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청와대 근처 신교동에 위치한 서울 맹학교에서는

매해 열리는 행사로서 송암 서거 47주기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해마다 참석하는 나로서는 오늘도 시종일관 감격스러웠다.

시각장애를 가진 분들이, 부부들이 참 아름답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늘 참석하시는데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의 10%가 선천성이요, 90%가 후천성 장애로서

당뇨 혹은 교통사고 등으로 중도에 시각을 잃은 분들이 잠시 절망하기도 하나, 이렇게 정확하고 편리한 글이(브라이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한글점자를 창제하신 송암에 대해 알게되면서 감격해 마지 않더군요. 

 

오늘 모임에도 여러 분들과 여러 단체가 금일봉을 내어 행사를 가능케 하였는데 인사말씀을 하시라고 하니,

자신은 40세에 시각을 잃을 때까지 이렇게 번듯한 좋은 글이 있는줄을 몰랐다가 송암선생께 너무 감사하게 되었다....라며,

오늘의 행사에서 유가족대표로 인삿말씀을 하신 송암의 큰따님 박정희 장로님(나의 어머니)께 치하하시는 것이었다. 

 

길에서 왕왕히 부딪쳐 보게되는 일반 시각장애인들과는 달리, 이런 모임에서 만나는

소위 시각장애인 사회의 지도자이신 분들은 정말 잘 생기고 그 삶이 멋지고 경제적으로도 정안인들 못지않은 성공을 이루고 사시니

송암의 제자임을 자처하며 마음으로 애모하는 분들, 참으로 대단하다.

 

신교동의 서울맹학교 자리는 1900년 초에는 제생원이라 불렸는데, 그곳에서 젊은 교사였던 할아버지의 맏딸로 어머니가 태어나셨다.

벽에 걸려있는 오래된 사진을 짚으시며 저기서 내가 태어났다... 87세의 어머니는 말씀하시는데,

나라가 잘 살게되니 이제 학교건물은 현대식으로 너무너무 편리하게 신축되어 강영우 박사님의 전기 등에서 짐작되던

그런 낡고 힘든 건물이 아니다.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여러해 노력하신 끝에 1926년 11월 4일 훈맹정음을 발표하셨고,

쓰는 이들마다 참 좋다, 편하다, 혼동되지 않는다 등등 칭송하고,

송암께서는 우편교육을 통해 전국의 시각장애 학생들이 글을 깨우치도록 도우셨다. 

송암추모회 회장이신 이성대 박사님이 오늘 .... 어린 시절에 [학생 스스로 공부하는 영어]라는 점자책을 송암에게서 받았는데

F를 ㅍ과 달리 점자표기하신 것 등을 말씀하시면서 추억하시는 것이었다.

 

저토록 헌신적인 송암의 일관된 생애는

진정 부인 김경래 여사(나의 외조모님)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제 송암의 전기가 6종에 이르렀으니 (이중 한 종은 내가 집필에 비서로 참여함; 2002년 문광부 이달의 문화인물 당시의 '박두성'),

이제는 송암의 생애 끝까지, 그리고 당신의 목숨이 붙어있는 한 남편의 평생의 사업을 보필하신 외할머니 김경래 여사님의 전기를 쓰기 시작하자고 어머니를 부추겼다. 이 모든 일을 증언하고 싶고 기록으로 남겨, 관심가진 후대들이 나중에 목마르지 않게 도와주고 싶다.

 

 

(옛날 인천을 기억하시는 분 중에 율목동 25번지, 대문에 태극기 그려있던 집을 아시는 분이 있을 터입니다.

송암 박두성 할아버지께서 은퇴후 노년에 사시던 집인데요, 여기서 송암을 모시고 살던 손녀 박혜숙(인일5회)언니와 외손녀인 저

유순애(인일7회)가  8월26일 연례행사에 유독 개근을 하네요~~.)

(관심있는 분들은 연수동 인천시 시각장애복지관 1층에 송암기념관이 있으니 방문도 해주시고,

뜻있는 분들은 복지관의 녹음봉사 있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