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은 회원가입시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회원목록을 정리하던 중 하던 일 잠시  멈추게 만드는 자기소개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상세하게, 성의있게 소개하신 분은 아마도 처음으로 기억됩니다.

7회에 금번 회장님을 맡게 되는 박혜인 선배님이십니다.

방금 전화를 하여 허락을 구하고 이 곳에 올려봅니다.

글의 리얼리티를 위하여 편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올립니다.

아래와 같이 소개를 하기 위해 정말 공들여 타자를 치셨어요.

더욱 감동적인 것은

이렇게 장문의 소개를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 줄 나중에 또 이야기 잇지요.라는 귀절입니다

선배님의 더 많은 이야기를 고대해도 될 듯합니다

저는 오늘부터 무조건 박혜인 선배님을 존경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emoticonemoticonemoticon emoticonpyo09.gif

 

본인소개 (공개)

 

원적:평안북도 박천군 병천면(어머니도 같은 박천군인데 면이 다름), 본적:인천시 송림동 11번지{중국 만주 남쪽으로 내려가 임시정부 수립도움,친정조부님 백부 함께 직접활동 이력따라 애국장 훈장 받으셨고[독립유공자명부실림],중경[중찡]이며 수저우항쩌우 요즘 상해임시정부 관광상품개발된곳 가까이 살며 자금대준 이야기듣고자람. 1945년광복직후 재산고스란히 중국에 놓고 상해-인천-서울 "우회"상경 곧 월남가족. 언니출생. 한국전쟁 육이오 발발 1.4후퇴 피난대열 남쪽 머얼리 거제도피난가족. 그곳에서 태어났다하나 본적은 인천으로 신고되어 거제도피난수용소 가봐도 감회없고 더러워 얼른 나옴(2008,2009충무행세미나길답사코스안경끼고디오라마관람). 돌전에 충청도서천군비인면 모나즈광산 광업광주농장경영겸하는 아버지솔가하여 이사.지역사회퍼주기봉사실천시절. 나 다섯살 다시 솔가하여 당시 기찻길옆 소사시 포도밭 보리밭 넓게 펼쳐진 곳 새 집 짓고 이사. 소사역 바로 옆길따라 일본이 남기고간 적산가옥 아닌 적산회사 인수한 작은집이 우리보다 부자였고 그 공장안 넓은터 놀이터로 놀고 동갑내기사촌 박선생님(나보다 사흘먼저출생, 우리아버님 돌림자 맞추어 미리 지어놓으신 내이름 '인옥'을 갖고갔다는 사실 우리 친척 지금도 만나면 이야기나옴)은, 서울교대 조경숙동창생임.그후 소사남국민학교 이름표 삔침꽂아 입학하여 뭐배웠는지 전혀 기억없는데,일제고사 상장 유일한 기록물 보관중.


우리고모댁 먼저 인천 금곡동사거리 목재소 경영 미리 자리잡아 사는 가까이 우리집사업체 비로소 송림동 11번지에 이사옴. 공장가, 이연고무공장 중공업 사이,바닷가 바로 옆공장 넓은 마당 빨간벽돌 사택, 적산가옥사택에도 몇 년 살고,우리앞마당에 양귀비도 심고 감자옥수수 모나즈모래밭 흔한 게 땅이고 으례히 땅위흙은 그냥 언제나 그곳에 그댈 있는 줄 알고 컸는데,감나무 흰꽃 온갖 일년생 한국전통꽃밭 과꽃 백일홍 채송화 봉숭화..그 시절 서림동창 이순점이며 이화여중간 이미경이며 남영숙오명자이명숙 몇몇애들 오망졸망 송림동사는애들 우리 공장에서 나는 대리석 공기돌로 많이공기, 다섯알공기 함께 논 기억, 지난번 완우통해 들었음.
난 소사남국민학교 1년마치고 서림초등 2학년에 전학편입, 낯선 중에 이현식담임과 조경숙이 제일 가까이 기억남. 한삼끼고 한복차려입고 운동회날 단체로 화관무쪽두리까지 챙겨쓰고 춤춘기억, 지금도 화관무 음악 들으면 참 배우는 게 무섭구나 느끼게 됨.
특히 전학간 첫날 4월(당시학제는 4월개학이었지) 들어선 교실, 아직 육이오상흔 남아 천막교실, 텐트 안에 들어가니 바닥은 흙인데 울퉁불퉁, 난 당시 반짝이는 청색 목긴비닐장회 굽있는 것 신고 이게 교실인가 당황한 기억 우동집 긴의자 책상 함께 눈에 선함.


이후생활은 16번지 이사가서 남의집 문간방 세 몇 달살고, 5번지 수봉산 언덕입구 길가 축대위 집 사서 새 집 진 것 불법이라 허물리고 다시 뒷집사서 새로 증축하여 남에게 두 방 세주고 주인집딸이라해야 입다물고 학교 집 오간기억 이외 생활 별무, 할 일없어 책보았고 그게 공부라더라 지금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 당황하여 그냥 지냄, 지금도 집 넓고 월급받아도 그냥 책이나보고 신문보고 세상돌아가는 구경하며 사는 게 인생이라 여기며 지냄. 중1 인천여중입학에 국어산수 200점에 체력장 3점빠져 3등입학, 2점빠진 유순애 2등, 마연희1등만기억하는 세상 삼성 예나지금 동일 놀랠것없음. 인일졸업에 모의고사 한번 일등 못했어도 예비고사 오전만보고 붙어 유명해지고 우리집사업 나 중학교2학년때 이른바 부도났다하여 이사했는데, 고3에야 산동네인것 발각났지만-아무도 집에 안들였으니.
고1입학하고 검정털'세타'살 돈 없어서보다 멀쩡한기지골덴텍스교복 더입자고 하복입을 때까지 버티며 "남루"란 단어 철저히 깨닫게 되어 지금도 허름한옷 일부러도 입고 함.
'인일'이라 힘주는 게 가는줄타이와 빳밧한 깃, 그걸 바치는 스웨터인데 중학생후배같이 세타안입은 게 왜그리 의식되던지, 지금도 그 기억에는 목이메임. 참, 책도 헌책방에 가서 남이 안사용했으나 오래되어 누렇게 된 새 책 삼. 공부하러 책 꺼낼 때 그 헌책냄새 맡으며 느끼던 기억있음. 가난, 무능해서라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않아 반항이란 단어도 모르고 자랐고,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 수없시 주변에 보고사니 뭐 나라고하여 달리 어쩔게 없었으니, 우리 자랄때 다 그러하지 않았던가. 상대적 부유함이라할가.
그만 적어야지 누가 보고 좋으라고,
인일은 나에게 영원한 모교, 나는 인일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국어시험보고나면, 내 점수 이번에도 전교 최고점이라는 김세경 선생님말씀 들으며 담임반이라 괜히 틀린답고쳐드려 미안했고, 그래선가 퇴임식날 갑순이원장님 함께 돈거두워전했지만, 사람인연 참 간단하지 않아 허회숙동창회장님 동창회장상타고 졸업하여 40년.이제 동창회장하게 되어 이 긴 글 공개하여 적고있네요,오늘 여기까지.

고종사촌언니중앙대약대 들어가 인일2회빛내고 내동생 인일 13기(서울교대들어가 잘다니다 재수하여 서울대의대간호학과들어가 평생고생. 봉사해도 힘들여하니 고생이지 미국RN자격따서 취업이민. 일산병원연수 부산까지가서 받고 떠난 지 잠깐인 듯한데 어느새 두 조카아이들 연년생으로 약대들어갔다고 한국나들이. 나중에 또 이야기 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