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학생

                                                                    박미산


  대학원 첫 수업 때였습니다. 지난밤 내내 잠을 설쳤던 탓에 5분정도 지각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원하던 대학에서 공부한다는 설레임과 젊은 친구들을 따라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 학비 등등 때문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늦잠을 잤던 겁니다.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학교로 오는데 길은 왜 그리 막히는지, 강의실은 왜 이리 미로 같아 찾을 수 없는지......  진땀을 닦으며 창문으로 강의실 안을 들여다보니 다행스럽게도 교수님이 안계셨고, 나는 안도의 숨을 쉬며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학생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고, 순간 고요한 정적이 흘렀지요. 고요함을 깨며 나는 자리에 앉았고, 잠시 후 교수님이 들어오셨습니다. 강의실 안이 술렁거렸습니다. 학생들은 40대 후반에 진학한 나를 교수로 착각했던 겁니다. 이러한 해프닝은 학기가 바뀔 때마다 일어났습니다.

  나는 큰 딸과 같은 나이의 학생들과 공부했습니다. 큰 애는 내가 석사 3학기가 되었을 때 대학원에 들어왔지요. 우리는 될 수 있으면 서로 겹치지 않게 수업시간표를 짰습니다.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가 학생들이나 교수님들께 알려지는 것도 피하고 싶었고, 페이퍼를 발표할 때마다 지적당하는 상황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전공은 다르지만 같은 문과대였기 때문에 나와 딸은 자주 마주쳤습니다. 다람쥐길이나 국제관에서 마주쳐도 우리는 서로 모르는 척 같이 수업 받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러가기도 하고, 다음 수업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대학원 수업은 대개 소논문을 발표합니다. 소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수업 받는 학생들이 서로 신랄하게 지적합니다.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면 학점은 물론 페이퍼를 다시 쓸 경우도 생깁니다. 저와 같은 젊은 동기생들은 짧은 시간에 자료준비와 페이퍼를 작성하는데 반해 나는 한 달 정도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일단 노트에 쓰고, 그 글을 하루 종일 독수리타법으로 컴퓨터로 작성해서 발표함에도 불구하고, 토론문화에 익숙하지 못했던 나는 학기 초에 질문이 나오면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벌렁거려서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방송대는 교수님이 주로 강의로 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토론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지요. 그러나 점차 학기가 올라갈수록 단련이 되었습니다.

 방송대 4년, 석사를 졸업하고 박사 수료 6년. 뒤늦게 시작한 공부가 10년째입니다. 그동안 28년 동안 모시고 살던 시어머님의 치매가 점점 심해져서 공부를 중도 포기 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형님의 주선으로 시어머님을 노인병원에 모셔놓고 논문을 쓸 수 있었고, 등록금은 학자금융자와 장학금으로 충당했습니다. 나는 강의를 할 때마다 나이 지긋한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지금 이 수업은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인생의 도약을 위한 출발점입니다. 어떠한 난관이 닥치더라도 절대로 중도포기하지 마세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