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에는
술이 뭔지도 모르면서 겉 멋이 들어 생맥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500cc 한잔도 못 마시면서 그때는 제법 잘 마시는 척 했다.
실상은 활명수만 마셔도, 박카스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체질이라 가까이 하지를 않았는데,
분위기가 좋아 어울리다 보니, 마시는 척 했을 뿐이다.
그후 교직 생활을 하면서
백묵가루 때문에 꼭 먹어야 한다며 돼지갈비집에서 곧잘 회식이 있었는데,
고기를 좋아하지 않던 나는, 먹은 뒤에 꼭 소주 두어잔을 해야 소화가 되는 증상이 생겨 소주를 먹기 시작했다.

나와 술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더니
급기야 술을 좋아하는 남편을 만나면서부터
술과도 뗄 수 없는 인연이 되었다.

처음 시집와 모진 시집살이를 할 때였다.
남편과 아이들은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하루 세끼를 따끈따끈한 밥으로 차려내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침을 먹고 돌아서면 금방 점심을 해야하고, 점심 끝내고 한두시간 정도 지나면 또 저녁을 차려내야 되고
빨래도 손빨래를 꼭 하게 하니 죽을 것만 같았다.
저녁이면 끙끙 앓는 나를 보던 남편은
소주를 따라주며 한잔 먹고 푹 자라고 위로를 한다.

그러면 지친 몸이 소주 2잔에 떨어져 잠이 들고는 했다.
매일 매일 술을 마시던 시절이었다.
내가 이러다 중독이 되면 어쩌나 할 정도로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몸이 힘들면 술에 의지를 하곤 했다.
소주 2잔이면 잠들던 내가 세월이 흐르다보니 1병으로 주량이 늘었다.
남편이 기겁을 하며,
그 다음 부터는 못 먹게 하여 그날로 단숨에 끊어버렸다.
나는 내가 지독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리고 모진 시집살이를 그냥 몸으로 견뎠다.

그래도 무심한 세월은 흘러 그렇게 힘들게 하던 시어머니가 81세로 돌아가시고
내 생활도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남편은 끔찍이도 나를 아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남편의 술이 문제였다.
효자인 남편은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힘들어 하다가,
책임감에서 벗어나자 홀가분해졌는지,
술을 엄청 마셔댔다.

남자들의 인생살이가 얼마나 버거울까?
아들로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아이들의 아버지로서의 삶의 무게가 술을 먹게 한 것은 아닐까.
그 때는 내가 그런 남편을 잘 이해하지 못 했다.

워낙 술을 좋아하고 그렇기에 술친구가 많았다.
그런데 문제는 술버릇이다.
술을 마시면 잠을 자는것이 아니라 입으로 깨는 사람이다.
그러니 아내인 내가 힘들 수 밖에......
밤새 한말 또 하고, 한말 또 하니
내가 술이라면 만정이 다 떨어질 지경이었다.

오죽했으면
한번은 장롱속에 쏙 들어가 숨어버렸다.
남편은 "우리 산학이 어디 있냐?" 하면서
온 집안을 뒤지고 돌아다니드만 결국은 장롱 문을 열어 제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쬐끄만 마누라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반가웠다나.
나를 보더니 두손을 벌리며 "까꿍" 하는것이 아닌가.
나는 화를 낼 수도 없고,
그 모습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얼마나 웃었는지.....
그래서 같이 붙들고 앉아 웃었다.
"내가 못 찾을 줄 알고......" 하면서 말이다.

또 한번은 술을 먹고, 하두 귀찮게 하길래
발길로 밀어 버렸더니 그냥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편하다 싶어 자고 있는데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려 일어났더니
눈 끝이 찢어져 피를 흘리며,
아프다며
손에 뭍은 피를 보고, 또 보고는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서, 밀어버린 사실은 꼭꼭 감추고
술에 취해 침대에서 떨어져 다친 것으로 밀어부쳤다.
그래도 "네가 날 때렸지?" 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남편에게
"나 힘이 없잖아. 어떻게 자기같은 덩치를 밀어 버릴 수가 있겠어" 하며 시침을 뚝 뗐다.
그 날 생긴 눈끝의 상처는 끝까지 지워지지 않고 남아
나를 실소하게 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술이라면 만정이 다 떨어져
절대로 입에도 대지를 않았는데,
요즈음은 나도 술 한잔이 종종 그리울 때가 있다.
그렇게 질색을 하고 살았는데, 지금은 후회가 많다.
그렇게 좋아하는 술을 내가 먼저 챙겨주며
"우리 같이 한잔 하자" 라고 왜 못했을까?
그렇게 했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아저씨. 나 술 마시고 싶어. 한잔 사줄래?"
하면 아마 까무러쳤을 내 남편......

그런 회한에
나도 가끔은 한잔 술이 그립다.
특히
오늘같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눈물에 젖어드는 밤이 되면 한잔 술이 더욱 더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