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한선민
발이 가는대로 그냥 둘러보며 찍은 사진들이라 순서없이 보인다.
옹기가 모여있는 장독대는 엄마를 그리워하게 한다. 누구에게나 그럴꺼다.
종심이덕에 땡전 한푼 않내고 좋은 구경 아주 잘 하고 있네.
절구통이며 멍석이며 특히 옷걸이등 눈에 익은 몸습들이지.
그리고 절구질은 찰쌀떡 할때 나도 어른들 하시는것을 몇번 찍어
보았는데 쉽지가 않더라.
지금이나 그때나 사는것은 다 매한가지 이겠지. 요즘 좀 편리하게
산다는것 뿐이지 오히려 그때가 더 좋았던것 같구나.
종심이가 기어코 독일 가기전에 고지 1900에 오르고 말었구나.
그동안 종심이가 좋은 사진과 많은 예기를 올려줘서
즐거웠지. 이제 안심하고 독일에 잘 다녀 오기를 바랄께...
그리고 이제 천천히 올안으로 2000 고지에 오르면 그때 야호 하자구나.
숙자!
정상인지 모르고 1900고지에 왔구먼.
우리 같이 열심히 뛰었으니 예상보다 빨랐네.
숙자가 살던 고향이 어디였을까?
숙자 얘기 들어보면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었을 것 같애.
거기서 어릴 적 숙자의 꿈이 한없이 펼쳐졌겠지?
어려서 부터 자연을 가까이서 흠뻑 만끽하고 살았기에,
또한 지금 숙자의 목가적인 전원 생활이
자연사랑, 꽃사랑을 한 층 더해주지?
난 친가, 외가가 시골이라 방학 때면 시골로
가서 지내곤 했지.
그래서 시골에 대한 향수가 많이 남아있어.
논과 밭, 거머리 있는 냇가, 꽃피는 들과 산,
참외 ,수박 열리는 밭에 우뚝 서 있는 원두막,
여름의 매미 소리...
모든 게 눈 앞에 선하고 들리는 듯 하구나.
그러나 지금 가 보면 옛날의 초가 지붕들은
전부 없어지고 옛과 같은 시골 맛이 전혀 없으니 유감야.
나 독일 가려면 아직 9일 남았어.
그 때까지 여기서 실컨 만나자!
내가 어렸을대 살던곳은 종심의 외가친가 와 아주 비슷한 곳이네.
나도 거머리 한테 여러번 물린 기억이 나지.
봄이면 냉이 꽃다지 캐고 윈추리도 캐서 나물 해먹고
저수지에 나가 파래따고 갯냉이 캐고 행자나물도 뜯고
조개는 엄청 많이 잡어 가지고 뭐 햇느지 먹은기억은 없지만.
내가 살던곳은 수인선 기차 타고 남동역에서 내려
얼마간 걸어 가면 논현동 이라 하느곳 일명 범 아가리 라고도 하지.
즉 송도와 소래 사이에 있는 곳인데 고잔에 화약 공장이 근처에 있었고
즉 논현동과 남동은 염전 이라는곳이 있어 많은 사람들의 생활터전 이었다네.
혹 종심이 외가 친가도 같은 그곳 일까?
그래 매미소리 여름이면 많이 듣고 자랐지. 버드나무 짤라
피리도 곧잘 만들었고 시골 학교라 여름이면 풀을 뜯어 학교에
갖다 바치고 송충이도 많이 잡었고 학교 밭에서 일도 했다네.
눈만 감으면 그 아름다웠던 때가 영화 필름처럼 줄줄 흘러 간다네
아즉도 9일 남었구나 . 그럼 언제 한국으로 돌아 오는지.
종심은 형제들이 한국에 살고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어머나 숙자!
우리 시골서 멀지 않은 곳야.
그 때 우린 인천서 시골 가려면 수인선 협괘차 타고 갔는데
송도, 고잔, 바다 보며 소래도 지나갔거든 .
바로 화성군 남양면으로 친가는 신남리,
외가는 원천리 샘실이란 곳으로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아주 시골이었다구.
수인선 기관차 없어진지 오랜데 전철이 생긴다더군.
너무 반갑다.
종심아 그럼 수인선 여러번 타 보았겠네.
반갑다. 우리집 뒤가 바로 철도길 이었지.
매일 기차 다니는 소리를 들으면서 성장한 셈이지.
내가 살던곳도 이제는 모두 고층 아파트로 변했다 더군
그러나 한번 가보고 싶단다. 반갑다 종심아....
종심언니~언제 민속촌까지 오셨나요???
저의 집에서 멀지 않거든요.
틀림없이 저의 집 앞을 지나가셨을것을
연락주셨으면
제 차로 모셨을텐데
왜? 기회를 안 주셨나요???
무척이나 안타까워라!!!
단정한 민속촌 사진으로 탈취한 1900고지 축하해.
애썼네.
흙 냄새 물씬한 풍경.
가끔씩 저런 곳을 거닐면 한결 차분한 마음이 들겠지
그나 저나
떠날 날이 가까 왔다고?
어제 우리 동네 오케스트라의 악장의 은퇴 음악회가 있었어
솔로로 차이콥스키의 메디테이선을 연주 하는데 감회가 돌더라.
우리 딸의 바이오린 선생이기도 했으니까.
?종심씨!!
1900고지 등정을 축하 합니다
더구나 용인 민속촌은 저와는 1975년에 업무적으로 제가 감정(부동산 가격 산정)을 실시한 물건으로
제 추억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곳이 랍니다
제가 75년도 2월에 결혼을 했는데 그 때 용인 민속촌이 감정이 의뢰되어 제가 업무를 전담하게 되어 신혼 여행도 단축하고 돌아 와 가격 산정을 했었는데 그 많은 건축물을 일일이 재야 했고 설계도를 참고로 하여 감정을 실시 하는라고 약 2개월이 넘도록 신혼 생활 중 이였지만 신부 곁에 가지고 못하고 업무를 수행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는 민속촌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개인 소유 부동산에 불과 하다는 無知로 가격을 기계적으로 매긴 결과
拙作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 나이에 비해 경험이 부족 하였던 것 이지요
용인 민속촌은 인사동에서 골동품으로 돈을 많이 번 문화재를 사랑하는 어느 독지가의 일생일대의 작품입니다
그는 전국을 돌아 다니며 문화재 가치가 있는 기와집이나 초가 집을 사서 移築 한 것입니다
되돌아 보면 이 민속촌이 없엇다면 외국인 한테 무엇을 보여 줬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나라 관광 상품으로 한 몫을
톡톡히 한 곳이기도 합니다
요즈음은 사극 영화 촬영 장소로 한 몫을 하지요
지금도 있지만 75년도에는 먹을 수 없엇던 쌀 막걸리를 이곳에 있는 양조장에서 특별히 얻어다 직원들과
막걸리 파티를 열고 독한 술에 취해 해롱되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종심씨가 1900고지를 제 기억이 새로운 용인 민속촌으로 소개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쫑심이가 독일갈날도 얼마 안남았는데
약속대로 1900고지 탈환을 하고 가는구나.
한3개월 헤어져 지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가다오다 둘러서 언니가 해주시는밥 염치없게도 맛있게 먹고
고독 씹고 있다고 투정부리면 강냉이라도 씹으라고 일부러 찾아주고
어제 갖고온 하와이안 티 벌서 동났다.
시원하구 맛있다구 인기 쨩이었어.
손수구워온 쿠키는 우리 손주가 너무 좋아해!
토기모양을 특별히...
요번것두 아주 맛있는데
그동안 쿠키 굽는법 배운다고 우리집 전기 오븐에 맞는 도란스도 갖다 놓았는데......
항상 네 사랑에 감사하며 지낸단다..
친구들아~~~~
2000 회 축제는
어찌 해야 가장 뜻깊고 또 좋을까요?
아주 근사한 아이디어....
기발한 생각
멋진 하모니....
겸손한듯 행동하고
오래 참음으로 행동하다 보면
진짜 겸손과 오래 참음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일 동문중에서 1000회 축제를 했고 2000회 축제에는...
미서니나 저에게 좋은 아이디어도 있음 주세요.
순자, 숙자
또 임무 완수한 종심에게
짝짝짝
고마워
잠시나마 이별을 하게 되면 이렇게 서운해 하는 분들이 많은데
좀 웃기는 제 발상으로는 남에게 잘하지 말자.
그게 다른 사람 가슴 아프게 안하는 길이다.
한 술 더 떠서 못되게 굴면 시원해 하실 것도 같네요.
울적하신 미선언니 위해 썰렁한 개그 했습니다.
뭐 진짜 그럴랑가요?
명옥씨 말대로 독일 가서
이닐의 가족들 생각나면
장미 동산 향내 맡으러
산보 나올 생각하고 있구먼요.
그려!~~ 그려!~~~
이니르의 장미 동산 향내 맡으러 산보나오려마~~~
PC방에 한글 자판 깔린데 없으니
계숙언니네나 크리스티나언니네 놀러가게되면 꼭 이니르 장미동산에 안부 전하거래이~~
그리구 종심아~~
난 아직까지 민속촌 못가보았쟎니!~~~
초창기에 양국님이 관련되 있다니 슬슬 가 보고 싶어지네!
그런데 그곳에 99간 양반집은 어떻든?
실은 그집이 우리집에 놀러오는 성당친구 올리바 시댁이였다네!
원래 올리바시댁이 왕손인데 몰락한 자손들이 민속촌 지을때 돈받고 넘겨서
고스란히 거기에 건립되었다고 하더구나.
인생무상 ~~
절대권력이 영원할수 없고
자식농사 잘 지은것이 노년의 큰복 이란것을 새삼 느낀단다.
으쌰 으쌰 ~~!!!
우리 2000고지 향하여 화이팅!!~~
벗꽃과 산수유꽃도 장관이다.
광 안에 들어 앉은 이렇게 커다란 독은 첨 보았다. 사람 세 명도 거뜬히 들어가 설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