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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새의 아침 식사를 지켜 보다 문득 옛날 유행가가 떠올랐다.
"늦기 전에 빨리 돌아와주오…."
늦기 전에 지구를 구해야 한다.
사랑도 자연도 한 번 잃으면 찾기 어려운 것이기에

 
 
'아침 6시에 일어나기'. 중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사흘 전 손가락을 걸며 한 약속이다. 그 후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 꾸준히 지켜온 기상시간을 30분 앞당기게 만든 건 박새들이었다.

작년여름 아는 분께 커다란 돌확을 하나 얻어 물을 담아 옥잠화를 띄워 놓았다. 다음 날 새벽 "치이, 치이, 치~~"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도둑고양이가 쥐를 덮쳤나 싶어 마당에 나가보니 박새 무리가 돌확에 걸터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다. 어릴 적 흔하디흔하게 보던 참새들도 보기 힘들게 되었는데 참새보다도 더 작은 새들이 겁도 없이 집단으로 날아와 물을 마시다니….

반갑고 신기하여 그때부터 박새 우는 소리가 나면 얼른 나와 물 먹는 모습을 구경하다 다 먹고 나면 바가지로 돌확에 고인 물을 퍼내고 새 물로 갈아주었다. 여름에는 정확히 새벽 5시 30분이면 우르르 몰려오던 녀석들이 달력을 볼 리도 없건만 용케도 추분이 지나고 해 뜨는 시간이 늦어지니 방문시간도 늦어지기 시작한다. 요즘은 거의 7시나 돼야 나타나 물 먹는 대신 감나무에 매달린 감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간다.

먹는 요령을 보니 정확히 잘 익은 감을 골라 댓 마리가 감꼭지 반대부분 또는 중간부터 쪼아 먹는데, 박새 일가가 감 한 개를 일주일 이상 먹는 것 같았다. 익은 감이 여러 개 달렸어도 집중적으로 한 개를 다 먹고 그 다음 감으로 옮겨가는 식으로 알뜰하게 먹어서 다 먹고 난 감은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꼭지에 빈 껍질이 축 늘어져 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최대한 에너지를 쓰지 않으려고 잎을 다 떨군 채 앙상한 가지에 감을 달고 서서 박새에게 먹이는 감나무. 다 뽑아야 한 줌도 되지 않을 털을 달고 겨울을 나는 작은 새 여러 마리가 일주일 내내 감 하나를 쪼아 먹는 모습을 보며 사람으로 사는 게 왠지 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 죄스러움은 우선 춥다고 걸치고 나간 점퍼부터 시작된다. 우리 인간과 같은 멀쩡한 생명체 오리 스무 마리의 털을 뽑아 속을 채운 옷,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높인 보일러 난방온도, 먼길 탄소를 배출하며 건너와 아침 식탁에 오른 수입밀가루로 만든 빵, 비닐하우스에서 난방을 하여 키운 오이, 딸기, 그를 쌌던 자연계에서 분해되지 않는 플라스틱, 스티로폼 포장재, 샤워꼭지에서 쏟아지는 물,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혼자 타고 가는 승용차, 일하기 편하라고 미리 부팅시켜 놓은 컴퓨터, 내가 좋아하는 카페라테 테이크아웃 일회용 잔, 무심코 뽑아 쓰는 티슈…. 끝도 없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의 주제가 실감났다. 외계로부터 주인공이 지구를 구하기 위해 온다. 지구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러 왔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 인간을 말살시킨다는 이야기다. 지구상에 엄청난 양의 CO₂가스를 배출하여 지구온난화와 갖가지 기상이변을 초래하고 환경의 역습을 받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외계인이 오기도 전에 큰일이 날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식품의 탄소 배출에 관한 주제 발표에서 식빵 10개들이 한 봉을 먹을 때 우리밀로 만들면 온실가스 배출량이 16g인 반면, 수입밀로 계산하면 온실가스 배출양이 무려 246g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한겨울에 먹는 딸기나 수박처럼 난방연료를 사용해 농사짓는 채소나 과일 역시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고 막대한 이산화탄소가스 발생을 초래한다. 서울에 거주하는 3인가족의 경우 현재 60% 이상인 수입식품 소비를 국내산 자급식품으로 바꾼다면 온실가스를 한 해 동안 300kg 정도 감축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자동차로 2700km를 달렸을 때 발생하는 탄소량과 맞먹는 수치이다.

우리 조상들은 '백리 밖에서 난 농산물은 먹지 않는다'고 하였다. 제철 식품을 먹고, 햇빛에 공짜로 말려 둔 채소와 생선으로 겨울을 났다. 제철에 흔한 채소들을 갈무리해 두었다가 채소가 귀한 겨울에 물에 가볍게 데쳐서 먹는 방법은 별다른 가공방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며, 생으로 먹는 것보다 섬유소, 단백질, 인, 철과 같은 영양가 함량도 높다.

쇠고기도 쌀도 귀했던 시절, 우리 어머니들은 잡곡밥에 시래깃국, 김장김치와 김구이로 아침을, 무말랭이무침과 멸치볶음을 도시락반찬으로 싸 주셨다. 아랫목에 깔아 둔 이불에 온 식구가 발을 묻고 구운 고구마에 서걱서걱 얼음이 언 동치미로 간식을 하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했다. 밤늦게 시험공부라도 하고 있으면 쌀겨 속을 헤치고 사과를 꺼내어 깎아주셨던 우리의 어머니들이야말로 진정한 '에코맘'이었다. 그 덕에 아직까지 우리가 질식하지 않고, 물에 잠기지 않은 채 살아남았는지 모른다.

우리 학교에는 '불 끄는 소방관'이라는 학생봉사단이 있다. 조를 짜서 강의실마다 돌아다니며 빈 강의실의 불을 끈다. 일회용 컵 대신 텀블러, 티슈 대신 손수건 사용하기, 내복 입기, 두꺼운 스타킹 신기, 음식물찌꺼기 안 남기기 등 아주 쉬운 일부터 실천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박새의 아침 식사를 지켜 보다 문득 "늦기 전에 늦기 전에 빨리 돌아와 주오. 내 마음 모두 그대 생각 넘칠 때. 내 마음 모두 그대에게 드리리. 그대가 늦어지면 내 마음도. 다시는 찾을 수 없어요"라는 옛날 유행가가 떠올랐다. 늦기 전에 빨리 지구를 구해야 한다. 사랑도 자연도 한 번 잃으면 찾기 어려운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