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봄이야.

여기는 산골이라 지금도 사방이 하얗지.

27살, 꽃다운 나이에 이 산골에 들어왔다.

단 한 번의 이동도 없이 30년 가까운 세월을

한 곳의 보건진료소를 지키고 있어.

그동안의 고생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지.

창고를 개조한 허름한 건물에서 시작했는데,

쥐새끼들이랑 동거동락하고,

샤워할 공간이 없어서

푸세식 화장실에 다라이를 들여다 놓고 물을 끼얹고,

빨래할 공간도 없어서

함지박에 빨랫감를 이고 개울에 나가 빨래를 했지.

두 딸을 업고 걸리고 가정방문을 다니고.......

 

힘들 때마다 수없이 사표를 내고 싶었지.

오똑이처럼 나를 다시 일으킨 건  '인일' 이었다..

나는 인일이다.

인천에서 일등이면, 안성에서도 일등이다.

인일의 자부심은 앞에서 당겨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나를 지켜주었다.

`인일'을 생각하면 늘 눈물이 났어.

인일의 프라이드는 하늘을 찌를 듯 컸지만,

그 프라이드를 내려놓고 겸손으로 승화시켜야

성공한다는 걸, 살아가면서 배웠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기가 너무 서러울 때,

인일은 눈물이 되어 서러움을 달래주었다.

내가 세운 공이 드러나지 않아 쓸쓸할 때,

인일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쓸쓸함을 달래두었다.

내가 사는 곳이 어디든, 무슨 일을 하든

인일에 부끄럽지 않으려 노력했던 날들이기에.......

산골의 보건진료소장으로 일한 수십 년 세월이

나는 자랑스럽다. 

 

강산이 세 번 변하는 세월을

나는 한 자리를 지키며 살아왔다.

내가 가장 열정을 바친 것은  주민들과의 약속이었다.

태풍이 불어도, 흰눈이 무릎까지 내려도

장마로 다리가 끊어지고 ,가뭄으로 목이 타도

나는 주민들과의 약속을 꼭 지켰다.

신의.

신의를 지킨 덕에 주민들은 나를 믿어주었다.

 

인일은 신의로 나를 지켜주었고

신의를 알게한 인일에 나는 감사하였다.

도시 문명과는 동떨어진 산골여인 안성댁.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

내가 만나는 주민 한 사람 한사람에게

신의를 지킬 수 있는 인일의 정신이 있어서

나는 날마다 행복하다.

 

이명숙 이메일 주소 :epatafan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