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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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값에 팔아 넘긴 돈의 일부를 겨우 타내어 여름방학 때 설악산을 가기로 하였다. 어머니는 형의 돈 씀씀이가 미덥지 않으신지 내 팬티 속에 비상금 오천원을 실로 꿰어 주며 형에게 절대 말하지 말고 비상시에만 꺼내 쓰라고 신신당부 하셨다. 형과 서울로 올라와 사진관에서 카메라도 빌리고 코펠 버너와 텐트를 챙기니 배낭이 차고 넘쳤다. 마장동에서 속초까지 가는 버스는 장장 열 시간을 넘게 걸려 도착하여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설악산에 도착하니 주위는 온통 깜깜하였다. 랜턴을 비춰가며 야영지를 찾아 가는데 경상도 특유의 사투리로 한남자가 “보소!보소! 와 남의 얼굴에 비치고 그러는 겨”하며 시비를 거니 참 난감하였다. 적당히 달래고 설악동 매점근처에 텐트를 치고 밥을 짓자 시간은 벌써 오후 열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석유버너도 난생 처음 사용하는 관계로 처음부터 펌프질을 많이 하여 불을 피우니 시커먼 연기만 나고 밥은 설고 첫날부터 일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날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카우보이 복장의 형은 등산을 와서도 설악동 세탁소에 들러 와이셔츠에 주름을 잡고 가죽조끼를 받혀 입고서는 한껏 멋을 부렸다. ![]() 그러나 나는 교련복에 헐렁한 모자를 씌우니 폼도 안 나고 며칠을 그런 식으로 보내니 얼굴은 까맣게 타고 점점 거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사이 형은 친척집 매점에 내려와 아르바이트를 하는 숙대 화학과에 다니는 여대생을 사귀기 시작하면서 난 안중에도 없었다. 더운 여름날 혼자 텐트를 지켜가며 사랑에 빠진 형을 기다리자니 한심한 생각도 들고 집 생각도 나고 눈물이 났다. 용돈은 다 떨어져 가는데 형은 신이 나있다. 늘 나를 남겨두고 다닐 생각에 대청봉은 너무 힘들고 토왕성 폭포는 미끄러워서 안 된다고 텐트만을 지키라니 이게 무슨 여름 휴가이고 등산인가? 몇 알 되지않는 김치는 쉬어 꼬부라지고 밥에다 통조림 식사는 식상한지 오래고 불편한 잠자리에 몸과 마음은 지쳐가고 있었다. 가본 곳이라고는 비룡폭포와 비선대 뿐이니 나의 불만은 커지기 시작했다. 다른 대학생형들을 따라 등산에 나섰다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뻔했다.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등반을 하다가 정말 큰일 날뻔하였다. 돌아와보니 형은 보이지 않고 돈이 떨어져도 집에 갈 생각은 않고 모든 것이 다 문제의 여대생 때문이라 생각하니 형도 그 여자도 모두가 싫어졌다. 드디어 나타난 형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얼마나 좋으랴 예쁜 여대생을 만났으니 동생이 굶든 떨어져 죽든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낙산 해수욕장을 거쳐 강릉에 도착하니 수중에 돈은 한 사람만 간신히 서울 갈 차비와 서울시내버스 갈아탈 돈뿐이라며 나 먼저 집에 가서 설악동 우체국으로 돈을 부치라는 것이다. 아니면 빌려온 카메라를 전당포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어머니와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내 팬티 속에 비상금 오천원이 있다고 하니까 형은 반색을 하며 우선 더우니 그 돈으로 수박을 사먹자고 하였다. 형의 고집불통에 밀려 정말 큰 수박을 사서 둘이 먹으니 배가 터지게 불렀다. 대책도 없고 즉흥적인 형의 제안에 속수무책 따라 갈수 밖에 없었다. 경포대 해수욕장에 텐트를 치고 자려는데 낮에 먹은 수박 때문인지 아니면 비상금을 다 써버린 걱정 때문인지 배가 아프기 시작 하면서 설사가 났다 . 형도 마찬가지로 멀리 떨어져 있는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잠을 못 이뤘다.. 나중에 귀찮아서 텐트 안에 모래를 파고 거기에다 큰일을 치루고 덮으니 그날 밤은 화장실에서 잠을 잔 거나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형과 헤어져서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를 타니 왜 그리 서글프고 집에 돌아가면 이 일을 어떻게 어머니에게 설명하며 그 뒤에 혼날 생각을 하니 하루종일 우울하였다. 차 안에는 남편과 함께 서울 청량리 정신병원으로 가는 아주머니와 뒷좌석에 동승하게 되었는데 말끝마다 외치기를 “피는 물보다 진하다!”하며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드니 정말 내가 미칠 지경이었다. 이 소리를 형이 들어야 하는데 말이다. 피를 나눈 형제임에도 사랑에 눈이 멀어 동생을 홀로 떠나보내는 형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버스가 휴게소에 들렀을 때 남편이 화장실을 다녀와야 한다며 그 아주머니의 손목을 꼭 붙들고 있으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난 무서웠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내가 손목을 잡으니 그 시끄럽던 아주머니가 순한 양이 되어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나의 처치가 자기와 비슷하다고 측은하게 여겼는지 아니면 낯선 학생이 손목을 잡아서 그랬는지 그 아주머니 정신이 오락 가락 하니 물어 볼 수도 없었다. 형이 하숙 하던 친척집에서 강화에 내려가는 차비를 빌려 집에 오니 어머니 벌써부터 형에게 할 욕을 나에게 다 퍼붓고 단지 형을 따라 나선 것이 죄인이 되어 며칠을 어머니 잔소리 속에 보내게 되었다. 아 악몽의 여름휴가 내 다시는 가나 봐라 하며 굳게 다짐을 했건만 그래도 8월이 오면 오래전 여름날의 쓰라린 추억이 떠올라 쓴 웃음을 짓게 한다. |
글 먼저 다 읽고 다시 창 하나 더 띄운 다음에
다른 일 하면서 한 번 더 들었죠.
역시 이번에도 읽어주는 사람이 글의 맛을 다 못 살려내네요.
그만큼 글이 재미있고 실감났어요.
평생 착한 동생과 꾸러기 형으로 살으신 거죠?
그 때야 싸우면 동생이 꼼짝 못했겠지만 지금은 누가 이기나요?
이러다가 윤용범님의 항의가 들어오겠어요.ㅋ
말은 이렇게 했어도 두 분은
인일에 함께 오신 '의좋은 형제'로 오래 기억될 분이셔요.
영원한 소녀 김영주 선배님,
세련된 사회, 매끄러운 말솜씨와 톤이
귓전에 아직도 맴돕니다.
형님의 항의요? ㅎㅎㅎ
형님은 당시의 제 고통과 무료함을 생각하면
악질형님으로 전국에 소개되도 좋아요. ㅎㅎ
글쎄 당시 어머님이 주신 비상금 오천원은
아주 큰 돈 이거든요.
그리고 큰 수박을 사고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충분한 여분의 돈인데도 그 문제의 여대생을
만나려 삥쳐 갔어요.
나중에 빌려온 카메라까지 전당포에 맡기니..
또 그 카메라 찾으러 어머니께 또 돈을 타 내려가고..
아주 등골을 뺏지요. 어머니의.. ㅎㅎㅎ
지금이라도 청문회를 해야해요. ㅎㅎㅎㅎㅎ
그래도 문제의 여대생이 형님의 생명을
구해준 것 같아요.
그 때 그녀를 만나려 비상금도 챙겨
동생을 강릉에서 먼저 보내고 다시
만나러 가는 바람에 해병대 지원을
못했거든요.
만약 그 해병기수에 나갔다면 당시
그 기수들이 훈련도중 배가 전복되는 큰 사고로
상당수가 아까운 젊은 목숨을 바다에
던지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지요.
전화위복으로 형이 살아있어 이번에 동행하는
즐거움이 있었지요.
상품도 준다니 언제 날 선선해지면
도선배님과 김선배님을 모시고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군요.
행복하세요.
그래요.
그런 젊은 날이 있었어요.
지금과 같은 여름 휴가철이었지요.
어제 일인양 기억이 새롭습니다.
제가 정말 철부지 였어요.
어머니가 그 비상금 다 쓰고 오라는 것이 아니었는데........
글구 방송에 나왔으니 이번에도 냄비 건 주전자 세트건 상품 타시겠네요.
상품타시면 여기 항상 성의를 보여 주시는 산하기님하고 영주 선생님한테 뭐 좀 국물이라도 나눠 드리세요.
택배로 보내 드리세요.
활기찬 하루 되시길.........
저도 무척 궁금하답니다.
시집갈때도 가지고 가서 간직한다고 약속은 했지만......
자수정 돌맹이가 지금 빛을 발하는지, 아닌지......
버렸을 수도 있겠지요.
과거사 정리 차원에서.....ㅋㅋ ㅎㅎㅎ
그것이 현명할 수도 있을 테고.......
그렇지 않아도 누가 숙대 총동창회 홈피를 뒤져서 설악산의 여대생을 찾아 준다고 하데요.
싫다고 필요없다고 했어요.
그냥 추억속의 흑기사의 이미지 그대로 남고 싶다고 그랬어요.
아름다운 추억만으로 기억하고 싶어요.
근대 왜 제가 이곳에서 지난 날 떠나 보낸 사람 이야기를 하지요?
더위먹은 것도 아니고......ㅋㅋ ㅎㅎㅎ
더구나 크리스마스날 일기장을 전해 준 소녀가 듣고 계신지도 모르는데.....
뭐 3개씩 올라왔다고 나무랄분 없응게
무궁 무진한 야그 보따라 계속 풀어 놓으시겨
야그가 들을만하니 방송을 타 일약 스타가 되겠군유
바지춤에 비상금을 꿰메 주시던 어머님으 극진한 그 사랑에
눈물이 나는군유 지난해는 하우스를 그 손으로 차리셨던데
올해는 기역이 어떠하신지유
당신 아드님들이 놈에 동래에 와서 재롱떠는 그런 소식을 전하면
알아 드실런지유 안부를 전합니다 총총
시애틀의 멋진 누님,
인주옥에서 첫 만남이 설레였고
아름다웠지요.
어머니의 사랑은 극진하셨어요.
단시 오천원이면 큰 돈인데 그 돈을 다 쓰라는 것이
아니라 아주 급할 때만 꺼내 쓰라는 것을
형은 여대생을 다시 만나려 그 돈을 횡령했지요. ㅎㅎ
어머니는 장애등급을 받기위해 누님이
노력하는데 자존심이 강하신지
사회 복지사나 건강보험공단의 요원이 나와
심사할 때면 펄펄 나시어 번번이 탈락하시지요.
어쩌면 그게 누나의 보살핌으로 더 진행되지 않아
다행일 수도 있어요.
뭘 물어 보고, 또 일어나 걸어 보라시면 "내가 이까진 걸 왜 못해요?"
더 씽씽거리시니 누나는 참 어이없어 한답니다. ㅎㅎㅎ
당연 요원들에 의해 "이유없음"으로 판명나지요.
누님의 안부에 어머니가 더욱 건강해지시리라
믿습니다.
고마우신 내 누님...
여산형제!
이렇게 말하니 나도 크리스찬 같으네. ㅎㅎㅎ.
자게판에 1개 이상을 올리지 않으려 과거 난 댓글란에
어떤 주제가 떠오르면 답글이 아닌 그저 내 글을 써붙였지요.
그런데 그런 글은 나 자신도 지금 찾아보기 힘들더군요.
한 개 이상이면 어떻습니까? 이번엔 빛 바랜 흑백사진이 한두 장 더 붙었군요.
참 두분 형제들, 든든한 인일의 파수병입니다.
실제 만나고 나니 인상이 좋아 더 친근감도 가고요.
옛날에 읽은 이야기 같은데 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전국적으로 형님을 악명 높게 만들어서 어쩐다지요?
그래도 지금은 자성의 빛이 보이니 다행이지만...
동생으로 난 사람은 속상한 일이지요? 나도 두째 딸이니 그 설움 조금 알지요.
그래도 지금엔 두분이 사이 좋게 지내시는 것같아 요.
공연히 너무 설치네 걱정하지마시고 자주 좋은 글들 올려 주시기바랍니다.
답글 다는 것이 다들 조금 시들해 졌지만 글은 읽고 감사할것입니다.
일찍 외출하지 않을 때는
부엌에서 즐겨듣는 여성시대 시간에 직접 들었어요.
마치 윤약사를 만나 듯 반갑더군요.
항상 형님땜시
골탕먹는 아우를 생각하면서 웃었어요.
꼴밤이라도 날려야하는 건 아닐까?
꼴밤으로 될까?강펀칠 날려야 하는감???
윤용혁님
그래도 이용가치가 있다싶어 그 곳 설악산까지 데리고 간 형의 속셈을 그 때는 모르셨겠지요?
순진한 용혁님만 악몽이 된 여름휴가를
지금은 "미안하다" 사죄를 했겠지요?
형님이 말입니다.
이번 여름휴가는 그런 일 당하지 마시고 즐겁게 보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