정숙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곳 시간으로 새벽 4시라고 했다.  며칠 전 정숙에게 전화했더니 자동응답기 영어가 흘러나오는데 당황해서 얼른 끊어버리고 말았었는데.

  회갑 여행 후 일이 손에 안 잡혔다고 한다.

  마음에 봄바람이 가득하다고.

  마음의 부자가 된 것 같기도 하단다.  

 그래서  낭군님과 함께 한국에 온단다.  4월 8-10일 제주도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써 놓고 올리지 않던 글 정숙이 전화 받고 올린다.  

 

 정숙에게 배운 것

 

정숙이를 생각하면 천경자 그림 속의 꽃 같은 여인들이 떠오른다.

정숙이야말로 남성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여인, 할머니가 되도록 함께 살아도 늘 그리운 연인 같은 여성이기 때문이리라.

 

정숙이는 나의 크루즈 룸메였다.

가이드님이 안내한 대로 우리는 짝이 되어 크루즈에 올랐다.

함께 하고 싶던 친구와 한 방이 되지 않은 건 섭섭했지만 미국 사는 친구가 짝이 된 건 그 중 행운으로 생각되었다. 어느 커플보다도 우리는 먼저 크루즈에 올랐다.

과연 크루즈는 함께 간 친구들조차도 미리 약속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익숙해질 때까지는 룸메끼리 그리고 이웃에 방이 배정된 친구끼리 가깝게 생활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정숙이는 손과 마음이 곱고 부드러운 친구였다. 함께 있는 것이 편안했다. 그 까닭은 아마도 정숙이가 양보를 잘하는 친구였기 때문이리라.

그 고운 짝을 혼자 있게 하는 일이 있었다. 그게 미안해서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단짝 친구가 왔다고 고백했다. 정숙이가 내 친구와 나를 함께 있게 하기 위해 단짝 친구의 룸메에게 방을 바꿔주자고 제안했었다는 건 나중에 다른 친구에게서 되었다. 내가 초등동창끼리 얘기를 하느라 밤이 새는 것도 모르던 날, 나를 걱정해 잠도 잘 못 잤다는 것도. 그러고도 정숙이는 내게 그런 내색도 하지 않았었다.

 

정숙이는 아주 멋쟁이였다.

그림쟁이다웠다.

자기가 손수 만든 액세서리 같은 것들이 그녀를 화려하게 하는 소재들이었다. 스카프 한 장 만으로도 그녀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였다.

그런 그녀는 집안에서도 그렇게 화사한 모습으로 생활한다고 했다. 늘 아름다운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은 행복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 아내가 아름다운 건 외모뿐이 아니었다. 남편이 원하는 일이라면 자기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남편이 원하는 방향으로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남편 또한 아내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다 들어준다고 했다.

정숙의 이야기들을 듣는 동안 연인 같은 부부의 평화롭고 따스한 일상이 수채화처럼 떠올랐다. 그 사랑을 이야기하는 동안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이는 그녀를 보며 부부가 저렇게 한 평생 살아갈 수도 있는 거구나 감동하였다.

 

홈피에서도 만날 수 없는 정숙이가 가끔 생각났다.

 

지난 일요일 저녁, 집에 왔다가 일터로 돌아가는 남편과 함께 청주행 버스에 타고 있을 때였다.

두 시간밖에 안 되는 거리지만 잠들지 않고 가기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야기 몇 마디 하고는 침묵이었다. 그 때 문득 정숙이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 남편에게 용기를 내어, 손을 잡고 가자고 제안했다. 남편은 그러면 불편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팔걸이에 자기 손을 얹어 두었다. 남편 손 위에 거친 내 손을 올려놓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물어가는 들녘을 바라보며 한 번도 잠들지 않고 청주까지 갔다.

그렇게 오래도록 설레는 마음으로 남편 손을 잡고 있기는 오랜 만이었다.

정숙이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