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이 방은
짧게 스쳐간 생각이나
텔레비전을 보며 느꼈던 감동이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얻은 깨달음 등...
우리 삶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귀한 것이 분명하나
자칫하다 보면 놓쳐버리기 쉬운 일상의 한 귀퉁이를 잡아두는 메모장입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도 좋고
자기의 기억 창고에 저장을 하기 위한 암호같은 독백도 좋습니다.
그저 메모를 하듯이 편하게 쓰시면 됩니다.
갈수록 시간은 더욱 빨리 달려만 가고
우리 머릿 속 기억 주머니의 끈은 어느새 느슨해져
듣고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을 제대로 간수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떠오른 생각을 어떻게 하면 오래 잡아둘 수 있을까?.
언뜻 스쳐가는 좋은 생각들과
아주 짧은 순간에 얻은 깨달음을 기록할 수 있다면
우리 삶에서 남긴 큰 이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생각,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허망하게 잊혀지지 않도록
문득 떠오르는대로 이 메모장에다
스쳐가는 단상들을 꽉 붙잡아 두시기 바랍니다.
나도 입이 모자라지 말이 모자라랴 싶은 사람 중 하나로서
찬정이의 해방구, 그리고 달린 덧글들을 보니
기억 속에 저장되었던 많은 감정들이 되살아나네. ㅎㅎㅎ
내 나이 서른 중반 쯤 되었을 때부터
시작된 부모님들의 병수발 문제가
내 나이 쉰 후반에 가서야 막을 내렸는데,
나는 그렇게 내 인생의 중요한 시절, 근 이십년을 시댁과 친정 부모님들 일로
양가를 오가며 종종걸음으로 살았었다네.
늘 마음이 무겁고 어깨가 처져 있던 그 무렵,
모처럼 가까운 친구를 만난 나는 이렇게 하소연했었지요.
" 이게 뭐니? 사는 게 이런 거니?
내가 그동안 어려서부터 별러왔던 소중한 일, 그걸 막시작하려는 데,
이젠 부모님들 일이 또 내 발목을 잡네.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이 상황을 다 지내고 보면
그땐 이미 내 차례가 시작되고 있겠지? "
그런데 양가 부모님들께서 결국 이 세상을 다 떠나시고 나니,
딸 애가 낳은 손주를 아니 돌봐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나요.
실은 내가 먼저 딸애에게 '어미가 돌봐줄테니 암 걱정 말고 직장과 가정을 양립하라"고
손을 내밀어 준 것이긴 하지만
모두들 알거나 짐작가겠지만 엄마 마음이란 것이 그런 것 아니겠어요?.
십삼년 외손주 돌보며 '나' 라는 소중한 자아는 뒷전으로 모셔놓고(?) 살았지만
가끔 내면 속에서 외치는 '나'의 몸부림이 없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그 작은 몸부림쯤은 손주녀석 사랑하는 마음에 번번이
다~~ 녹아 없어져뿌리곤 했지요.
몸이 힘들어 괴롭거나, 하고픈 일들 못하겠는 아쉬움쯤도 타성이 되어버렸는지.
아니면 인생을 포기한 거나 다름없이 놓아버린 마음 때문인지
별로 부대끼지 않으며 살게 되었지요.
그런데 어느날,
내 아쉬운 마음 하나가 나를 붙들고 조용히 이야기를 걸어 왔어요.
나는 그 마음과 둘이, 아니 홀로 조용히 대화를 나누다가
비로소 결론 내린 것이, 이제라도 플룻을 시작하자는 것이었어요.
풀릇은 불어 본 적도 없었지만 작고 은빛나는 악기가 마음에 와 닿았고
어디나 들고 다니기도 편하다는 장점이 있어서 쉽게 결론을 내렸어요.
어디 맘놓고 갈 수도 없고
누굴 만나 오래 이야기 할 시간도 녹록치 않은 나에게
플릇은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어요.
처음,
플룻을 입술에 대고 후~ 숨을 불어넣으니,
뿌~~~~~~ 뱃고동 소리 같이 울어주었어요.
그때 나는 눈물이 찔끔 나왔어요. 진짜루요.ㅎㅎ
플룻이 나와 함께 울어주는 느낌,
나의 긴~~ 한숨~에 함께 울어주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
그날 플룻 선생님이.
"왜 그러세요? 아니 그걸 불고 벌써 감동하시면 어떻게 해요? "
그러셨어요. ㅎㅎㅎㅎ
생각해보니 풀릇은 그 무렵 나의 해방구였습니다.
사실, 너무 모자란 실력으로
동문들 앞에서 부끄러운 연주를 해서
소음공해를 많이 일으키긴 했지만
플릇을 불고 있을 때 나 스스로 만큼은 그냥 행복했었답니다.
나의 친정과 시댁의 부모님들께서는
이제 궁극의 해방구를 찾으신 후
모두 하늘나라에서 안식을 누리시고 계시고,
자라나는 나의 손주들은
이제 할미의 손길이 없이도 문제없이 잘 지낼 수 있게 잘 자라고 있어요.
2000년도에
실은 제가 '해방' 같은 것을 선언한 적이 있어요. 남편한테요. 아니 저 자신한테요.
누구의 아내도 아니고, 애들 엄마도 아니고, 선생도 아니고, 집사도 아니고,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네떼루, 나의 이름석자까지도 다 떼어버린,
그냥, '나' 자신이 그리웠어요.
남편 앞에 어렵사리 한달간의 시간을 약속하고
나는 캐나다 밴쿠버로 떠났어요.
그립고 그리운 '나' 가 누군지 그사람을 만나고 싶어서요.
홀로 떠났어요.
하필 왜 밴쿠버냐하면 그곳이 지구상에서 비교적 안전한 곳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었죠.
그곳에 아는 지인을 찾으면 있겠지만 연락 하지 않았고 그냥 떠났어요.
영어 잘 못하고 사전 지식도 없지만 무조건 떠났어요. .
그동안 부모님 수발과 자녀들 양육, 그리고 선생노롯을 거쳐 학원운영하던 모든 일들에서
완존히 나를 해방하고, 거기 가서 한 달 간 술~ 술~ 돌아다니고 잘 놀다 왔어요.
뭐~ 진짜 '나'가 캐나다에 있다고 믿어서 그리로 간 것이 아닌 만큼
많은 이야기를 만들고 잘 놀고 많이 돌아다니다 정확히 한 달 후에 돌아왔는데
내 인생에서 그때 그 짓(?) 아주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요, 거기서 '나'를 만나고 왔냐고요? ㅎㅎㅎ
돌아와서 가만히 되짚어 봤어요.
난생 처음 낯선 장소에 닥쳐서 혼자 잘 견디고 해결하며 지낸 경험은 얻었어요.
그런데 '나'는 어디 있는지 만나기가 어려웠어요,
아니 만나고 어쩌구 할 경황이 없었다고나 할까요?
그냥 그렇게 낯선 상황에 적응하려 애쓰며
하루하루 어떻게든 잘 지내보려고 바둥거리는 나 자신의 모습을 타인을 보듯 보았다면 그뿐이예요.
찬정이의 글을 읽고보니
그 캐나다에서의 한 달이 나에게 첫번째 해방구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모두 떠나고 남편만 내 옆에 남은 지금,
나는 세번째 해방구를 누리고 있는 중입니다.
두 번째 해방구는 앞서 이야기했던 바로 그 '플릇'이었구요.
남편과의 남편살이가 있는데 무슨 해방구냐구요? ㅎㅎㅎ
그 사람이 평생 나를 옭매고 골아프게 한 것이 있긴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이상한 식성이지요. ㅎㅎ
안 먹는 것이 넘 많아서 먹을 게 없지만 뭔가는 먹어야 하는데 한 번에 많이는 못 먹고
아주 조금씩 자주자주 뭔가를 다른 메뉴로 먹어야 하고 조금만 냄새가 다르거나,
색깔이나 모양이 달라도 싫고 어쩌구 저쩌구~~~ ㅎㅎㅎㅎ ㅋㅋㅋㅋㅋ
근데 그 사람의 그 까다로운 혀~를 무시하고(?)
나는 요즈음 스스로 '나'를 해방했어요.
"알아서 스스로 잡수시라요."
조금 배려하기는 하지만 다 맞출 수는 없다, 그리고, 더 이상 당신의 혀의 노예로 살지는 않으리라.
뭐~ 이런 독립선언문을 외친 거지요. ㅋ
그런데 실은,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진정한 '독립이'란 없다고 생각해요.
'관계' 없이 있는 '나'는 없는 것과 다름 없다? ㅎㅎㅎ
......................................................
윽~~
쓰다보니 또 너무 길게 쓴 것 가따. ㅠㅠㅠ
한 번 수다가 나오면 내가 이렇다니께유.
글구요, 다시 보니께 보탤 말이 또 있는 것 가타서리
나중에 몇 자 더 보탰어요. ㅠㅠ
?진부한 얘기라지만 찬정이하 하면 깜이 되네요
누구나 소설속 비련의 주인공~~
속 시원한 수노언니 글
가려운 데 잘 긁어주는 옥규언니글
빨간 립스틱 오르가즘 바비언니의 벤쿠버행(멋져요~~)
아쉬움 없이 해야한다는 화림언니 글
우야든동 다 해피엔딩~~
한때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고 살았으면 ~~~했던 적이 있는데요
그게 ~~
주게 되면 줘야 되고
받게 되면 받아야 하고
얼켜 설켜 주거니 받거니 살아야 해서요~~~
~~
꼭 받아야만 하는 입장에게는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고 하면
얼마나 야속하겠어요~~
우야든동 홈피와서 돌아다니는 게
해방구죠~~~
겨울나무의 노래 김정웅 시 김선주 노래
은희 언니 아드님이(김선주) 가수로 데뷔했다는 소식은 우리 홈피를 통하여 알았다.
이르지 않은 나이에 쉽지 않은 선택이었겠구나 하는 왠지 짠한 마음과 함께
참으로 부모 덕이 있구나 이런 훈훈한 느낌도 들었다.
내가 부모 덕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힘든 유턴과 시작 과정에서 아드님이 부모님의 이해와 격려를 충분히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은희 언니의 적극적이고도 전폭적인 마음의 지지는 보기에도 가슴이 뭉클했다.
아들에게는 너무도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 <겨울나무의 노래>라는 제목의 음반을 택배로 받았다.
열고 보니 아버지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아들의 노래 음반이었다.
-겨울나무의 노래- 김정웅
사람이 그리울 때는
겨울나무를 생각한다.
오, 경쾌한 바람의 채찍
맨살에 떨리는 찬바람 소리를 듣는다
친구여, 지금 가슴에
주렁주렁 매달린 계절의 이름들 나뭇잎들
우수수 떨구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우리 서로 낯모르는 얼굴로
어두운 뒷담에 홀로 숨어서
가다듬을 목청도 없는 음치의 노래
부끄럽게 부끄럽게 흐느끼다가
처음 만나던 그때 그 목소리
아직도 남았을까
친구여 나는
사람이 그리울 때면
찬 바람 몰리는 겨울나무
수식없는 노랠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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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부르는 아들.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없는 홍복 아니겠는가!
<아버지를 위한 노래>라는 영화에는 35년 동안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던 아들이 나온다.
아버지가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자기를 이해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10대 때,
그는 그 괴로움을 잊기 위해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월이 가고 아버지를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장소에서 아버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너의 아버지는 너를 참 사랑하셨단다-
-너의 아버지는 너를 자랑스러워했지-
아! 나는 왜 아버지가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을까?
이 아들은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
나이가 들어서야,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다니....
어떻게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부모로부터 자기의 생각을 이해받는다는 건 얼마나 귀하고 좋은 일인가?
그래서 편안히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시도 좋고, 무척 곡조도 좋은데 특히 노래하는 가수 목소리의 공간이 매우 부드럽고 조용하고 그윽하다.
때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때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때로는 자랑스러움으로,
눈물도 속으로 삭이며 그저 베푸는 것으로 긴 세월을 살아온 은희 언니의
세월과 정성이 보이는 아름다운 음반이다.
감사합니다. 잘 듣겠습니다.
?
옥규가 받은 그 음반 저도 받았어요.
신곡을 알리기 위해 제작한 CD 같았지요.
마지막엔 반주만 들어 있더군요.
남 같지 않은 느낌.
은희 언니의 아들이기 때문일겁니다.
대중이 좋아하고
많이 따라 부르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노래가 되기를 ~
작품을 내어준 아버지와
그 작품을 노래하는 아들이 다 행복하기를 ~
곁에서 지켜보며 노심초사하는 어머니에게
기쁨과 감사가 가득하기를 ~
저도 모르게 고개 숙여 기도하게 됩니다.
나두....
온맘을 불살려 자식에게 모든것을 내어주는
부모님의 맘이 느껴져 좀 숙연 했구먼요.
누가 듣던지 오로지 신인가수의 능력을
인정해주시고 많은 사람이 펜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끝까지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며 영혼을 불살려
쓰신 귀한 글들을 기꺼이 내주신 부모님의 사랑에
다시한번 감읍합니다.
?간만에 로그인을 하려니 비밀번호 잊어버려 애 먹었다오.
언젠가 새로 만든 인일홈피 로그인 비밀번호 메모한 수첩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요
어제 옥규글 올라온 소식 듣고 읽기는 진즉에 읽었으나 이제야
이곳에 글을 써 봅니다.
옥규 , 춘선, 순호, 모두 고맙네요.
추위가 닥치면 힘든 겨울을 지내는 사람 옆에서
이제겨우 한숨을 돌리는 차인데
아들이 부른 "겨울나무의 노래"는 우리 부부의 지친 기운에 생기를 가져다 주었답니다.
불혹에 나이에 나름대로 걷고있던 길을 포기하고
처음에 가고싶던길을 다시 찾아 처음부터 걷겠다는 아들애가
가수의길을 가겠다고 하니 엄마인 나는 옥규말처럼 걱정스러웠지요.
그러나 ...........지 팔자다 생각하기로 하니 걱정도 잠깐이였지요.
한마디로 이젠 잘한다 잘한다 하면서 박수만 치기로 했읍니다.
그래 적극적으로 나서서 극성에미가 되어 펜모임에 일원으로 등록도 하고
지방순회 공연으로 알게된 젊은이들과 소통도 하곤했지요.
밴드니 페이스북에 글도 올리면서 이번에 노래로 나온 김시인의 "겨울나무의 노래"가
음반으로 나오게되는데에 일조를 했답니다.
시를 잘 읽지않는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시를 알리기 시작해서
그 시를 읽은 작곡가 젊은이가 노래를 만든 계기를 주었으니까 말입니다.
처음에 자기시로 노래를 만든다 하니 갸우뚱 하던 아버지가 이젠 제일 좋아하고 옛날 젊은시절
기분이 살아나는듯 거의 글 쓰기도 포기하고 사는듯 보였는데
이 겨울 끄트머리 봄의 문턱에서 다시 펜을 잡기 시작합니다.
이 한 해가 나에겐 인생의 보너스를 받는 한 해가 된듯싶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옥규샘의 마음의 글..................거듭 고맙다.
올 설부터 차례와 기제사를 저희집에서 지낸다고 말씀 드린 적 있지요.
잘 차려라 어째라, 격식이 이러니 저러니 하는 사람은 없어요.
어머니가 병환 들기 전에는 손수 제수거리 장을 다 보셨는데
과용하신다 싶었지만 오랜만에 피붙이들이 모여드니 팔 걷어부치고
솜씨를 부려 잘 먹이고 싶은 마음에서 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동원할 노동력(주로 어머니의 친정 올케나 동생을 불러서 시킴)도 없어지고
한 달을 두고 먹어야 하는 제사음식에 진저리를 친 손녀딸이 거듭 읍소하여
손 놓으시기 전에는 생선도 한두 가지, 전도 두 세 가지로 많이 줄이셨어요.
이번 추석에는 제가 텃밭에 가꿨거나, 제 주변에서 장만할 수 있는 것으로 하고
최소한의 것만 사겠다고 계획을 세웠지요.
어쩌면 전통적인 격식에서는 벗어났을지 몰라도 요즘 애들도 잘 먹고
경제적으로 쓸데없는 지출을 안 해서 좋았어요.
음복하면서 조카들에게 음식 설명도 해가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예를 들면
과일은 사과와 배만 사고 우리집에서 딴 무화과, 대추는 이웃집에서 받은 것, 밤은 뒷산에서 주웠습니다.
삼색나물은 고사리는 봄에 꺾어 말린 거, 하얀색 나물은 봄에 장만해 둔 죽순을 들깨가루에 볶고,
초록색은 애호박을 따서 채썰어 절였다가 살짝 볶았지요.
전은 동태전. 버섯전그리고 동그랑땡 대신 감자크로켓. 새우튀김대신
냉동해 놓았던 오징어로 오징어튀김, 이제 막 알갱이가 들기 시작하는 들깨송이 튀김
식으면 뻣뻣해져서 먹기 나쁜 쇠고기 산적은 버섯불고기로
손 많이 가는 것에 비해 맛은 별로인 화양적은 잡채로 대신했습니다.
그래두 쌀 빻아다가 송편은 제대로 만들었어요.
그나마 하는 것도 혼잣손에 하려니까 이틀동안 얼마나 종종거렸는지 모릅니다.
저는 형편껏 하는 것이 가장 무리가 없고, 길게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경제적 형편, 노동력 형편 생각 안 할 수 없죠.
거기다가 모두가 잘 먹는다면 더 말 할것도 없는거구요..
조상님도 과용해서 차리고, 무리해서 병나면 민폐를 끼쳤다 생각하실거 아니겠어요?
비가 많이 와서 아침에 개산보 안했는데
비가 뜸하니 얼른 다녀와서 2부 있습니다
일본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서울 살 때도 조상님들 산소 벌초를 해야 하는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여기 살면서 알게 된 것이지요.
적어도 일년에 한번, 추석전에 벌초를 하는 게 문중이나 한 집안의 행사입니다.
요즘 벌초 대행해주는 사업도 있지만 그건 정렬된 집단 묘지의 얘기고
업자 데리고 산속에 있는 산소 위치 알려주러 가느니
간 김에 직접 벌초 하고 오는게 낮죠.
휴일 하루 벌초 하는 날을 잡아 문중의 남자들이 벌초를 합니다.
두 세 명 한 조가 되서 이 산 저 산으로 흩어져 있는 선조의 산소를 찾아 다니며 별초하는 일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기계로 하긴해도 일년에 한번 하다보니
잡초가 허리춤까지 우거져 있기도 할겁니다..
벌초하러 모인 일가중에는 우리 남편보다 형님들이 있긴 하지만
우리 남편이 작년부터 의견을 내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찾아다니며 벌초를 한다지만 우리가 나이 들어 못 하게되면
객지에 살고 외국에 사는 후대들은 산소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나 하겠냐고.
무연고 묘처럼 되느니 오래된 산소는 이제 그만 정리를 하자고 했다네요.
우리집안뿐 아니라 요즘 그런 생각을 하고 정리작업을 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저희 친정 종손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선산의 분묘를
다 정리(조상땅 팔아먹기 위한 불순한 의도가 있긴했죠) 해서 납골묘 조성했고,
친정 오라비는 시립묘지에 계신 부모님의 합장묘를 돌아오는 윤년에 호국원 납골당에 모신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육이오때 제2국민병 징집되었던 것을 인정받았다네요.
저의 시외가 문중도 다 정리해서 열평 남짓한 터에 봉분없는 납골묘를 만들었지요.
요즘 들은 얘긴데 칠십대의 지인 한분은 재산도 많고, 마흔 살 넘은 아들이 둘인데
작년에 밀양 선산에 있는 직계조상님 산소를 다 정리해서
화장한 후 산골(散骨)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은 다 우리 대(代)에서 끝내야 할 일이라고 하데요.
추석에 시가에 다녀온 동네 이웃과 잠시 얘기했어요.
몇해전까지는 차례를 지내느라 전날부터 가서 일을 했는데
시어머니가 제사는 내 代 에서 다 정리한다며 절에다가 올렸다나봐요.
추석날 맛있는 거 한두가지 해가지고 가서 먹고 오면 되니까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모른다네요.
성당에서추석에 합동으로 미사를 봉헌한다고 하니 카톡릭신자는 그것도 좋지요.
우리 앞 세대 그리고 우리 세대는 그런 유교적 관습을 그래도 수긍하는데
젊은 다음 세대에게는 무리하게 강요할 수 없으니
형편에 맞게 정리하는 것이 우리 세대가 맡은 숙제중 하나라고 합니다.
시가의 제사나 산소는 정리한다면 그건 백번 지당하고,
친정에서 제사와 산소를 다 말쑥하게 정리 한다면 좀 서운할 것 같네요.
이게 무슨 고약한 심사인지.
우리가 이런 세대입니다.
이 말 들으면 이것도 맞는 거 같고, 저 말 들으면 저것도 맞는 것 같은 낀 세대.
?병실에서의 이야기를 그냥 몇자 적어보고 싶다.
뭔일이 있음 마무리를 해야 속이 편한 내 결벽증? 아님 정서적 정리때문이랄까?
내 앞 침대 아짐의 이야기, 또 그 옆 아짐의 이야기~
나는 무릎아픈 이유가 순전히 나의 잘못 때문이다.
이곳에 오면서 텃밭을 하게 되면서 밭에서 나온 소출이 어찌나 싱싱하고 맛있는지 "아휴~ 맛있어"를 연발하며
마구 먹어댔다.
내가 씨를 뿌려 내가 거둔 소출이니 얼마나 신기하고 맛있겠는가?
일산에 살땐 저녁식사후 꼭 호수공원을 한바퀴 돌곤 했는데 여긴 논밭이 너무 황량해서 걷기가 싫어 운동을 안했더니
몸은 자꾸 불어만 갔다.
불어난 살을 이기지 못해 드디어 무릎이 탈이 난것이다.
내 앞 침대 아짐은 통성명을 해보니 나보다 예닐곱살 아래다.
미끄러운 빙판길에서 잠깐 발을 헛디뎌 넘어졌는데 무릎과 복숭아뼈가 으스러졌단다.
통기브스를 했는데 가려워 죽는다.
입원한지 거의 보름~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데 어찌나 애처로운지~
남편이 폭력에 기집질에 ~ 어떻게 하면 벗어날까 궁리끝에 딸 셋을 낳고 33 살에 겨우 이혼을 하게 됬다한다.
혼자서 딸 셋을 키우려니 안한게 없단다.
그나마 목욕탕 때밀이가 젤 돈벌이가 되어 그일로 자식셋을 전문대까지라도 보낼수 있었다 한다.
간호원이었다가 일이 너무 힘들어 요즘 쉬고 있다는 둘째 딸이 며칠에 한번 와서 엄마를 돌보고 갔다.
퇴원은 시집간 큰딸이 사위가 운전해서 해줄꺼라고~
이 병원은 동생의 아들이 내과 의사로 있어서 오게 됬다고 한다.
말도 재미있게 하고 싹싹해서 이것 저것 나눠먹고 아쉽게 헤어졌다.
그 옆의 아짐은 더 기막힌 이야기~
횡단보도를 가는데 느닷없이 벤츠가 백미러로 가슴을 치더니 넘어졌는데 이번엔 또 발등을 차바퀴가 딛고 가더란다.
너무 놀라 괴성을 지르며 기절~ 아무리 보험이 해결해준다지만 입원하고 나서 어떠냐는 전화한통 없단다.
발등이 새까맣다.
게다가 그 집 남편은 더 가관이다.
80 이 넘었는데도 개인택시를 모는데 지금 자기가 아는 돈만도 현찰 4 억이 넘는데 여전히 돈만 번단다.
언제 쓸건지 이해가 안간단다.
좁쌀 좁쌀 그런 좁쌀이 없단다.
물티슈좀 가져오라면 천원이면 묵직한거 하나 주더만 몇장 들어있는 백원짜리~
먹을거좀 가져오라면 이젠 군인들도 안먹을거 같은 쵸고파이 한통.
와서는 투덜대며 "도데체 나 밥은 언제나 얻어먹는거야?"
남의 남편이지만 정말 귀싸대기를 한대 갈기고 싶다.
나는 내가 관리 못해 병원에 왔으니 억울할것도 없지만 어느날 이렇게 날벼락을 맞을수도 있는게 인생인가?
인생이란 반드시 노력한 만큼의 결과는 아니란 걸 실감한다.
교과서에는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있다 하지만, 나이 들면서 그건 아니란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건 주님도 설명이 어렵기 때문에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하라" 하셨나보다.
나는 일주일만에 퇴원했지만 언제 퇴원할지 모르는 두 아짐이 이 신새벽에 짠하게 생각난다.
이쯤에서 친정엄마 입장인 나도 한마디.
딸 하나인 엄마는
딸ㄴ 힘들어하는것 생각하믄 아주 딸네집에서 상주하고
애들쳐업고 주방에서 순직해야 한다지만.....!
지기랄~!
누구를 위하야 종을 울리냐고요.
난 대놓고 야그했어요.
너 내가 안팎으로 얼마나 유능한 인재이지 알지?
용돈정도루 생각할래믄 주지두 말아.
안받구 안봐주믄 되니까
니네가 엄마를 보통 할매루 생각하구 대충 주면 나두
고만큼만 할테니께.
중국아줌마등판에 매달려 댕기는 손주 생각해
니나노하면서 댕겨도 되는 나의 일터인 학원을
세주고 애를 돌봐주기 시작할때 하던 말입니다.
유치원에가서 주위할매들 야그 들어보니
남편떼어놓고 자식네 집에서 상주하며 일주일에 한번씩
집에 갔다오고 세상에 20~30씩 받는대요.
자식들 힘들다고....!
에미,애비 모두 각자 차갖고 다니는 족속들이
즈들 아이 봐주는 시엄니 를 고만큼 디리고 부려먹는다규?
그걸 또 자식들 생각해 입도 벙긋 못한다네.
이런~~!
난 우리들도 우리들만의 지존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얼마나 잘난 핵교에서 잘자랐고
우리가 을매나 똑똑해요~?
사회에 나가보니 어디가든지 눈에 뜨이더라구요.
(나만 그런겨?)
자존감은 자기가 맨들어야할 필요도 있어요.
에구~나보다 애들이....(웃기지 말라구 해요)
갸들은 어디서든지 잘먹고 잘싸댕겨요.
그러다 아프믄 귀찮아 하기나 하지요.
어디서나 당당하고
어디서나 똑똑하게
어디서나 자신있게
어디서나 말해대고
어디서나 고개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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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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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
입이 모자라지 말이 모자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