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에 2주간의 일본여행과 1주간의 네팔여행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오랜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떠난 남편과 기러기가족 생활을 한지도 벌써 6년이 지나
3개월 안식을 갖게된데다, 나도 그동안 하던 일을 정리하고 한국에서 또다른 삶을 계획하는 시점에 오게 되었다.
그사이,호주나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머리에 떠올리고 있을때
동경에서 40년간 화가로 활동하는 남편친구 김씨가
자신이 3년째 주관하는 네팔 그림그리기 여행을 같이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것은 네팔의 안나푸르나 지역의 산골 나우리곳에서 초등학교 학생들과 같이
그림그리는 프로그램인데, 150명의 주민중 학교의 학생은 35명 정도.
이 산밑의 고방이라는 마을에는 100가구에 학생이 100명 정도되는 오지이다.
1년에 한번씩 외부에서 20여명의 사람들이 와서 하는 이 프로그램은 이 마을의 최고의 날이며
온 주민이 나와 축제를 벌이는 날이다.
모험심과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이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 것이라고 종용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2월 초 일본 동경에서 만나 2주간 여행하고
2월 14일, 그날이 바로 발렌타인 데이 였지. 방콕을 거쳐 네팔을 여행하게 되엇다.
그러나, 나리따 공항에서 만난 일본인 그룹은 주로, 화가, 미술선생님, 음악가, 약사, 은퇴한 유치원 선생님, 산악가,등
여러 분야의 나이든 사람들이고, 아주 친절했지만 아주 간단한 영어도 소통이 안되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김씨의 통역을 통해서만 모든 것을 해결해야했다.
네팔의 수도 카드만두에 도착해 우리가 하루 묵은 곳은 sunset view hotel.
일본 여자가 이곳에 왔다가 네팔인 Arjun 을 만나 결혼하여 운영한다는 이 호텔은
그래서인지, 일본식으로 정원이 아주 아름답게 가꾸어져있고 , 높은 지대에 있어서
시내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좋은 곳이었다.
로비에도 주로 일본책이 많았고, 방명록을 보니 주로 일본인이 숙박한 기록이라
간혹, 영어와 한국어도 보일때면 너무 반가왔다.
우리는 유엔 지정 문화유산지라는 patan 이라는 곳을 걸어 나가며
뿌연 흑먼지를 일으키면서 빵빵 대는 오토바이족들과, 택시들의 질서없는 혼잡길을
간신히 빠져나가야 했다.
와, 수없이 많은 불교와 힌두교 신전과 동상들.
인구의 90%가 불교와 힌두교라니 이해도 되지만,
자신의 안녕과 복을 비는 인간의 원초족인 욕망이 이렇게 진지하고 무서운 것일까?
월요일 아침 우리는 Buddha 비행기로 40분간 이동해 포카라에 도착했다
소형비행기라 낮게 떠서 히말라야의 깊은 계곡과 산 절벽이 그대로 또렷이 보인다.
저기 everest 가 보인다고 망원경을 들이대며 흥분하는 사이에 포카라에 도착했고
우리는 다시 이곳에서 또 5인용 헬리콥터를 타고 높은 지대로 이동해야 한다.
활주로를 달리지 않고 그대로 곧장 위로 오르는 헬기.
처음 타보는 것이기도 했지만, 모든 시설이 5,60년대에 준하는 이곳에서
과연 이 헬기가 안전하게 내 생명을 이동할까 하는 두려움과,
산 바로 위를 나르기 때문에 태고의 산 계곡과, 호수와 눈산 등 기가 막히게 펼쳐지는
자연의 경관앞에서 숨이 막힐 정도였다.
눈산이 바로 앞에, 안나푸르나 계곡은 손을 뻗으면 그대로 잡힐 듯한 깊은 절벽과 계곡의 진상이
그대로 펼쳐진다.
이 헬기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이 속속들이를 어떻게 추적할수 있엇을까
그리하여, 대대로 살아온 이곳 조상들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자연의 신비앞에서
멀리서만, 그렇게 많은 신을 만들어 숭배하고 경외하는 종교가 생긴 것이겠지.
인간의 외소함과, 신의 위대함.
저 멀리 산 꼭대기의 빨간 지붕의 그림같은 집.
마치 이곳에서는 궁궐처럼 보이는 집이 우리가 도착하여 묵을 호텔이란다.
해발 2,650 미터.
믿기지도 않게 헬기는 가볍게 이 집 모래마당에 내려 앉는다. Thasang village, Nauricot.
2명의 원주민이 우리를 환영하며 문앞에서 북을 치고 있는데,
남편은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들 앞에서 장단 맞추며 덩실 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Namaste.
카드만두의 sunset view hotel 을 소유한 Arjun 이라는 네팔인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햇빛에 검게 그을린 모습만 빼면 꼭 한국사람같다.
우리가 일본말을 모른다고 하니까, 영어를 조금 한다고 하면서도
웬만한 내용을 설명하고 안내하는데 별로 불편이 없었다.
아, 이제 가슴이 트이는 것 같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의 답답함과 외로움.
또 이 호텔의 메니저가 영어를 잘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 꼭대기의 산에다 어떻게 이렇게 멋있는 집을 지었을까?
돌과, 통나무와 대리석.
그에 의하면 4년에 걸쳐 (우기때는 공사를 못하기 때문에 1년에 6개월만 공사를 한다고 한다.)
Mule 로서 모든 재료를 운반하였다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여장을 풀고 Arjun 의 안내로 마을을 걸어나갔다.
조그만 산비탈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있는 시골집,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갈수 있는 낮은 천장의 집안은 전기도 없이 정말 깜깜하다.
외길 중간에서 만나는 소뿔소 무리들이 우리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오히려 길을 비켜주고
꼬마 아이들이 나와 만날때마다 나마스떼 하며 인사한다..
마을 꼭대기로 올라 갔을때 나타난 곳은,
히말라야의 많은 봉우리들 중에 6번째로 높다는 8,100 미터의 다울라기리.
정말 엎드리면 닿을 것 같은 거리의 눈 산봉우리, 그 밑에 이어지는 절벽.
중간 중간에 신전이 조금 보이고, 가늘게 떨어지는 폭포 물줄기.
우리는 이 전경을 코앞에 두고 마른 풀밭에 털썩 주저 앉아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침묵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거대한 자연 앞에 잠잠히.
나무들은 앙상한데도 꽃이 피어있는 것이 신기하고 반짝이는 햇살만이 모든 주위를 clear 하게 비춘다.
이곳 저곳에 검게 탄 조각들이 있는 것을 보니 제사를 지낸것 같은데
두개골에 연결된 염소의 양쪽 뿔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나무사이를 헤집는 사각거리는 바람소리을 들으며, 해 떨어지기 시작하면 곧 추울것이라는 말에
우리는 호텔로 내려왔다.
네팔인의 극진한 서브로 Nepali full dinner 를 먹고 또 Buckwheat Tea (메밀차)를 마시면서
우리들은 이곳에 올라온 소감들을 나누었다. 물론 우리는 김씨의 한글 통역을 통해서.
또 한 젊은 일본인이 jomsom 에서 7시간을 트레킹하여 이곳에 숙박하러 왔는데 이름은 마모르.
이 잘생긴 35살의 방랑자는 마치 20대 초반의 대학생으로 보일만큼 상큼하고 성격도 명랑하여
영어도 조금 구사하는 바람에 우리와 금방 친해졌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이런곳에 오래 머물 수 있는지 모든 것이 궁금하였는데,
부인은 일본 기독교 단체의 후원으로 이 곳 네팔의 재소자 (prisoner) 의 어린이들을 돌보는 간호원으로
와 있기 때문에, 자기도 조각가로 활동하며 이곳을 트레킹한다는 것이다.
7년전에도 자기 부인과 함께 안나 푸르나 트레킹을 했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녁후, 우리는 내일 마을 학교 어린이들과 같이 부를 SOUND OF MUSIC 의 도레미 송을 돌림노래로 부르고
"둥글게 둥글게" 라는 노래를 연습했다. 말은 틀리지만 음악은 UNIVERSAL LANGUAGE 라더니
같이 노래부르는 사이 서로가 마음으로 통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룹중에 클래식을 전공한 소프라노 아가씨가 있는데, 푸치니의 라보엠 중 나오는 아리아와,
또 "그리운 나의 아버지" 를 열창함으로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PHANTOM OF OPERA (일본에서는 괘인 이라고 번역해서 공연하는 것 같다) 에서도 주인공 역할을 했지만
이제 그만두고 이태리로 음악공부하러 떠날거라는 아름다운 아가씨
내가 일본말을 좀 했으면, 아니 이들이 조금 영어만 했으면 정말 좋은 사귐이 될만한 사람들이었다.
밤에는 그룹으로 나누어 내일 학교에서 진행할 프로그램을 준비하였는데
그림에 소질이 없는 나는 색종이 접기와 공작반에 들어가 참가하였다.
이곳은 중앙난방이 없고 밤에는 전기가 안들어 오기 때문에 회중전등을 옆에 두고,
뜨거운 물병을 가슴에 안고, 두꺼운 양말에, 내복에, 스웨터로 무장한 후 침대에 들었다.
6시에 SUNRISE 가 장관이라는 말을 듣고 두꺼운 코트와 목도리로 완전 무장하여
눈만 빼꼼히 내놓고 옥상에 올라가 새벽별을 보면서 싸늘한 아침공기를 아하........
그것도 잠깐, 속이 메쓰거려 방으로 들어와 누워버렸다.
이것이 고산병이란 것인가?
물을 많이 마시고 푹자면 나을 거라는 일반적인 처방에도 아랑곳없이 두통과 구역질은 계속되었다.
빈 속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물 밖에 없는데,
계속된 구토로 나중에는 위속의 노란 쓴 액체까지 토해내며 탈수상태로 이어졌다.
오후가 되어서도 호전되지 않자 우리는 밤이 되기 전에 낮은 지역으로 이동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LIG 여행보험에서는 5,000 불이 드는 긴급 헬리콥터는 커버가 안된다고 하여
할수 없이 산소 호흡기가 있다는 1시간 떨어진 JOMSOM 병원에 가기로 하였다.
JOMSOM 에서 JEEP 이 오려면 1시간,
남편은 부랴부랴 짐을 챙기고, 저 산밑의 마을에서 나를 이송하려고 온 네팔인은 맨발의 슬리퍼 차림이었다.
해는 어둑어둑 지려고 하고 비가 한방울 씩 떨어지는 가파른 시골길을 부축 받으며 한발 한발 떼었던 25분간.
말이 통하지 않은 네팔인이었지만, 그는 나를 위로하느라 콧노래도 부르고
구토로 땅에 쪼그리고 앉을라치면 어깨를 붙들어 도와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상이 없는데, 왜 나만 이 고산증으로 프로그램 참석도 못하고 철수해야 하는지
한심함과 참담함이 가슴을 눌렀다.
드디어 JEEP 이 도착했을 때는 주위에 아무것도 안보이는 깜깜한 밤이었다.
울퉁불퉁한 돌산길을 덜덜거리며 달린 1시간,
의자 뒤로 젖힌 내머리는, 차가 하도 JUMP 하기 때문에 천정이나 창문에 부딪치기도 하여
할 수 없이 고개를 꽂꽂이 세우고 있어야 했다. 주위에 불빛이라고는 차의 FRONT LIGHT 뿐.
옆을 보니 희미하게 강이 흐르르는 것 같은데 그야말로 절벽인 것 같다.
이 와중에도 나는 JEEP 이 핸들을 잘못 틀거나 벽에 부딪치면 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다는 공포감에,
생명의 순간성을 절감하면서 아직 죽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에 사로 잡혔다.
그분의 손에 나의 생을 맡긴다는 믿음은 어디로 갔는가?
지금 나의 생이 끝난다면, 나는 떳떳하게 부끄럼없이 그분을 대면할 수 있을까?
아 아,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고마운 것은 호텔 메니저 산토스가 통역을 위해 이 먼 길까지 동행해 준 것이었다.
드디어 JOMSOM 병원에 도착하여 보니, 이곳은 내 상식에 있는 병원이 아니라
6.25 동란때 군인이 쓰다 버리고 간 막사 같은 곳이었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 누워 있으니 두통은 가시었는데, 구토증은 계속되어 괴로왔다.
조금 있더니 NEPALI 의사가 와서 내 증세를 보더니 탈수가 심해 IV 주사를 맞는 것이 좋겠다 하여
링겔을 꽂고 길고 긴 하루밤을 보내게 되었다.
다행히 의사는 영어도 하고 친절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어 안심이었으나
문제는, 내일 아침 포카라로 떠나는 비행기에 좌석이 없어서 모래까지 기다리거나, 아니면
JEEP 을 타고 7시간을 덜컹거리며 가야하는 것이었다.
열악한 환경의 빈민병원, 화장실도 가기 힘들고, 어서 빨리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한밤중에도
간호원은 수시로 링겔병을 체크해 주었던 고마운 사람들.
아침이 되어 어제 네팔 의사가 와서 퇴원해도 좋다는 진단을 내렸지만 비행기 좌석이 없으니
하루를 더 있을까 고민하는 중에 어떤 사람이 급히 달려 오더니 비행기의 좌석이 확보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THANK GOD!!!
우리는 급히 짐을 싸서 퇴원 수속을 밟아 (병원비가 3,000 루피라니, 40불인 셈이다. 세상에 이렇게 싼 병원비라니....)
택시를 불러 공항에 도착하니 15인승의 소형 비행기가 떠나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토스가 아마, 환자가 가야하는 상황이라고 요청한 끝에 아마 다른 사람이 우리를 위해 좌석을 포기한 것 같았다.
20분간의 비행 속에서 또 한번 토하고 포카라에 도착하니,
산토스의 주선으로, ARJUN 의 자매가 운영하는 모나리자 호텔에서 사람이 마중나와 우리를 호텔로 데리고 갔다.
간신히 호텔 방에 들어가 구토 가라앉히는 약을 먹고 잠을 청하니 이제는 죽음의 고비에서 벗어 났다는
안도의 숨과 함께 그동안의 숨막히는 상황들이 빠르게 머리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틀간 아무것도 못 먹고 구토만 하던 괴로움의 터널이 아득하게 느껴지면서
생명의 연장을 허락하신 그분께 감사 드릴뿐....
자연 앞에 설때 비로소 작고 보잘것 없는 나 임을
느끼고 조물주앞에 무릎을 끓을수 있는듯~~~
인옥 후배 글을 읽으면서 어찌 잘 묘사를 했는지
같이 고산증세를 느끼며 네팔의 안나프르나 히말라야의
고산지대를 헬기로 돌며 같이 진동의 충격에 멀미가나네요.
진짜 표현 문체들이 살아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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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늘 아침은 무엇이 먹고 싶다.
식욕이 난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겠지.
!호텔식당에서 CONTINENTAL 아침을 먹고 여행사에 연락해 영어가이드가 딸린 택시를 불러 포카라를 TOUR 하기로 했다.
WHAT A DIFFERENCE BETWEEN TODAY AND YESTERDAY !!!
어제는 땅속으로 기어들어갈 것만 같은 초죽음이었는데,
오늘 아침은 너무나도 상쾌하고 청명한 하늘빛으로 몸이 날아 갈것만 같다.
참으로 신기하고 감탄할 만한 인간의 몸이다.
인구 30만이 사는 포카라, 6개의 호수가 있고 따듯한 기후와 절묘한 자연환경으로
히말라야 트레킹하는 사람들이 거쳐가는 관광도시.
티벳인이 모여사는 사원에 들어가 까까머리 소년들이 벽돌색의 수도원복 옷을 반쯤 두른채
열심히 마당을 청소하고 있다.
그 옆의 HANDCRAFT 하는 작업실에서는 여인들이 베틀앞에 쪼그리고 앉아
능란한 손을 놀려 하나 하나의 실을 엮어서 카펫을 만들고 있었다.
와, 이 지루하고 단순한 노동력이 한달을 걸려야 조그마한 방석이나 RUG 가 생산된다니 !!!
순수 HANDMADE 라 당연히 값이 비싸겠지만, 이 상품이 티벳인의 자유를 되찾는 일에 쓰인다고 하여
기꺼이 100불을 주고 부억용 작은 RUG 를 샀다.
하루의 관광 일정이 끝나 택시를 돌려보내고, 호수가를 따라 늘어있는 상점가를 걷고 있는데
옆으로 지나가는 JEEP 안에서 HELLO 하고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 THASANG VILLAGE 에서 만났던 일본인 마모르가 우리를 보고는 반가와서 소리치는 것이다.
어머나, 이곳에서 또 만나다니. .... 그는 우리와 JOIN 해도 좋으냐고 묻길래 물론이지 라고 했더니
신이 나서 JEEP 에서 베낭 하나를 꺼내 들러메고는, 운전수에게 1,000 루피를 건네고 BYE 하여 우리와 합류했다.
정말 놀라운 만남이었다. 여행자는 타국에서 이렇게 만나고 가까와지나보다.
그는 내가 고산병으로 떠난후 많이 걱정했다며 다시 살아난 나를 보고 기뻐했다.
그는 우리 그룹들과 초등학교에서 이틀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JOMSOM 에서 오늘 아침 JEEP 으로 7시간을 달려
이곳 포카라의 부인 숙소가 있는 곳에 온 것이란다.
우리는 저녁에, 마모르와 부인 세오리를 불러내어 한국 음식점에서
오랜만에 돌솣비빔밥과 참치김받, 보쌈, 불고기 등을 푸짐하게 먹었다.
요즘 일본인들도 한국 김치를 좋아한다더니, 그들은 한국 음식을 너무나 맛있게 먹었다.
7년전에도 네팔 트레킹을 했다는 마모르와 세오리 부부.
이들은 천성적으로 맑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들로서 살벌한 경쟁사회에서 떨어져
자유을 만끽하며 이곳 네팔에서 부모없는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는 것이다.
세오리는 PANIC DISORDER 와 DEPRESSION 으로 오랫동안 약을 먹고 있는데
같이 일하는 동료로부터 기독교를 알게되어 이제는 신실한 신자가 되고 싶단다.
모든 사람이 성공하고자 달려가고 있는 이 세대에 어떻게 이런 후진국에 와서 봉사를 하게 되었느냐고 묻자,
MAYBE I AM TOO WEAK IN THAT WORLD. I AM SO HAPPY TO BE HERE HELPING CHILDREN.
그렇다. 경쟁사회가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베푸는 것은 아니다.
세오리처럼 가냘프고 연약한 마음의 소유자에게, 경쟁사회는 너무나 가혹하고 비인간적이다.
세오리는, 전기도 수도도 없는 이 시골의 열악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물동이를 어깨에 이고 나르는 아이들이
너무나 존경스럽다고 한다. 남을 통해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큐슈에서 태어난 세오리가 호카이도에 간호공부를 하러 갔다가 현재의 남편 조각가 마모르를 만나
결혼하여 이곳에서 봉사하고 있는 이 젊은부부의 인생 이야기.
나는 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부인을 지원하기 위해 네팔까지 온 마모르는 정말 코믹하고 낙천적인데,
( 어쩌면 오랫동안의 약 복용으로 이기를 낳지 못할수도 있지만 ) 아기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자기는 꿈을 꾸는데, 어느날 아침 갑자기 조그만 아기가 자기 옆구리에 베게를 가지고 나타나
HI, MOM. HI, DAD 하면서 같이 잠을 자게 되는 꿈이다.
이 얼마나 낭만적이고 낙천적이면서도 부인을 배려하는 발상인가?
마모르에게 앞으로 네팔 봉사가 끝난후 호카이도에 가서 살게되면
그때 우리가 너희부부를 방문하겠다고 했더니
/OH, YOU ARE SO MUCH WELCOME. I WILL PREPARE A BIGGER TENT.
앞으로 계속해서 사귐을 갖고 싶은 즐거운 만남이었다.
그 다음날 일본인 그룹이 학교 프로그램을 마치고 포카라에 내려와 우리와 죠인한후
카드만두에 도착했을때 ARJUN 이 나를 보더니 YOU REALLY NEED AN INDIAN YOGA.
YEH, YOU ARE RIGHT. 갑자기 나의 모습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남편은 마모르와 같이 한달간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고 싶다고 그곳에 남았다.
난 요거이가 젤로 반갑구만.
에구 인옥이 그렇게 오래 미국에 살아서 우리들이 빨리 요즘 말로 이야기 하면 그거 무슨 뜻이야 하고 묻더니
우째 이리 글을 잘 쓰니?
정말 내가 거기 있는 것 같구나.
울렁거려요 고산병.
나머지 글들과 사진들도 기다릴게.
참 너다워서 좋은 부분
<남편은 마모르와 같이 한달간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고 싶다고 그곳에 남았다.>
것 봐라 친구들~ 징징대지 마시고~~~!!!
덕분에 네팔에 대한 공부 많이 하겠됬어.
전에 한겨레신문에 박범신의 "나마스테"라는 소설이 연재됬었지.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
상상만 해 보던 네팔을 네 덕에 가 본듯 하구나.
어쩌면 이리도 생생하게 상황묘사를 잘 하는지....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네 글에 매료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나도 다음 이야기를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단다.
계속 이어 쓰실거지?
(나는 2주일 동안 다녔다는 일본 이야기도 궁금한데.....
아직 일본은 한번도 안 가봤거든.
네팔 여행기 다 쓰고 나면 일본 여행이야기도 들려주셔)
요번 여행은 네가 특별한 감동을 받았구나
혹시 다음 인생 계획은 네팔에 가서 현지인을 도우면서 살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동안 기행문 좀 쓰라고 하면 다 잊어버리구 못써 하더니 갑자기 특별한 은사을 받았나
감동 그자체다.
일본은 어땠니? 그 곳이야 말로 많은 종류의 신을 섬기잖아.
어제는 남편 선배분의 칠순잔치에 갔다왔는데
이제는 그나이도 피부로 느껴지면서 하나하나 눈여겨 보고 다복하고 건강한 모습에 진심으로 축하도 보내구왔다.
그곳에서 또 다른분의 결혼적령기를 넘은 딸을 걱정하는 분이 있었어
네 남동생 생각나더라 남동생 이메일을 내게 알려줘
집안이 크리스찬이면 좋겠다고 하더라.
항시 건강하고 멋진 글 부탁합니다.
멋진 인옥아, 글고마워.
늘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서 범상치 않았지만
역시 ~ 역시다.
총회때 보고싶었는데 ...
다음에 한국에 오면 얘기해줘~!!!
선배님들, 영주 선배님, LA 동창회에서 만난 칠화, 은열언니, 피아노 잘 쳐서 부러운 명옥언니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친구들, 성원해 주어서 고마워.
설경이의 수고로 동창회 사진을 보며 나도 참석한 듯 반갑다.
사실 평소에 글을 써보지도 않았고 또 오랫동안 한글을 쓸 기회가 없이 살다 보니
인일 홈피에서 댓글 몇자 쓰는 것도 쉽지 않게 느껴졌는데,
그래도 사람의 감성은 대개 비슷한지, 작가들의 글들을 읽으면서 어쩜 이것은 내마음과 똑같지?
하고 감탄할때가 많더라.
그런데 어쩌지? 네팔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인데.
요 짧은 글 쓰는 데도 사실, 마음뿐이지 간혹 단어가 생각이 안나서 끙끙거렸지.
여행을 다녀보면 결국 사람사는 모습은, 문화와 자연환경이 다를지라도, 거기에서 거기가 아닐까 라는
시시한 생각을 할 때가 있엇는데,
이번 네팔여행은 특이한 경험과 함께 내게 너무 강렬한 감동으로 다가왔는지 글이 쓰고 싶어진거야
나우리곳에 도착한 그 다음날부터 아프기 시작했으니 프로그램은 하나도 참석 못한거지..
나 때문에 남편도 하루 참석하고 철수해야 했는데, 나중에 포카라에서 내가
"이제 네팔은 이것으로 첫번이자, 마지막 여행이지." 그랬더니
"당신이 하루라도 참석하여 마을의 어린이들과 부모들이 모두 나와 벌이는 축제의 분위기를 느꼈어야 했는데"
하며 아쉬워 했다.
트래킹 하는 사람의 말로는, 만약 트래킹해서 올라갔다면 서서히 몸이 적응되기 때문에 괜찮았을텐데
헬기를 타고 갑자기 올라갔기 때문에 고산증이 온 거라나.
아무튼 이번에 망신을 톡톡히 당하고 왔는데,
지금 집에서도 아들과 딸로 부터도 평소 운동을 안했기 때문이라는 핀잔을 받고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너무 혼나서 이제 네팔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머리속은, 언젠가 다시 일본의 김씨와 함께 한국인들로 구성한 그림 그리기 여행을 하는 꿈을 꾸고 있으니.
징징대지 말라고?
인옥아, 다음번 그림 그리기 여행에는 만화 잘 그리는 옥규도 넣고, 재줏군 신영이도 넣고...
사람들과 함께하는 인옥이 여행기는 읽는 재미가 아주 색다르구나!
옆에서 조곤조곤 얘기해주는 것같이 생생해서 흥미진진하게 보았다.
별러서 갔을텐데 프로그램에 참석도 못하고 아프기만했다는 부분은 듣는 나도 안타까워.
한달간 트랙킹하고 오시면 특별한 경험 간접으로라도 듣고 또 전해보렴!
신들의 세상 ...네팔에
인옥이도 다녀 왔구나...
몸 고생을 많이 했네...ㅠㅠ
우리처럼 트레킹이 아니고
바로 고지대로 올라가서 그랬구나....ㅠㅠ
아마 고소적응을 못해서 고소병에 걸린다는 것이 흔하게 접할수 없는 상황이라
괴롭기도 하지만
그 병에 대해서 아는것 없어서리....불안함이 더 컷으리라...
그렇지만 그곳의 특이함은
그렇게 몸과 마음이 고통스러웠지만
그곳만 다녀오면
무언가 모르는 어떤것이 마음 깊숙한곳에 자릴 잡고서
다시 그곳에 가야 한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이러나게 한다는 거지...ㅋㅋㅋ
그래서 난 이번 봄.
열심히 체력 훈련을 해서
에베레스트베이스캠프에 가보려 한다네......
그이유는
나도 또한 안나푸르나트레킹 했을때
그곳의 풍광과 네팔사람들의 따스한눈빛이
내 머릿속에... 내 마음속에.... 지울수 없는 잔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인거 같으...ㅋㅋㅋ
영희, 나타났네
네팔 여행하면서, 언젠가 영희가 올린 안나푸르나 트레킹 사진들이 떠올라
네 생각 많이 했어.
에베레스트 베이스 켐프를 또 간다고라?
진짜 산사람이네.
영희는 학교때부터 운동으로 다져진 체력이니까 문제 없을거야.
포카라에서 북서쪽이 안나푸르나, 북동쪽이 에베레스트
나는 포카라가 너무 정겹고 오래 머물고 싶은 도시로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봄에는 혹시 우기라 비가 많이 오는 때 아니니?
지금 계획은 3월26일날 출발 하려구...
그때 출발하면 우기는 아직 아니고....
안나푸르나 갔을때 5월1일날이 출발일이 었는데
살짝 우기시작이라 오후 3~4시 이후가 되면 거의 매일 소나기가 오더라..
그래서 이번엔 앞당겨 가는데
날이 정말로 좋왔음 하는 소망이야.
고소증상은
언제 어느때 누구에게 어떻게 올지 몰러....
정말로 천천히 걸으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여
우리몸이 고도에 적응할수 있도록 시간을 줘야해.
천천히...천천히...아...주... 천...천...히.
한걸음...한걸음...또 한걸음...
인옥아~
포카라라는 곳 말야...
참 마음이 가는 곳이지???
우리부부도 이것저것 주변 정리가 되면
포카라에서 좀 살아보구 싶단 이야기를 한적도 있어.
ㅋㅋㅋ이러다 나두 네팔사람 되능거 아녀???
정말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머무러 보고 싶은곳.....포카라!!!
집밖을 잘 나서지 못하는 나로선
으잉 나만 우물안 개구리 되는 것아니여?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참 멋지고 또 애썼다.
덕분에 그 곳을 생생히 떠올리며 언제 가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 그런 곳도 있구나. 하며 그 속을 배회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렇지 않아도 난 고산증상을 느낄까 괜찮을까/ 요 며칠 생각했었는데
그 고통의 기억이 생생한데도 그 곳을 그리워한다니
그 곳이 어떤 곳인가 상상으론 참으로 부족하구나.
옥규 말처럼 네 요 생생한 글을 읽으면서
내 눈에 제일 쏙 들어오는 글귀는
가끔 북한산을 오를 때나 그 근처를 갈 때 우리 인옥이는 지금 어디 있을까? 생각나더라.
혜숙이 말처럼 너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보고싶다.
정화야. 네 그 총명함 덕분에 중책을 맡게 되었구나.
네가 그일을 하고도 넘치는 능력의 소유자 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왠지 미안한 맘이다.
힘들 땐 혼자 꾹꾹 참지말고 언제든 sos 신호보내.
막강 12기 파워 언제 써 먹을래.
그라구 저 무재주여유~~~
아 어쨌든 참 좋다,
간만에 우리방이 환해져서...
우리 12기 모두들 쌩쎙한 모습 변치말자. 아자!
Namaste!!
내 영혼과 당신의 영혼이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