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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들이 병풍같이 둘러쳐진 산골마을에 가을이 크게 입을 벌렸다.

    장하의 땡볕을 일광욕하듯이 받은 가을의 과일과 곡식들이

    햇볕에 그을린 채 겸손을 알아 모두 고개를 숙였다.

    덩달아 고개 숙이던 해바라기도 까만 이를 들어 내 키들거렸고...


    번번이 연줄을 삼키던 대추나무의 대추가 양볼에 홍조를 띠며 상기되어있다.

    감나무의 감들은 점점 황달에 걸려갔고...

    호두나무의 호도는 선하품을 하다 턱관절의 이상으로 반쯤 입을 벌리다 말았고...

    입술을 뒤집어 아람 벌린 밤은 앙증맞은 밤톨을 이슬에 목간시키다

    순간 밤톨을 놓쳐 고구마 밭이랑에 떨어트렸다.

    고구마 순에서 곤한 잠을 자던 청개구리가 화들짝 놀라 툭 튀어나온

    두 눈을 두리번거렸다.


    저쪽에서 상용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고구마 밭에 떨어진 알밤을 주우라 오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갈라진 고구마 이랑을 상용이가 발로 툭 차

    햇고구마 한 개를 슬쩍하는 것이 아닌가?

    “저놈이! 남의 고구마를?”

     

    순간 정의의 사자 용대는 이 광경을 목격하고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야! 너 고구마 훔쳤지?”

    “아니!”

    “지금 발로 툭 차 고구마를 훔쳤잖아?”

    “아니라니깐!”

    상용이는 현장에서 발각되고도 시치미를 뚝 떼었다.

    걔네가 하루 겨우 두 끼 식사만 하기에 허기진 배를 채우려 그리했음에도... 


    옥신각신하다 결국 몸싸움으로 번졌다.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고...

    보리밥만 먹다 가끔 고구마를 먹어서인지 상용이의 힘이 만만치 않았다.

    용대는 풀밭에서 고생잡기를 하던 실력으로 겨우 그 녀석을 제압했다.

     

    상용이의 불룩 나온 배에 올라타 씩씩거리며...

    "야! 너네는 우리집 뒷간의 휴지도 훔쳐가잖아!"

    용대네는 아버지께서 학생들이 시험보고  난 답안지를 가져와 자로

    사등분하여 휴지로 사용하였는데 그 집 식구들은 일을 본 후 지푸라기를 

    물에 담궜다가 써 밑이 쓰라리던 차에  가끔 그 집에서 가져간다고

    알고 있던터라...

    상용이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아무 말도 못하다가 갑자기

    이 말을 던졌다.

    "너네 형도 고구마를 훔쳤다며?"

    "뭐라고! 이게! 인천으로 유학간 형이 어떻게 고구마를 훔치니?"

    "누구한테 들었어!"

     

    나중에 알고보니 사실이었다.

    아버지께서 학교가는 길의 고구마밭을 가르키며 용대의 형에게

    "넌 절대로 남의 고구마를 훔치면 안 된다."

    그렇게 늘 신신당부 일렀거늘 어느날 만승이네 고구마 밭에 들어가 고구마를  

    훔친 동네 애들이 교무실로 끌려 오는데 코를 벌름거리며 얼굴이 넙저덕한

    애가 제일 먼저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더라는 것이다.

    다름아닌 형이...

    딴 애들은 몰라도 선생네 애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아버지께서

    그렇게 타일렀거늘...

    당시 교무주임이시던 아버지께서는 형의 담임선생님께 당신의 아들을

    더 때리라고 말씀하셨단다.

     

    상용이와 일전을 치룬 용대의 옷은 흙과 고구마 순의 시퍼런 물이 들어

    엉망이었다.

    그래도 남의 물건에 손대서는 안 된다는 평소 아버지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한 것 같아 마음만은 뿌듯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용대가 학교 가는 길이었다.

    청색 군복을 갈색 위장복으로 갈아입은 메뚜기 떼들이 이리저리 날아올랐다.

    알알이 영근 벼들도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양지깨 고모님네 밭을 지날 쯤 용대의 발이 무엇인가에 걸려 크게 넘어졌다.

    책가방은 나뒹굴어 토악질을 하며 필통과 공책을 우수수 쏟아냈다.

    다행히 본 사람이 없어 덜 창피하였다.

     

    그러나 책가방 가운데를 열어보니 어머니께서 싸 주신 점심 도시락 반찬용

    김치담은 유리병이 깨져 냄새나는 김치 육수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제기랄!”

    조각난 유리병을 주섬주섬 치우다 용대의 손가락을 베었다.

    앗! 따가! 용대의 손가락에서는 이미 검붉은 피가 주룩 흘러 내렸다.

    이 아까운 피를..흐르는 피를 입에 잠시 물었다. 

     

    누군가가 길에 여름내내 무성히 자랑 풀의 양끝을 매어 골탕을 먹이려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용대보다 조금 앞서 이 길로 상용이가 지나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녀석이 앙갚음으로?”

    쓰라린 손가락의 상처를 공책을 찢어 가만히 눌렀다.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으니...

    하긴 일전에 용대도 여자애들을 골탕 먹이려 풀을 매어 놓은 적이 있어서...

    상당히 분한 생각이 들었으나 인과응보로 여기니 그런대로 마음이 풀렸다.


    학교가 파한 후 산에 올라 가을이 벌려놓은 잔치 상에 용대는 마음이 가있다.

    조금 지나면 산 보리수 열매가 줄줄이 주홍색등을 켜 반길 것이고

    달콤한 다래는...

    덩굴 속 으름은 입을 헤하니 벌려 용대를 부를 것이고...

    소에 풀 먹이는 애들은 논틀밭틀을 뒤져 콩트기를 할 것이며..


    산들이 아스라이 멀어져 갈쯤 살무니 산골 마을에 가을이 손에 잡힐 듯

    여기저기 와있다.

    초가지붕의 둥근 박이 과감하게 희멀건 엉덩이를 뽐내고 있었다.

    고추잠자리가 군무를 이루자 마당에는 빨간 고추가 멍석에 누워 배를 가르고...

    “아!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