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우선 아래 글은 작년 제 모교 동창회보에 올렸던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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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형!
수년간이나 같은 교문을 드나든 인연으로 이렇게 글월을 올립니다. 제 아들도 제고동문(44회 졸업)입니다.
아마도 형이 제 글을 읽을 때쯤이면 가을 단풍도 절정을 이루고 있겠지요.
직장 관계로 남부지역에 살게 된 동문들이 계시지만 거주를 위해 내려온 동문은 흔하지 않다는 한 가지 이유로
?동창회보 편집위원께 발탁(?)된 모양입니다.
05:30
츄리닝 바지에 등산용 윗도리,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밑창이 거의 닳아버린 마라톤화
(20분도 뛰지 못하고 무릎에 통증이 오던 관계로 마라톤은 포기하고 거의 걷기에만 신겨지는)가 몸에 걸친 전부입니다.
첫발을 딛으며 “이 땅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막아 주시옵고,
오늘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게 하옵시며,
어제를 돌이켜보며 미래를 앞당겨 사는 오늘을 지혜와 명철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어둠 속에서 산들은 웅크리고 앉아 새벽미명을 맞고 있습니다.
빛들이 첩첩한 산들 저 너머에서 오고 있는 듯 능선을 따라 어슴푸레 빛이 길들고 있습니다.
도시생활을 접고 본격적으로 시골생활을 접어들었을 때 제일 처음 찾은 것이 어둠이었습니다.
겨울에 접어들기 무섭게 오후 3시면 산그늘이 지기시작, 곧이어 발끝도 구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주변을 에워싸고,
난청지역이라 텔레비전도 안나오고 그냥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는데
밤 10시는 되었겠다 싶어 시계를 보니 7시도 안되었기에 집사람과 둘이서 실소를 머금은 적이 있었지요.
지난 밤 머리 위로 길다란 꼬리를 흔든 채 사라지는 별똥별하나,
저 별은 결국 하늘 어디에선가 산산이 부서져버리겠지만, 내 눈과 가슴 속으로 떨어진 별은 아주 오래도록 빛날 것임을 믿습니다.
‘차량진입금지/ 눈 올 때 돌아가세요/ 함양군수’ 대형 입간판이 제가 오늘 걸을 왕복 10Km의 시작점이기도합니다.
1023번 지방도로 지리산 가는 길이며, 전라도 광양, 경남 하동 지역의 소금과 해산물을 운송하는 중요한 운송로였답니다.
나는 빈손으로 그 옛날 보부상 되어 훠이훠이 아스파트 길을 홀로 걷습니다.
밤 산에서 들리던 예초기 소리가 들리지 않아 오랜 만에 조용합니다.
밤을 줍기 위해 밤나무 밑의 잡초를 베어내는 연중행사 기간이거든요. 벌초도 아울러...
지난주에는 추석을 앞두고 곳곳에서 벌초하는 소리가 대단했습니다.
가드레일에 걸쳐져 비닐을 덮어 쓴 참깨가 열을 지어 세워져 있고,
밤이슬을 피하려고 태양초 고추들도 검은 차광막에 돌돌 말려있습니다.
참깨를 베어낸 자리에는 비닐 멀칭을 하고 배추 어린 모종들을 이식해 두었는데
심각한 여름 가뭄으로 성장하지도 못하고 잎들이 타들어갑니다.
요행이 집 가까이나 근처에 흐르는 물이 있어 주전자로라도 물을 주는 곳은 벌써 한 뼘 이상 자라났지만
그렇지 못한 곳은 다시 어린 모종을 다시 심어야할 판입니다.
05:47
겨울이면 눈 때문에 올라오지 못하는 급경사의 꼬부랑길 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건설교통부’라는 글이 새겨진 동판이 1m 자연석에 붙어있습니다.
함양을 알리는 포스터에 자주 등장하는 길이기도 하더군요.
지금부터는 완만한 길이 이어집니다.
얼마 전에 이삭이 패는 것 같더니만 이른 품종인지 누렇게 고개 숙인 벼도 계단식 논 사이에 보입니다.
일찍논을 둘러보러 나온 농부의 손에는 회사원이 볼펜 챙기듯 낫이 들려있습니다.
논두렁의 풀도 베고 잎도 따고 나뭇가지도 치고 수수도 베고...
가로수로는 배롱나무가 심겨져있습니다.
남쪽에 내려와서 자주 보게 되는 나무인데 백일 동안 빨간 꽃이 핀다고 해서 백일홍이라고도 불립니다.
지금은 키가 2m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10m 넘는 나무도 본적이 있는데 참으로 우람하고 보기 좋더군요.
06:13
오른쪽으로 흐르는 계곡물 옆에 주막이 보입니다.
‘여보게! 살다가 힘들면 쉬어가게...’ 빛바랜 현수막 글과 피죽을 올린 지붕이 그럴듯해 보입니다.
변강쇠와 옹녀의 무덤도 만들어 놓고 오가는 행락객을 부르고 있습니다. 性은 모두가 흥미를 느낍니다.
제가 토종벌을 키우며 보니 살림 날 때가 되면 벌통마다 3,000마리 이상의 숫벌이 태어나는데
이들은 꿀을 모으는 일도 하지 않고 가장 좋은 꿀만 먹으며 태어나는 한 마리의 여왕벌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중에 몇 마리만 교미한 후 죽고 나머지는 한달 안에 일벌들에게 다 쫓겨나 굶어죽더군요. 변강쇠 벌만 교미하는 것이겠지요.
06:24
나뭇잎들은 팔랑이고 숲은 출렁이고 있습니다.
그저 부는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출렁이는 나뭇잎의 수런거리는 이야기를 들을 뿐입니다.
소나무 뾰족한 잎 사이로 늦여름과 초가을의 경계에서 불어오는 야릇한 바람 냄새.
경사로 15%라는 교통 표지판이 있는 곳입니다.
길섶에 있던 까투리 두 마리가 발소리에 놀라 날아갑니다.
저도 놀랍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기도 전에 또 두 마리의 까투리가 괴성을 지르며 날아가는 바람에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미안하다. 예들아. 놀라게 해서... 그렇다고 나를 놀라게 하다니... 헐” 놀라게 할 의도가 없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교회 봉고차가 급경사 길을 힘들게 올라갑니다. 2주 동안 이 길을 걷고 있는데 교회 차는 처음 봅니다.
도시에서는 흔하게 보던 차량을 이곳에서는 보기가 흔치 않습니다.
아시겠지만 제가 목사여서인지 이른 이 시간 무슨 바쁜 일이 있을까 걱정도 해봅니다.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감리교신학대학을 들어갔고,
기혼전도사를 원하던 교회의 요구에 응하느라 군제대후 결혼하고 목회를 시작했었지요.
종교교회 교육전도사, 부천 성연교회 개척, 포천 가산교회 담임목사, 인천은혜교회 부담임목사,
시화은혜교회 개척, 추풍령 단해교회 담임목사 모두 합해보니 23년간의 목회를 했습니다.
급경사 길을 오르는 것처럼 오르기만 했던 시간들...
하나님 기뻐하시는 목회를 하기보다는 사람을 기쁘게 했던 목회,
진정으로 한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지 못하는 아픔에 통곡하던 순간들...
월급쟁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
서서히 몸과 마음이 탈진해 가던 순간... 은퇴한 후 산골로 가기로 했던 계획을 몇 년 앞당기기로 하고 지리산으로 들어왔습니다.
설악산 쪽은 겨울에 너무 추울 것 같아서 따뜻한 남쪽을 선택했고...
바다보다는 산이 먹을 것이 풍부하리라 단순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허름한 빈집을 구해서 3년을 살았고 이제 산골에서도 살만하다고 여겼기에
경매를 통해 함양의 집을 구입하고 올 1월에 이사해서 살고 있습니다.
내 집이 없어서 나무 하나 심지 못했는데 이제부터는 집을 가꿀 여유가 생겼습니다.
취미로 토종벌을 기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돌 보아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서 사는 걱정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06:38
悟道嶺(해발 773m) 정상 도착.
정상주변에 78개의 장승과 23개의 솟대 도합 101개의 상징이 나그네를 반가이 맞습니다.
흐르는 땀을 너른 주차장의 수돗가에서 씻고 웅장한 지리산제1문 문루로 올라갑니다.
운무로 가리워 보이진 않지만 백두대간이 시작되는 천왕봉에서 반야봉까지 27Km 지리대간을 이곳 오도재에서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소백산맥 최남단에 솟아있는 산인 智異山(方丈山, 頭流山), 높이 1915m, 동서길이 50Km, 남북길이 32Km, 둘레 320Km,
행정구역상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군, 경남 산청군ㆍ함양군ㆍ하동군 등 3개도 5개 군에 걸쳐있습니다.
J형!
여행가이자 의사인 임현담씨가 시킴 트레킹을 다녀와 쓴 글의 한 부분에서...
‘모든 풍경은 일생에 단 한번이다.’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순간이 아니면 다시는 기약이 없습니다.
설령 같은 길을 수십 번 수백 번 오르내리더라도,
오늘 만나는 길은 내년과 다르고, 내년에 만날 길은 분명 오늘 걸었던 모습과 같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약속과 부질없는 희망으로 오늘을 허비하며 기약 없이 보내고 있지는 않으시는지요?
정상에 여러 詩를 자연석에 새겨 놓았는데 청매선사라는 분이 남긴 漢詩의 번역시를 적어 왔습니다.
十二覺時
깨달음은 깨닫는 것도/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니
깨달은 자체가 깨달음 없어/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네
깨달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니/
어찌 홀로 참깨달음이라 이름하리요
06:50 출발
turning point 누군가에게 반드시 오는 전환점일텐데 아마도 지금의 제가 있는 곳이겠지요.
올라올 때는 별로 의식하지 못했는데 내려가며 보니 내리막의 경사가 더 급하게 느껴집니다.
올 봄부터 유난히 무덥더니 가을의 초입인데도 낮에는 연일 30도를 웃돌고 있습니다.
해 나기 전에 밭일이나 잡초 제거, 벌통 돌보기 등 잡일을 하고 낮에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으로 독서를 하고 있습니다.
집사람과 같이 빌릴 수 있는 분량이 두 주에 8권이니 몇 달 동안 열심히 모든 장르를 망라하여 읽고 있습니다.
심심하고 고독할 틈이 없습니다.
제가 살아오며 모았던 자료와 신학관련 서적(2,500권정도)은 마지막 교회에 모두 기증하고 떠나왔습니다.
지금 제 책꽂이에는 성경과 성서사전, 성구대사전뿐이었는데 3년간 몇 권의 책이 늘긴했습니다.
책 읽는 욕심도 벗어나고 싶은데 잘 지켜지지 않는 결심 중의 하나입니다.
50여 마리의 까마귀가 정상부근의 나무와 500m 길 가의 전선에 앉아 있다가 제 주위를 맴돕니다.
며칠 전만해도 20여 마리였고 먼저 도망가더니 며칠 새 50마리로 늘었고
내가 가까이 가면 대여섯 마리가 내 머리 위로 낮게 날아오더니 10여m 앞의 전선에 앉기를 반복합니다.
위협하는 것 같기도 한데 아직은 쪼이지는 않았습니다.
대담하게 점점 머리 위 가까이 날아오는데... 소름이 오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새까맣더군요.
세계적으로는 길조라던데 친근감은 못 느끼겠네요.
07:10
주막 앞을 지나 한 5분간 걸어 저 앞의 고개를 돌면 산그늘이 없어지고 햇살이 내려 쪼이기 시작합니다.
내려가는 길에 만나는 아침 햇살처럼 남은 인생 동안 좋은 일들이 계속되어지기를 기원해봅니다.
올라 올 때 용케 개들에게 들키지 않고 잘 지나왔는데 소리 없이 돌고는 있지만
컹컹 흰 개의 충성스런 울음이 산골을 울립니다.
이제 저 아래 집의 개도 알아버렸으니 조용히 지나가기는 애시당초 틀린 모양입니다.
“그래. 안다. 이놈아! 그만 좀해라” 괜스레 임무에 충실한 개에게 한마디 합니다.
07:31
아름다운 길 안내석 부근에 길을 관람할 수 있는 조그만 정자로 들어가 팔굽혀펴기를 시작합니다.
땅에 손바닥을 짚고 코가 땅에 닿도록 굽혀 속으로 둘까지 센 후 팔을 펴기를 반복 15개로 시작하여
매일 하나씩 늘려 오늘은 30개를 도전했는데 겨우겨우 해냈습니다.
평소 팔 쓰는 일을 하지 않았기에 팔 힘을 더 늘려야겠습니다.
07:45
마을 입구에 이르니 동네 노인들 몇 분이 장에 간다며 모여계십니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함양 5일장이 열리는 날이군요. 같이 모이신 것을 보니 나가는 차가 있나봅니다.
아니면 5분 걸어서 버스가 다니는 길까지 가셨을테니까요.
동네 노인분들을 디카에 담습니다. 어느 정도의 분량이 되면 동네 앨범을 만들어 드릴 예정입니다.
07;50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고구마 밭에서 잎을 따 먹고 밤새 휴식을 취하고 있던 고라니가 인기척에 놀라 도망갑니다.
한참 안 보였는데 이곳이 그리워 다시 왔었나봅니다.
지난 겨울 결혼한 딸이 추석선물로 배를 보냈다고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문득 딸이 그리워집니다.
부모님이 그리워져야하는데...그래서 내리 사랑이라고 하나봅니다. 이번 추석에는 경기도에 사시는 부모님을 뵈러 가려고합니다.
J형!
글이 길어졌습니다.
다음 소식은 인터넷 http://power.jegonet.com 총동문사랑방이나 19회 동기게시판에 올리겠습니다.
곧 환절기인데 건강 유념하시고 하시는 모든 일마다 형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럼 이만 총총....
2008년 9월 7일
제고 19회 김춘식 드림
춘시기 님
장문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하고요.
지리산 자락에 둥지를 트신 님의 자연친화적인 생활이 그려 집니다.
저도 훗날 고향땅에 정착해서 유유자적하며 살고 싶어요.
토종벌 키우고 속노란 고구마 심으면서......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장미동산에 오셨으니 이곳 마님들과 친하게 지내시길.....
목사님이시니 가끔씩 복음 말씀도 전해 주시고요.
자주 뵈요.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