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개의 붉은 심장이 이루어낸 경이<세계일보>
  • 입력 2010.09.26 (일) 18:52, 수정 2010.09.26 (일) 23:56
  • 대한의 어린 딸들이 해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텔레비전으로 소녀들의 끈질긴 투혼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내 속으로 울었다. 그 정도 했으면 됐다, 져도 좋으니 여한 없이 기백을 펼쳐라. 하지만 소녀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치열한 접전에 접전을 거듭하다가 끝내 우승컵을 거머쥐기에 이르렀다. 설마설마 했을 뿐 정상에까지 올라가 우뚝 서리라곤 미처 예기치 못했다. 속으로 참았던 울음이 눈물이 되어 두 볼 위로 쉼없이 흘러내렸다.

    ◇박미산 시인
    2010년 9월 26일은 우리나라 축구에 새로운 역사의 장을 펼친 날이다. 우리나라 축구는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관하는 대회에서 정상을 밟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26일 대한의 어린 소녀들이 U-17(17세 이하) 여자 월드컵 결승전에서 3대 3으로 비기고 난 후, 승부차기에서 5대 4로 일본을 이겨 FIFA 대회 남녀사상 첫 우승을 이룩했다.

    우리 어린 딸들은 30도를 넘나드는 습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세계 여자 축구의 주인공이 되었다.

    주인공이 되어가는 과정은 험난했다. 시합 시작 6분 만에 이정은의 통쾌한 선제골로 일본과의 경기를 쉽게 이길 줄 알았다. 그러나 나오모토 히카루의 동점골과 다나카 요코의 역전 골, 이어서 전반전 종료 직전 김아름의 동점골로 종료 휘슬이 울렸다.

    후반전에 들어서서도 한국과 일본은 내내 엎치락뒤치락하였다. 가토 지카에게 추가골을 허용한 우리 팀에 교체 투입된 이소담이 바로 슛을 터뜨리며 동점을 만들어냈다. 골을 넣고 난 후 활짝 웃는 그 환한 웃음은 마음 졸이며 시청하고 있는 우리 국민의 마음을 녹이고도 남았다. 전후반전을 3대 3으로 마친 두 팀은 연장전을 펼쳤다. 경기가 진행된 120분 동안 어린 선수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숨 막히게 뛰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름다운 주인공들이었다.

    다리에 쥐가 나서 쩔쩔매는 선수, 넘어지면 곧 바로 일어나지 못하는 선수들이 끝까지 접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 팀이 이기든지 상관없이 빨리 경기가 끝났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초록빛 잔디 위를 쉬지 않고 달렸다.

    나는 열한 개의 붉은 심장이 치열하게 펄떡펄떡 뛰는 경이를 보았다. 우리 어린 딸들이 승부차기에서 5대 4로 일본의 골망을 흔든 것이다. 20년 전 일본에게 1대 13이라는 기록적인 참패를 당한 우리 여자 축구팀. 20년이 지난 지금 승리의 여신은 잘 자란 우리 딸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1882년 축구가 대한민국에 처음 선보인 지 128년 만에 이루어낸 쾌거였다.

    트위터에서는 “남자들은 이제 집에서 살림을 하고 여자들을 축구장으로 보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떠도는 모양이다. 말 그대로 웃자고 하는 얘기일 것이다. 머나먼 이역의 그라운드에서 파김치가 되어서도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소녀들을 보면서 자신의 딸내미들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았을 터인데,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대견했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 딸과 아들의 구분은 무의미하지만 대한민국 여성의 끈질기고 강인한 정신을 높이 사지 않을 수도 없다. 대한민국 여성들의 크고 넓은 모성의 품과 생명력이야말로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힘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우리나라 축구 역사의 주인공인 대한의 딸들아! 너희들은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으로 상대편 골문을 향해 질주하며 주인공이 되었다. 주인공이 되는 것도 험난한 일이지만 주인공의 자리를 지키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지금 이 엄청난 에너지를 흘려보내지 말고 힘을 모아 밝은 미래를 꿈꾸어라. 앞으로 역동적인 축구의 꽃을 피울 것을 우리는 굳게 믿는다.

    박미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