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따라서 우리 식구가 몸 담은 한인 이민교회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평범한 교회분위기가 아니었다.
교인 중 80% 이상이 국제 결혼 가정으로 대부분이 한국 주둔의 미국 군인들을 따라 들어온 가정들이었고 나머지 교인들은 그들이 초청한 가족들 그리고 몇 가정은 유학생 가정들이 있었다.


첫 목회지를 목회 경험없이 그곳에서 시작하면서 살아오는 동안 나와 비슷한 환경들끼리만 어울렸던 지난 날들은 부족함이 없었던 나의 복 받은 세월이었음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했다.


이중문화 가정의 한국부인과 같이 따라서 교회를 나오는 외국인 남편들과 한국말을 모르는 자녀들을 위해 남편은 예배도 한국설교와 영어설교를 같은 내용으로 준비 해야만 했다.


어느날 예배 후에 나는 남편의 부탁으로 노인 권사님들을 목사 사무실로 모시고 들어갔다. 50대의 교회의 권사님들을 처음 목사 사무실로 불러 서류에 자필로 기입할 일이 있었는데 그 권사님들은 펜을 손에 쥐고 고개를 숙인채 요지부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눈치를 못챈 남편은 반복해서 빨리 써서 달라고 재촉을 했다. 하지만 한글을 모르는 그들이 아무리 크게 불러 준들 쓸리는 만무였다.


그렇다고 한글을 모른다고도 안한다. 신기한것은 그분들은 암기력과 화술이 뛰어나서 누가 봐도 무학이라곤 전혀 생각을 못한다. 성경 귀절도 한번 들으면 줄줄 외우고 기도도 어려운 문자를 넣어서 거침없이 술술 잘 한다. 사용한 문자의 뜻을 아는지는 모르지만 외관상으로는 멋을 한껏 부린 세련된 교회 직분자들이다. 그리고 교회 봉사도 몸 안 아끼고 얼마나 헌신적으로 하는지~~ 글은 몰라도 직분을 감당함에 충실하다. 또한 전도도 열심히 해서 열매도 잘 맺는다.


그 일 후에 나는 그들을 각자 개인적으로 한글을 가리켜야만 했다. 그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다른 사람들이 알기를 원치 않고 독선생 해주기를 바라는 바람에 가가호호 시간을 맞춰 다녀야만 했다.

그리 공들여 가리킨 보람이 있어 시간이 지나니 주보도 잘 읽고 찬송도 잘 부르고 자신감들이 생겼다. 특별히 생일 카드에 사모 이름을 친필로 써서 줄 때는 눈물이 다 핑 도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끈끈한 사랑으로 묶여졌다.


어느 때는 설교를 하면 걱정이 그들이 어려운 성경 낱말들을 얼마나 알아들을지 궁굼하기도 했다.

한번은 설교 중에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날 교인 한분이 성전을 나오면서 나에게 심각하게 ~~ 사모님! 고슴도치도 그런 생각을 다 하는군요~~ 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이해력에 할 말이 없었다.


우리 교인 중에 방 할머니라는 분이 계셨다. 그분은 딸이 이곳에 미국분하고 결혼을 해서 남편은 직장을 다니고 부인은 미장원을 하고 있었다. 두 부부가 모두 일을 하니 아이를 맡길데가 적당치 않아 친정 어머니를 한국에서 모셔왔다.


그 할머니는 한국에서도 노점 장사를 하며 고생을 많이 하신 학력이 없는 노인네셨다. 성격이 얼마나 화통하시고 놀기를 좋아하시는지 노인네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인기가 대단하신 분이셨다. 교인들 모임에 그분만 참석하면은 그날 모임은 완전히 코메디언을 게스트로 초대해온 분위기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교인들을 심방할 때는 가끔씩 운전을 못해 집안에 묵여지내는 노인네 교인들을 바깥 바람이라도 쐬시게 할겸 교회벤으로 모시고 심방을 다니곤 했다.

헌데 방 할머니는 한국에서도 교회생활을 전혀 안해보신 분이셨다. 늘 그분은 심방이 끝나고 돌아 올 때면 운전대를 잡고 달리는 목사님에게 꼭 제안을 하신다. ~~목사님 기름 잔뜩 넣어 드릴테니 우리~~ 집에 돌아가지 말고 밤새 돌아 다닙시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경공부로 교인집에서 모이고 서로 헤어질 즈음에는 꼭 하는 한마디 ~~목사님, 그냥 가시지 말고 고 스톱이나 한판 치고 가시지요~~ 라며 신발 신으시는 목사님을 붙들고 사정을 하는 모습에  모두를 폭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방 할머니가 어느 날 드디어 큰 사건을 만들었다.

어느날 딸이 시간이 없는 관계로 시장을 봐다가 문 앞에 들여놓고 엄마보고 대충 정리 좀 해 달라 이르고 자기는 직장으로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저녁에 집에 돌아왔는데 온 집안이 독한 바퀴벌래 소독약 냄새가 진동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 이게 무슨 냄새야?~~ 하고 소리를 지르니 방 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나오면서 하시는 말씀이 ~~얘야 나는 빨래 풀 먹여 다린 일 밖에는 없다~~ 하더라는 것이었다.

해서 딸이 다림질한 옷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냄새를 맡아보니 몇벌의 다림질해 놓은 옷들에서 바퀴약 냄새가 진동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방 할머니는 그 약통이 옷에 풀먹일 때 쓰는 것인줄 알고 그 독한 스프레이 한통을 몇 벌의 옷에 모두 뿌리고 데려서 옷 걸이에 잘 걸어 두었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왜 이리 골이 아프냐며 방에 들어가 누워 있었다는 것이다. 딸이 놀래서 창문 마다 모두 열고 공기 환기를 시키고 옷을 빨고 난리도 아니였다고 했다.

그리고 딸이 그날 저녁을 하러 부엌에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영어를 못 읽는 할머니가 클로락스를 냉장고 우유 넣는 칸에 떡하니 모셔놓고 쥬스는 식품 보관 창고에 집어 넣어 놓고 빨래 풀 먹이는 스프레이는 화장실에 가 있고 정말로 미칠뻔 했다는 것이었다. 정말 요즘 유행하는 유행가 가사처럼 ~~미쳤어~~미쳤어~~라고 했다.


그날 오후 내내 딸에게 퉁박을 받은 할머니는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어제의 실수로 미안한 마음에 출근하는 사위를 위해 아침상을 한상 떡 부러지게 차리셨는데 아침의 메뉴는 몸에 좋다는 현미밥과 큰 대접의 철렁 철렁 담은 미역국에 생선에 김치에 차려 놓으시고 미국 사위에게 한국말로 하시는 말씀 ~~빈 속으로 일 가면 몸 배린다~~ 꼭 한국 사위에게 하시듯이 한국말로 다정하게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었다.


그 할머니 딸의 말에 의하면 방 할머니는 아침을 차리지 마시라고 누누이 말씀 드려도 굳이 남편을 빈속에 내 보내면 못 쓴다며 ~~아침을 잘 먹어야 하는거여~~ 하시면서 계속 아침상을 차리셨는데 몇번은 사위가 먹는 척을 했는데 나중엔 사위가 서툰 한국 말로 ~~오~마 미여구~므시어 (엄마 미역국 무서워)~~ 했다는 것이었다. 외국인 중에는 동양 음식을 잘 먹는 사람들도 많지만, 색이 검은 김이나 미역국 혹은 자장면을 선입견 때문에 선뜻 못 먹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방 할머니의 딸을 통해 이야기를 듣던 교인들은 숨이 멎을 정도로 웃고 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방 할머니는 어려운 시절의 생활고를 겪으신 인정 많은 한국의 어머니셨다. 늘 교인들을 만나면 꼭 밥 먹었냐고 물어 보시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 싶어하는 한국의 평범한 인정이 듬뿍 배어 있는 우리들의 어머니 모습이었다.


교인들 대부분이 한국에서의 어려웠던 환경의 아픔의 상처들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 속에는 사랑으로 녹여 줄 수 있는 연약한 심성이 잠재하고 있었다. 성경 말씀을 이론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그들이지만 예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몸소 목회자가 몸으로 보일 때 목회자 뒤에서 새끼 오리들 처럼 졸졸졸 따라오는 그들은 목회자를 그대로 보고 행하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었다.

자식을 키우며 희노애락을 겪는 것처럼 그들로 인해 어려운 일들도 많았지만 또한 우리는 가끔씩 배가 아프도록 웃을 수 있었음에 늘 그런 착한 양들을 맡겨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한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