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6.25, 한국전쟁의 달이 다가왔다. 요즘은 6월25일이 되어서야 기억을 되살리는 멘트들이 있는 정도이지만 20-30년 전 6월이면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노래를 부르고 반공포스터를 그려야하는 달이었다.

   우선 이번 달에 소개할 그림을 보자. 한 편에선 총 칼로 무장한 군인들이 무지막지한 총을 겨누고 있는데, 다른 한 편에선 무기는커녕 옷도 입지 못한 벌거벗은 여자들과 아이들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체 서있을 뿐이다. 피카소가 1951년에 그린 이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을 지금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지만 한 때는 사진을 들여오지도, 출판하지도 못 했던 때가 있었다. 총 칼을 겨누는 편이 남한을 지원한 미군을 암시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피카소는 1944년부터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공산당의 평화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헌신적인 노력으로 1950년엔 스탈린 평화훈장까지 받았다. 이 그림의 주제 또한 한반도에서의 학살에 미군이 개입되어있다고 믿고 있던 프랑스 공산당이 제안한 것이었으니 이 그림에서 총칼을 겨누는 군인은 당연히 미군을 암시한다고 짐작할 수 있다.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피카소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에 이 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쪽이 미국이라니, 자유 민주주의를 자부하는 미국과 한국에선 이 그림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2년 부산 피난처에서 추상화가 김병기는 피카소에게 ‘한국에서의 상황은 정 반대’라는 항의편지를 보내고, 미국의 『아트 뉴스』 편집장인 토마스 헤스(Thomas Hess)는 이 그림이 피카소의 “직접적인 정치입장 표명인지” 아니면 단순히 전쟁이 초래하는 재앙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인지의 문제를 이슈화하였다. 

   1937년 스페인 내란 중 나치의 개입으로 게르니카가 폭격을 맞았을 때 피카소는 이를 주제로 <게르니카>(국회보 2008년 2월호)를 제작하였다. <게르니카>는 작품성과 함께 예술가의 사회참여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피카소는 이 작품이 직접적인 정치견해인지를 묻는 인터뷰에 시달렸고 그는 완곡하게 ‘정치적인 그림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작품제목이 <게르니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에 뉴욕타임즈는 그가 비겁하다고 비난하였다. 피카소가 <한국에서의 학살>로 인터뷰를 한 적은 없지만 위와 같은 논리로 본다면 그는 이 그림 또한 정치적인 그림이 아니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과연 이 그림은 정치적인가 아닌가.

   『국회보』에 2년 여 연재해오는 ‘미술 속의 정치’를 눈여겨 읽어온 독자라면 이 그림이 고야의 <1808년 5월3일의 처형>(2007년 10월호)과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2007년 12월호)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단박에 짐작하였을 것이다. 힘 센 가해자와 어쩔 수 없이 당하는 힘없는 자들, 인류의 역사에 언제나 존재하는 이 폭력의 문제와 이에 눈 감고 있을 수 없었던 화가들의 고뇌가 담겨있는 그림들이다. 그러나 화가들은 현실 정치에 대한 그들의 적극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직접적인 방법을 피하고 있다. 고야는 1808년의 사건을 가해자인 프랑스군대가 스페인에서 철수한 1814년에야 그림으로 그렸으며, 마네는 멕시코에서 처형당한 막시밀리안 황제의 사건을 마치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처럼 그것도 무심한 척 그려내었다. 피카소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시 한 번 그림을 자세히 보자.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하게 양분되었으되 총칼을 겨누는 편이 미국인지 소련인지, 남한인지 북한인지를 알려주는 아무 힌트가 없다. 가해자는 몸이 마치 기계인 듯 금속성의 몸과 총구만 강조되었을 뿐이다. 어디 그 뿐인가 한국전쟁이라면 맞서서 싸우는 편도 군인이었을 터인데 여기에는 남자는 없고, 아기를 안거나 임신한 여자들, 아녀자들이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서있다. 전쟁이기보다는 그냥 무지막지한 폭력과 속수무책의 피해자라는 느낌만 전달될 뿐이다.

   이 그림은 프랑스 공산당의 제안으로 그려졌으되 미국과 한국에서만 지탄받은 것이 아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랑스 공산당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였다. 미군이 공격하고 북한군이 용감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기대했던 공산당원들에게 이 그림은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너무나 모호한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정치는 흑백의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는 정의와 불의의 경계가 그리 확실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피카소는 굳은 믿음으로 공산당을 지지하였지만 사실 그의 관심은 권력을 다투는 정치, 어느 한 편을 지지하는 정당정치에 있기보다 정의의 실천이라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에 관심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의 실천을 위해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힘 센 폭력과 아무 대책이 없는 약자들, 이들의 공격성과 슬픔, 통렬한 감정을 그림으로 호소하는 것, 이 방법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미약한 방법이야말로 전쟁의 실상을 대변한다. 전쟁은 힘 센 놈이 약한 놈을 정복하려는 폭력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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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설명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 패널에 유채, 110 cm × 210 cm, 파리, 국립 피카소 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