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너무도 슬픈 이별을 감당 해야만 했던 순간들이 잊혀 진줄 알았건만 아직도 가슴 한구석 에 아주 생생한 다큐멘터리 필름이 되어 돌아가고 있다. 봄과 여름의 계절 다툼으로 무더위가 시작되던 어느 초 여름날 나는 반갑지 않은 이삿짐을 꾸려야 할 생각으로 온 몸과 마음이 개운치가 않았다. 우리 부부는 보스톤에서 안식년을 나름대로 의미 있게 보내고 새로운 목회 지를 향하여 이사를 가기위해 그곳 창고에 맡겨 놓고 있었던 이삿짐을 정리 하느라 먼지에 온몸이 범벅이 된 채 짐들을 모두 이삿짐 운송 차량에 옮겨 싫고 있었다. 이사를 수없이 다녔으면 짐 나르고 쌓는 기술이 몸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어찌 가도 가도 이사하는 일에는 꾀만 늘고 행동은 갈수록 느려지고 천근만근 미숙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럭저럭 창고 2개를 빌려 틈도 없이 꽉 차게 방치해 두었던 짐의 태반은 남의 눈에는 쓰레기처럼 보일 듯한 잡동사니들을 그런대로 거의 이사트럭에 실어가고 있었다. 큰 딸이 이사 오던 날 우리에게 한 말이 있다. 엄마 아빠는 왜 책꽂이 같은 값도 안나가는 것은 끌고 다니고 그 보다 비싼 가구는 죄다 남을 주고 와서 창고 비용이면은 책꽂이를 더 많이 새로 살수 있는데 이해 할 수 없다고 불평을 했었다. 헌데 짐을 끌어 내다보니 나도 똑같은 생각으로 짜증이 엄청 나는 것이었다. 이사 트럭은 다행히 짐을 원하는 곳까지 배달해 주는 것이라 실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도 정한 시간에 빨리 실어야지 안 그러면 지불 액수가 점점 올라갔다. 트럭은 엄청난 사이즈인데 우리가 쓸 수 있는 공간은 우리가 비용을 낸 만큼 만이고 그 짐차는 몇 군데 더 들려 짐을 싣고 배달 지역으로 떠나 가까운 지역부터 내려놓는 이삿짐 전문 트럭이었다.

그런대로 일을 마치고 숨을 헐떡거리며 건물 한 쪽 그늘에 앉아 물을 마시며 쉬고 있는데 남편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딩카딩카 소리를 낸다. 무심코 전화기를 꺼내 맥없이 받던 남편의 목소리가 갑자기 반가움의 고음으로 금방 바뀌어 활기가 넘치는 것이었다. 전화를 건 상대편은 남편의 친했던 대학 동창이었다. 남편이 그리 반가와 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대학 졸업하고 몇 십 년 만인 몇 년 전에 우리를 수소문해서 찾았다는 그 친구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를 끝내고 미국으로 들어와 연락을 했을 때였다. 그때 연락 후에는 그 친구는 또 감감 무소식이었다. 처음 통화 당시 그 친구는 친했던 친구가 목사가 되었다는 현실에 흥분이 되어서 걸죽한 경상도 말투로 ~~니~ 우얀 일이고? 니~ 우얀 일이고?~~를 반복했다고 들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친구는 자기가 캐나다 켈거리에 현재 살고 있다며 자기 근황을 이야기 하다가 전화를 끝낼 쯤에는 지나가는 말로 자기가 좀 아프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 친구와 반가운 통화를 정신없는 중에 나누고 우리는 이사를 내려왔다.

새로운 목회지에 와보니 전 교인 중에 유색인종은 한사람도 없고, 동양인 우리 부부 두 사람 뿐이고 그 동네 주위에는 이민 온 사람들조차도 볼 수가 없는 동네였다. 밖에 나가면 안 돌아가는 발음이지만 열심히 혀에 버터 바른 듯 굴려야하고 한국말은 집에 돌아와서야 남편하고 대화 할 수 있었다. 어쩌다 교회에 큰 행사가 있어서 동네 사람들을 초대하면 그들은 우리 부부 모습의 신기함에 눈을 때질 못하고 어느 애는 나에게 다가와 어느 네일 싸롱에서 일하느냐? 묻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남편하고 그 근처 식당엘 갔는데 전혀 초면인 동네 사람이 반갑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같이 반가와 했더니 그의 반응이 우리를 안다는 것이었다. 해서 어찌 아느냐? 물었더니 ~~아! 너희들 저기 어느 동네 중국 부페집 주인이지?~~ 그의 엉뚱한 반가움에 우린 폭소를 했지만 한편으론 이방에 와 있다는 허전함이 마음 한 편을 채우고 있었다.

생소한 환경에 얼마만큼 익숙해져 가고 있으려니 다시 또 남편의 켈거리 대학 동창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남편에게 자신이 간암이라고 진단이 나왔는데 몇 주 후에 식구 4명이 우리 집으로 여행을 오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대환영이라고 그 친구의 방문을 기뻐하며 받아들였다. 그에게는 부인과 연년생인 대학1학년인 아들과 고교 졸업반인 딸이 있다고 했다. 친구의 전화를 받은 후에 온다는 날짜가 어느새 돌아왔다. 남편의 친구 가족들은 아틀란타 공항에서 내릴 예정이었다. 우리 사택에서 그곳 공항까지는 3시간 정도를 차로 달려서 가야 도착 시간에 맞출 수가 있었다. 우리가 그들을 맞이할 공항 안의 대기 장소에 도착 했을 때에는 조금 여유가 있는 시간이었다. 꽤 많은 마중 객들이 밑층에서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에 눈을 고정 시킨 채 모두들 아래를 주시하며 서 있었다. 우리도 그 대열에 끼어 시간이 넘도록 그들을 기다렸지만 그 친구와 가족들은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우리는 마냥 그곳에 서 있기가 피곤해서 잠시 다른 쪽 의자를 찾아 앉아 기다리기로 하고 잠시 그 자리를 떠나 있었다. 얼마를 앉아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있는데 남편의 전화가 울렸다. 그들이 조금 늦게 도착을 해서 입구로 나와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부부는 서둘러서 그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의 눈에 들어온 그 친구 가족의 모습은 처음 대하는 사람들 인대도 금방 그들인 것을 알아 낼 수가 있었다. 비행기를 두 번을 갈아타고 환자를 동행해서 먼 길을 떠나온 그들의 모습은 행복한 분위기가 아닌 아주 우울하고 어색한 분위기임을 금방 느낄 수가 있었다. 식구들 가운데에 휠체어를 타고 앉아 100파운드도 안 나가게 삐쩍 마른 친구의 반갑다고 내미는 손은 너무나 애처롭기 그지없는 최악의 상태였다. 나는 도저히 그의 손을 잡아줄 용기가 나질 않았다. 처음 보는 앞에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감정을 추스르고 그에게는 목례만하고 뒤에 서있는 부인과 아이들에게 서로 껴안고 인사를 했다. 우리 부부는 그가 그렇게 많이 아픈 상태일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어찌 우리 집으로 여행을 떠날 각오를 한 것인지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내 맘속에 떠오르는 결론은 한가지였다. 그들이 며칠 머무는 동안 정말 최선을 다해 행복하고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을 만들어 주리라 다짐을 했다. 다행히 그들은 남편의 병간을 하면서 교회를 더욱 열심히 나간다고 했다. 우리 모두는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불 갈비를 맛있게 하는 식당에 들려 시원한 냉면을 곁들여 아주 맛있게들 먹었다. 그 친구는 정말 오랜만에 이리 맛있게 많이 먹었노라 아이처럼 기뻐했다. 사택으로 돌아오니 벌써 날은 어두워 깜깜한 밤이 되었다. 우선 환자의 안정을 생각해야 하므로 많은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하고 방으로 들여보냈다. 나는 그들이 오기 전에 어느 한국 목사님이 침에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분과 수소문 끝에 시간 약속을 해 두었었다. 마침 다음날이 주일이라 우리들도 예배를 보고 저녁 시간에 그분을 만나러 한 시간 거리를 가야만했다.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려니 마음이 왜 그리 쓰라린지 부인과 두 아이들의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남편의 친구는 중병의 몸을 일찍부터 일으켜 준비한 아침 식탁에 둘러앉았다. 그들을 위해 특별히 주일 아침에 심심하게 콩나물국과 갈치구이를 해서 먹였다. 평소에 우리는 아침엔 한식을 안 하려 했다. 미국 교인들과 만남에 아무래도 우리 음식의 특유한 냄새를 우리 스스로는 몰라도 그들에겐 어쩌면 불쾌한 이미지를 심지 않을까 우려의 생각도 들어서였다. 그날 남편은 우리들보다 일찍 교회로 떠나고 나는 그들이 모두 준비되길 기다렸다가 예배 시간이 거의 되어서야 도착을 했다. 예배당에 그들과 들어서니 온 교인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들은 뒤줄 가까이에 나란히 앉고 친구 분이 바로 내 옆에 앉았다. 그는 앉아서 예배를 보는 중에도 연신 고개를 주체 못하고 들었다 내렸다 힘 겨워함이 역력했다.

그날따라 예배 중에 우리교회의 기적의 소녀 앰벌이 나와서 수화로 찬양을 했다. 그 애는 고등학생인데 병명을 알 수 없는 암 종류의 희귀병으로 인해 청각을 점차 상실하더니 아예 듣지를 못하는 상태에서 수화 찬양을 하는데 온 몸으로 표현하는 그녀의 찬양은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는 은혜의 시간이었다. 수화를 하려 치켜드는 그 앰벌의 손등에는 암 덩어리가 밖으로 튀어 나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귀를 못 듣게 될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이 절망이었을 텐데 그 좌절의 늪에서 신앙을 붙잡고 수화를 열심히 배워 모든 이에게 수화 찬양으로 은혜를 주고 있었다. 그 앰벌의 엄마는 라이라는 아줌마인데 내가 그녀를 만난 때는 후드뱅크라는 극빈자 배급소에서였다. 우리교회에서는 일주에 한번 토요일마다 그 동네 가난한 이웃들에게 모든 종류의 식료품을 무료로 공급해 주고 있었다. 나는 토요일이면 아침 일찍 교회로 출근을 해서 그들이 적어낸 목록을 받아서 식료부터 잡화까지 일주일 분을 챙겨주는 일에 교인 몇 명과 일을 함께 했는데 그 당시 라이가 마약에 쩌 들어서 식료품을 받으러 오는 그들 속의 한 사람이었었다. 그녀의 행색은 신앙으로 거듭난 지금도 혀에 붙인 링하고 몸의 문신은 그대로 지닌 채 늘 말도 반벙어리처럼 한다. 그래도 그녀에게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서슴치 않고 ~~그레이스~~하는 것이다.

나는 옆 자리의 남편 친구에게 앰벌의 병에 대해 대충 설명을 해 주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힘겨워하는 그를 생각해서 예배를 보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때가되어서 그를 위해 녹두죽을 쑤었다. 방문을 노크를 하고 드려다 보니 그는 침대에 맥이 빠진 듯 누워있었다. 나는 그를 침놓을 약속 장소에 데리고 가기위해 깨워서 죽을 먹였다. 헌데 그는 전혀 입맛이 동하지를 않는지 수저를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에 우리 모두는 한 시간을 걸려 침을 잘 논다는 노인네 목사님을 찾아 갔다. 그날 그를 만나는 장소에는 여러 사람들이 진맥을 하기위해 앉아 있었다. 그 방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분위기로 봐서는 그런대로 신뢰가 가는 분위기였다. 그 목사님은 친절하게도 친구부터 맥을 짚어주셨다. 그 노인네 목사님은 진맥을 한참 하시더니 환자를 조심스럽게 소파에 누워 안정하라며 권하시더니 모두에게 같이 기도하자며 불러 간절히 기도하신 후엔 아무런 손도 안 쓰시는 것 이었다. 나는 속으로 그의 그런 행동이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그렇게 치료도 안 해주는 상태에서 그냥 있을 수도 없고 해서 우리들은 집으로 다시 돌아오려고 일어섰다. 헌데 그 노인네 목사님이 우리와 같이 우리 집으로 동행을 하겠다고 따라 나서시는 것이었다. 남편은 그의 행동에 그리하시라 대답을 했다.

그날 밤 우리 차 뒤를 따라서 그 목사님이 같이 집까지 오셨다. 그리고 모두들 피곤한 상태라 방으로 들어들 갔는데 친구 방에서 인기척이 자꾸 들려서 들어가 보았다. 친구 분이 화장실에 고개를 떨군채 앉아 있고 부인은 남편에게 자꾸 눈을 뜨라며 말을 시키고 있었다. 그런 부인의 성화에 친구는 떳어! 하니까 부인이 내 얼굴을 보라니까! 눈을 뜨고~~하며 자꾸 재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힘없이 내려뜨렸던 머리를 가까스로 치켜들며 한마디 들릴락 말락 말을 했다. ~~당~~신~~이~~뻐~~. 나는 왠지 모르는 불안감에 부인에게 밤중 언제든 일이 있으면 우리를 깨우라 일러 놓고 자리에 누웠다. 남편은 표현은 안 해도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잠이 드는 둥 마는 둥 비몽사몽간에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용수철에 튕기듯이 앞방으로 들어가 보니 침대에 반듯이 누워있는 친구는 거칠고 숨 가쁜 심상치 않은 숨을 무의식 상태에서 몰아쉬고 있었다. 아이들은 옆에서 어이없는 아빠의 마지막 모습에 몸을 치고 뜯으며 구르고 있었다. 나와 남편도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 못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나의 남편이 친구의 상체를 보드듬고 숨쉬는 것을 도우려 하자 친구는 그리도 보고 싶다고 찾아온 옛 친구 품에서 마지막 숨을 크게 몰아쉬고 운명을 하는 것이었다. 졸지에 큰일을 당한 우리 모두는 그냥 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같이 따라 와준 생면부지의 노인목사님이 울고 있는 남편을 대신해서 임종예배를 주관해 주셨다. 그리고 앰브란스가 도착해서 환자를 싣고 병원으로 떠나고 나는 나머지 식구들을 태우고 무슨 정신에 병원에 도착을 했는지 모른다. 다행히 병원까지 가는 동안 새벽길에는 차량이 한대도 보이질 않았다. 병원에 도착을 해서 마지막 의사의 사망 판명을 기다리나 마나건만 그래도 친구부인은 그 말 한마디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넋두리하며 슬피 울었다. ~~이리 빨리 죽을 걸 왜 힘든 공부한다고 일본까지 가서 온 식구가 다 고생고생 힘들게 하구 죽었냐구~~

그날 이후에 켈거리에서 친구 만나러 두 발로 걸어 왔던 옛 친구는 관속에 누운 채 켈거리로 붙여졌다. 모든 절차를 밟는 동안 아틀란타에 산다는 친구의 고향 분들이 문상을 와서 그런대로 우리 집에서 조촐하게 초상 손님도 치렀다. 모든 일의 마무리가 되면서 남아있던 3식구가 떠나는 날이 되었다. 그날엔 어느 누구도 입을 열기를 두려워했다. 서로의 눈만 마주쳐도 숨어있던 눈물이 그칠 줄을 몰랐다. 하지만 하나님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시기에 주님의 종 두 분이 품에 안고 임종을 지키라 예비하셨을까? 마지막 순간도 어찌 그리 평온하게 잠을 자듯이 고통 없이 떠났는지! 연어가 자기가 죽을 즈음에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듯이 켈거리 친구는 공부하느라 어렵게 고생하던 삶을 그리워하던 옛 친구의 영혼의 고향을 찾아와 평온하게 마감을 한 것이었다. 남아있던 세 식구가 떠나던 날 나는 그들의 떠나는 모습에 가슴이 쓰려 울고 또 울었다. 올 때는 네 식구가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돌아 갈 때는 세 식구의 돌아서는 모습이 너무 가여웠다. 그날 밤 앰브란스의 소란한 출동으로 그 동네에는 새로 부임한 목사가 돌아가셨다는 소문과 함께 교회로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 하나님은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들의 가장이 손수 되어 주셔서 어렵고 힘든 일마다 돌봐주시고 세 식구를 신앙으로 이끌어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