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지부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33.허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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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디자이너’ 앙드레 김(본명 김봉남)이 대장암 합병증인 폐렴으로 12일 오후 7시 20분경 타계했다. 향년 75세.
1997년에 문화훈장 화관장(5등급)을 수상한데 이어 2000년에는 프랑스 예술문학훈장, 2008년에는 문화훈장 보관장(3등급) 등을 받으며 패션계는 물론 ‘민간문화 외교사절’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고인은 당대 최고의 스타들을 무대에 세워왔으며, 매년 자선 패션쇼를 열어 불우이웃을 돕기도 했다. 이와 함께 국내 스타들과 정치인들의 경조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따뜻한 마음 씀씀이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
지명제 선배님 반가워요.
그리고 안녕하신지요...요즘은 일상적인 인사가 곤란할 때가 있어 조심스럽게 안부인사를 한답니다.
지선배님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한번 그분의 모습을 만났어요.
이제는 그분의 자취가 역사속에서 빛나겠군요..
삼가 고인의 평강한 안식을 바랍니다.
비엔나 특파원이신 옥인선배님께서 재빨리 한국의 소식까지 올려주셨군요.
2005년에 대장암으로 수술하고 그동안 치료를 받아오다가 폐렴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훼션계의 거장이시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대한민국을 널리 알리셨던 앙드레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후원인의 모습:
앙드레 김이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12일 저녁, 수화기 너머의 소프라노 조수미는 한참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잠깐 잔병을 앓으시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는 어떤 패션 모델보다도 앙드레 김의 드레스를 가장 많이 입은 여인이었다. 런웨이가 아닌 무대에서다. 지난 22년간 세계 유수의 독창회 무대에서 그는 언제나 앙드레 김의 드레스만을 고집했다. 조수미가 한국 전통미를 살린 앙드레 김의 자수 드레스를 입고 한국 가곡을 부를 때면 외국 관람객들은 넋을 잃고 황홀경에 빠졌다.
"선생님과의 각별한 인연이 시작된 건 88올림픽이 열렸던 그 해, 저의 첫 귀국 독창회 때부터였어요."
당시 조수미는 이탈리아를 거점으로 국제성악콩쿨을 휩쓸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계 클래식계에서는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 중반의 신인 소프라노에 불과했다. 경제적으로도 아직 학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 공연이 있으면 시장에서 옷감을 사다가 동네 아주머니한테 부탁해 드레스를 지어 입었다.
이날 객석에서 조수미의 노래를 들은 앙드레 김은 '신이 내린 목소리'에 감탄하는 동시에 초라한 드레스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먼저 조수미에게 연락했다. '어떻게 이런 옷을 입고 노래할 수 있냐'면서 '앞으로 내가 소프라노 조수미의 드레스를 지어주고 싶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20년이 넘도록 어김없이 지켜졌다. 앙드레 김은 조수미가 언제, 어떤 무대에 서든지 그에 맞는 드레스를 직접 디자인해서 보내줬다. 조수미 역시 어떤 대단한 무대에 설지라도 반드시 앙드레 김의 드레스를 입었다.
"베르사체, 구치 등 해외 명품 드레스를 입어보라는 주변의 권유도 마다했어요. 세계 무대에서 자신의 드레스를 입고 한국의 미를 알리길 바라는 선생님의 뜻을 잘 알았기 때문이죠."
조수미가 한국에서 독창회를 열 때면, 무대 바로 앞 자리인 C블록 1열 1번 좌석은 앙드레 김 '지정석'이었다. 스포트라이트를 즐겼던 앙드레 김은,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 때 조수미가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는 순간을 아이처럼 좋아했다. 자신이 조수미의 가장 열렬한 후원자임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쏟아지는 박수를 받으며 뒤돌아 객석을 향해 인사하는 게 일종의 '세리모니'였다.
"한번은 제가 그 '세리모니'를 깜빡하고 지나갔어요. 어찌나 서운해하셨던지 한달 동안이나 화를 안 푸시더라고요. 매일 같이 편지를 쓰고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하얀 꽃을 보냈더니 어느날 갑자기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전화하셨죠."
앙드레 김은 조수미가 부른 노래 중에서도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를 끔찍히 좋아했다. 매번 패션쇼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순백의 결혼식 장면에 이 음악을 사용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조수미는 자신의 '열렬한 팬' 앙드레 김을 영원히 떠나보냈다. 더이상 그가 만들어준 드레스도 입을 수 없게 됐다.
앙드레 김과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는 그의 목소리가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선생님을 기리는 박물관이 생긴다면 제가 간직해온 200벌이 넘는 드레스를 기증하고 싶어요. 부산아시안 게임, 한일월드컵 등 나라에서 큰 행사를 치를 때마다 나라를 대표했던 선생님의 작품들이니까요."
김소민 기자/som@heraldm.com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에 묻혀 지내던 그였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외로워했던 한 인간이었다. 매년 겨울이면 일본 삿뽀로 눈축제를 갈 정도로 눈을 사랑했고, 어린아이를 좋아했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순진무구한 피터팬이었다. 일전 "선생님의 열정의 나이는 몇살이세요"라고 누군가 묻자 주저없이 "영원히 순수함을 잃지 않는 10대"라고 말했던 그다.
일년에도 수십차례 열리는 패션쇼와 대사관 만찬, 유명인과 연예인들과의 교류 등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는 지극히 검소하고 규칙적인 수도승같은 생활을 해왔다. 그런 면모를 알게 해주는 몇가지 일화가 있다. 2003년 4월 어느날 흥분에 찬 목소리로 앙드레김이 전화를 걸어왔다. "디자이너가 된 지 40년만에 내 소유의 부티크를 갖게 됐다.같이 기뻐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지금도 같은 자리에 있는 서울 신사동 부티크에 오랫동안 세들어살았던 그가 건물을 사게 됐다고 뛸 듯이 기뻐했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상류층에게 파는 값비싼 고급옷을 만들었지만 수량이 적어 수익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번 돈은 해외패션쇼에 쏟아부었다. 그런 그가 건물을 살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1999년 옷로비사건 덕(?)이었다. 사치스럽고 세속적일 것이란 세간의 편견과 달리 성실하고 장인과 같은 참모습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그를 더 많이 좋아하게 된 것. 이후 앙드레김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 와중에서도 앙드레김은 물욕을 갖지 않았다. 인기가 높아지면서 서울 중심상권에 한 건물 소유주가 한층을 통채로 내주겠다고도 했고, 수억원대 CF광고제의도 잇따랐다. 그때마다 그는 기자에게 "이건 안하는 게 좋겠죠"라며 조언을 구하곤 했다.
자신의 패션철학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한 패션디자이너 지망생이 '앙드레김'의 패션사이트를 운영하고 싶다고 전화를 해왔을때는 "젊은 학생이 기특하다"며 흔쾌히 허락해주던 그였다.
고인이 된 마이클 잭슨이 그에게 엄청난 백지수표 제안을 한 적이 있다. "돈은 원하는데로 줄테니 미국으로 와서 나의 전속 디자이너가 되어달라"고 제안한 것. 하지만 앙드레김은 "나는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다. 개인의 전속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앙드레김은 평소 기자에게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자주 했다. 아버지가 친모와 이혼후 들어온 계모였지만 그에겐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던 존재였다. 앙드레김이 백여벌의 흰색옷을 소유하는등 온통 흰색에 집착하는 것도 새어머니의 영향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깨끗하고 정갈한 것을 좋아했다. 매일 아침마다 그에게 양잿물에 새하얗게 빨아 솥뚜껑위에다 말린 옷을 입혀 보냈다. 앙드레김이 소독제를 탄 물에 새하얗게 빤 흰색 면직물 옷을 평생토록 입을 정도로 집착했던 이유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때문이었다.
그는 "25살에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을때 일년동안 밤마다 베개가 온통 젖을 정도로 울었다. 아마 평생에 걸쳐 울 것을 그때 전부 쏟아버려 이제는 눈물이 메마른 것 같다"고 했다.
앙드레김의 기력이 급격히 쇠한 건 지난해 11월말 경기도 기흥에 마련한 '앙드레김 아뜰리에'를 완성한 직후부터였다. 대장암 투병생활과 수시로 찾아오는 폐렴도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을 꺾을수는 없었다. 하지만 평생숙원사업이었던 '앙드레김 아뜰리에'오픈 당일 그의 모습은 할일을 다한 사람처럼 쇠잔했다.
15년간 그를 지켜본 기자가 볼때 '앙드레김 아뜰리에'는 단순한 패션공간이 아니다. 패션불모지였던 60년대부터 디자이너를 시작해 평생토록 소원했던 꿈 그 자체다.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건물을 둘러싼 나지막한 담장안 정원에는 흰색 꼬마열차가 꽃밭 사이를 달리고, 장작불이 타오르는 벽난로가 역시 흰색인 실내를 따뜻하게 덥히는 곳. 그 안에서 어린 손자에 둘러쌓여 있던 앙드레김은 그토록 꿈꿔왔던 순진무구하고 완벽한 백색의 순간을 마침내 완성하고 맛보았다.
매년 봄여름가을겨울 자연을 풍경삼아 꿈의 공간인 아뜰리에에서 패션쇼를 열겠다던 그는 이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앙드레김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그 자신의 공간을 남겼다.그래서 그는 저 세상에서도 행복해할 것이다.
[김지미 기자]
?
오늘 아침 남편이 "김복남이 세상 떠났다네!!"하길래
"김복남이 누구야?"하니 앙드레킴이라고해서
좀 놀랬지요
자살인가했어요.
아직 20년은 더 살 나이인데 세상 떠났다니
참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슬하에 자식도 없고 행복한 가정을 가진자가 가장 부럽다고 했다는데.........
근데
우리 옥인후배는 그곳에 앉아서도 세상뉴스가 참 빨리도 가네요.
그리고 이렇게 우리들에게 알려도주고.......
그곳은 날씨가 요즘 어떻나요??
여긴 오늘 초가을 날씨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