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뢀리 노스케롤라이나에 처음 이민 와서 정착한 새로운 환경과 낮설은 이곳의 생활방식에 서툴어 어정쩡한 분위기였을 때 어느 집사님 댁에 초대를 받아갔다.

초창기 이민 시절에 누군가가 초대를 해주면 남들보다 아이가 많은 나는 왜 그리 미안한지 그 집에 가서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행여 폐를 끼칠까봐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를 못하니 사실 초대 받는 것도 그리 편치는 않았다.

그 당시에 내가 이웃에게 초대를 받아 저녁 식사를 하러 갔을 때에 쌍둥이 딸이 6살이고 막내가 2살이었으니 얼마나 부산스런 대가족의 외출이었는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또 우리 대식구는 어디를 가도 꼭 함께였다. 누군가가 나나 남편을 아이들을 떼어놓고 초대를 한다면 우리는 조용히 아이들과 집에서 보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난 우리 애들은 시집 가서도 꼭 모유를 고집하며 아이들을 데이케어나 남의 손에 맡길 줄을 모른다.

 

그날 우리 외에도 초대 받은 가정이 또 한가정 있었는데 그들은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는데 우리 쌍둥이와 비슷해 보이는 나이의 아들을 데리고 왔다. 자세히 살펴 보니 남편은 아주 외소한 작은 키에 튀지 않는 외모에 대화 중에도 남의 대화에 앞서 자신의 지식을 큰소리로 앞지르는 열등감이 많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작업복 차림에 켑 모자를 아무렇게나 푹 눌러 쓰고 대화 시에도 상대방과 눈을 맞추려 않고 늘 빗겨간 촛점으로 이야기를 했다. 헌데 부인을 자세히 보니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느낌을 주는 미모의 얼굴에 가랑가랑한 몸집에 키도 늘씬했다. 그녀는 대화중에 이북 사투리가 가끔씩 튀어 나오며 강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분위기가 말해주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인천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우리가 인천에서 왔다는 소리를 들은 그 미모의 부인이 반색을 하며 나에게 어느 고교를 나왔냐고 묻는 것이었다. 해서 나는 ~~인일 졸업했어요~~ 했다. 그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미모의 여인이 반색을 하며 ~~아이구 내 후배잖아?~~ 하며 내 손을 와락 붙잡아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 손을 이끌고 조용한 구석으로 비껴 앉아 후배를 만났다는 기쁨에 흥분을 가라 앉힐 줄 몰랐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내가 한국에 있을 때 그 선배 언니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내 나이 20대 초반에 결혼 전이었는데 내 친구 언니가 기독병원 아래쪽에 위치한 은행에서 은행원으로 근무를 했었다. 그 당시 나는 그 친구와 돌아 다니다가 배가 고파서 그 애 언니가 근무하던 은행에 들려서 가까운 중국집에서 자장면과 탕수육을 얻어 먹은 적이 있었다. 헌데 가만히 기억을 되 돌려 보니 바로 그 자리에 변양이라는 다른 은행원 처녀가 같이 따라 나와서 우리들을 밥을 사주고 들어간 것이 기억되는 것이었다. 바로 그 미모의 여인이 바로 변양이었다. 세상은 정말 넓고도 좁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나는 그녀를 그렇게 딱 한번 만났지만 친구를 통해서 너무도 변양에 대해 많이 들었었다. 내가 들어온 변양의 기억은 그 은행 내에서는 제2의 김지미로 소문난 미모의 행원이었다. 많은 손님들이 은행에 드나들면서 그녀에게 마음을 둔 남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고 했다. 늘 도도한 분위기로 매일 미장원에 들려 머리를 손질하고 세련된 분위기로 은행 분위기를 화사하게 밝혀주는 튀는 직원이었다.
헌데 워낙에 눈이 높다보니 혼기를 놓치고 노처녀의 반열에 서더니 어느 날 갑자기 재미교포에게 시집간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궁금한 스토리만 무수히 주위 사람들에게 남긴 채 어느날 홀연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고 친구가 하는 말을 들었었다.

그런데 그 변양이 내앞에 선배라며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날 반가운 만남을 뒤로하고 헤어지면서 변 선배언니는 나에게 조용히 다가와 말을 했다. ~~얘, 지영이에겐 말 하지마~ 나 여기산다고~~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 선배는 우리 가족을 자기집으로 초대를 했다. 한인 인구도 얼마 안되는 이곳에서 내가 유일하게 만난 선배였다. 우리 식구가 주소를 보고 찾아간 그녀의 보금자리는 집이라고 할 수 없는 많이 낡은 싱글 모빌홈이었다.

그 모빌홈 안으로 들어 서면서 둘러 보니 조그만 방 하나에 거실과 부엌이 일렬로 늘어선 구조였다. 살림도 그녀의 남편이 결혼 전에 혼자 쓰던 짝도 안맞는 살림들이 비좁게 놓여 있었다.

그날 선배 언니의 말로는 그 집에 초대받은 사람은 우리가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내 눈에 들어오는 변언니의 모습은 예전에 그리도 콧대 높아 많은 신랑감들을 퇴짜 놓던 예전의 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도대체가 그 두 부부는 어울리는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어 보였다. 후에 언니 말에 의하면 남자를 따라 미국에 와서야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 때는 이미 되돌릴 형편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은 인천의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찌 미국에 들어 왔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에 와서 뢀리에 있는 주립대학 학부를 10년만에 졸업하고 그 당시에 어느 자동차 고치는 공장을 다니며 틈틈이 한인들 차를 고쳐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남편과 대화를 하고 있으면 그가 미국 와서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엄청나게 자랑스러워 했다. 하지만 둘의 분위기는 물과 기름의 분위기였다. 그 남편의 성격은 완전히 자기주의고 아내를 배려하는 따뜻한 성격은 아니였다.

선배 언니는 그날 우리를 초대해서 후배를 위해 성의껏 많은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 그날 집에 돌아 오면서 변양 언니가 너무도 안된 마음에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는 그렇게 가끔씩 얼굴도 보며 사이좋게 지냈다. 그리고 내가 좋은 직장을 잡았을 때 언니에게도 소개를 해서 같은 직장도 재미 있게 다니며 정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생활이 여유가 생기자 우리는 또 학군이 좋은 동네에 같이 새 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 나와 자주 만나면서 언니는 결혼 생활의 갈등을 많이 내 비췄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같은 시기에 회사의 일감이 줄어들면서 임시 휴직을 당했다. 당분간은 매달 나오는 실업 보조금으로 견뎠지만 시일이 지나가면서 선배 언니가 새 직장을 구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또 나를 소개해서 같이 다녔다.

우리들이 새로 들어간 곳은 일본 사업체가 이곳에 현지 생산을 위해 차린 게맛살 만드는 공장이었다. 그곳에서는 일단 작업장으로 들어 가려면 백색의 아래 위 작업복에 일본군 모자 모양의 챙이 달린 백색 모자를 쓰고 긴 장화를 신고 그 장화를 자동 세척기에 물로 씻은 후에야 들어 갈수 있었다. 선배 언니와 나는 서로의 우수꽝스러운 모습에 서로 처다보며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곳에 다니는 동안 언니는 생각지 않은 임신을 40이 넘은 나이에 했다. 나는 걱정이 되었지만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선배 언니는 큰 고뇌에 빠져서 유산의 방법도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국은 유산이 허용된 나라가 아니라서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선배 언니는 이리 저리 궁리를 많이 하는 듯 하더니 그냥 무기력 속에 체념을 하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몇 달 동안 일을 하고 있으니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언니와 나를 다시 불러 들였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서 많은 날들을 같은 차로 출퇴근을 했다. 그러는 사이에 나이든 언니는 불러오는 배의 비중으로 걷기조차 힘겨워 보였지만 일 만큼은 열심히 하러 다녔다.

 

그리고 산달이 닥아오자 언니는 다행스럽게도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 노산이었는데도 잘 견뎌 낸 것이었다. 그리고 해산 후에 딸과 애기 보는 일을 돕기 위해 친정에서 엄마와 아버지가 미국엘 오셨다.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헌데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친정 부모가 사위의 행실이 맘에 들지 않으면서 집안의 불화가 끊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노인네가 미국에 온지 두어 달 후에 친정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으신 것이었다.

 

선배 언니의 가족 중에는 아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없었다. 선배 언니 조차도 자신의 생활이 행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돈 버는 일에는 열심이었지만 교회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어느날 나는 언니네 집에 식구들이 모두 외출하고 친정 부모님들만 계신 시간을 맞춰서 찾아 갔다.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는 나를 할아버지가 반갑게 맞아 주셨다. 나는 암의 말기 선고를 받고 딸네 방문 중에 너무도 큰 충격으로 혼란을 겪고 있을 할아버지에게 같이 기도해도 되겠냐고 여쭤봤다. 예상외로 할아버지는 그러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꼭잡고 간절히 하나님께 할아버지의 불신의 불쌍한 영혼과 그의 병든 육신을 위해서 간절히 눈물로 간구를 했다.

그 순간 할아버지는 펑펑 우시면서 자기도 이제 부터는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손을 잡은 채 한참을 같이 울었다. 그후에 언니의 부모님들은 한국으로 돌아가시고 그리 긴시간이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했다.

 

선배 언니는 부모님들이 딸집에 와서 마음의 병으로 돌아가셨다며 무척 괴로워했다. 그리고 말 수도 줄어 들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소화불량으로 소화제를 자주 복용했다. 그리고는 견디기가 힘들었는지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병원에서 검사 결과가 위암으로 나온 것이었다.

너무도 어이없는 결과에 나는 정신이 몽롱해졌다. 선배 언니가 너무 불쌍했다. 미국 와서 고생만 하고 자신에 맞지 않는 남편과 젖먹이 아들과 그녀 주위의 모든 것들이 확대되어 내 가슴을 짓 눌렀다. 언니는 의사의 권유로 급히 위 절재수술을 받는 수술 날자를 잡았다.

 

어느날 이른 아침에 나와 남편은 서둘러 준비하고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선배 언니는 자신의 착잡하고 허무한 깊은 어두움의 수렁 속에 빠진 심정을 나에게도 쉽게 보이지를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 부탁하는 말이 있었다. ~~얘 쌍둥 엄마야~ 수술전 네 남편에게 기도 부탁한다고 전해줘~~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남편은 백인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할 때였다.

언니가 기도를 부탁한다는 것은 너무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녀의 허무한 생의 낭떠러지 끝자락에서 나온 말이 그래도 기도 받고 싶다는 말이라니 너무 불쌍한 언니의 모습에 나도 몰래 눈물이 났다.

 

그녀는 내 앞에서 잘못 끼워진 인생의 단추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를 표현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항상 대쪽같은 기게에 꼿꼿한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와 당당한 말투 그리고 립스틱 만큼은 안 바른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 처녀 시절 미모와 화려한 겉치장에서 광채가 비췄던 언니의 모습은 티셔츠 몇 장을 갖고 일년을 나고 신발도 튼튼한 작업화 하나면 떨어질 때까지 신었다.

남편과 나는 언니가 누워 있는 병실로 들어섰다. 병실에는 아무도 없고 혼자 누워있던 언니가 환한 미소로 반갑게 맞아 주었다. 헌데 그녀의 얼굴은 수술한다는 환자가 화장을 아주 곱게하고 립스틱까지 바르고 우리를 맞는 것이었다.

그러한 선배 언니의 분위기로 인해 잠시 옆에 있었던 우리들은 우울한 대화를 빗겨가서 엉뚱한 대화만 나누다가 기도로 마치고 그 방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언니의 화장한 얼굴이 우는 얼굴보다 더 슬퍼 보여 우리 부부의 마음을 눈물로 적시게 했다.

 

그날 위 절제수술을 하려던 수술 의사가 배를 열었을 때는 너무 심각한 상태라서 위를 모두 잘랐다고 했다. 그리고 식도와 창자를 연결 시켰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언니는 일단은 통증이 없어졌으나 수술 후 음식 조절을 누가 옆에서 간병을 해주어야 성공적으로 회복될 수 있었다.

헌데 그녀 옆에는 누구도 없었다. 간혹 내가 죽 종류를 만들어 갖고 갔지만 그렇게 몇 번 해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언니의 남편이 부인을 위해 헌신적으로 대책을 세워야 했건만 그리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언니는 수술 후의 몸으로 1살짜리 애기와 늘 낮에는 둘이만 있었으니 집안 일을 정상인처럼 하며 애에게 시달렸을 것이었다.

 

그런 중에 우리는 사우스케롤라이나로 남편 따라서 이사를 해야만 했다. 이사 와서도 늘 선배 언니가 마음에 걸려 어느날 날을 잡아 모든 교회 일을 뒤로 하고 노스케롤라이나로 달려 갔다. 언니 집에 다달아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기척이 없었다.

이상한 느낌에 대문을 살짝 밀어보니 열리는 것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문 가까이에 두살짜리 녀석이 앉아서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리번 거리며 집안을 살피니 너무도 조용한 적막감이 흘렀다. 나는 불길한 예감에 침실로 향해 열려있는 문을 들여다 보니 언니는 거기에 있었다. 우리가 못 본 사이에 언니는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붙어 있는 의식과 숨을 감탕키 버거워 산소 호흡기를 끼고 몸은 이미 거의 굳은 채 침대에 누워 어둑어둑 커튼 쳐진 방안에 아무도 옆에서 손 조차 잡아 주는 이 없이 그렇게 쓸쓸하게 버려져 내동댕이 처진 주인 없는 물건처럼 누워 있었다.

언니를 발견한 나는 누구에겐가 그리 격한 분노의 감정을 느껴본 건 처음이었다. 나는 미동의 느낌도 없는 언니에게 가까이 다가가 이미 체온이 떨어진 손을 잡았다. 그리고 언니의 귀 가까이 대고 불러보았다. ~~언니~~ 그녀는 잡고 있는 내 손 바닥에 자신의 손톱으로 신호를 보내왔다. 그리고 반쯤 감겨 있던 눈에서는 뜨거운 한 줄기의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나는 언니의 볼을 나의 따뜻한 손으로 한참을 어루 만져 주었다. 그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자리를 뜨지 못하는 나를 남편이 언니로부터 조용히 떼어냈다. 그리고 언니를 위해 남편과 나는 마지막 느낄 그녀의 체온이 있는 손을 붙잡고 셋이 간절히 하늘 나라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언니를 위해 하나님께 간청했다. 이곳에서 주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살았지만 그녀를 불쌍히 여기시고 모른다 하지 마시라고 흐느끼면서 기도를 했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다시 몇시간 운전을 하여 우리의 목회지로 내려왔다.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언니가 돌아 가셨다는 기별이 언니의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들려왔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가서 선배 언니의 남편과 슬픔을 같이 나누며 위로하고 싶지 않았다.

 

그후로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지금이라도 인일 선배 언니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곳 머나먼 타국 땅 미국이라는 나라에 평생을 같은 길을 걸을 한 남자를 믿고 이곳에 와서 짧은 생애를 혼자만의 고뇌로 얼마나 내색도 없이 삭히며 살다 떠났는지는 언니의 병을 보면 알듯 했다. 너무도 외롭게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컴컴한 골방에서 혼자 떠난 언니의 마지막을 한국의 가족과 어린 시절 언니의 친구들에게 변선배가 소리 없이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고 나의 맘속에 정겨운 선배 언니로 영원히 살아 있음을 말해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