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아이들과 정착을 해서 열심히 밤 낮 없이 일한 결과로 그런대로 아이들과 부족함 없이 생활하며 좋은 동네에 집도 새로 지어 이사하고 아이들의 사교육에도 열성을 부리며 딸 셋을 바쁜 생활 중에도 열심히 가르치려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신학을 하겠다고 가족들에게 의논을 했을 때 우리 가족은 반대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어려운 길을 가족 모두가 한 배를 타고 같이 험난 할 수밖에 없는 답이 뻔한 길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그의 길을 막겠다고 반항 하기에는 너무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었다.

 

그 일의  결단 후에 우리들의 앞일은 모두 하나님께 맡기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특별히 아이들을 위해서 매일 아침마다 간구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나님! 저희 가족이 아빠 따라 주의 길을 동행 할 때에 어떤 역경과 어려움 중에도 주님이 우리 아이들의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시고 교육시켜 주실줄 믿고 이 길을 가겠습니다~~ 라고 기도하며 아이들의 미래를 주님께 간절히 부탁하는 기도를 드렸다.

앞으로의 여정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기에 부모를 따라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어려움을 겪을 아이들이 깊은 근심이 되어 마음 한켠에 두려운 그림자로 드리워졌다.

 

우리 부부는 앞으로 우리 가족의 어려워질 경제에 대비해서 우선 생활비의 큰 몫인 집부터 팔고 모든 살림의 지출을 줄였다. 그리고 최소한의 생계비의 예산으로 갑자기 하루 아침에 가난한 살림살이로 뒤바꼈다.

아빠가 신학공부를 하겠다는 결정 전에는 딸셋을 그 동네에서 제일 유명한 선생님을 고집하며 피아노 레슨을시켰다. 그리고 배우러 가기 싫다는 아이들을 우리 부부는 강제로 차에 태워 데려가고 데려오고 리사이틀이라도 있는 날에는 집에서 전화기를 피아노 건반에 갖다 대고 선생님과 연결을 해주고 정말 그 당시를 돌아보면 극성 부모의 극치였다.

 

아빠의 신앙 결단으로 인해 우리 가족은 듀크 신학대학원의 학기가 시작 되기 전에 방 두개 반 짜리 조그만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때 쌍둥이 딸이 중학교 1학년이고 막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아파트는 좁은 공간이었어도 동네 만큼은 학군이 좋은 곳을 택했다. 새로 이사 간 아파트는 우리가 살던 뢀리 외곽의 리치포드란 길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는 그대로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있게 이사를 갔다. 대신 남편이 학교를 가려면 한시간을 덜함까지 운전을 해야만 했다.

 

우리 아이들은 처음에는 하기 싫었던 여러가지의 과외 활동을 모두 중단한 것에 대해 매우 자유롭고 즐거움을 느끼는 듯 보였다. 더구나 내가 남편 몫의 수입까지 책임을 져야 하니 아이들에게는 무서운 엄마의 존재가 더 이상 효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대신 남편이 나 대신 아이들을 감당하는 몫이 늘었다.

남편은 아이들과 늘 같이 곁에서 자기 공부를 해가며 이곳 저곳을 데려 가고 데려오고 아이들을 기다리는 동안 차속에서 졸아가며 공부하면서 늘 애 셋과 붙어 다녔다. 그러한 결과가 후에 이곳 주에서 주는 장한 아버지 상을 받게 해주었다.

 

훗날 TV 방송과 이곳 스테이트 신문에서 나와서 우리 애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이 어떻게 공부를 해서 쌍둥이가 하나는 하바드 대학교에 또 한명은 듀크 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가는지 궁굼하다고 했을 때, 우리 둘째는 대답했다. ~~우리 아빠는 늘 우리를 챙기며 옆에서 책 읽는 모습을 많이 보여줘서 우리도 책을 많이 본 것 같다고~~

 

그런 대답을 했던 둘째 딸이 중학교 2학년 때 아파트로 이사와서 어려움이 시작되던 시절, 어느 날 학교를 다녀와서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나를 기다렸다가 내 주위를 자꾸 머뭇 머뭇 맴돌면서 무엇인가 말을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애에게 뭘 말하고 싶은지 어서 말해 보라고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애는 어려웁게 입을 떼었다. ~~엄마 나 바이올린 레슨 받고 싶어~~ 라고, 나는 그애가 우리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딸이기에 그러한 질문을 하기까지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음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리고 딸 셋중에 그 애만 레슨을 받게 한다면 다른 애들에게도 상처가 될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절망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더 더욱 안될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는 답을 그애에게 해 주었다. ~~윤이야 우리 그것을 놓고 믿고 너와 내가 하나님께 기도 해보자~~ 라고 했다. 하지만 내 맘 속에는 실상 그것을 놓고 기도할 마음은 거의 없었다. 우선은 먹고 사는 문제가 내 앞에 시급한 과제였기에 맘속의 기도 제목은 다른 곳에 방향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이는 아주 잠잠하게 학교를 잘 다녔다. 그리고 봄학기가 새로 시작되던 어느날 둘째 딸이 학교에서 돌아와 흥분된 상태로 깡총 깡총 뛰며 나를 찾는 것이었다.

~~엄마, 엄마아~~ 나는 놀래서 마주 뛰어 나가며 급히 물었다. 왜? 그러는데? 라고 물으며 그 애의 얼굴 표정부터 살폈다. 내가 본 둘째 딸의 얼굴에는 기뻐서 흥분이 된 발그래하게 홍조된 볼과 반짝 반짝 빛나는 때묻지 않은 눈망울이 촉촉한 수분을 머금고 있었다.

그 애의 말에 의하면 바이올린 선생을 구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공짜 선생님을, 나는그 애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놀란 표정을 지었더니 딸은 나에게 되물었다.

~~엄마가 나보고 믿고 기도 하라 했잖아~~ 그래서 내가 기도 했더니 진짜 하나님이 선생님을 구해 주셨어!~~ 하는 것이었다.

 

둘째 딸이 어느날 아침에 학교를 가려고 스쿨버스를 타고 뒷쪽 창가에 홀로 앉아 있으려니 어느 키가 큰 여자애가 자기 옆에 와서 앉았다고 했다. 헌데 한번도 본적이 없는 아이라서 우리 애가 말을 시키려고 보니까 그 애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있어서 물어본 말이 너 바이올린 하니?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혼자 말처럼 중얼 거렸다고 했다. ~~나도 바이올린 배우고 싶은데 우리는 형편이 안되서 못해~~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일 그 애와 같이 버스를 타면서 아주 친절하게 친구를 대해 줬다는 것이었다.

 

그애의 이름은 하이디였는데, 어느날 그애가 자기 엄마가 우리 윤이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 엄마가 뉴욕 시향의 단원인데 전공이 바이올린이라며 도시 생활에 너무 권태를 느껴 얼마나 이곳에 머물지는 모르지만 얼마간 딸과 둘이 쉬러 왔는데, 아빠도 바이올린을 손수 만들 정도로 바이올린이 자기의 인생의 전부인 사람인데 뉴욕에 잠시 가족과 떨어져 있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어디에 사느냐고 우리 애가 물어 봤더니 놀라웁게도 그들 모녀는 바로 우리 아파트 옆동에 이사를 와서 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애와 나는 하이디의 엄마를 만나러 바로 옆 건물로 걸어갔다. 우리를 반갑게 맞는 그녀의 이름은 ‘기다’라는 유태인이었다. 그녀의 아파트에는 임시용 살림 외에는 가구도 없는 휑한 분위기였다.

 

나와 우리 애를 만난 기다는 아주 만족스러운 듯 정겨웁게 대해 주었다. 그녀는 자기 소개를 자기 남편과 자기는 바이올린에 미친 사람들이라 표현했다.

자기 남편은 이태리계인데 자기 바이올린을 자기가 만들기까지 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가 뉴욕에서 비싼 레슨비를 받고 많은 애들을 가르켜 봤는데 대부분 부모의 열성으로 억지로 따라오는 아이들이었다면서 자기는 그런 레슨은 이젠 더 이상 안 하기로 했다며 우리애 보고 정말 그리 배우고 싶냐고 물어 보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애는 그렇다고 강하고 또렷하게 대답을 했다.

기다는 그 다음날로 우리 애의 책과 가방, 악보 등을 모두 자기 자비로 구입을 하고 우리 애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날부터 학교 안가는 시간에는 기다와 우리 애는 잠자러 집에 오는 시간을 빼고는 늘 붙어서 바이올린을 켜댔다.

 

보통 레슨은 일주에 30분이나 한 시간씩 이틀 정도를 받는다. 헌데 우리 애와 기다는 하루도 안걸르고 매일 만나서 밥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는 늘 붙어서 바이올린을 켰다. 주말이면 아예 그 집에 가서 하루종일 먹고 켜고 먹고 켜고 살다 싶이 했다.

몇달이 지나고 하이디의 아빠가 뉴욕에서 잠시 내려 왔는데 우리 애까지 4사람이 함께 바이올린을 켜 대는데 우리 아이도 빠지지 않는 손 놀림으로 놀랄만큼 실력이 늘었다. 그리고 기다와 그의 남편의 연주 솜씨는 거의 신기에 가깝게 무아지경으로 활을 그어댔다.

 

기다는 유태인답게 사소한 생활 비용에는 무척 알뜰했다. 그런데 그녀는 하이디나 하물며 남의 자식인 우리 둘째에게 들어가는 교육에 관한 비용에는 아까운게 없이 준비를 해주는 것이었다.

우리 둘째 딸은 기다에게 아주 푹 빠져서 그 해 여름 방학을 바이올린 속에 묻혀 살았다. 몇 달을 기다와 붙어서 엄청난 시간수를 바이올린과 함께 한 결과는 여름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 갔을 때 놀라운 결과를 갖다 주었다. 우리 애는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차석 자리(2nd chair)에 앉게 된 것이었다. 우리 애의 갑작스런 출연으로 많은 사람들이 으아해 했다. 오케스트라 선생님도 어찌된 영문인지 물어 보더라는 것이었다.

 

기다와 죽이 맞아서 함께 하는 시간 동안은 우리 둘째 딸에게 너무도 행복한 시간 시간들이었다. 기다도 아예 자기 딸인 양 착각을 할 정도로 자기 딸과 우리애를 똑같이 책임져 주었다. 헌데 그렇게 일년을 한 식구같이 붙어 지내던 기다가 어느날 슬픈 이별의 소식을 갖고 우리에게 왔다.

그녀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공연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슬픈 소식을 우리 아이보다 먼저 우리에게 들려 주었다.

그리고 몇일 후 기다는 우리집에 트윈키라는 빨강 파랑 크림색이 혼합된 자기가 기르던 노래하는 아주 예쁜 새를 선물로 주고 떠났다. 트윈키는 악기만 연주하면 같이 노래를 부르는 사랑스러운 새였다.

 

물론 우리 둘째 딸의 이별의 슬픔은 말로 다 표현을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 후로도 기다는 전화상으로 우리 애의 레슨을 끈질기게 책임져 주었다. 또 방학을 하면 우리애를 뉴욕으로 불러 올려서 시간을 같이 보내며 많은 추억거리를 만들어서 보냈다.

트윈키도 늘 우리 식구들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주며 우리 가족들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해주었다.

기다와 하이디는 분명 하나님이 우리 딸의 기도를 듣고 보내주신 하나님의 천사들이 아니었나 지금도 벅찬 감동의 감사가 내 영혼 속에 파도친다.

하나님은 순간 순간 우리가 겪는 목회의 연단 속에서도 내가 남편을 따라 목회의 길을 가며 처음 드렸던 나의 눈물의 기도를 외면치 않으시고 지금까지도 놀라운 축복으로 우리 아이들을 책임지고 계신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