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회 - 게시판담당 : 최경옥, 정환복,설인실 - 11회 모임터 가기
친구들은
아들 장가 , 딸 시집 보내고 하는데 우리 딸 이제 대학 2학년 올라간다.
그래도 별 걱정 안 한다..
나도 원래 늦게 갔잖아~~~~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더구만
블로그에 조금씩 생일 축하 글을 써서 보내 주려하다가 결국 날짜를 지나고 말았단다.
이 게으름을 어찌 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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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언덕을 낑낑대고 올라가는 아이
부르스타와 제법 큰 냄비를 들고 가는데 가방엔 뭐가 또 그리 많은지 터질 것 같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라고 미리부터 배우는지 '한 짐'을 지고 가는 우리 나라 아이들~~~
초등학교 시절엔 왜 이렇게 각종 준비물이 많았을까?
미술 뿐 아니라 다른 교과에도 있어서 늘 한, 두 가지는 꼭 챙겨가야 했던 것 같다.
우리 딸이 초등학생 였을 때 어쩌다 늦게 퇴근해 가서 갑자기 다음 날 준비물이 없으면 발을 동동 굴러야 했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음료수 깡통, 휴지나 은박지 속, 야쿠르트 병, 아이스크림 막대, 크기가 다른 과자 상자 등등 늘 모아두었었다. 웬만한 것은 문방구에서 사기도 하지만 어쩌다 살 수 없는 것도 있을 뿐 더러 버려지는 폐품을 모아두면 요긴하게 쓰기도 했기 때문이다. 요새는 아이스크림 막대를 팔기도 한다는데 이제 대학생이 된 우리 딸에겐 무용지물이지.
직장 생활을 하는 나는 미쳐 챙겨가지 못한 아이의 학습 준비물을 가져다 준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아이가 1학년 쯤이었던 것 같은데 몸이 좀 불편하여 병가를 낸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늘 엄마 먼저 나가버린 빈 집에서 인사도 없이 혼자 등교하다가 아픈 엄마지만 그래도 집에 있던 것이 좋았는지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나갔는데 현관에 스케치북이 떨어져 있었다. 크레파스는 가방에 넣어주었는데 손잡이가 달린 스케치북은 들고 가라고 했더니 신발을 신다가 잊었나 보다.
'이런 정신 없는 건 꼭 나를 닮았다니까.'
후다닥 들고 뛰어나갔건만 눈에 띄지를 않아 할 수 없이 학교까지 들고 뛰는데 선생님들께서도 출근하시는 시간이라 아차 싶었다. 헝클어진 머리, 집에서 입던 반바지 그리고, 슬리퍼...
서둘러 딸 아이네 교실 뒷문으로 가서 거의 대부분 엄마들이 그러하듯이 약간 숙이고 고개만 쏙 집어넣고 두리번거렸다. 보통 자주 오는 엄마들이면 다른 아이가 보고 '야, 너네 엄마다.' 하고 가르쳐줄텐데 나를 알아보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이러다 선생님과 마주치면 어쩌나...'
우리 예쁜 딸은 세 번째 줄 쯤에 앉아 뭔가 하고있었다.
자습인지 ...
끄적거리다가 스케치북을 들어 보이는 나를 발견하곤(?)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얼른 나와서 받아가야 선생님한테 안 들킬텐데 반 쯤 일어나다 말고 짝, 앞에 앉은 아이, 뒤에 앉은 아이들을 막 건드리더니 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야, 저기 봐 , 우리 엄마다."
세수도 안 한 부시시한 얼굴에 꾀재재한 옷과는 상관없이 '엄마'라는 사람이 거기 그렇게 와 주었다는 것.
아, 그러고 싶은 거였나보다.
우리 엄마도 자기가 빠트리고 온 공책이나, 숙제, 준비물 등을 가져다 주었으면 했었나 보다.
얼떨결에 달리기를 해서 뿐일까?
돌아오는 발걸음이 후둘거림은 뭐라 말로 풀어낼 수가 없었다.
이제 대학생이어서 엄마의 그런 손길은 필요없지만 그래도 뭔가 늘 아쉽다.
9월 8일 오늘
우리 딸 생일!
가을에 입을 운동복과 속옷 몇 벌, 아빠가 준비한 세계사 관련 책(다른 것은 다 느린 사람이 말없이 책을 주문해 놓았다.)을 부치며 '보낼 것이 더 뭐 없을까? '두리번 거리게 되는 그런 마음이 엄마 마음인가 보다.
"엄마, 괜히 비싸게 이것저것 보내지 마. 여기도 다 있어."
그러면서 돈을 아끼느라 고물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니고, 방학에도 남들처럼 놀러도 안 가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딸 아이.
"사람은 결국 자기 하고 싶은 걸 해햐 하는 것 같아 . 한국에서 쓸데없는 것 하느라고 시간을 흘려보낸게 너무 아까워 . 나 한국에서 쏘왓 동아리 할 때 선배 언니도 이공대를 나왔는데 뉴욕에서 미술 공부 시작 했대."
"공부해야 할 게 너무 많아, 미술관은 가도 가도 끝이 없고. 하지만 책에서 공부한 것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고 익힐 수 있어서 너무 좋아."
"다음 학기 대비하여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야."
수능 공부하느라 특별히 뛰어난 관심이 없으면 쌓을 수 없는 인문학적 소양의 부족함에 많은 책을 읽어내야 하지만 밤 늦게까지 책을 읽다 맑아진 머리로 일어나는 기쁨을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살아가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수확인가?
우리는 한 평생 살면서 가슴 저리게 즐거울 수 있는 일을 얼마나 하는가?
이 여름에
이젠 딸이 앞으로 그 무엇이 될 것인가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을 하지 않게 된 나는 이제야 자식에게 자유롭다. 이건 어쩌면 나 자신에게서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 아닐까?
"야, 그 어린 것이 어떻게 숑숑 말을 하며 공부를 할까?"
친구 하나는 내년 여름에 같이 유럽 여행가자 한다. 그래 같이 한 번 가보자꾸나. 너는 며느리도 얻었는데 난 언제나 사위 얻냐?
"성문아. 생일 축하해~~~~"
어머 송자야!
그런 엽서가 있었어???
게다가 잘 보관까지 하고 있다니 대단하다.
정말 반갑다.
LA 영란네에 갔을 때 너희들과 만났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 때 중학생였던 우리 딸이 많은 길을 돌고 돌아 이제 자기 자리 대학 2학년에 가 있는 거란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소리가 날 정도로 잘들 크고
가끔 소식 들으며 우리가 늙어가는 거 확인해가는 게
'삶' 아니겠니?
온 몸으로 힘들었던 육아 시절이 오히려 그립다고 말들 하는 걸 보면
'늙어감'이 확실한 것 같다.
곱게 곱게 늙어가야지?
송자야, 그래도 6인용 테이블에 둘러앉아 함께 밥 먹을 수 있음을 감사해라.
영란아
오랜만이다.
따님이 유학을 가 있나보구나.
많이 보고 싶겠네.
세월이 참 빠르지?
애들이 많이 큰 걸 보면 말이야.
송자야
하영희가 엘에이의 주민이 되었단다.
지난 토요일엔 다들 만나서 영희 입나성 축하모임을 가졌어.
영희가 가까이에 와서 기분이 좋다.
백영란씨 딸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군요. 사랑한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는것이지? 우리 경수가 말한대로 지난 토요일에 모여서 '절
절한 사랑'에 대하여 말했었지. 나는 성격상 매양 그저 그런 편이라 애뜻한 면이 없지만 그래도 뒤돌아보면 아이들과 같이 했던 시간들이 참으로 소중하고 재미있고 행복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악기를 배울때 (피아노, 클라리넷, 색스폰) 밖에서 기다리며 선생님과 같이 하는 화음을 들었을때(혼자 하는 것은 별로인데 역시
화음을 이룰때 아름답다)요즘도 느끼는 것이지만 아들 친구들이 여럿 와서 으하하 웃으며 수영할 때, 4학년인가? 5학년때 인디안 마을을
이 무딘 솜씨로 같이 만들어서 숙제로 가져갔을때 등등 (웬수같았던 장면은 전부 삭제되었음) 그래 좋은 것만 기억하자. 아니 사실이 또
그렇고. 써 놓고 보니 결국 사람 온기를 기다리는 할머니 넋두리같이 되었구만 그랴. ㅉㅉㅉㅉ
송자야 이제 그곳에 그 뭣이냐 노란 단풍이 드는 나무가 변하기 시작하겠구나. 아바 공연을 보고 와서 광분하던 영숙이 덕분에 우리도
들떠서 당장이라도 가고 싶던 것도 벌써 2년 전인가? 그렇다.
영란아
잘 지내니?
그래 친구들은 아이들 시집 장가 유학............등으로 떠나보내고
두내외 덩그라니 남았다는데
나도 대학으로 떠나면 끝이라는 주위사람들 말만 듣고
예쁜 이인용 마블테이블로 바꾸었더니만
아들 대학졸업하고 집으로 들어와
딸아이 집에서 대학다니니
모두모여 식사할 때마다 불평을 하니
한마디 "야! 남들은 이나이면 부엌에서 조금 해방된다는데 니들은..........."하고
다시 육인용 커다란 식탁다시 들여놓았다는거 아니니
영란아
나는 니생각만 하면
어느 여름 니가 캠핑가서 내게보낸 엽서 생각이 난다
그 엽서는 오래된 내 앨범 마지막장에
바랜사진들과 함께 있지
참 좋은 시절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