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야, 이번엔 꼭 부케를 받아라.}

 

<난 평생 시행착오를...>
치사랑, 내리사랑 중 우리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이 내리사랑이 더 큰 듯싶다.
삼강오륜에 기초한 <전설 따라 삼천리>등에는 자식은 다시 낳으면 되지만 부모님은
그럴 수 없으니 부모님을 살리기 위해서 자식을 희생시킨다거나 자기 넓적다리 살을
베어 피를 입에 넣어드리는 식의 문법(文法)이지만 그래도 내리사랑으로 인해 인류가 계속

종족이 유지되는 것이리라. 치사랑, 즉 효(孝)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단지 난 아이들은 엄마, 아빠 그리고 형제들과 뒹굴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살아오면서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는 사람이지만 그중에서도 자식농사는

정말 내게는 많이 아쉬운 대목이다.

물론 언감생심 재미(在美) 전혜성 박사 가족처럼 유색인종으로서

주변인(周邊人)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4남2녀 모두를 하버드와 예일 대 박사출신으로

미국 주류(主流)의 CEO, 대학총장, 정부요직인사 등으로 배출하고

집안의 박사수를 합치면 11개가 된다는 그런 분들과 비교열위(劣位)의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나도 내게 찾아오는 대로 낳다보니 농구 팀이 됐다.

자식은 키워지는 게 아니고 스스로 성장하는 거라 생각한다.

내게 주어진 자식들이 부자나 고귀한 자 되기를 바라진 않는다. 

다만 부모로서 자식의 잠재적 능력과 재능을 최대한 살려주고 성실하고 우애로우며

남을 배려하고 사랑할 줄 아는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이 사회(社會)에 내보내 주는 게 우리들 부모 된 자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늘 보통사람들보다 한참이나 뒤늦게 철이 들고

보헤미안으로 살아온 나로선 충분히 그리 하지 못한 듯싶은 게 마음에 걸린다.

 

그중에서도 난 늘 둘째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시리다.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히 다른
아무 이유나 계산 없이 부모님이 휑하게 큰 집에서 적적하게 사시는 게 쓸쓸해 보여
난 돈키호테的 효도(孝道)를 단행했었다. 당시 우리는 아이가 3명이었는데 학교에
들어간 큰애와 4살짜리 셋째 말고 둘째아이 하나를 1년 간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도록 한 것이다.

 

“얘는 저 현관 턱에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어. 큰애나 셋째는 급해서 잘 살펴보지도 않고

앞으로만 내딛다가 자주 떨어져 울곤 했는데... 얘는 정말 엽렵하고 찬찬해.
생긴 것도 제일 예쁜 게 천생 여자애야.” 그런 식으로 꼭 누구와 비교하며 칭찬인지 정의(定義)인지를

늘 입에 달고 다니던 어머니의 언어습관이 아이에겐 엄청난 독(毒)인 줄 그 때는 미처 몰랐다.

주말에 아내와 부모님께 인사차 잠시 들렀다가 돌아올 때면 녀석은 울먹울먹하면서도

따라온다고 고집을 세우지 않는 것을 그저 대견하게만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 학교에 입학하면서 둘째를 데려왔다. 근데 녀석은 밤에 자주 오줌을 쌌다.

지 동생도 진즉에 가리는 데...한의원도 데려 가보고 병원도 가봤다. 하지만
그 후로도 거의 2년이나 가끔 실수를 했다. 나중 그게 녀석이 엄마 아빠와 떨어져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면서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크게 받았던 때문인 것을 뒤늦게 알았다.

 

할머니(=어머니)는 푸근하고 텁텁한 된장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 즉 편안한 사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아버지)도 아이들이 마루에서 장난을 치며 어질러 놓거나 어쩌다 전화나 꽃병 하나만

잘못 건드려 떨어지거나 깨져도 눈썹이 올라가고 목소리가 커지는 분이었다. 또한 거기 도우미 아줌마도

몹시 깐깐하고 여유라곤 도무지 없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이가 혹 오줌이라도 싸면 “괜찮아” 라고

다독거려줘야 하는 데 “너 오늘밤도 오줌 싸면 내일부턴 마루에서 혼자 자게 할 거야.” 식으로

미리 잔뜩 겁을 주는 타입이었고 할머니는 “우리 OO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엽렵한 데

바보처럼 오줌을 싸진 않겠지.”식으로 미리 아이를 긴장시키는 타입이었던 것을

난 한참을 지나서야 깨달았다.

 

녀석이 아예 더 어리든가 아님 좀 더 컸더라면 그렇게 까진 되진 않았을 텐데...

바보 녀석 같으니라고...며칠만 자다 “싫어, 싫어 나 엄마 따라 집으로 갈 거야.”
하고 막 울고불고 생떼를 쓰며 막무가내로 보채지 않고서...

 

<혼자 먹는 밥이 서러워...>
살다가 몹시 어려운 상황에 빠져 우리 대(大)식구가 한 지붕 밑에서 별을 보기가 무척이나 버거웠던 시절,

그 때도 녀석은 큰애와 둘이 자원해서 나가 자취를 했다. 난 가끔 녀석을 찾아갔다. 아니 자주 갔다.

그리곤 “너 밥 먹었냐? 안 먹었어? 그럼 나가서 아빠랑 먹자.” 사실 난 밥을 먹은 지 1시간도 채 안되어

배가 빵빵한 채 시침 떼고 그렇게 밥을 같이 먹었다. 또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난 식사한지가 한참이 지나 배가 고파죽겠는데 녀석이 방금 전에 식사했다고 할 때면

“나도 밥 먹은 지 얼마 안 돼 밥 생각 없다.” 라며 몇 시간을 뱃속에서 구라파 전쟁하는 소리가

녀석에게까지 들릴까 조바심하며 참기도 했다.
.........  
.........

그러한 이런저런 애잔한 기억들이 늘 내 가슴속에 묻혀 있다.

근데 이제 또 동생이 앞질러 면사포를 쓰려하는구나.
딴 따다다,~ 딴 따다다.
셋째와 웨딩마치를 연습하는 저 앞에 네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아~!
OO야, 이번엔 꼭 부케를 받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