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자정리(會者定離) 


신입생들이 입학을 하고, 새로 전근을 온 교사들과 기존의 교사들이 새 업무와 환경에 적응하느라 바쁘고 분주한 3월의 신학기가 시작된 다음 날, 오랜 친구의 갑작스런 사망의 비보를 들었다.

 1981년 나의 첫 부임지인 00중학교는 그 해 신설된 학교여서 학생도 1학년만 있고, 교사들도 몇 안 되었다. 그 중 첫 발령을 받은 미혼의 몇몇 여교사들은 새내기 티를 벗지 못하고 병아리처럼 서로 의지하며 지냈는데, 그 중 하나였던 그녀는 손재주가 뛰어나서 매듭과 바구니 만들기 등을 척척 해내서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내가 그녀보다 한 살이 많지만 우리는 코드가 잘 맞아서 마음을 터놓고 깊은 얘기를 나누며 친하게 지냈다. 겨울방학 중의 어느 날 군에 가 있는 남자친구 면회를 가는데 쑥스럽다며 함께 가자는 그녀의 제안에 흔쾌히 허락을 하고 우리는 함께 서울 근교의 군부대에 갔다. 정문에서, 야외훈련 중이라 만날 수 가 없다는 통보를  받고 아연실색하며 추위에 발길을 돌리려는데 정문을 지키던 군인이 마침 부대로 복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며 잠시 기다려보라고 했다. 막 흩날리기 시작하는 눈발 속에서 우리는 기뻐서 소리를 지르며 손뼉을 마주쳤다.

몇 년 후 12월 겨울에 공교롭게 그녀와 나는 한 날 한시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 가보지는 못했지만 각자의 결혼식장에서 축하의 텔레파시를 보냈다. 그 군인이 아닌 다른 남성과 중매로 만나 결혼식을 올린 그녀의 신혼여행 중에 갑자기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슬픈 일을 비롯하여, 남편의 지나친 술버릇, 자신의 도회지 문화와 시댁의 시골문화의 차이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그녀는 몹시 힘들어했다. 나 역시 결혼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주어지는 많은 역할들에 힘겨워하며 그녀와 비슷한 고비들을 겪었고, 그 학교를 떠나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가서도 우리는 가깝게 지냈다.

혼란스럽던 20대, 힘겹던 30대, 뭔가를 조금 깨달은 듯한 40대를 보내고 우리는 50 줄에 들어섰다. 딸 둘을 가진 나에 비해 그녀는 나의 큰 애와 비슷한 또래의 아들을 낳고 한 참 후에 늦둥이 딸을 낳았는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예쁘고 영리하고 엄마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귀한 딸이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 지난 12월, 그 딸이 원하는 국립고등학교에 입학했다는 소식과 함께, 그녀가 부엌에서 쓰라며 빨간 실로 뜬 예쁜 수세미를 소포로 보내왔다. 결혼기념일이 같은 우리는 결혼 25년을 맞는 흰머리 성성한 중년의 시점에서 그동안 여러 위기를 잘 극복하고 견디어낸 서로를 칭찬하며 조만간 만나서 우리의 지난날들을 진하게 돌이켜보자는 얘기를 전화로 나누었다. 계절제로 늦깎이 대학원 공부를 하는 내가  방학동안 수업을 받고 과제를 준비하고 제출하는 일들을 하다보니 그만 새 학기가 가깝도록 그녀와의 약속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미안하다는 내 말에 ‘괜찮아요, 여유생기면 연락 줘요, 만나게.’라며 문자를 보냈던 그녀였는데 신학기를 하루 보내고 그녀는 그만 가고 말았다.

“참고 살아오길 잘 했지요!! 50줄에 들어서니 뻔뻔스러워지기도 했고~ 이 나이에 무언 들 못하랴하는 자신감도 생기네요. 그래도 우리의 20대의 그 첫 학교에서의 생활은 생각할 때마다 풋풋한 냄새가 나는 듯해요.”

 하던 그녀가 아침 일찍 스스로 먼저 가는 길을 택하다니.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고들 한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고도 한다. 삶의 무게를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는지, 고통 없는 세상이 있을 줄 알았는지 서둘러 먼저 간 그녀와 다시 만날 날이 있을까? 기다리는 서글픈 마음을 가져본다.


가고 오지 않는 사람

              

              김 남 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나중에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