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CC 사진과 컴퓨터 클럽 ㅣ 포토 갤러리 - 게시판담당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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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
시 간 |
계 획 |
12월 11일(금) |
오후 5:00 ~ 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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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00 ~ 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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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00 ~ 8 : 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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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00 ~ 9 : 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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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00 ~ 9 :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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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30 ~ 끝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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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토) |
오전 7 : 00 ~ 8 : 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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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00 ~ 9 : 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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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00 ~ 10 : 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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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00 ~ 12 : 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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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 : 00 ~ 1 :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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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00 ~ 6 : 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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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좋은 생각 오시는 길'
바탕골미술관을 아시는지요?
힐하우스를 조금 못 와서 오른쪽에 살색 건물 바탕골미술관이 보일 거에요.
거기서부터 설명할게요. 사진 아래에 설명을 쓰겠습니다.
사진의 왼쪽 위에 보이는 살색 건물이 바탕골 미술관이에요. 실제 가는 방향에서는 건물이 오른쪽에 보이죠.
계속 직진하면 힐하우스가 나오는 길인데 우리는 우회전을 해야 해요.
'정보화 시범 마을' 이라고 써있는 곳으로 우회전을 해서 한 200 m 정도 오셔요.
버스 정류장을 지나자마자 좌측에 ' 참 좋은 생각' 푯말이 보여요. 좌회전해서 들어오셔요.
계속 직진 상태를 유지해서 오시면 돼요.
위 설명한 부분에서 50m (짐작) 정도 오면 요런 길이 보이는데 정면에 있는 직진 길을 택하시면 돼요.
사실 계속 직직만 하면 되는데 헷갈려 하실까봐 찍은 거에요.
조금 오면 요런 길이 보이는데 당연히 우측으로 가지말고 직진하셔야지요.
이 사진은 공연히 헷갈리게 할지도 모르는 사진이에요. 직진하면서 우측에 강하중학교가 있길래 오른쪽 보면서 찍은 거 거든요.
오른쪽에 이렇게 학교 교문이 보인다는 것을 보여드린 거에요.
참 좋은 생각 푯말 보이시죠? 계속 직진이에요.
여기에서만 헷갈리지 않으면 돼요.
우측길로 가지 마시고 직진하시면 돼요. 사실 정면 전봇대에 '참 좋은 생각'이라고 써있지만 어둑하면 안 보일까봐 그래요.
요즘은 일찍 어두워지더라구요. 일찍들 오셔요. 적어도 5시까지는 오시면 좋을 거 같아요.
직장 있으신 분은 조금 늦어도 하는 수 없지만.
여기에요. 보이는 길에서 온 거에요.
우측으로 주차장이 보여요.
여기가 우리가 묵을 곳이고요.
주차하시고 이 계단을 따라내려오시면 맛있는 저녁 식사가 기다리고 있지요.
설명을 길게 했지만 먼 거리는 아니에요. 바탕골미술관에서 2km 정도니까요.
하여튼 직진을 계속한다고 생각하고 오시면 돼요.
'참 좋은 생각'에서 남한산성 가는 길
여기에서 큰 길로 나옵니다. '참 좋은 생각'에서 치자면 좌회전을 하는 셈입니다.
되돌아 가는 길이죠. 그러니까 하얀차 있는 데서 우리가 나오는 거죠.
다음 지도를 보시고 오셔요. 네비가 말을 하겠죠. 남한산성.
제가 앞장 서고 뒤따라 오시면 되니까 염려 없어요.
산성 끝까지 오셔서 로터리에 있는 큰 주창장에 주차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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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너머 주막' 의 위치와 정보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401-1
전화 031-748-3405
주차장에서 1분 거리
남한산성에 대하여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북문루와 서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남한산성 주변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된 곳으로 손꼽힌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百濟)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溫祚王代)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 (晝長城, 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결(結)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仁祖)2)이다.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여장(女墻) 1,897개·옹성(甕城) 3개·성랑(城廊) 115개·문 4개·암문 16개·우물 80개·샘 45개 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다.
그 뒤 순조(純祖)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正祖)22) 한남루(漢南樓)를 세우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을 1829년(순조(純祖) 29)에 수리하였다. 관해(官해)로는 좌승당(左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을 비롯하여, 비장청(碑將廳), 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鐘閣)·마구(馬廐)·뇌옥(牢獄)·온조왕묘(溫祚王廟)·성황단(城隍壇)·여단(여壇)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는 처음에 총융청(摠戎廳)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守禦廳)이 따로 설치되었다.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摠戎大將) 이서(李曙)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縝)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三田渡受降檀)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IICC 프로그램에 감격해서 눌물 찔끔...
-모든 안내에 또 감격, 재차 감격
나이들어서 눈물만 느는가 봅니다. 남한산성의 수어장대를 오랫만에 보겠군요 -울보순애 씀-
장군서방님이 전역하니, 뭐 도움 되는게 하나도 없어서 도움안됨,진한글씨만 따서 제가 우만장군이라고 부르거든요
물론 호도 지어드렸지만... 꼬솝은 나만의 속내가 있는 경우, 우만장군! 하고 부르죠.
울 보 순 애 에서 두자 따서,앞으로 저를 존칭없이 울순씨~로 불러주세요.
김자미총무님께서는 표만들기를 이용한 공지사항 작성에 달인이 되셨네요
깔끔하고 일목요연하게 한눈에 쫘악 들어옵니다.
보기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고
멋진 공지사항을 보기만 해도
알찬 모임이 될 것이 눈에 보입니다.
영주 위원장님은 IICC의 알찬 모임을 위하여 참으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제 IICC는 IICC의 격을 높여가는 과정에 한국의 역사까지 탐방하는
품격있고 유익한 프로그램으로 업그레이드 되어가고 있습니다.
끝임없이 수고 하시는 김영주위원장님께 ~!!!!!!
IICC 이거 어때요?
가로 현수막 대신 이렇게 세로로 만들었어요. 만년묵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