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반 강제다 싶은 중매로 알게 되어 몇마디 말도 해본 적도 없고 먼 발치로나 보았던, 생판 남남이었던 남편을 따라 미국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각자의 삶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한 두번 다 쓰러져 가는 광주 시댁에 다녀온 나로서 대강 눈치챘었기는 하였지만 얼마나 가난한 집 출신인지 이야기 중에 기가 막히게 다 드러난다. 우리 엄마 말씀 맞다나 "고르고 골라서 하필 그런 집으로 시집 가냐?" 하신대로..
하기야 나도 시골 출신이고 중 고등학교 6 년, 대학 4 년간 자취를 하며 얼마나 가난을 많이 체험했었던가? 어린 나이에 연탄을 두장씩 양손에 들고 산 꼭대기 자취집을 올라갔던 일도 여러번 있고 생일인데 먹을 것이 없어서 고추장에 밥을 비벼 먹으며 눈물 흘린 적도 있었다. 수도물이 며칠씩 안 나오면 무거운 물통을 메고 산 아래에서 길어 오는 언니를 어쩔줄 몰라 하며 따라 온 일도 기억난다.
주말이면 버스를 타고 시골집에 가서 부모님에게 생활비와 용돈을 타오곤 했었다. 내가 마음이 약해서 쓸 돈을 깍고 깍아서 최소한으로 말씀을 드리면 세상에, 그것을 다 주지 않으시고 또 에누리해서 주신다. 여러 아이들을 도시로 보내어 공부시키느라 너무나 옹색해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혼자 눈물을 삼키느라 혼이 나곤 했었다. 이 돈으로 어찌 일주일을 지낼까하고...
나도 알만치 안 가난이었었는데 시댁의 가난은 비교 자체가 안 되었다. 정말로 가까이 몰랐었던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 매일 저녁 일이 끝나고 돌아오면 옛날 이야기를 하였는데 가난했던 이야기를 내가 하도 신기해 하니까 더욱 신나게 들려 주었다. 다 잊지 말고 어디다가 써 놓자고도 했는데 지금은 다 기억이 안난다. 그중의 생각나는 몇가지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 추운데 내복이 없어서 항상 덜덜 떨고 살았다고 한다. (우리집에는 감사하게도 부지런한 엄마 덕분에 칠 남매가 털실 내복을 항상 입었었다.) 김장을 담글 돈이 없어서 몇 포기 못하니까 반달이 못되어 다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도 고추가루를 제대로 못 넣고 하고 소금만 넣은 허연 김치인데 그것도 배부르게 먹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집은 반대로 직접 심은 배추와 무우, 수무우등..김장이야 늘 흥청망청 넘치도록 해서 다음해 여름까지 먹고도 남아서 다시 김장 할때까지 김치찌개를 늘 해먹었다.) 기름이란 것에 음식을 튀기거나 볶아 먹어보지 못했다고도 하고 설탕은 구경한 적이 없었다고도....
가난한 집을 도울 량으로 신문돌이를 했는데 신문 소장이 월급은 주지 않고 신문값 안 주는 집에서 받아서 월급으로 쓰라는 치사한 작전을 썼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먹지 못하고 아침 저녁으로 너무 혹사 당하여 결국 결핵이 걸렸단다. 그것을 알고 어떤 기독 병원 간호원이 매주 나와서 결핵 주사를 놓아주어서 건강을 회복하였던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할수 없단다.
그분이 젖 짜 먹으라고 염소를 두 마리 갖다가 주었는데 그나마 가난한 집에 있는 염소 두 마리를 몽땅 살림과 함께 집어간 도둑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날에 밥을 해 먹을 도리가 없어 어머니께서 머리를 잘라 팔아서 냄비를 사왔다는 가슴 아픈 추억도 있다.
한도 끝도 없는 가난한 이야기들... 그러나 지금은 단지 옛 이야기로 추억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비록 남들처럼 떼 돈을 벌어 본 적이 없어서 평생을 근근히 살고 있다고 해도 경제 공황으로 다시 허리를 졸라 매고 살아야 한다고 해도 그때 보다는 비교 자체가 안되는 풍성한 삶이 아닌가!
그런 극심한 가난을 체험 사람은 어떤 상황에도 살아 남을수 있는 무형의 재산을 가진 것과 같은 것이다. 그동안 너무나 흥청 망청 살아온 미국 사람들도 이 어려운 때를 지나면서 탐욕과 이기심을 버리고 좀 더 겸손한 생활 자세로 바로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가난의 어려움은 지나갈 때가 반드시 있으며 평생의 좋은 추억이 되는 수도 있으니까 모두가 힘을 내면 좋겠다.(2008년 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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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엔
왜 그리 못 살았는지~
그러나 지금은 많이 행복하시죠?
전세계가 경제위기로 어려움이 많다지만
우리가 살았던 7,80년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충분히 이겨나가리라 믿어져요.
우리 모두
이인선 선배님, 그 때는 누구나 가난했지요.
동네, 혹은 한 반에 몇 명이 넉넉해서 부러웠고
가난은 죄가 아니라 하는데도
어린 시절에는 죄진듯 부끄러웠던 기억이 나요.
그래도 인천은 나았지요.
충청도 어느 산골에 살던 아는 이는 어려서
자동차 타이어를 껌 대신 씹었대요.
겨울에도 홑저고리를 입고 산을 넘어 학교를 다녔다고 해요.
지금은 그 때에 비해 너무도 풍요로운데
풍요 속에서도 또 다른 가난을 느끼니 그게 문제지요?
경제의 안정이 빨리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미국에 돈을 부쳐야 할 적마다 난감해요.
오늘도 환율이 1,550원이래요.
가슴이 뭉클하군요.
선배님만큼은 가난을 모르고 아주 풍족은 아니더라도
어려움이 없었을 줄 알았으나 당시 대부분이 그랬듯이
인내를 감수하며 학창시절을 성공적으로 보내시니
경의감마저 듭니다.
부군의 말씀은 더욱 더...
전쟁 후라 무척이나 힘든 시기였음을 압니다.
모든 것은 파괴되고 복구되어가는 과정에...
지금의 세계적으로 불어오는 경제한파와
불경기가 빨리 잘 극복하고 특히 북한의 떼쓰기가
남한경제에 악영향이 되지 않기를 빌며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어려웠던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담담히 풀어내신
선배님의 멋진글에
마음을 내려놓고 갑니다.
동문회때 만나서 참 반가웠어요~~
나보다 1회선배인데, 어째 나보다 5살쯤은 아래인 것 처럼 보여요.
동명상에서 보니 언니 춤솜씨도 만만치 않던데요??
언니의 글솜씨는 정말 진솔하여 언니의 글을 읽을때마다 아주 감동을 많이 받지요~~
가난했던 옛날 얘기를 보면서
저도 학교 다닐때, 중학생이 6학년짜리 진학 과외공부를 시키며서 공부했던 생각이 나네요~~
지난 날 가난했던 얘기를 보면서, 그래도 그때 우리들의 마음이 이뻤고 순수했었던 것 같애요.
요즘 아이들 너무 풍요로와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할거예요.
지금
인선언니는 아주 부자지요???
입는것, 먹는것, 거하는 집, 타고다니느 차..........
우리 지금 너무 부자지요????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 것 밖에 없어요~~ 그렇죠??
춘자후배, 벌써 만나고 온 지 한달 하고 반이 갔네..
오늘 최영희 회장이 보내준 앨범을 받아들고 마음이 뭉클 해지더라고..
후배 사랑을 이렇게 많이 받아도 되는가..하고
춘자후배가 어리게 봐줘서 황송하구만..
춤솜씨가 나왔나? 아직 안봤는데 한번 봐야지...
지금은 조금 더 늘었는데 써 먹을 데가 없어서..ㅎㅎㅎ
미국와서 집지니고 차를 한대도 아니고 두대씩 부리고 부자중 부자올시다.ㅎㅎㅎ...
아니 건강하면 떼부자라고 합디다.
그러니 나도 늘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살지요.
빨리 내년 되어 다시 만나면 좋겠어~
요즈음 조금 바빠서 홈피에 잘 못들어 왔었어요.
옛날에는 용혁후배처럼 아버지께서 다달이 봉급을 타오시는 분이야 말로
큰 부자들로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지나간 이야기들은 가난도 재미있지 않아요?
지나 보니 가난한 것 그리 겁낼 것도 없었는데 우리 모두 얼마나 겁을 냈었던가요?
왜 그때는 잘 사는 것 처럼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주눅이 들곤 했었는지...ㅎㅎㅎ
미국에 돈을 부쳐야 한다니 환율때문에 혼이 나겠군요,
하루 속히 모든 것이 안정 되어야 할텐데...
나는 최영희 후배하고 섞갈렸었거든요.
마음이 통하는 후배라고 생각해요.
지금 전 세계가 가난의 공포에 쌓여 있어
옛 이야기가 도움이 될것 같았는데 역효과인지도 모르겠군요.
언젠가 소련에서 교환교수로 온 사람이 미국과 전쟁하면 자기 나라가 이긴다고
그 이유는 자기네 나라 사람들은 빵과 차만 먹어도 일주일을 살수 있는데
미국 사람들은 스포일이 되어서 낭비가 심해서 그렇다는 말을 해 주었어요.
가난이 큰 힘이 되는 법도 있으니까 무서워 하지 말고 대면하여 허리 졸르고 사는 법도 이런때 배워 두어야 하겠지요.
이런 이야기를 털어 놓을 수 있는 건 '상처가 다 치유 되었기 때문'이라는 어느 친구의 멘트가 생각 나는군요.
다들 어려운 고비가 있게 마련이지요.
한국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이 가는 부분이예요.
어려운 시기를 잘 견디라는 격려의 글인 줄 알고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먼저 말문을 열어주신 선배님의 마음을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