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엔 마리 앙트와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의 초상화에 대하여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마리 앙트와네트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느냐고. 제일 먼저 나온 대답이 “악녀 중 한 명 아니에요? 프랑스 왕비로 너무 사치해서 혁명을 일으키게 한 여자요.” 그 다음 대답은 “농민들이 빵이 없다고 봉기하니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했다던 여자요.” 였다.

마리 앙트와네트는 오스트리아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를 어머니로, 신성로마황제 프란츠 1세를 아버지로 태어나 열네 살에 장래 루이 16세가 되는 프랑스 왕세자와 결혼하였다. 서로 반목하였던 두 나라가 잘 지내보자는 정략결혼이었다. 1774년 루이 16세가 왕위에 오름으로서 열여덟 살 오스트리아 공주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는 절대왕정의 베르사이유 궁에서 온갖 달콤함을 누리다가 프랑스 혁명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비극의 최후를 맞았다. 38세를 두 주 남긴 나이였고 죄목은 프랑스 국고를 탕진하고, 아들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패륜이었다.

 

여기 네 점의 초상화를 소개한다. 언뜻 보아도 한 인물에 대한 묘사가 너무도 다르다는 점이 충격적이다.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함께 갖춘 왕비의 초상(그림1), 풋풋한 밀짚모자의 아름다운 여성(그림2), 왕비이기보다는 어머니로서의 초상(그림3), 그리고 단두대로 끌려가는 한 죄인(그림4). 서로 다른 이 이미지들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인류역사상 가장 큰 사건의 소용돌이 속 주인공이었다는 사실과 겹쳐져서 머리 속에 맴돈다. 과연 이 초상화들은 혁명전야의 사회와 마리 앙트와네트라는 한 여성의 삶과 어떤 관계 속에 있을까. 무릇 초상화는 보이는 그대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고 싶은 모습을 주문하고 그려지는 것임을 상기하면서 사회는 그녀에게 어떤 모습을 원하였는지, 왕비는 과연 어떤 모습의 자신을 원하였는지 짐작해본다.

 

1778년에 그려진 그림1의 초상은 과연 왕비답다. 폭이 넓은 드레스에 높게 올린 머리 장식은 당시 유행을 보여주면서도 우아하다. 과장된 장식에도 불구하고 품위가 느껴지는 것은 흰색에 가까운 단색 드레스이기 때문일 것이다. 배경에 거대한 기둥을 배치함으로서 전체 이미지에 확고함과 장엄함을 더 해주고 있다. 그리고 오른 쪽 작은 테이블 위엔 남편의 왕관과 그녀의 상징인 장미가 꽂혀있다. 여러 화가에게 초상을 맡겨보아도 만족하지 못하던 왕비는 이 그림에서 드디어 화가를 찾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초상은 거의 공식초상이 되었으며 여러 점을 다시 그려서 여러 곳에 보내졌다. 딸을 결혼시킨 후 초상으로 밖에 딸을 보지 못하던 오스트리아의 황제 어머니 또한 이 초상의 다른 번안을 받고 비로소 내 딸을 닮은 초상을 받았다고 만족하였다. 합스브르그가 얼굴의 특징인 다소 긴 두상이 밉지 않게 반영되었으되 실은 왕비의 품위에 만족하였을 것이다. 영국과 적대적이던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운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면서 프랑스의 선물로 이 초상의 다른 번안을 보냈다. 그녀는 프랑스 왕정의 대표였다.

 

이에 반해 그림2의 초상은 요즘 말로 아주 캐쥬얼하다. 얇은 모슬린의 원피스는 치마를 부풀리지도 않았고, 몸에는 귀금속 장식도 없으며, 머리엔 밀짚모자를 썼다. 왕비의 차림으로는 너무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림1의 초상화 이후 왕비의 신임을 받은 여류화가 비제 르브렁(Vig?e Lebrun: 1755-1842)은 이 후 30여점의 왕비의 초상화를 그렸다. 1783년 르브렁은 이 초상을 당시의 국가 전시였던 살롱전에 출품하였다. 그러자 비난이 쏟아졌다. ‘속옷 차림의 마리 앙트와네트’라고,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왕비에게 밀짚모자를 씌웠다고 말이다. 이 비난은 물론 초상화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마리 앙트와네트에 대한 여론이었다. 그녀는 왕비가 된 후 몇 년 동안 아기를 낳지 못하면서 철없이 옷과 장신구에 낭비하고 노름에 빠져 살았기 때문이다. 왕이 선물한 트리아농(Trianon)궁에서 여자들과 남자들과 유흥에 도취하여서 여자 동성애, 혼외정사 등의 온갖 구설수에 싸여있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아이들을 낳으면서 당당해진 왕비가 정치에도 간섭하자 ‘오스트리아 계집’이라고 불리면서 오스트리아에 대한 적대감의 표적이 되었다.

 

이 비난을 귀로 다 듣고 살았던 마리 앙트와네트가 모슬린 옷차림의 초상화를 주문하고 또 살롱에 까지 전시하도록 허락한 것은 무슨 의도였을까. 모슬린 옷은 당시 격식을 차리던 프랑스식 옷이 아니고 자연스러움을 선호하던 영국식 옷이니 말이다. 혹시 왕비로서의 공식적인 모습에서 자신을 분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마치 공식적인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사적인 공간인 트리아농 궁을 더 좋아했듯이 말이다.

 

이후에도 왕비는 돈만 생기면 궁전을 더욱 화려하게 꾸밀 생각을 하며 살았고, 1785년엔 그녀에게 치명타가 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 터졌다. 라 모트라는 사기꾼 백작부인이 왕비의 이름을 사칭하여 다이아몬드 600여 개로 만든 어마어마한 목걸이를 손에 넣은 뒤 이를 해체해서는 파리와 런던의 시장에 내다 판 사건이다. 사건 속에는 왕비에게 잘 보이고 싶어했던 로앙추기경이 있었으며, 우리가 앞에서 본 모슬린 옷으로 위장한 가짜 왕비도 있었다. 한 두 해전 보석상이 왕에게 이 목걸이를 팔고자했을 때 왕비는 “현재 프랑스에겐 보석보다 배 한 척이 더 필요하다.”고 거절했다지만, 그리고 이 사기사건은 왕비와 아무 관련이 없었지만 최대의 피해자는 왕비였다. 소문에서 로앙 추기경은 왕비의 연인으로 발전하였으며, 왕비는 그를 이용해 목걸이를 산 뒤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소문은 사건의 진위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그녀는 점점 더 ‘과대한 낭비, 통제할 수 없는 성적욕망’의 표상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787년 <세 자녀와 함께 있는 마리 앙트와네트>(그림3)가 그려지고 그 해의 살롱에 전시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왕비는 이전의 사치스런 모습을 모두 거두었다. 비록 머리 장식은 크지만 배경에 옷장이 있는 실내는 중산층 집안 같으며 왕비는 세 아이를 양 쪽과 무릎에 앉힌 어머니 상이다. 화면 왼쪽엔 당시 8살 이었던 첫 딸, 오른쪽엔 왕세자 루이 조세프, 그리고 무릎엔 막내 루이 샤를을 안고 있다. 마치 ‘내게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보다 아이들이 더 큰 보물’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 ‘내 아이들은 프랑스의 자식’이며 ‘나는 사치한 오스트리아 계집이 아니라 덕성있는 프랑스의 어머니’라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실제로 이 초상화는 왕비자신이 주문하였으며, 살롱에서는 직격탄을 조금 비키려는 듯, 한 구석에 조용히 걸려있었다고 한다. 시민계급이 급부상하고 노동자 농민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즈음, 마리 앙트와네트는 이제 덕성있는 어머니의 이미지로 자신의 오명을 씻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1789년 혁명은 시작되고, 루이 16세와 가족은 파리로 잡혀가 튈르리 궁에 갇혔으며, 1792년엔 왕과 가족이 감옥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다음해 1월 왕이 처형되고, 같은 해 10월 마리 앙트와네트가 사형당하였다. 혁명재판소가 내린 죄목은 프랑스 재산의 탕진과 “아들(루이 샤를)에 대한 탐닉을 멈추지 못해 우리가 생각하거나 이름난 들어도 공포에 떨게 되는 그런 음란 행위”였다. 당시 혁명당원이었던 화가 루이 다비드는 단두대로 끌려가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모습을 스케치(그림4)로 남겼다. 하얀 옷에 손을 뒤로 묶인 채 눈은 아래를 향한 부동의 자세이다. 이 스케치를 본 한 화가는 이 그림이야말로 가장 마리 앙트와네트를 닮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왕비로 보이지 않아도 되고, 덕성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고, 주문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마리 앙트와네트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 영화, 소설, 논문 등을 두루 보았지만 그래도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남아있다. 과연 그녀의 실제 삶은 어떠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그녀는 실제이기보다 귀족사회에 대한 거대한 집단 투사일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말한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말 또한 소문을 생산하던 저널리스트의 말일 것이라고. 당시의 기록은 그녀가 당당하게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전한다. 그녀의 잘못은 탕진과 음란이기보다는 오히려 가장 지체 높은 신분으로 태어나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앞을 내다보지 못한 점일 것이다. 그녀를 역사의 희생양으로 또는 철없는 왕비로 보기보다 사회의 거대한 요구 속에서 살아간 한 여자의 삶으로 묘사하는 진짜같은 소설을 기다린다.

 

 

그림1) 비제 르브렁, <마리 앙트와네트>, 1778, 유화, 237.2 x 176.8cm, 빈, 미술사박물관

 

그림2) 비제 르브렁, <마리 앙트와네트>, 1783, 유화, 93.3 x 79.1 cm 독일 크론베르그 개인소장

 

그림3) 비제 르브렁, <세 자녀와 함께 있는 마리 앙트와네트>, 1787년, 유화, 275 x 215 cm, 베르사이유 궁의 국립박물관

 

그림4) 루이 다비드, <단두대로 가는 마리 앙트와네트>, 1793,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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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1                                                                   그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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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3                                                                                  그림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