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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은 할 말을 잊고 물줄기를 서해로 흘러 보내고 있다.

    순박한 이웃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평화로운 마을에 사연도 많다.

    특히 사시사철 차가운 개울물이 흐르는 그곳을 따라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각자 나름대로의 슬픔이 있다.

     

    두개의 시냇물이 여울목을 이루며 마을을 돌아 흘러가는데

    유독 한쪽 시냇가에 사는 집들이 불행을 겪고 있었다.

    대동아 전쟁 때 일본군으로 끌려갔던 큰아들이 남지나에서

    전사한 집이 있고, 육이오 전쟁 중 빨갱이라 불리는 토박이

    공산당한테 아버지를 처참하게 잃은 집의 사연만 보아도 그랬다.

    인민군들에게 같이 붙잡혔다가 어벙한 벙어리 대신 구사일생 살아났으나

    이마에 난 암 덩어리 같은 혹으로 인해 장남이 유명을 달리한 집도 있다.

     

    징집을 피해 도망 다니다 호적에 붉은 줄을 긋고 결국 폐병으로

    장남이 횡사한 집도 그렇고...

    큰아들이 낙동강 전투에서 파편 상으로 귀환날짜를 받아놓고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신 부작용으로 상처가 덧나 숨을 거둔 사례도 있다.

    죽은 자의 유복자인 아들은 평생을 아버지 없는 설움에 지금도

    너무 외롭게 살고 있다.

     

    일제 때 관동군으로 끌려갔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왔으나 남의 초상집

    공술 얻어먹고 아들이 객사한 집도 있다.

    객사한 그 아들이 술좌석에서 입버릇처럼 불렀던 기미가요 등 일본 군가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여름철 개울물이 불어나 급류에 작은 딸애를 잃어버린 애환 등이 개울가

    집들에게 서려있다.

     풍수지리를 논하는 지관들은 덕정산에서 흐르는 개울을 지팡이로 가리키며

    냉혈 터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고 했다.

    “이런 개울가에 집짓고 살면 않되! 사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흉한

    집터란 말이야 ”

     

    상여막이 야트막한 산에 자리하고 밤이면 소쩍새 스산하게 울면

    음침한 고개에서 들리는 "켕켕" 여우의 울음소리 소름을 끼치게 하였다.

    집안에 남자들이 다 죽어 폐가로 남은 기와집이 있었다.

    밤마다 귀신들이 나와 “삐꺽” 문을 여닫고 그 집 부엌에서는 아낙네들이

    설거지 하는 소리가 밤마다 들린다고 소문이 돌았다.

    흉가로 변한 그 집에서 가끔 장독대를 끼고도는 한 서린 여인들의 흐느낌도

    들렸다고 했다.

    이웃들은 한 여름 밤 밀거적에 나와 앉아 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밤이

    더 깊기 전에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낮에 가 보면 멀쩡하였다.

    모든 문이 판자로 못질해 있을 뿐...

    참으로 희한한 일로 동네가 흉흉하였다.

    “검은 그림자가 휙 지나치는 것을 난 보았어.”

    누가 담력을 자랑한다고 막걸리 한말 내기를 걸고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여름밤에 그 흉가에 들어갔단다.

    대문이 와락 닫치는 바람에 놀란 누구는 높은 담을 단숨에 뛰어 넘어 자기 집에

    들어가 그만 몸살이나 누웠단다.

    “병까지 나고.. 뭘 본 것이 확실해.”

     

    그 집 친척들은 의논 끝에 잘 지어진 기와집을 헐고 아카시아 밭에 덩그러니

    묻힌 무덤을 이장하려고 팠었다.

    파 보니 아니나 달라 시신은 검게 변해 있었고 아카시아 뿌리가 썩지 않은

    시신을 칭칭 감고 있더란다.

    실제로 그 집의 아들 셋 모두가 패가망신하였다.

    시집간 출가외인이라던 딸들은 말고...

    참 믿거나 말거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로 수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 잘하던 어느집 아들이 수년 전 이름 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튼실한 그의 아내는 과부댁이 되고 말았다.

    긴긴밤이 외롭기만 했을테지...

    그러던 차 남정네 한분이 개울가 냉혈 터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밤새 불을 밝히며 버섯을 재배하고 있었다.

     

    그런대 밤마다 한 여인이 불나비처럼 찾아든다는 괴상한 소문이 돌았다.

    과부댁이었다나...

    그간 참아온 주체할 수 없는 욕정을 밤마다 불사르고야 말았다.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고만 그들 사이엔 도덕이고 윤리도 한갓 거추장스러운

    단어일 뿐이었다.

    밤마다 토해놓는 역겨운 신음소리가 소스라치는 개울물을 타고 흘렀을 테지...

    타락의 끈적끈적한 여름밤은 쾌락으로 흘러만 갔다.


    그러나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는다." 더니 만 그게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죽은 큰아들과 친척이 되는 다혈질의 사나이가 그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눈치 챈 그가 이를 묵과할리 없었다.

    “아니 야심한 밤에 형수님이?”

    과부댁이 저녁이면 시동생이 되는 집의 동정과 눈치를 살피니 의아하던 차에

    둘의 관계를 깨닫고 현장을 잡고자 벼르고 있었단다.

    그날 밤도 여지없이 비닐하우스가 두 육욕의 몸체가 합체로 부르르 떨 때

    다혈질의 사나이 손에 들려진 장작이 허공을 내젓더니 무섭게 춤을 추었고

    정욕을 못다 채운 남정네의 등짝에 날선 장작이 여러 번 내리 꽂혔단다.

    얼마나 강타를 당했는지 모른다.

     

    이후 조용한 동네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쉬쉬하였다.

    결국 매질을 당한 남정네는 시름시름 앓다 골병들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한순간의 열락이 사망을 낳고야 만 것이었다.

    매질을 심하게 한 사나이는 양심의 가책인지 몰라도 심한 우울증으로

    수년간 고생하다 생을 스스로 끊고야 말았다.

    개울가의 비극이 현재 진행형으로 이렇게 모질 수가?

    “구구 구국!” 산골짜기에서 들리는 산비둘기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구슬프다.

    아! 비련의 개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