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만남 -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2월의 중순을 지나면서 어느 덧 사순시기가 시작되었다.

재의 수요일.

학교에서 신부님들이 교수연수를 떠나시는 바람에 재를 이마에 바르는 예식을 아직 하지 못해서 어쩌나 고민중이다.

아마도 일반 성당에 참석하거나, 혼자서 재의 예식을 거행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안식년이라고 늘 새로운 일들의 연속이다.

익숙하지 않은. 그래도 특별한 일들이 많아서 좋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사람에게 힘을 준다.

특히 나와는 다른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 겉으로는 화려해보이지만,

그 건강한 삶을 이루기까지 지켜온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그 안에서 묻어나온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체험이 많은 이들의 경우에는 더 그렇다.

아마 체험이 많지 않은 나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라도 간접체험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 수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나의 신학적인 이론들이 하나의 현실로,

사건으로 확인되는 희열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학자는 자고로 현상과 현실을 이론으로 만들어내는 동시에,

이론이 얼마나 현실적인 감각을 갖고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학문은 죽은 것이나 나름없다.

특히 신학은 더 그렇다.

 

인생을 힘들게 산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에 대한 경외감과 더불어 그런 고난의 시간을 겪지 못한 이들로서 느끼는 자괴감 같은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나의 경탄과 더불어 신기함까지 불러 일으키는 사람들의 고뇌와 인내의 삶.

그 삶의 뒷자락에서 자신들의 인생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면 참 행복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만큼 하느님은 살아 계신 분이시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일까?

 

희귀병으로 오랜 시간 남들이 겪을 수 없었던 엄청난 고난의 시간을 지낸 부부를 만났다.

연골이 녹아 들어가고, 온몸을 지탱할 수 없는 절망의 시간을 보낸사람.

시력까지 잃고 4년여의 시간을 암흑의 시간으로 보내면서도,

그 시간을 하느님과 가장 가깝게 살았던 축복의 시간으로 표현하는 사람.

그 곁을 10여년을 지키면서 단 5분의 시간도 그 곁을 떠나기를 걱정하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인의 곁을 지켜준 남편.

그 아픔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두 시간을 넘게 성가를 불러주며 위로해주던 대부대모님들.

 

참 사람들의 삶은 고통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전환되는 특별한 은총의 체험이 있다.

그래서 고통은 인간이 겪어내는 가장 큰 신비이자 두려움이지만,

그 고통을 겪어내고 삶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고통이 하느님께 봉헌하는 희생의 제사임을 체험하고 고백한다.

무엇이 고통을 일으키는지

구약의 욥도 고민했고,

석가모니도 고행을 통해 찾아냈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드러내주셨다.

그것이 나 아닌 타자와의 관계에서 오는 것인지,

나의 무지와 깨닫지 못한 집착에서 오는 것인지,

인간이 원초적으로 지닌 나약함과 죄로 인한 결과인지 각기 생각을 전개해볼 수 있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고통은 하나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육체적인 고통으로 전개될 때 두려움과 절망이 우리의 마음을 감싸고,

그것이 우리에게 더 이상의 희망을 막는 현실이라해도 그렇다.

 

고통을 겪어내고, 인내로 희망을 살아온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희귀병으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외면당할 수 있던 처지에도,

부인을 업고, 함께 휠체어에 실어 부인의 바램을 들어줄 수 있는 남편의 사랑,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유로 일부러 만들어낸 행복이 아니라,

당연한 삶의 동반자로서의 기쁨으로 해낸 남편의 미소가 참 편해 보였다.

그리고 위로하러 온 사람들이 오히려 위로를 받고 갈 수 있도록 웃음과 기쁨을 선사해줄 수 있는 여유와 깊이.

그런 삶의 깊이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절망하지 않는 삶.

희망이 나를 감싸는 삶.

그것이 신앙의 삶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교리나 어떤 훌륭한 가르침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닌 듯 싶다.

분명히 하느님은 삶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세상에 감사할 것들이 너무 많은데도, 불평과 자괴감으로 자신을 나락에 떨어뜨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하느님은 고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더 삶에 대해 진지해지도록 이끌어 주시는지도 모른다.

희귀병으로 고통받는 자매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다.

자신이 육체적으로 부자연스러울때,

시력을 잃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을때,

그 때 오히려 하느님을 가깝게 느끼고, 그 시간이 정말로 은총의 시간이었음을 느꼈다는 말.

 

요즘 읽고 있는 "불평없이 살아보기"란 책을 통해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각오를 갖게해주는 삶의 전환체험에 관심이 간다.

감사하기보다는 불평하는 것에 익숙해진 우리들이기에,

고통스런 순간이 오면 감사해야할 많은 순간들을 잃고 살았음을 느끼는 새로운 체험의 길이 막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순간, 하루의 축복들이 얼마나 감사할 일들인지...

 

사순절의 시작이다.

머리에 재를 바르고 더 이상 세상에 가져갈 것이 없다는 고백을 드러내는 예식을 통해 올 해의 사순시기를 시작한다.

마음의 준비도, 충분한 훈련도 없이 갑자기 사순절을 맞은 느낌이 나를 당혹스럽게 하지만,

올 해 안식년에 맞는 사순절은 어느 사순절보다 좀 더 의미있는 기간이었으면 한다.

말로가 아니라 삶으로 사순절을 살아가는 시간이 그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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