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할 줄 모르고 학교만 다니다  남들 한다고 그냥 얼떨 결에 해 버린 결혼!

그 것도 부모형제 곁에서 도움 받아가며 조금씩 뭘 익혀 갈 수도 없는 타향에서의  꽤 길었던 세월!

 

이제 고국에 돌아와서 산지도 만 30년에서 2년이 겨우 빠지게됬는데

그리도 싫었던 기억이 조금씩 아련한 추억으로 변해지네요.

 

그 당시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지금와서 생각하니 값진 경험이었고.

그냥  철없었던 우리들은 알 수 없었던 세계에 사신 분들의 이야기를

잊어버리기 전에 적어두고픈  그런 마음이 생겼길래 두서없이 끄적거려봅니다.

 

1974년 5월에 일본으로 갔어요.

남편은 학생이었고 그 당시 유학생이나 유학생가족이 흔히 하던 일자리를 찾아

저희는 카나가와 현의 후지사와라고 하는 한적한 도시의 거류민단 사무실에서 일을 하게 됬어요.

 

거의 확실시 됬던 장학금이 취소되는 바람에 급히 찾느라

동경에서 조금 떨어졌지만 학교로의 통학이 가능한 곳으로 가게 된 거였지요.

정식으로 유학 온 사람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 교포들의 고국사랑이 각별했어요

 

남편은 학교 다니고 일주일에 두 번인가(생각이 안나네요) 교포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전 민단 사무실에서 사무원으로 일을 했는데

일이란 게 호적이나 여권등 영사관이나 대사관에 직접 가지 못하는 분들을 위한 대행 업무가 주고

(한글 모르는 분들도 많아서  편지도 읽어 드리고 )

나머지는 그 지역 동포들의 사랑방 같은 역활를 하더라구요.

일단 거류민단이니까 단장, 부단장, 고문 , 감사  등등  계시더라구요.

여자분들은 부녀회도 있고요.

 

1975년 1월에 제가 첫아이 출산을 위해  한국에 오는 바람에  약 8개월 만에 종친 짧은 생활이었지만

생전 처음으로 겪어 본 영화 속  주인공같은 분들의 이야기가 아직도 생생해서 소개하려구요..

 

대개 점심시간 지나고  오후가 되면 여러분들이 사무실로 오셔요.

오전 중에 얼추 일 마치시고 오후에는 그리운 고국에서 온 새댁 얼굴도 볼 겸 ㅎㅎㅎㅎㅎ

 

오전 중에 일을 다 마친다는 건 회사나 관공서처럼 출퇴근이 정해진 직장은 거의 없고

주로 밤이나 새벽에 하는 일들을 하신다는 의미지요.

 

자영업이라는 게 좀 크면  건설업 ,아니면 부동산, 야끼니꾸(고기집), 빠찡꼬.

그리고 힘들지만 수입이 좋은 청소업 ( 재래식 변소 푸러 다니는 거요  물론 기계로 하지요).

암튼 요즘식으로 말하면 3D업종이에요.

참 고물상도 많이들 하셨어요.

저희는 덕분에 세탁기 나오면 얻고 수박 한덩이 선물로 드리고  좋았지요.

일본에서는 \계속 세탁기는 수박으로 해결했다니까요. ㅎㅎㅎ

 

이런 분들이 다들 집과 차를 가지고 있고 사장님이라는 직함도 있어서

그 당시에 허영에 차있던  여인들이 재일교포를 부자로 오인을 한 일이 많아서 또 그 에피소드도 많아요

지금 우리나라가 그렇듯 그 당시의 일본은 자동차라는 것이 전혀 부의 상징이 아니었거든요

 

이 분들이 오셔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시는 거에요.

 

이제부터 쓰는 건 다 그 때 옆에서 들은 이야기들!

일단은 다 실화에요.

 

 그 당시는 그 분들의 그리움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좀 귀찮았었는데

 나이가 들고 저도 객지 생활 하다 보니 지금와서  새록새록 생각이 나네요.

 

 

좀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대부분이 교포 1세시고요.

다들 아시다시피 자발적으로 가신 분들은 안계시지요.

끌려가서 고생 죽도록 하시다가 해방이 되니 고국으로 갈 줄 알았는데 그 것도 안되고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가서 그리운 가족들을 만날 일념에 결혼도 하지 않고 지내시다가

거의 체념의 상태에서 마흔도 훨씬 넘긴 후에  결혼 하신 분들이 대부분이더라구요.

드믈게 징용 이전에 온가족이 오셔서 가정이루고 살던 분들도 간혹 계시긴 하고요.

어렵긴 매한가지였대요.

 

제가 갔을 때에는 나름대로 자리들을 잡고 각종의 차별이야 있었지만

그나마 먹고 사는 일에는 별 걱정없이 사시더라구요

일단 그 때의 분위기로는

학벌 좋고 제대로 풀린 드믄 케이스의 분들은 그곳 출입을 안하시더군요.

 

그 몇 년 전에 한일 협정이 성사되서 다들 몇십년만에 고국방문들을  하실 수가 있었대요.

사람 맘이 그렇쟎아요?

일본 땅에서 죽도록 고생한 흔적 보이고 싶지않고

그저 못사는 고향 식구들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 피 땀 흘려 번 돈 가지고들 가셔서 논도 사주고 밭도 사주고 집도 지어주고들 오셨대요.

 

자식들만이라도 고국의 처자와 혼인시켜주고 싶어서 색시감도 물색하고요.

그런데 이야기 하시다 보면 부풀러진 무용담도 있고 현재의 위치도 과장될 수 있고.....................

 

그쪽에서는 그저 부지런하고 절약하며 살 수 있는 아가씨들을 원했는데

재일교포2세들과 결혼해 간 사람들이  대부분 허영심이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었더라구요.

어려운 한국에 비해 자가용 굴리면서 사모님으로 편하게 살까 하는 기대가 컸던 그런 사람들이요.

 

우리나라는 그 때만 해도 나라는 가난했지만

좀 산다 하는 집에서는 상주하는 도우미를 두고 살았쟎아요?

 

그런데 일본 이란 나라는 그 당시에 벌써 인건비가 비싸서

연예인들조차도  도우미를 쓰기 힘들고

잡지에 황족들이 손수 애키우느라 외출도 힘들어 하는 모습들 심심챦게 나왔더랬어요.

게다가 절약으로 치자면 콩 한알갱이도 안버리고

마시다 만 커피도 절대로 안버리고 나중에 다시 마시는 그런 풍토인데

그 속에서 사는 교포1세들의 상황이야 오죽 했겠어요?

 

 

당연히 양 쪽의 실망도 크고  깨진 부부도 많고 그랬지요.

여자 쪽에서는 남자를 마치 거짓말로 꼬셔댄 파렴치한 정도로 매도하고

그 쪽에서도 게으르고 사치하다고 본국에서 온 여자들을 싫어하더라구요.

 

에그 딴 길로 샜어요.

다시 돌아가서 본국방문 말인데요.

 

가보니 글쎄 신혼 초에 생이별한 부인이 아기를 낳아서 키우고

오매불망 그저 남편이 돌아 올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 아기는 자라서 교대를 나와 선생님이 되신 집도 있고(나중에 이 분 이야기도 쓸 꺼에요)

암튼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대부분 대동소의했어요.

남자분들은 그 때 이미 일본에서 결혼들 하시고 애들이 있는 집이 대부분이었지요.

 

생각해보세요.

누구 개인의 잘못도 아니지만 수많은 가족의 인생은 불행 그 자체였어요.

 

그 상황에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이중생활을 하게되신 분들도 있고

너무나 안타까워서 본부인과 자식을 일본으로 데려다가 살게 했다가 풍비박산 난 집도 있고...........

 

다음 이야기는 일단 회상 1,2,3 으로 쓸께요.

새번호 뽑아서 쓰는 게 댓글과 섞이지않아 읽기가 쉬울 듯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