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프라하로부터 뮨헨행 차창을 통해 본 해바라기 무리~~~
올해는 내가 유럽에 온지 20년이 되는 해다.
소녀때, 문학이라는 향기에 취해서 몽롱하던 시절 만났던 문인이 전혜린이었다.
그녀의 에세이를 보면서 상상하던 뮨헨을 20년전 처음으로 찾았을때
감격보다는 어느면으로는 실망을 느꼈었다.
1950년대 그녀가 보았던 독일과 30여년이 지난 내눈에 비친 것에는 차이가 있을수 밖에...
그러나,
그후 간간히 뮨헨을 들르면서 점점 그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었다.
금년에는 5월과 7월 두번 뮨헨을 방문했다.
다녀온 며칠후, 오늘 책꽂이 정리를 하다 오래된 나의 일기장을 들쳐 보면서 다시금 옛날을 돌아보게되었다.
1990,2,5
나를 아끼는 ㅁㅁ가 이제는 아름다움 자체를 내가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했었다.
오늘 이 작은 notebook을 서점에서 본 순간 그 말이 떠올랐다.( 주: 그날 8절지 크기로 두꺼운 덮개의 예쁜 공책을 샀섰음)
아름다움의 본질이란 과연 어떠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느낌으로 알 수있다.
나의 인생이 어느점까지 이어질까?
지나간 날의 추억을 생각하며 현재에 가장 족하게 살아가려한다.
.......중략.......
오늘 나에게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가장 평범하다고 생각하던 글귀가 크게 작용했으며 감동시켰다
Wo ein Wille ist, ist auch ein Weg.
아침에 일어나자 절망감과 고독감과 허무감 속에서 나를 추스려야만 했다.
그러나 계속적인 노력으로 감정을 누르며 오후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작은것을 구하고 나의 마음이 평안해졌다.
무엇인가 이제부터는 정리도 하고 보배스러움을 간직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전혜린의 글...
격정적으로 사는 것, 지치도록 일하고 노력하고 열기있게 생활하고 많이 사랑하고 아뭏든 뜨겁게 사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도 끔찍한 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나는 더 생을 사랑한다. 집착한다.
여자는 체계화된 생, 또는 이성적인 생활을 하고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남에게 보여서 부끄러운 사랑은 마약 밀매상적인 요소가 있다.
대낮을 견딜수 있는 사랑이어야 한다
"또 가을이 오고"에서 인용
1990,2,14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지켜보기 보다는 차라리 내 자신이 그 고통을, 괴로움을 치르는 것이 더 쉬울(?) 것 같다.
ㅁㅁ(주: 어린딸애)의 아픔이 내 마음을 뚫고 들어왔다.
비오는 거리에서 병원을 찾아 헤메었다.
허기지고 얼굴에 병색이 짙어짐을 느끼며 난 두려워 졌다.
........중략......
오늘밤 그녀( 주: 전혜린)의 글귀에서 너무 허망함을 느낀다.
그리고 몇년 전에 책 모퉁이에 적어 놓았던 나의 글들을 보면서 반갑기도 하고 얼마쯤은 아연해지기도 했다.
---드문 드문 적어 논 나의 글귀들--
- 괴롭다는 것
- 혼자되고 싶다는 것
- 신적인 생활에 있어서는 어떠한 상태일까?
인간은 죽음을 인식하며 살아야 하는가
산다는 자체가 나의 의지가 아닌데도....
삶의 의미를 묻기전에 나는 이렇게 삶을 영유하는 데도 불구하고....
쓰고 싶은 욕망과 쓰고자 하는 노력과 나타난 표현은 삼위 일체여야 한다.
그녀의 (64년의 생활) 갈등과 절망과 고독은 너무도 처절한 절규였다.
차라리 독백이었으리라.
이렇게 작은 공책을 장만한날 부터 간간히 일기 형태로
처음에는 자주, 점점 써가는 일자간격이 벌어지면서
2005년 4월까지 쓰여진 나의 글들을 읽으면서
현재의 내가, 오랫만에 만난 친구같은 나를
전혜린과 더불어 만났었다.
김옥인 후배, 아직도 여행 중인가요?
젊은 날 누구나 한 번쯤은 전혜린에게 매료되었던 거 같아요.
그녀의 글을 탐독하던 때는 내 삶이 이렇게 펼쳐질 것을 아직 모르고
많이 설레던 황금 같은 시절이었지요.
이제는 기억하고 싶었던 문장들도 다 잊고....
열정으로 사는 삶이면 다 아름다워요.
김옥인 후배도 그렇지요?
감정에 충실하고 일에 충실하고 문학에 음악에 미술에......
내가 갖지 못하는 스타일의 삶이라 더 관심이 간답니다.
좋은 글, 아름다운 사진들을 계속 기다릴게요.
"현재의 내가, 오랫만에 만난 친구같은 나를...... "
가끔 그럴 때가 있지요.
.........................
브라운톤으로 모양을 낸 뮌헨거리를 거닐면서
나는 새삼 겉멋의 소중 함을 절실히 느낀다.
생전의 전혜린이 영국공원 산책 후 자주 왔대서 유명해진 화일리찌쉬 (Feilitzsch Straβe 32번지)
길모퉁이의 카페 제에로제(SEEROSE).
주인인 스페인 남자는 휴가중이었고
속눈썹이 긴 종업원 청년만이 빈 카페를 지키고 있다.
특별히 눈길을 끌 만한 미술작품이나 장식도 없는 작고 어둑신한 카페다.
전혜린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가끔씩 한국인들이 찾아와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서 수줍게 고개를 젓는다.
이제부터 저 창 가 어디쯤에
한국의 문인 전혜린이 앉았던 자리라는 명패를 붙이라고 하 자
정말 그래야겠단다.
이 카페를 찾아 비행기로 수만리 밖에서 날아왔 다고 하자 놀란다.
서울에는 그녀가 다닌 이런 카페가 남아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없다, 서울에는. 바로 엊그제 죽은 예술가의 흔적도 서울에선 찾기 어렵다.
가고 남은 예술가의 뒷자리는 한결같이 쓸쓸할 뿐이다,
라고 나는 속으로만 말했다.
......................김병종 서울미대 교수의<화첩기행> 중에서.
영국공원( Englischer Garten)에서의 산책은 어느 계절을 막론하고 흥미롭다.
완만한 산책로를 걷다가 잔디에 앉아서 쉬기도하고
중국탑이라고 일컬어 지는 곳에 가면 언제나 뮨헨전통 맥주를 마시는 시민들을 만나게 된다.
점점 날씨가 더워지면 젊은이들이 일광욕을 냇가에서 하는데
나처럼 옷을 걸치고 지나치려면 그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한다.
지난번에는 시간도 아낄겸 영국공원 중간 부터 오디온 광장까지
자전거 뒤에 2인용 좌석이 붙어 있는 요렇게 생긴 것을 혼자 넓게 차지타고 편하게 돌아 나왔다.
전혜린이 나를 보았다면 기절 초풍했을까?....
"나처럼 옷을 걸치고 지나치려면"
을 읽으면서 혼자 웃습니다.
미국사람, 유럽사랍들은 햇볕만 보면 무섭게 옷을
벗어 던지지요?
지난달에 보스톤에서 캠브리지동네를 돌아다니다 풀밭이 조금 달린
우체국 앞에 그 곳도 퍼블릭이라고 옷 벗고 누워 책보는 사람들 보면서
실소룰 금치 못했지요.
저 넓은 잔디를 보면 얼마나 부러워 할까? 그 이유없이 콧대 높은 캠브리지 사람들.
카페 제에로오제( Cafe Seerose)
이곳은 뮨헨의 슈바빙지구 대학교와 영국공원 가까운 곳에 있는곳이다.
여기 저기 산책후,
추운날에는 따뜻한 커피나 차를
더운 여름철에는 맥주나 와인에 소다수 섞인것을 마시면서 느긋이 생각에 젖어본다
와이샤쓰 단추를 푼 분위기
뮨헨 사람을 특징지어 주는 편견없는 정신과 저 유명한
"정다움"이 가장 악센트 있는 도시로 만들었다.
.......중략.............
내가 살았던 집 가까이에 제에로오제라는 음식점이 있었다.
이 집은 수백년래의 전통을 완강하게 지키는 주인 몰라아씨의 힘으로,
슈바빙을 점점 균등화시키고 있는 기계문명과 미국 양식의 침투에서 완전히 보호되어 있다.
즉 이 집에서는 방 한 가운데 놓인 거대한 쇠난로에서 석탄을 때서 난방을 하고,
주인 물라아씨가 손수 소와 돼지를 잡고,
또 그 고기를 물라아 부인이 손수 요리하고 있는 부엌도 그 이상 불편할 수 없게 불편한 구식이고
전기나 가스로가 아니라 석탄불로 요리한다.
..........중략
물라아씨는 사십세 가량 된 키가 크고 뚱뚱한, 언제나 유쾌하게 보이는 사람으로서
특히 호주머니 가벼운 단골들 사이에 인기가 있다.
새벽에 길 소제를 하고난 청소부 할아버지들,
또는 석탄을 배달하는 검둥이 같이 검정이 묻은 석탄 배달부들,
또는 뮨헨에 언제나 있는 도로 수리와 집 수선,
또는 건축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더러운 작업복을 입은 채 들어와서 앉으면
물라아씨는 벌써 누가 누런 맥주, 누가 검은 맥주, 누가 흰 맥주를 마시는 가를 묻지 않아도 알고
각 사람 앞에 한 잔씩 큰것을 갖다 놓고는 자기도 같은 식탁에 앉아서 ㅁㅁㅁㅁ정부를 비판하는 정담에 열심히 참가한다.
안채의 식탁보를 덮은 자리에 앉아서 신기한 표정으로
주위의 그림과 사진과 칠판에 사인한 수 없이 많은 예술가들의 이름을
두리번 거리고 있는 말끔하게 차린 독일 각지에서 온 나그네들과 외국(대개 ㅁㅁ)
관람객들에게는 그는 무관심하다.
................중략
뮨헨의 주민은 건전하고 상식적인 서민과
약간 악센트 있는 슈바빙가가 적당히 혼합되어 구성되어 있다.
..........................생략..................................
전혜린 수필집중 "뮨헨의 몽마르트르" 에서 발췌.
이 카페가 자리한 전체집은 1898년에 지어졌으며 문화재 보호건물이다.
독일의 노벨 문학수상자 Thomas Mann이 이집에서 1899~1902까지 살면서
?Die Buddenbrocks“를 저술했다.
오래전 부터 뮨헨중심 문학예술가들의 모임이 되었던 이 카페 "제에로오제"에서
1948년 "SEEROSE"라는 각 방면예술 총망라한 협회가 결성되었다.
이 모임의 지도적 역할을 맡었던 시인이자 희극배우였던
Peter Paul Althaus이 이 카페"SEEROSE"를
"슈바빙의 제2의 탄생지"라고 당시에 표명했었다.
그러나 21세기 현재, 전혜린의 글을 읽고 찾아온 방문자는
글속에 표현된 부분을 오로지 벽면에 붙여있는 흑백사진으로만 느낄 수 있다.
그것은,1975년 새롭게 보수를 했기 때문이다.
전혜린이 지금 찾아온다면 어떤 느낌일까?
소녀시절,전혜린의 책들에 매료되지 않은 친구들이 없었지요.
지금은 어떤 문구가 씌여졌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아마,치열하게 인생에 대해 생각하고 노력하는
문장이 아름다운 책이었다는 것 뿐이 생각이 안 나네요.
몇번 답글을 쓰다가 얘기가 안 풀어졌던 건,그런 이유에서 였을거예요.
전혜린이 자살을 했다는 것,모방자살을 한 소녀들이 꽤 있었다는 것
전채린이라는 작가가 그녀의 동생이라는 것
민망한 사랑을 했었을 거라는 것
그녀는 책에선 자신의 사랑에 대해선 정확한 묘사가 별로 없었지만
그럴 거라는 건 모두 추측으로 알 수 있었었지요.
추억여행으로 데려가 주시는 선배님
고마워요.
이번 뮨헨여행을 하면서
저의 이국생활 20년을 스스로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었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전혜린글을 읽으며 뮨헨을 동경하던 소녀시절이 저절로 떠올랐지요....
제가 이곳에 처음 왔었을때는 그녀의 글을 읽었던 시절에서 20년 가까히 지났던시기 였으며
제나이는 그녀가 세상 떠났을때 보다 연상이였었지요
같은 독일어권의 나라에 살면서
어렸을적 읽었던 번역 독일문학을 사전찾아가며 원어로 보다보니
그녀의 유학시절이었던 시기의 그녀의 감성과 이성에 동감이 될때가 많더라고요....
저는 그녀가 자살했으리라고 생각 못하겠어요
왜냐하면, 어떻게 그렇게 사랑하던 딸을 두고 떠나겠어요?
저 스스로가 엄마가 되어보니 그것은 참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현상이에요.
요즘 그녀의 죽음에 다른 해석이 많아요
평소에 수면제를 이용해서야 잠을 청할 수있었는데
그날은 평소보다 좀 많이 복용했었으며
그녀의 건강상태가 이겨내지 못하고 영면하게 되었다고요....저는 이 주장을 믿고 싶어요
그녀는 대학강의와 독일문학 번역하느라고
스스로 창작할 시간이나 여유가 없었슴에 언제나 안타까워 했었지요
가끔 저도 통역이나 번역일 하다보면
나 스스로가 일회용 소모품같은 기분이 들때가 있어요.
하물며 그녀는 저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높은 이상으로 창작열이 뜨거웠을텐데
내면의 고통이 컸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다르게 변모해 가지요.
그녀도 살다보면 무뎌지면서 지탱되었었겠지라는 생각들면서 그녀의 죽음이 더 애석해요
그녀를 생각하면
너무 일찌기 서둘러 앞서가다
앞이 안보이는 짙은 안개낀 정상에서 벼랑으로 떠러진 듯한 삶인것 같아요.........
사랑얘기는 개인적 성역안의 것이라
얘기하기가 ...
뒤를 돌이켜 보면 아스라히 남아있는 청춘의 추억이 있죠?
앞으로 20년 후에는 지금 이 시절도 청춘으로 느껴지리라고 믿으면서
순간순간 연속되는 현재에 충실하려고 해요
테이블마다 조금씩 다른 꽃들이 꽂혀 있는것이 재미있네요
은방울꽃도 튜립도 꽃잎 떨군 양귀비도, 마가렛 데이지,
퀸 앤스 레이스.......
마치 주인이 들 판을 걸어 오면서 하나 둘 따다가 꽂아놓은거 처럼.
나는 왜 별안간 전혜린의 어린 딸이 그 어린나이에 "광기'라는 어휘를
사용하여 엄마를 놀래킨 이야기가 수필에 있었던 것 처럼 생각이나네.
맞는 지 아님 섞갈린 건지는 모르겠으나
옥인 후배는 지금 그 딸은 무얼 하고 있는 지 아시나요?
김햬경 선배님, 잘 지내고 계시지요?
전혜린의 딸 정화는 '광기'라는 말을 쓴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정화는 지금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교수로 있다고 합니다.
옥인씨, 궁금한게 있어요.
영국공원에는 지금도 저녁에 가스등을 켜든가요?
그녀의 수필에는 저녁이면 자전거를 탄 할아버지가 가로등 하나하나에
불을 밝히는 장면이 나오죠.
뮨헨 근교에는 닥종이 인형작가 김영희씨도 살고 있구
'뮨헨'은 전혜린으로 하여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고장이기도 합니다.
김병종 교수의 '화첩기행'이 십여년 전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는데
책으로 나온걸 빌려다 보았습니다.
서너권쯤 되더라구요.
기회가 되면 읽어도 좋을, 그런 책입니다.
1)
정화의 주위에는 어른 밖에 없다.그의 말씨나 내용은 너무나 어른답고 연령과 동떨어져 있다.
"조숙한 아이"의 굴레가 정화에게도 씌워지는 것 같다.
어른들이 하는 말은 모두 따라하고 이해력과 예지력이 특출한 아이가 되어 버렸다
....중략......
외국 배우의 얼굴을 보고 곧 이름을 아는 배우가 허다하다.
"호모"니 "광기"니 우리집에서 쓰이는 말은 다 외워두었다가 비슷한 경우에 써 먹는다.
도저히 어른과는 비슷하지도 않은 맑은 눈,투명한 피부,장미빛 입에서 이렇게도 거친 내용의 어휘가
참새 같은 억양으로 흘러 나오는 것을 보면 한심함을 누를 수 없다.
....생략....
자라나는 숲----- 육아일기 중에서
2),3)
봄에 생각한다
길바닥에 뿌려진 그 전날 카니발의 색종이를 바라보던 봄의 슬픔.
뮨헨에서라면 이런 날 나는 공동묘지에 갈 것이다
봄은 나에게는 취기의 계절, 광기의 계절로 느껴진다.
자연과 인간에서부터 어떤 사랑을 취하게 하는 강렬하고 새로운 생기가 발산하여 가만히 있어도 마음이 뜨거워 고조된다.
사육제의 광기와 회색 수요일의 허망과 부활주일의 흰 나르시스꽃에 쌓인 길과
이런 나의 젊은 날의 추억들과 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 뿐 아니라 내가 나의 첫번 출산의 이적을 겪은 것도 삼월이었다.
.....생략....
<1964.사월. 주간성대>에서
김혜경 선배님 그리고 이수인 선배님 ~~
위에 "광기"에 대해서 썼던 몇가지 올렸어요... 참조^^
전혜린 딸에 대해서는 이수인 선배님이 대답을 하셨는데요,고마워요~~
저는 잘 몰라 인터냇을 뒤져 보았었지요.
김영희 닥종이 인형작가의 글은 자녀와 가정과 본인의 활동이 합쳐져 전형적 실화라는 느낌이 강해서 그런지
훨씬 오래전에 읽은 전혜린의 뮨헨 이야기하고는 다른 분위기이지요...
뮨헨 영국공원에 지금은 아쉽게도 가스등이 없어요
50여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에 현대화된 현상이겠지요....
?
저런!
옥인 후배도 나 만큼이나 장난스런 호기심이 있는가 봐요.
그여 가서 책을 뒤져 보았네요.
내 오빠가 대학생이고 내가 고등학생일때 우리는 그저 재미로
"광기" 니 톡씩(toxic :독기?)이니 하는 말들을 아무대나 갖다
부치면서 피식 피식 웃곤 했지요.
그게 전 헤린의 영향인지 아닌지는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당시에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어휘가 아니였을 까하는
추측입니다.
뮨헨은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오빠가 유학가서 몸이 아프게 되어
공부를 끝내지 못한 아픈 기억을 가져다 주는 도시 이기도 하구,
또 오빠가 세 들어 살던 죠이너 할머니의 집 뒷마당에 동동 떠다니는
버터 접시를 ( 냉장고가 없어서) 떠올리게 하는 도시이기도 하지요.
그때에 우리가 쓰던 "광기"는 베토벤이나 고흐에서 보는 한참
쳐다봐야하는 "광기"이거나 꽤 튀어나는 예술적 특출함의 번득임같은.
꽤나 선망적인 끼가 아니였나 해요.
도끼 살인 ..붜 그러거가 아니구. ㅎㅎㅎ
올려주신 예문들을 다시 보니 전헤린이 "광기"를 무척
좋아하긴 했네요.ㅎㅎㅎㅎㅎㅎ
2009년에 살고 있는 나는,
전혜린이 살았었던 전후 1950 대 중후반기의 뮨헨과 현재의 뮨헨을 비교할 수있는데,
그녀가 왜 그 당시에도 있었던 역사적인 건물(예:시청, 주립 극장,돔성당,사람들이 모이는 광장 ,님펜부르그 궁전 그리고 등등)들을
언급하지 안(못)했는가가 궁금하다.
5년동안의 유학생활에 오로지 지식에 대한 "인식욕"에 의해서 책속과 살던 집주위와 학교에만 파 묻혔던가?
그녀가 그곳을 떠나 온후 이루워 진 것(예:올림픽 스타디움,BMW MUSEUM등등) 들을 방문하면서,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변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님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였다.
176회 뮨헨 시월축제
2009년 뮨헨 맥주 Oktoberfest가 9월19일부터 10월 4일 까지 있었다.
570만의 방문객이 650 만잔의 대형 생맥주를 마셨고,8억Euro의 총매상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뮨헨시청앞에서 만난 전통의상을 입고
10월축제기간이 아닐 때도 호객행위하는 총각과 아시스텐트 처녀ㅋㅋ
그런데, 어쩌죠? 맥주를 잘 못마시는데 ㅎㅎㅎ 사진만 찍었지요~뭐 ^^
전혜린글 계속 ~
1958년10월 15일
깊은 가을 ------------ 바람, 비, 그리고 떨어지는 나뭇잎들.......
첫번 석탄을 샀다.따뜻한 속바지와..... 곧 따끈한 군밤을 파는 할아버지의 구루마가 레오폴드가에 보일 것이다.
새빨간 사과가 4파운드에 85페니......중략.... 올해는 실과의 풍년이다.
....중략
일생에 한번,한 개라도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그것을 위해 살아아간다.모래를 씹는 것같은, 또는 폭풍우가 아프게 뼈까지 때리는 것 같은,...
그러나 때로는 은빛 안개에 잠긴 낙엽에 깔린 아침길과 같은, 또는 파란 하늘에 둥둥 분홍 구름이 떠 있는 황혼과도 같은,...이런 여러 개의 수많은 순간들로 구성돼 있는 나의 삶은 결코 쉽지만도, 또는 즐겁지만도 않다.그러나 나는 죽음을 부르게 할 생각은 없다.
싹이 트고 있는 나무의 기둥처럼 나의 몸에는 생의 의지, 아니 단순한 생이 시작되었다.
11월 5일
돈이 떨어지다.
배는 다소 고프지만 나는 즐겁다. 오늘은 가을 하늘이 멋이 있었고, 나의 머리는 니이체와 루우 생각으로 가득 찼으니까...
나의 텅 빈, 넓고 추운 방에서 나는 벌페처럼 들어 박혀서 나의 꿈을 기르고 싶다. 닫힌 창문과 마음 속에 끝없이 펼쳐가는 환상의 세계의 크기와 니이체,루우, 릴케, 튜린, 질스 마리아....
11월 27일
밖에는 휘색 어둠과 함께 눈에 안 보이고 소리도 없이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뮨헨 특유의... 비라기 보다는 젖은 공기가 내린다고 하는 편이 적당할 것 같은....아무것도 눈에 안 보이는 데도 머리카락과 아스팔트가 촉촉하게 골고루 젖는다.
벌써 노란 가스 등이 켜졌다, 거리에는...... 잎이 없는 나무맘 서 있는 빈 마당에서 누가 모닥불을 피우고 있다. 새빨간 불꽃과 하늘 높이 올라가는 보랏빛 연기가 어둠 속에서 무슨 그림같이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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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에 표현된 51년전의 뮨헨의 모습은 아직도 비슷하다.
화폐가 유로화 되어서 화폐단위를 읽으니 향수감을 불러일으킨다.
유학생활시 돈이 떨어졌을 때의 심정을 잘이해한다.
내가 이곳에 처음 왔었을 때는 요즘처럼 인터넷 뱅킹이 안되어
한국에서 송금이 왔는지 직접은행에 가서 문의 한후 아직 안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은행을 나올 때 그직원이 내 뒤통수를 쳐다보는 듯한 기분으로 나왔었다.
일 할수도 없는 처지에 낯선 외국에서 돈이 떨어진 경험은 참으로 절망감속에 떨리게 하는 것이다.
그런 절망감을 이기기 위해서 더욱더 그녀는 인식욕에 파묻혔으리라.
그녀가 묘사한 ...'비라기 보다는 젖은 공기'라는 표현은 어쩌면 그리 적절한 표현인지....
지금은 거의 사라진 가스등불 아래 거닐던 그녀의 낭만과 고독을 상상하는데 충분하다.
1958년 12월 1일 (월요일,눈)
12월과 함께 첫 눈이 왔다.
이제는 정말로 크리스마스 기분이 난다. 눈, 벽난로, 촛불,전나무가지....한 달, 한 해 한 해....늙어간다는 생각도 잊고 겨울이 오면 크리스마스가,설이,그리고는 봄이 기다려지는마음.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이 커다란 덩어리로 내리는 따스한 날에는 왜 그런지 마음이 뛰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아마 롱펠로우( Longfellow)도 그래서 ,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를 썼을 것이다....
(하늘에 무지개를 보면 나의 가슴은 뛰노라!편자 주. 이것은 William Worthwords 의 시를 착각한 모양이다)
무지개나 눈 뿐 아니다. 도대체 자연이란 늘 같으면서도 틀리고 싫증이 나지 않는다. 특히 괴롭거나 고독에 의해서 모든 것을 좀 더 깊이 보게 된 사람,자기를 응시하게 된 사람, 그리고 죽음을 멀리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연이란 별다른 감동과 정다움을 느끼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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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만 오면 기분 좋아지는 나는 지금 이글을 쓰며 눈을 기다려본다.
'도대체 자연이란 늘 같으면서도 틀리고 싫증이 나지 않는다'
라는 표현이 내마음을 그대로 표현한듯 하다.
윗사진은 비엔나에서 두시간여 떨어진 린츠라는 도시에서~~~
다뉴브 강변 건너서 멀리 언덕까지 보이는 설경. 눈온 다음 날씨가 화창한 날.
1965.십이월 . 경향신문
집시처럼
그이름을 듣기만 해도 피를 끓게 하는 도시가 나에게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인이다. 열흘 가량 밖에 있지 않았는데도 비인은 나를 미치게 한다. 비인의 골목을 거니는 기분,호프만스탈,알텐베르그,츠바이크 등이 담론하고 기염을 토하던 다방들, 모짜르트가 빌리이드를 친 카페,베에토벤이 맥주를 마시던 주막집들.
거리의 모퉁이마다 우뚝 서 있는 예술가의 조각들. 브라암스,슈베르트, 모짜르트,베에토벤,괴에테,쉴러,슈트라우스.... 거리의 이름도 그 곳에 살던 예술가의 이름을 따고 있었고 오페라며 브르크 극장이며 음대며...아뭏든 비인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장에 이 도시는 예술 특히 음악을 위한, 예술에 의한, 예술의 도시임을 직감시켜 준다.
.....중략
이맘 때면(세모가 되면) 새삼스럽게 비인, 특히 그 교외의 주막에서 마신 항가리 포도주며, 진짜 집시가 켜던 바이얼린의 피를 끓게 하던 선율이 그리워진다.
나도 집시처럼 정처없이 춤과 노래와 사랑과 점치는 일로써 생활하면서 온 세계를 방랑했으면!
이런 공상이 연말의 여러 가지 의무와 경비로 짓눌리는 부자유한 나의 정신 속에 통기구가 되어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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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을 처음읽었을 때는 여고시절이었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그때 내가 여기 비인에 와서 살게 될줄을 상상도 못했었다.
현재 내가 사는 도시를 전혜린의 느낌으로 적은글을 읽다보니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내가 여행하는 다른 곳에서 감격하며 느끼는 감정의 양상이 잘 묻혀나오기 때문이다.
전혜린이 이글을 썼을 때는 이미 뮨헨유학을 마치고 서울생활하면서
유학시절 10일 정도 머물렀던 비인을 회상하는 글이었다.
나는 지금 다시한번 곰곰히 생각해본다.
언젠가 이도시를 아주 떠나 다른 곳에서 살게 되는 날이 올 것인가?
집시 비슷하게 여행은 자주 하지만 이 도시는 나의 평생움막처럼 정이 들어 버려서 상상이 안된다.
며칠후에 나는 첨으로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머나먼 나라에서 성탄을 맞이 할것이다.
아마도 전혜린이상으로 구석구석을 헤메이고,
어느 훗날 그 곳을 기억하며 성탄절마다 추억의 정겨움을 느끼게 될것이다.
마음이 지금부터 설레인다.
또 한번 집시처럼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본다~~~~~~~~~~!!!
(참조:이글 쓴 이후
2009년 겨울 성탄휴가~ 뉴욕,
2010년겨울 송구영신휴가 ~마드리드에서,,,
2011년 겨울 성탄휴가 암스테르담,,,
집시처럼, 아니 그 보다 더 돌아다니며 물론 전혜린의 이 글이 회상되었슴)
오랫만에 들어온 전혜린추억방에서
벌써 해가 두번 넘어감에 세월의 흐름을 감지한다.
30여년 인생을 살았던 그녀가 남긴 글들이
50년가까히 지난후인 현재에도 여전히 마음에 닿아옴은 왜일까?
그동안 세계는 얼마나 변모하였던가...
그녀가 살았던 독일만하더라도
2차대전후 베를린장벽의 설치와 그후 1989년이후 장벽의 무너짐,
EU 라는 공동체가입..
전혜린이 지금양상을 전혀 예상못하고 지냈던 그 시절이
오늘따라 그리워진다.
장작이 타들어가는 벽난로가 바로 옆에있다면
나도 그녀처럼 세상의 모든 욕심을 버리고 글과 자연속에서만 희열할 수았을까?
아~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
또한 우리는 적응하고 그러면서 또다시 새로움을 향한 욕구가 일어나리니...
이글을 쓴 후,
나에게도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다면 있었다.
집시처럼 여기저기를 다녔기도,
두더지처럼 겨울잠자듯 하기도,,
이래도 저래도 세월의 흐름은 정확하다.
자꾸 과거를 되삭인다는 것은
결국 앞으로의 날들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의미일진저..
이러기도 저러기도 하면서 나는 그전처럼 여전히
내일, 다음달,내년 그리고 내후년을 기대하며 오늘을 시작한다.
날이 따뜻해지면 뮨헨에 다녀와야겠다.
그녀를 생각하면 나의 청춘이 살아서 다시 돌아온다.
(위 사진찍었던 2010년 7월 3일 토요일 뮨헨의 이자르 강가에서 한가히 산책하며 저절로 전혜린과 나의 젊은날을 떠올렸었다.)
참조:
전혜린 47주년 기일에( 바로가기 클릭)
전혜린이 즐겨 거닐었던 미류나무가 길게 늘어선 레오폴드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