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2기 장은숙 선배님을 다른 홈피에서 만나뵙고 얼마나 반가웠는지요.
선배님의 옛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2기 게시판에서 검색해 봤습니다.
그곳엔 우리 홈피 초기에 쓰신 선배님의 주옥 같은 글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 원형교사 이야기가 있어서 같이 읽으려고
자유게시판으로 이동해 왔습니다. 물론 선배님께는 허락을 받았지요.
이 글을 읽으시고 원형교사에 대한 추억을 빛바랜 사진과 함께 올려주시면
많은 동문들이 회상에 잠기는 행복한 순간을 갖게 되겠지요?
호랑이 담배 피던 그 시절- 2 회 장 은 숙 -옛날 고리짝 이야기..
우리가 인천여중에 처음 입학하던 때, 그때가 아마 1959년 이였을 거다.
일자로 지어진 목조건물에서 중학교 일년 동안 공부했던 걸로 기억된다.
복도도 없이 밖에서 바로 신 벗고 교실로 들어갔었던 듯싶고...
여름 장마철이면 교실천정에서 비가 새어서 양동이와 세숫대야를
받쳐놓고 책상을 옮겨가며, 똑.. 똑.. 또르륵..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공부 했었다.
시간마다 다른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가르치시는 것이 신기했던 일..
지금은 이름이 가물가물 기억나지 않는 나이 드신 지리 선생님을
할아버지 선생님이라고 불렀다가 벌을 서던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아마도 이항구 선생님이 아니셨던가?
할아버지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아주 싫어하시던 선생님..
지금 내 나이보다 젊으셨을 선생님을 그렇게 불렀으니, 벌서고 매 맞는건
피할 수 없는 일이였지..
일 년 정도를 목조 건물에서 공부했고 2 학년 때부터 교실을 신축하기
시작했던 걸로 기억된다.
우리는 거의 일년 동안 체육시간에 교실 짓는 일을 돕기 위해서
흰 옥양목 체육바지를 입고 공사장에 일 열로 서서 벽돌을 나르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되지도 않게 우리가 학교를 지었다고 자부심을 가졌었는데...
지금 학생들에게 그렇게 일을 시켰다면 학부모들이 가만히 있었을까?
학교에서 공부는 안 시키고 어린 학생들에게 벽돌 나르는 노동을 시킨다며
시 교육위원회나 문교부에 항의를 하고 신문에 떠들썩하고 방송을 하는 등
난리가 벌어 졌을 것 인데..
지금의 그 원형 교실을 지을 때 이야기다.
새 원형교실.. 그래서 우리는 그 교실에서 첫 수업을 받을 수 있었던 거였다.
그런데 그 교실에 창문이 많아서 겨울엔 몹시 추웠었다는 기억이다.
그리고 또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
인일여고가 탄생하던 그해 인일여고는 1학년이 제일 윗 학년이였고,
우린 아직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렇게 새 건물을 지으시고 인일여고를 탄생시킨 교장선생님이 그해
가을인가 다른 학교로 발령이 나신 것이다.
건물을 지으시느라 고생하시고 인일여고를 만드신 교장선생님을 그대로
다른 학교로 가시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 선배님들은 밤샘농성을
하기로 결정을 했다.
우린 아마 그때 중학교 3학년이었고 인일 1회 선배님들이 고 1학년 때였나?
누구들이 모였는지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선배님들과 우리는 한 50여명이 일단 하교했다가 저녁에 다시 학교에 모여서
밤샘 농성을 했던 기억이 난다.
시 교육위원회에서 훌륭하신 교장선생님을 발령내주신다는 설득에
12시가 넘은 시간, 통금시간이 있었던 시절이여서 파출소에 신고하고
선생님들께서 우리들을 일일이 집에 데려다 주셨었다.
그후 새로 오신 교장선생님이 이창갑 선생님 이셨는데..
밤샘하던 일은 까맣게 잊고 미남선생님이 오셨다고 아이들 모두 좋아라했던
철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고등학교 일학년 때였던가?
인천시 대항 마스게임 대회가 있었다.
체육시간과 무용시간 그리고 대회임박해서는 오전 수업만 하고
마스게임을 열심히 연습했는데...
두 줄로 서서 남녀가 사교춤 추는 포즈로 한바퀴 도는 동작이 있었는데..
그 동작이 말썽이 되어 다른 동작으로 바꾸라고 해서 그것 때문에 우린
바꿀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우기도 하고...
모든 학생이 한꺼번에 연습하기에 우리학교의 운동장이 작아서 옆 학교
제고 운동장을 빌려 연습을 하기도 했던 그해,
남녀 고등학교가 다 참석했는데 우리 인일여고가 1등을 차지했었다.
감격하여 펄펄 뛰며 좋아 했던일..
그리고 그땐 강당이 없어 건물 옥상에서 졸업식을 하기도 했었지..
여기 동창회 사이트에 오면 문득 문득 꿈 많던 그 시절 생각이 나서
40여 년을 넘나들며 추억에 잠기곤 한다.
인천여중, 인일여고 의 6 년간의 생활중에
제일 잊을수 없는일이 있다면 원형교사 에서의 수업도 있겠지만
중학교때의 마스게임 연습과 공설 운동장에서 일등 이라는
감격적인 순간을 잊을수 없군요. 흰색의 체육복 속에 테극기 두개를
돌돌 말아 몸안 양쪽에 숨기고 마스게임 맨 마지막에 태극기를 뽑아
휘날리니 그 우뢰같은 박수소리에 가슴이 울컥 눈물을 흘리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 김중흠 선생님이 마스게임을 지도 하셨는데
지금도 건강히 계신지 궁금하군요....
원형교사가 헐리고 있는 그림을 보면서...
인천 가까이에 살았더라면 한번쯤 가 보고 싶었는데...
원형 교사를 마지막 본것이 언제인지..
아마도 동기 오인숙이가 인일 선생으로 재직할동안
잠깐 학교에 가서 원형교사 보았는데... 70년도 인지 71년도 이었는지...
우리가 뛰놀던 운동장은 커다란 연못으로 바뀌었던걸로 기억이 나고..
그리곤 그 이후 한번도 보지 못한 원형 교사가 헐리는 그림을 보고...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영주 후배 역시 헐리는 원형 교사가 아쉬웠던지..
나도 써놓고 잊고 있었던 케케 묵은 글을 이곳에 옮겨...
그바람에 원형 교사의 추억나누기가 되었네요.
그런데... 추억은 원형교사 뿐이 아니군요.
그 마스게임... 난 그때 고등학생만 했는줄 알고 있었는데...
맞아요!! 김숙자 후배...
그때 태극기를 두개 양쪽 허리춤에 꽂고 들어가서
크라이 맥스때 태극기를 펼쳐 들었었지요.
그럼 그때 중학교3학년 도 함께 했나요?
바로 그 김중흠 선생님이 그 마스게임을 할때 우리 담임 선생님 이셨어요..
그러보니 김 중흠 선생님 안부도 정말 궁금하군요..
그리고 원형교사 앞에서 찍은 사진 하나를 올립니다.
고1때 아마도 체육시간후에 찍었던것 같아요..
사진은 위 좌로부터 나, 박영수, 최희순, 이금자, 노환규
아래는 좌로부터 ㅇㅇㅇ, 김소자, 강명자, 임인택 ?
장은숙선배님 안녕하세요
요즘 어찌 지내시는지요, 건강은 어떠신지요.
위원장님, 장은숙선배님은 부경지부탄생의 주인공이셨어요.
부산과 경남지역을 합해 부경지부라 이름지었는데 추후에 보니 경남지부로 바뀌었더군요.
부산에 거주하시면서 활발하게 참여하셨죠.
당시로서는 대선배님들 중
싸이월드를 운영하시면서 컴퓨터를 잘 다루셨던 선배님이십니다.
장은숙선배님의 고1때 사진을 보니 저는 그 때 그러면
초등 2학년,... ㅋㅋ
두분이 창영초등학교 동문인 것이 참 부럽습니다.
사진 하단 오른쪽에서 두번째 강 명자 선배
상단 맨 왼쪽 장 은숙 선배
장은숙 선배 오랬만이어요
얼마전 선배으 외 할머니으 남 동생 으 [순간 성함을 잊었네요 ]
생애를 작품화한 '압록강은 흐른다' 테이프를
빌려다보고 넘 슬펐어요 이국에서 고국을 그리는 그 맘이 같은배를 타서 였겠죠
결국 그렇케도 드시고 싶으셨던 이밥을 못 드시고 세상을 고하셨고
조강지처가 보낸 쌀은 가는 도중이여서
더욱 안타 까웟죠 특별히 그 작품에 대하여 장학 퀴즈
문제로 나왔었는데 어느 서울대를 합격해 놓은 남학생이 그만 두만강는 흐른다라고
대답을해서 틀리게 되였었죠
작품은 시작할때 흐르는 배경 음악이 4대 명곡인 드볼에 "신세계' 였고
그 음악에 가사는 이렇습니다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옛터전 그데로 향기도 높아
지금은 사라진 동무들 모여
옥 같은 시냈물 개천을 너머
잔디불 쫓아서 즐기였건만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
위에 가사와 같이 모국을 그리다 가셨군요
저도 그렇케 늘 모국을 그리워 합니다
특별히 신세계는 한국이 낳은 정 명훈씨가 지휘할때 들으면
넘 감미롭죠 참!지난 나성 인일 모임에 마 영옥 선배가
다녀 가셔서 반가운 해후를 했습죠 그자리는 워낙 서로들 반가워하는 분위기라서
각 기수끼리 흥부먹다가 딴 기수들하고는 워낙 대하기가 힘들기에
인사도 못드렸습니다 장 선배도 강 명자 선배랑 한번 오셔유 총총
은숙아~~~~
오래간만이네.가운데는 최희순이고 임인택은 오른쪽이야.
앞줄 가운데는 김소자같다.나도 일학년때 김중흠선생님이 담임인데 우리가
한반이었구나.까마득한 세월이 별걸다 잊구있었어.
사진으로 보니 유행가 가사처럼 그시절이 그립구나.
건강은?
보지는 못해도 요기라도 자주자주 들려.......
영주후배...
예서 만나고... 제서 만나고... 그렇네요..
어제는 멋진 톤을 가진 창영 남자 후배가 전화를 했더라구요..
동창회지를 보내겠다고 주소를 물었지요..
모두들 봉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 하는구나 싶어요..
리자 온니~~..
잘 지내지요?
바쁜일이 있어 한동안 부산 경남 쪽에 소원했더니...
저렇게 썰렁해져 버렸네요..
부산 경남에 사는 동문들이 제법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방이 마련되었으니 후배들이
활발히 드나들줄 알았는데...
아마도 따로이 경남방에 신경쓰기보다는 기별게시판이나
다른 소모임에서 활동하는것 같아여..
흠흠~~ 송호문!!!
반갑네 그려...
여전히 여기 저기 바쁘게 지내는 구먼...
맞아!! 그분 이미륵 할아버지는 나으 외할머니으 막내 동생이시고
우리 엄니으 외삼촌이시지..
지금처럼 왕래가 쉽지 않은 시절에 독일까지 망명을 가셔서 그곳에서
외롭게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
돌아가실때에는 옛날 그 올드랭사인에 가사를 붙인
애국가를 부르면서 돌아거셨다네...
영화는 극적인 부분을 묘사하기 위하여 약간의 픽션이 가미 되긴 했지..
특히 부인에 대한 부분이... 그 드라마가 방영된 후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는 연락을 해오고 있다네..
영옥이는 딸이 LA에 살고 있는데.. 마침 그때 출산을 해서.
그쪽 모임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고 하더라구...
명자는 친구들과 몇년전 추억의 수학여행으로 경주에
다녀가서 정말 오래간만에 만났었지..
호문이도 한국올 기회가 있거든 부산에도 한번 다녀가게...
연자야!!
약국일로 바쁜네가 기 회장을 맡아 수고가 많겠구나..
우리가 고1때 한반 이였다는건 지난번 남미 여행에서 확인이 되었었잖니..
그런데... 네 글읽고 저 위 사진에 내가 이름을 썼보았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나는 친구도 있네...
에그~.. 그게 모두 나이탓 아니겠니?
건강은...
두번이나 크게 혼이 났으니... 이제는 무엇보다 열심히 챙긴다..
너나 없이 모두들 건강 챙겨야할 나이지...
그려.. 가끔씩 들릴께...
원형교사라서 교실이 부채꼴이었고, 교실과 교실 사이에 복도가 있었지요.
단골 1분 지각생이었던 나는, 걸어잠긴 뒷문 제일 앞에 앉다 아침 자율학습이 끝날 때 까지 바닥에 앉아있곤 했어요.
그리고 교실로 입실할 때는 돼지 저금통에 지각비를 넣으며 들어가곤 했던 기억이 나요.
부채꼴 교실 사이의 복도에서 지각생들의 소근소근 잡담도...재미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