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

  아들에게 이번호에 다루는 그림을 보여주며 어떠냐고 물으니, “공작새 같아요. 그런데 갑옷 같기도 하고. 글쎄, 전투적인 천사라 할까?”라고 한다. 딸에게 보여주니 “와~, 아름다운 여자인데 발은 지도를 밟고 있으니 지배한다는 것 같고, 머리 위 오른 쪽엔 천둥치는 밤을 물러가게 하고 앞에서는 밝은 태양 빛이 다가오니 악은 물리치고 선이 이 여자를 밝힌다는 것 같네. 왠만한 귀부인이 아니고 대단한 통치를 한 여자 같아요.”라고 한다.

   나는 여왕 엘리자베스 1세(Queen Elisabeth I:1533-1603, 재위 1558-1603)의 초상화를 보고 있노라면 언제나 같은 궁금증이 일었다. 같은 시대의 남자 정치인, 예를 들면 그녀의 아버지인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의 초상(홀바인의 1540년 작)은 그의 위엄은 다소 과장되긴 했으나 얼굴과 몸의 묘사가 매우 사실적인데 50여년 뒤에 그려진 여왕의 초상은 어쩌면 이렇게도 비현실적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눈부신 흰 옷 속의 몸을 보면 허리가 목둘레 만 하고 팔은 거미같이 가늘고 어깨에 부풀려진 옷은 마치 날개 같다. 목 둘레에 펼쳐진 섬세한 레이스는 그녀의 새하얀 얼굴을 떠받들어 더욱 빛나게 하니 마치 천상의 여인 같다.

   이 초상은 헨리 리 경(Sir Henry Lee: 1533-1610)의 저택에 걸려있었다고 한다. 그는  1590년까지 여왕을 모시고 은퇴 후 옥스퍼드 주의 디츌리(Ditchley)에 살았는데 1592년에 새로 지은 집에 여왕을 초대하여 여왕은 이틀 동안 이 집에 묵었다고 한다. 이 초상화는 아마도 이를 계기로 주문하여 여왕이 방문하였을 때 이미 집에 걸려있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짐작한다. 이러한 연유로 ‘디츌리 초상화’로 불리는 이 초상화는 엘리자베스의 이전 초상화의 형식을 바탕으로 하였으되 더욱 눈부시고, 더욱 순결하며 또한 더욱 모뉴멘탈 하다. 헨리 리 경이 소넷 형식의 시에서 여왕을 “아베 마리아와 같이 엘리자여 영원하라."Vivat Elisa for an Ave Mari" 고 칭송함을 미루어 보면 천상 이미지의 초상 또한 그의 주문내용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엘리자베스 여왕 1세는 영국의 번영기를 이룩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아버지 헨리8세와 앤 블린 사이에서 공주로 태어났지만 어머니는 그녀가 세살 때 처형당하고, 왕위가 바뀔 때 마다 감옥에 갇히거나, 가택연금을 당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며 살았다. 여왕이 된 뒤에도 정적인 메리(Mary of Scotland)를 처형해야 했을 만큼 처절한 튜더왕조의 권력암투에서 살아남은 여자이다. 어디 그 뿐인가 그녀가 25세에 여왕이 되어 44년간 통치를 하면서 가장 위태로웠던 스페인 함대의 공격 앞에서는 전장에도 나섰다.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흰 벨벳 옷에 은색 갑옷을 입고, 열세에 몰려있던 군인들 앞에서 “이 전장의 한 복판에서 나는 여러분과 함께 살고, 여러분과 함께 죽겠다.”고 독려하여 영국역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러한 여장부이면서 어떻게 천사 같은 순결한 이미지를 유지하였을까.

   엘리자베스는 여러 번의 혼담과 연애사건은 있었으나 결혼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처녀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결혼하지 않았음을 처녀라는 아우라로 사용하여 범할 수 없는 존재로 형상화 시켰다. 여왕은 스스로 “나는 처녀 여왕(Virgin Queen)이다. 나는 국민의 어머니이다.” 라고 말하였으며 또한 그렇게 칭송받았다. 그런데 ‘순결한 처녀이며, 어머니?’라니, 어딘가 익숙한 이미지이다. 가톨릭의 마리아 신앙을 개신교인 영국에서는 여왕이 대신한 것일까? 순수하고, 영원한 처녀이며 동시에 어머니 같이 관대하고, 강한 여성, 성처녀 숭상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녀는 그토록 강해야했으면서 왜 이미지는 순결을 내 세웠을까.

   학자들은 말한다. 가부장적인 구조의 사회에서는 강한 힘을 소유한 여자를 의심스럽게, 불안하게, 심지어는 혐오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은 정 반대의 갈구를 낳으니 비정상적으로 이상화시킨 여성상을 절대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궁정의 적들 속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살고 있었던 엘리자베스는 이러한 사회심리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어마어마한 권력이 있었으되 자신을 연약한 여자라고 말하고, 순백의 빛나는 옷으로 무장하였다. 그럼으로써 온 국민의 연인이되 동시에 아무도 그녀를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이번 호에서 다룬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디츌리 초상화>는 그리 유명한 화가가 그린 것도 아니고, 소위 명화에도 끼지 못한다. 그러나 볼수록 궁금해지는 그림의 마력은 엘리자베스의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향한 당대의 소망이 그대로 형상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국을 지배하나 천상의 여인 같은, 현실과 소망을 한 몸에 지닌 여왕의 초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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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설명
마르쿠스 게라르트 소,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디츌리 초상화>, 유채, 241 x 152 cm, 1592년경,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