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슬픔의 미학> 문법일상(日常)의 쳇바퀴에서 화석화(化石化)되는 감성(感性)의 털구멍들을 깨우기 위해
일부러 사랑이란 불길을 찾아 뛰어들기도 했었다! 그것은 도피(逃避)도 아니고
스트레스 해소(解消)도 아닌 허망(虛妄)이요 무명(無明)이었다.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슬픔의 미학에 속절없이 매료돼버린 나에겐 엉뚱하게도
그 사랑은 해피엔딩 적(的)이기보다는 늘 슬픈 이별과 깊은 상처에 가슴 아파하는
비극적 사랑을 지향(指向)하는 것이었다.아름다운 슬픔을 위해 덧없는 허무(虛無)를 알면서도 그 슬픔의 미학이 주는
매력 때문에 심지어 나는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으려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다.만나는 순간 헤어짐을 예감했고 함께 있는 시간에 이별의 쓰린 가슴을 연습했다.
그렇게 비련(悲戀)의 주인공이 되도록 스스로 연출했다.슬픔의 미학은
첫째 현실과 괴리되고 일상도 넘어서야하고
둘째 미남미녀의 이야기라야 그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기에
나의 그런 정서(情緖)는 애초에 늘 슬픈 이별을 잉태하고 있었다.1: 우선 슬픔의 미학과 일상, 그리고 현실과의 관계
<로미오와 줄리엣>이 해피엔딩으로 맺어져 결혼했다,
그 후 잦은 부부사움 끝에 이혼했다고 치자, 얼마나 밍밍한 이야기이냐?
<러브스토리 2편>에서
제인을 잃고 올리버는 다시 재혼을 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시들한
그러나 현실적인 일상사에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소시민(小市民)이 되어가는 그 모습...
그게 더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이지만 그래서 재미 즉 미학이 없는 것이다.
결국 아름다우려면 비현실적이고 일상이 배제돼야 한다.하나 더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드라마 <겨울연가> 를 다시 복습해보자.
‘유진’(=최지우 扮)이 10년 전(前) 사랑했던 애인(愛人) ‘준상’과 붕어빵 같은 ‘
이민형,(=배용준 扮)이 나타났다.‘ 준상’ 과 너무도 닮은 그러나 기억(記憶)을 상실한 채로...
빈껍데기 ‘이민형’으로 나타난 ‘준상, 여기서 유진이 처절히 애타하는 모습을 통해
드라마는 우리를 어지간히 울리고 애간장을 녹인다. 그러나 유진에게 갈등은
처음부터 없었다.즉 ‘상혁이’(=박용하 扮)보다 더 미남이고 부자이고 확고한 지위(地位)도 갖춘
‘이민형’이기에 ‘준상’과 overlap 되어 사랑의 불씨를 다시 spark시킨 것은 아닐까?
그가 허름한 노점상인(露店商人)이나 풀빵 장수였다면...!
설령 처음 보는 순간 spark가 다시 튀었다 해도 의식적으로 평정(平靜)을 택하지
않았을까? 이처럼 현실을 넘어서야 미학이 스며들 여지가 있다.2: 둘째
미남미녀가 주연배우로 扮해야 그 슬픔이 더욱 아름답고(?) 깊게(?) 오래(?) 전달된다.
내가 그 어린 시절부터 늘 보아오던 앞 동네 처녀,
초등학교시절부터 전혀 분장을 하지 않고도 마녀(魔女)나 추녀(醜女) 역(役)을 도맡아했던,
미인은커녕 완전민주주의였던 그녀가 저 세상에 갔을 때도 매스컴에는
<미모(美貌)의 여대생 의문의 죽음!>이라는 타이틀이 크게 시선을 끈다.
물론 이 경우 그런 표현은 더 슬프다는 뜻이기보다는 분명 좀 더 드라마틱한 효과를 노린
것이겠지만...자 잠시 미인들과 슬픔의 역학적 관계를 조망하기 위해
생각나는 대로 몇 미남미인들에 대한 추억여행을 떠나보자.1968년 <로미오와 줄리엣>을 열연(熱演)한 당시 실제 17 세였던
‘올리비아 핫세’는 그 얼마나 예뻤던가, 특히 그 프로필은 ...!
男주인공인 ‘레오나르드 화이팅’은 또 어떻고...
‘화이팅’의 빨아들일 듯한 그 그윽한 눈빛!<하이눈>에서의 기품(氣稟)있고 청순(淸純)한 눈빛의 ‘그레이스 켈리
<초원의 빛>에서의 커다란 눈망울과 상큼한 콧날 완벽한 비공(鼻孔)의 ‘나탈리 우드 ’
묘(妙)한 매력을 풍겼던 턱과 섹시한 눈 꼬리의 ‘앤 마가렛’
<애수(哀愁)>에서의 살짝 들린 105°각(角)과 부드럽게 휜 꿈같은
콧날의(=일명: 버선코) ‘비비안 리’와 미남중의 미남인 로버트 테일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공연한 ‘클라크 케이블’할리우드 영화사 의도(意圖)대로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Image를 물씬 풍기며
왼쪽 볼 아래 매력 점과 뇌쇄적(惱殺的)이면서도 선량(善良)한 눈(=약간 처졌기에
더욱) 그리고 조금은 천(賤)해 보이는 육감적(肉感的)인 입의
원초적(原初的) 백치(白痴)같은 매력을 풍기는 ‘마릴린 먼로’
늘 veil속 미인으로 남고자 했던 가느다란 반(半)달 눈썹과
그림같이 멋있는 콧날의 ‘그레타 가르보’두툼하면서도 선이 뚜렷한 예쁜 입과 푹 파묻히고 싶고,
퐁당 빠지고 싶은 크고 맑은 눈의 <‘For whom the bell tolls ?,>의
‘잉그리드 버그만, 과 사나이의 카리스마 물씬 풍기는 게리쿠퍼.
누가 뭐래도 완벽한 미녀...,오른 쪽 볼 아래 매력 점마저 갖춘
정면(正面)과 프로필 두루 예쁜 미인 ‘리즈 테일러,와
<자이언트>에서 호흡을 맞춘 호남중의 호남인 록 허드슨.너무 큰 입과 마무리가 덜 된 코는 다소 밸런스가 맞지 않지만
호수(湖水)와 같은 시원하면서도 사람을 빨아들이는 눈의,
최하위그룹의 인간들을 보듬는 마음 보여준 글자 그대로
진정한 천사(天使)였던 ‘오드리헵번,20대 초의 <쉘부르의 우산(雨傘)>때보다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그 아름다움이
농익었고 환갑(還甲)이 되어 가는 지금도 어지간히 멋있는 진짜 미인
‘까뜨리느 드뇌브,쓸데없이 너무 완벽하게 예쁜 ‘브룩 실즈’ 等
선(線)이나 각도(角度) 그리고 옆모습 앞모습 전(全)방위(方位) 미녀는 실즈, 나
테일러, 우드, 이겠으나 느낌이 가장 아름답고 그윽한 여우(女優)는
역시‘드뇌브, 가 단연 압권(壓卷)이다.대개의 경우 비극의 주인공은 미남 미녀이다. 그래야 슬픔이 더 강조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불후(不朽)의 명작(名作)이 되는 것이다.나는 평생 이것을 바꾸고 싶었다.
미남 미녀나 천재의 슬픔만이 더 아름답지 않다고...
다만 더 드라마틱할 뿐이라고...그러나 역시 현실적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애수> <로미오와 줄리엣>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쿼바디스> 등의 영화를
다른 평범한 배우가 주연했다고 상상할 때 과연 그런 감흥이 생길까?.결국 내가 아무리 미인의 비극이기에 더 덧없고 더 허무하진 않다.
더 애절(哀切)하지도 않다. 다만 더 드라마틱할 뿐이다. 라고... 억지를 부려보아도
슬픔의 미학은
현실 속 일상을 벗어나야 아름답고 미남미녀가 주연해야 더 감동을 주는가 보다
비극으로 끝나야 일상이라는 현실이 연결되지 않고
미남미녀의 슬픔에서 대리 카타르시스(?)까지 느끼니...이순(耳順)을 넘긴 이 나이에 비로소 어쩔 수 없이 나는
슬픔의 미학 이란 전공(專攻)을 바꾸어야 함을 절감한다!!!
아까부터 창 두 개 띄워놓고 여러 번 노래를 들었습니다.
일부러 찾아 듣게 되지 않는 좋은 노래들을
용상욱님 덕에 가끔 들을 수 있어 좋습니다.
전쟁터의 총알도, 화살도
주인공을 반드시 빗겨가는 사실도
영화스럽죠?
직선으로 날라오던 화살과 총알이 주인공 근처에 오면
곡선을 그리거나 다른 방향으로 날라가버리는거...
그래서 주인공일테지요.
다른 사람들은 총맞고 금방 숨이 멈추고 쓰러지는데
주인공은 장렬하게 포즈를 취하며 비틀거리면서
할말 못할 말 다 하고 죽죠.
감독은 정말 인간 차별 엄청하지요?ㅋ
용선배님,
한줄 띄지 말고 그냥 쓰셔도 되지 않겠나 제 의견을 조심스레 전해봅니다
음악 들으며 한껏 감정살려 읽어내려가는 도중에
스크롤바를 움직이다보면 읽던 줄을 자꾸 놓쳐
애잔한 느낌이 자꾸 흐트러져버려요.
줄을 바꾸는 깊은 뜻이 있으실지모르나
폰트의 크기도 크고, 또 굵고 하니까요.
그냥 제 생각을 써보았어요
아니시다 싶으면 그냥 넘기셔도 되요.
밑의 세로 줄을 내 실력으로는 올리지 못하겠군요.
부탁합니다. 수정하다가 사진도 위로 올라가버렸고요.
원래 내 처음 의도는 사진을 왼쪽이나 오른 쪽에 중간 중간 놓고
그 옆에 글을 붙일려고 했던 것인데
지금은 우선 저 세로 줄이나 밑의 글에 붙였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보니 고쳐주셨군요.
공연히 테이블에 넣는다고 까불다 수고만 끼쳐드렸네요.
사실 외부인들에게는 연습장이 열리지 않으니
손을 대면 그게 곧 연습이고 실전이라 새로운 시도를 하기가 주저돼요.
"~ 학" 이라는 학문소리만 들려도 기가 질립니다.
슬픔의 미학, 한가지 더 추가시키고 싶다면
"순수" 가 있지 않을까요?
제가 워낭소리를 아직 보지 못했지만 거기엔
머언 우리 어린 날의 순수했던 시절을 동경하게 하는
마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장쯔이 나오던 "The road home" 의 아름다움도 그렇고요.
로미오와 줄리엣의 올리비아 핫세, 이야기만큼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지요.
그녀가 후에 나온 "나사렛 예수" 에서의 어머니 마리아는 더욱 아름다웠어요.
아마 예수의 미래를 예언이나 하듯 그렇게 예뻤어요.
로마의 휴일에서의 오드리 햅번도 예뻤고요.
이렇게 주인공이 예쁘고 이야기가 아름다운 것은
그들이 주는 순수함이 있어서 더욱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요.
우리 인일 게시판이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것은
우리가 어렸을 적 순수했던 여고시절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 아닐까요?
경숙 후배!
사실 위 글은 미남미녀를 통해 슬픔의 미학을 표현한 작가나 감독들에게 어깃장을 놓느라고 억지로 꿰맞춘 글이기에
미남미녀를 강조한 좀 멋없는 글입니다. 사실은 미남미녀보다는 어떤 아우라가 있는 배우들을 출연시켜 성공한 예가 많지요.
결코 미녀라고 할 수 없는 미아 페로우가 주연한 영화들, 미남이라고 할 수 없는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한 영화,
그리고 안소니 퀸이 주연한 영화로 <25시>나 <길> 등 영화에서 우리는 슬픔의 미학의 정수(精髓)를 맛볼 수 있지요.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미남미녀일수록 특히 한국의 경우 혼(魂)을 담는 가슴은 형편없이 좁은 듯싶어요.
그래요. 이 세상 살아가는데 순수한 영혼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지고(至高)의 선(善)이지요.
워낭소리, 그 영화를 아직 못 보았군요. 참 경숙 후배 말처럼 어찌 보면 차라리 도무지 주변머리가 없다고 해야 할 만큼
순수(純粹)하고 외고집인 한 노인과 소의 숙명적 삶과 우애(友愛), 애정(愛情), 공생(共生)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맨 처음 뿔이 셋 달린 소가 무거운 짐을 끌고 청량산을 오르다 죽어 그 소를 매장했다는 청량사의 석탑 장면이
이 영화의 상징처럼 등장합니다.
명산(名山)과 영산(靈山)의 품격을 함께 갖추어 오랜 세월 늘 가보고 싶던 그 청량산을
노인의 그 외가닥 삶과 소의 숙명적 코뚜레 삶을 그 영화가 보여주는 느리고 느린 템포처럼
나도 한 걸음 한 걸음 땀방울 심으며 천천히 음미하며 올라보고 싶습니다.
영화 평은 여러 곳에서 좋은 글들이 많고 여기 인일홈피에도 두 편이나 있으니
능력도 안 되는 나는 생략하고 내 친구가 보낸 메일을 하나 올려봅니다.(=다음)
다음:
말장난을 용서해 주신다면 <워낭소리>는 감독 본인이 의식했던 못했던 간에 1950년대 neo-realism 의 눈길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야만 하는 니체 的 노인과 노인보다 더욱 더 니체적인 운명을 이어가는
말 못하는 동물에 대해 영상으로 써 내려간 화엄 的 헌시다.
돌아보면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조물주의 어떠한 기막힌 해피엔딩 식 운명의 반전에도 기대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차가운 눈길이 그러한데 이는 이미 우리가 1950년대 이태리의 영화천재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나 <펠델리코 펠리니>등이 설파했던 이 세상 우리네 삶의 실상이었다.
참혹하리만큼 우리의 일상은 꾸역꾸역함만으로 이어지고 우리는 이러한 삶을 수긍할 수밖엔 없다.
노인의 운명도 그러하고 소의 운명은 더욱 더 앞날을 기약 할 수 없는 비극으로 가득 차 있지만
소도 노인도 그러한 상황을 피할 수도 뛰어 넘을 수도 없기에 그것은 참으로 니체 的이다.
니체가 일찍이 갈파했던 삶의 끝없는 무한전개가 여기서 비롯되고 우리는 여기서 한 치도 비켜갈 수 없는 운명이다.
이쯤해서 니체는 외친다. 삶은 멍에 같은 것, 어떤 창조주의 구원의 환상에도 기대지 말라
왜냐면 신은 죽었고 인간은 자신의 초인 의지로 이 암울한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한다고 !....그의 초인의지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에게는 절대 절망만이 남는가? 그건 그렇지 않다. 절대 절망이 아니라 절대 희망이 기다린다.
그것이 불교적 화엄의 세계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의 보이지 않는 끈 인과 연 <연기적 인연>으로 이어져 있고
노인의 병마와 소의 병마는 별다른 두 개가 아니고 노인의 눈물과 소의 눈물 또한 따로 동떨어진 절망이 아니다.
그것은 심지어 이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관객 자신인 우리의 운명과도 보이지 않게 이어져 우주 삼라만상의 생명의 실체로 이어져
끊임없이 생멸을 이어 나갈 뿐이다. 이것이 감독이 의도했던 않았던 관객에게 보여주는 <워낭소리>의 메시지다.
슬픔의 미학이 순수한 영혼의 울림에서
"신은 죽었다"의 니체까지 왔네요.
우리는 아직 니체에서 한 발걸음도 떼지 못 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고시절
니체를 엄청 좋아하던 친구가 책을 권했는데 읽다가 어렵고 지겨워 덮어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수녀가 되고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인 것만 같습니다.
과연 그 녀석이나 제가 뭘 알고 지껄였을까요?
늘 이 세상에서 지가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눈물 가득 담고
비극의 주인공인양 궁상을 떨던 그 친구가
현각을 몇 년 쫓아 다니더니 이제는 화엄의 희망을 읇조리는군요. 글쎄요?
산학 님! 그동안 여러가지로 고마웠습니다.
노래: 프랑코 코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