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이번 토요일 한글학교갈때 네모난 박스에다 밥싸가지고 갈래, 오늘 지혜가 그렇게 싸왔는데 맛있게 보였어"

"어떻게 싸가지고 왔던?"

"간장물 묻은 고기, 밧줄같이 생긴 계란, 주름살 많은 까만 콩 "

 

장조림,계란말이,콩장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아이 들을 여섯이나 기르셨던 어머니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 나셔서 - 그당시 우리 집엔 알람 시계도

없었는데 어떻게 새벽마다 정확하게 일어나셨는지 가끔 생각하면 신기하다 - 도시락을 싸셨다.

크고 작은 도시락에 밥을 퍼넣으시고는  어묵, 콩장, 멸치볶음등을 나누워 반찬을 담으셨다. 어떤 날은 계란을 부쳐서 꽃을 피우듯 밥위에 얹어 놓은 도시락을 가져가기도 했으나 우리들의 나이가

삼년 터울이라 3년마다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던  우리 부모님의 빠듯한 살림으로는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세숫물을 데우는 수증기가 가득한 부엌에서 어머니는 바쁘게 손을 움직이시며 등교시간이 다 다른  우리들의 시간에 맞춰 밥상을 여섯번이나 차려내고 도시락을 보자기에 싸서 하나씩 들려 내 보내셨다.

 

넷째시간이 되면 빨갛게 달아오른 난로위에 부지런히 도시락을 올려 놓는다. 차곡차곡 싸여진 도시락들은 온 교실안에 향내를 품으며 제 몸을 덥혀갔다. 가죽 실내화 속에 꽁공 얼었던 발도 녹아지며, 신나는 축제라도 기다리듯 끝나는 종소리를  귀기울 때면 커다란 양은 주전자도 덩달아 딸깍거리며 길다란 주둥이로 흰 수증기를 힘차게 품어 대었다.

 

어머니가 우리들 도시락을 육십이 넘으시도록 싸주셨는데 새언니가 들어 오시며 언니가 그 일을 맡았다   그때 언니가 이십대 후반에 시집을 왔는데 나는 그 때 고등학생이엿으므로 언니를 무척 나이 많은 어른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어떻게 어린 나이에 그렇게 시댁어른들과 어린 시누이들을 섬겼는지 지금의 나와 비교해 보면 부끄러울 지경이다. 리고 내 동생은 나와는 달리 영악스러워서 막내 시누이로부터 시집살이를 많이 한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날 동생은 금방 싼 도시락을 언니 앞으로다시 밀어 놓으며 "나는 두 끼를 같은 것을 먹으면 배탈이 나요 " 하고는 책가방만 든 채 현관을 나섰다. 언니는  연근 조림으로 급히 반찬을 만들어 버스로 삼십분이나 거리는 동생학교까지 갖다 주셨다. 그 일을 아무도 몰랐었는데 십여년이 난 후 철이든 동생이 겸연쩍게 웃으며 고백을 해서 온 식구들이 다 웃고 말았다

 

미국에 온 뒤 그 도시락의 정감은 사라지고 뻣뻣한 빵으로 샌드위치를 싸가지고 다녔다  계란도 흔해터져 그 어릴적 도시락 속에 황금알을 보면서 가졌던 그 감동은 돈을 주고 살래도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 더구나 난로 위에 밥을 데우던 그런 정취는 더 더구나.....   그런데 뜻밖에 딸 아이가 도시락 운운해서 아침에 일어나서 쌀밥을 만들었다. 콩장을 만들고, 계란말이를 해서 한 쪽으로 놓고 보석이 장식된 젓가락을 비스듬히 박았다. 뚜껑을 닫고 분홍 보자기에 쌌다

도시락을 보더니 딸아이가 기뻐 웃는다 "땡큐"하더니 뽀뽀를 한다.백열등이 빼꼼하게 켜진 부엌에서 허리를 구부리시고 손마디가 굵을대로 굵어진 손으로 싸주시던 도시락을 받아가며 한 번도 고맙다는 인사를 못했나 하는 마음이 들어 갑자기 콧등이 시큰해진다

 

아이 들을 데리고  학교로 향하며 ^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눈물 납니다. 이런 시가 없이 발전된 미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는 신세입니다^ 하던  누구의 한탄처럼 건조해질대로 건조해진 이곳 생활에서 우리 어머니들이 새벽마다 도시락을 싸던 그 사랑으로 다음 세대를 엮어 가는 한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희망차다는 확신으로 마음이 뿌듯해 왔다

 

 

* 여러 해 전 쓴 글인데 나누고 싶어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