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드베키아 꽃길 따라...>

   해바라기도 아닌 것이, 금잔화도 아닌 것이, 들국화도, 유채꽃도 아닌 것이...
어느 것은 해바라기 4촌이고 어느 것은 5촌 같고 어느 것은 한 6촌쯤 돼 보인다.
키도 20센티미터에서 1미터로 여러 가지고 자주색 바탕에 노란 꽃이 주종이나
어느 것은 자주색이 거의 얼굴 전부를 차지한다. 아무튼 이것도 해바라기처럼
향일성(向日性) 꽃인 듯하다.
   차를 몰고 나서면 그 곳이 고속도로든 국도(國道)든 가릴 것 없이 노변(路邊)에
싱그러운 모습으로 따라오는 노란 꽃, 그것이 루드베키아이다.

길에 나서면 그것은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내가 길 위에 있음을 알려준다.
   길을 따라 나선다. 혼자서 하는 여행은 외롭다. 진저리나도록 고독하다.

하지만 가다가 싫증나면 쉬고 정 못 견디게 배가 고프면 어느 村스러운 밥집에서

나물비빔밥이나 가락국수로 요기하고, 목적지를 따로 정하지 않고 그저 표지판이 저만치 보일 때
마음 내키는 대로 길 하나를 골라잡으면 되는 자유로움이 있다.

옆에서 “배고프니 어디 들러 요기부터 하자”라고 보채는 소리도 없고

천천히 달리라든가 좀 더 빨리 달리라든가 하는 잔소리나 채근도 아니 들어서 좋다.

듣고 싶은 음악 내 맘대로 골라 들을 수 있고 또 그저 조용히 달리고 싶을 때면

아무 때고 라디오 끌 수 있어서 좋다. 옆에서 코골며 혼자가 아니되

더욱 혼자처럼 외로움에 부채질하는 상대적(相對的) 고독(孤獨)이 없어 좋다.

하지만 혼자서 하는 여행은 역시 외롭다. 진저리나도록 고독하다.
   혼자서 달릴 때는 상념(想念)이 많다. 온갖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오거나

아예 어떤 묵직하고 암울(暗鬱)한 상념의 늪에 빠진다. 이런 상념은

안개가 지척(咫尺)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무섭게 덮어 마치 허허(虛虛)바다에서

좌우(左右)구별도 못하고 표류(漂流)하는 나룻배처럼 조심조심 거북이걸음으로 전진할 때 몰록 사라진다.
근처에 휴게소 등 어떤 쉴 공간도 없어 어쩔 수 없이 나아 갈 때 그것은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전일(專一)한 전진(前進)일 뿐이다. 안개 속 운전은 졸음운전 다음으로 위험하다.

그러다  거짓말처럼 안개가 걷히면 어느새 상념이 다시 자리 잡고 피어오른다.
   오늘도 루드베키아는 여전(如前)히 나그네에게 이정표(里程標) 역할을 해주건만
그걸 보는 나그네는 심신이 지쳐버린 중늙은이가 되어 혼자 외롭게 정처(定處)없는
핸들을 잡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평화로운 어촌(漁村)이라는... 아차, 이 말은 실수(失手)다.
 평화로운지 아닌지 제3자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나?

그 안에서도 지지고 볶는 집들이 더러 있는지 정말 누가 알겠나?

그래,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 웅장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모래사장, 병풍(屛風)같은 송림(松林),

그리고 멋들어진 절벽의 곡선(曲線)으로 휘돌아진 산자락에 그림같이 들어앉은

조그만 어촌(漁村)! 그곳이 바로 삼척시 근덕면 용화리이다.

2000년 1월1일 밀레니엄을 맞으려고 민박(民泊)을 한 그곳을

산중턱 길가 조망대에서 하염없이 내려다본다. 이윽고 나도 그 풍광의 일부가 된다.
   여행은 무엇인가? 국내여행이든 외국여행이든 우리는 국외자(局外者)일 뿐이다.
그저 지나가는 과객(過客)으로 그들의 생활, 법률, 일상의 온갖 희로애락(喜怒哀樂)과,

그 지방에 담겨있는 수백, 수천 년의 역사나 체취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그저 구경꾼일 뿐이다.

그래서 부담(負擔)없고 마음이 편한 것이고 일탈(逸脫)의 해방감을 느낀다.
그것은 결국 내 멋대로 느끼는 것일 뿐 진정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시 아는 만큼 보이고 느껴지겠지.

또한 그렇게 여행에서 투영(投影)되는 온갖 사물과 이야기에서
모처럼 자신과의 내밀(內密)한 대화를 하는 달콤한 고독의 시간이겠지.
   다시 길을 떠난다. 각종 크고 작은 해암(海巖)이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진 신남 해변 이곳이 또한 장관이다.

이곳에는 국내유일(國內唯一)의 어촌 민속전시관과 남근(男根)제(祭)를 지내던 해신당(海神堂)기념관이 있다.

용화리가 나 같은 이가 좋아하는, 아직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아름다운 어촌이라면

신남은 이미 공인된 한국제일의 아름다운 어촌이다.

기념관에서 400년 전(前)의 두 남녀의 애틋한 비극적 전설에 마음속으로 묵념하고

바위들 멋들어지게 덮여있는 해변으로 나오면 일본의 아끼다 해변 못지않은 絶景을 만난다.

바다에 세워진 여인(女人)상(像)이 파도에 무릎까지 잠기곤 하는 경관에선 덴마크의 인어(人魚)를 상기한다.
   강원도 7번 도로 어디고 시원하지 않은 곳이 없지만 특히 삼척에서 백암까지의 해변도로는 정말 장관(壯觀)이다.

여행은 행복한 고독이다. 하지만 역시 혼자 하는 여행은 외롭더라. 진저리나도록 외롭더라.

아! 친구여!

언제고 강원도 해변에 걸린 이름 없는 횟집의 평상(平床)에 앉아

나와 함께 저 파도(波濤)소리 들으며

밤바다에 비치는 달을 소주잔에 담아 삼켜 보세나.

아니 잔도 던져버리고 그저 밤을 새워 저 바닷물을 들이켜 보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