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1>
부제(副題) : 아날로그 따라지

어느 날 우연히 열어본 누나의 책상 서랍에서
난 어느 남학생이 보낸 연서(戀書)를 보았다.
그는 나도 이름을 아는 선배로 전교에서 수석을 다투는 이었다.
헌데 사연은 참 구구절절한데 감동은 없었다.
그저 그랬다.  글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내가 봐도 별로였다.

그런가 하면 교지(校誌)를 받아볼 때마다 늘 눈에 띠는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의 글은 한줄 한 문장이 전부 외우고 싶을 만큼 멋졌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차원을 넘는 어떤 울림이 있었다.
난 무턱대고 그 선배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 선배의 글이 좋아서 편지한다고...팬이라고...
그렇게 해서 그 선배와 편지를 주고받았고 가끔 만나서 즐거운 얘기도 나누었다.

당시 그 선배는 학원이란 잡지에도 자주 글을 올렸고 숫눈이라도 내린 날이면
방금 쪄낸 백설기 같은 새하얀 눈이 수북하게  쌓인 운동장에
나란히 발자국을 포개어 처녓길(處女)을 함께 내고 싶은
인천의 문학소녀들이 줄을 서곤 했다.
그 시절에 난 그 선배가 질투 내지 부러움의 한 대상이었다.
솔직히 문학성이라는 문제를 떠나 여학생들에게 그토록 인기가 있다는 그 점 때문에...
 
하여 하릴없이 부러워하는 대신 난 늘 장문(長文)의 편지로 내 없는 재주를 커버하려 했다.
그게 버릇이 되다보니 여기 인일홈피에서 늘 글이 길다고  전문적으로 경고를 받곤 했다.
허나 내 졸문(拙文)의 긴 편지도 글의 좋고 미숙함을 떠나서 바로 그 장문이라는 점 때문에
효자 노릇한 일이 과거 여러 차례 있었다.
  
그중 몇 개 경우를 보면
기(其) 1:
열사(熱沙)의 나라 사우디 현장으로 파견된 내 친구에게 어느 날 보낸 10 여 쪽의 긴 편지,
그로 인해 친구는 특별포상휴가를 받아 한국에 나온 적이 있었다.
그 회사에선 고국(故國)에서 보내온 편지를 여직원이 방송을 하고 그걸 들은 직원들이
공개투표를 해서 우수편지를 가려 그 편지를 받은 주인공에게 휴가를 주는 제도를
시행한다는 사연을 나중 들었다.
내 편지는 졸문이긴 하지만 한두 줄 멋진 글만 달랑 쓰인 짧은 편지나
의례적인 안부편지에 비해 길다보니 여직원의 달콤한 목소리를
더 오래 들을 수 있었고 그래서 거기 무더운 사막에서의 지루한 향수(鄕愁)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도록 잊을 수 있던 직원들의 무더기 투표가 있었나보다.

기(其) 2:
1년여 만에 가까스로 이름과 거처(居處)를 알아낸 처녀 집에 쳐들어가서
예상 못한 그 오빠를 만나 메아리 없는 간접(間接)구애(求愛)를 2시간이나 한 후
맥없이 상경한 다음날 써 보낸 10 여 쪽의 편지.
그리곤 바야흐로 체념상태로 지내던 어느 일요일...
그 편지를 기본으로 내 신상조사와 학교 성적, 필체, 인격, 사상 등을 분석(?)한
그 집의 친척들이 여러 지방과 서울에서 대거 모여 나를 직접 면접하러 나타났던 일...
당시 내 편지는 국문과를 다니던 동창들도 짜깁기해서 연서(戀書)로 쓸 정도로
연서의 패러다임이었다.
물론 내 글은 문장이나 표현, 묘사력은 글 수준에도 못 끼는 형편없는 글이었지만
발상(發想)이 특이했고 그 발상이 조금도 과장(誇張)이나 뻥튀기가 아닌
내 절절한 진심이었다는 것이 주효했나보다.

기(其) 3:
30년 동안 마음의 팬으로만 지내온 한 성우(聲優)에게 보낸,
육필로 쓴 15쪽의 긴 펜팔에 감동 먹은 그 성우가
“이 편지는 내가 직접 잘 보관하겠다.” 며
비록 15쪽 전부는 아니지만 행복한 목소리로 낭송해주던 일.....

기(其) 4:
무려 300 여 쪽에 달하는 글을 한 권의 다이어리에 적어 보내고
5일 만에 같은 분량의 답 글 쓰인 다이어리를 받았던 일 등, 등...

지금 세상은 초음속의 시대로 달리는 데 여전히 난 자주 편지를 쓴다. 
때로는 상대가 컴맹인 때문에,  때로는 육필(肉筆)이 전해주는
그 생동감을 잃기 싫어 나는 편지를 쓴다.
단지 요즘은 워드로 쓰고 봉투만 육필로 쓰는 비중이 더 많아졌다.
정성스레 주소와 이름을 쓰고 우표를 붙여, 설레는 심정으로
빨간 우체통 입으로 넣는다.

그렇게 아직도 나는 아날로그의 시대에 묻혀 지내는,
시대에 한참 뒤 떨어진 무지렁이 촌(村)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