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어릴 적 아버지 몰래 갈퀴 살을 잘라 가오리연을 만들었어요. 살무니 산골마을에서 대나무를 구하기란 참으로 어려웠지요. 커다란 달력 한 장을 떼어 오려 얇게 여민 갈퀴 살을 밥풀로 붙이고 꼬리는 신문지를 길게 잘라 붙이면 제법 그럴 듯 했어요. 실을 끊어 귀를 맞추니 마음은 이미 창공을 날고 있었지요. 얼레는 어차피 없으니 어머니가 쓰시는 실패에 감긴 실을 풀어 마당에 나가 시도를 하면 이놈이 꼬리를 흔들며 요리조리 체머리를 빙빙 돌리다가 땅으로 곧잘 곤두박질하였어요. “양귀가 잘 안 맞았나?” 조용한 바람이 문제였어요. “바람아, 제발 불어다오!” 동생은 큰소리로 외쳤어요. 동생의 원대로 된바람이 불어 왔어요. 실패에서 실을 늘어뜨리자 동생이 또 다시 소리쳤지요. “자 날린다.” 어느새 용대의 마음은 두둥실 하늘로 떠올라 이리저리 날아다녔어요.
겨울방학이 되자 인천중학교에 다니던 큰형이 내려왔어요. 자취를 하다 하숙집으로 옮겨서인지 살이 투실투실 앙팡지게 붙어 있었어요. 용대와 동생의 우상이 시골집에 내려온 것이지요. 가오리연을 날리던 저희를 보더니 “야, 창피하게 그게 뭐냐!” 그러더니 이가 듬성듬성 빠진 갈퀴를 거의 작살내어 방패연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들창문을 바르고 남은 창호지를 직사각형으로 잘라 동그랗게 가운데를 오려낸 다음 댓살을 대각선으로 여럿붙이는 것 까지는 좋았어요. 글쎄 귀를 못 맞춰 뱅글뱅글 돌기만 하고 연신 땅바닥에 코를 들이 박아 방패연이 만신창이가 되었어요. 그런데 큰형보다 한 살 아래인 옆집 형은 방패연을 잘 만들어 아까부터 놀리고 있었어요. 결국 큰형과 시비가 붙어 몸싸움을 하는데 그 믿었던 큰형이 밑에 깔려 허둥대고 있지 않겠어요? 두 동생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어요. 인중에서 유도를 배웠다고 방학 때가 되어 내려오면 봉당에 이불을 깔고 낙법을 가르쳐주니 마니 하던 큰형의 체면이 구길 대로 구겼죠. 그래도 저녁에는 마을 사랑방에서 옆집 형에게 항복을 받았다고 큰형은 코를 벌름거리며 알려 왔어요.
그날 밤, 곤하게 자는데 집 옆 성당의 종각에서 심하게 울리는 종소리가 들려왔어요. “땡땡땡땡” 마구잡이로 흔들어 대는 종소리였어요. 들창문을 바라보니 대낮같이 훤하였어요. 안방에서 모두가 같이 잠을 잤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황급히 일어나시어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으셨어요. “영인 네가 불난 것 같다.” 잠결에 저의 집이 불난 줄 알고 얼마나 무섭고 두렵던지... 한참 후 양동이와 세숫대야를 가지고 불 끄러 달려 가셨던 부모님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돌아 오셨어요. 그런데 그 불 끄시던 도구를 절대로 집안으로 들어 놓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굵은 소금을 획하니 뿌리셨어요. 화마를 내쫓는 의식이랬어요. 당시 시골집들은 겨우내 땔감을 처마 밑에 잘 쌓아 놓았는데 아궁이에서든 그리고 버린 담배꽁초 등의 불씨가 화재의 원인이 되곤 하였지요. 개중에는 여름내 물꼬 시비 등으로 이웃집과 사이가 안 좋아 앙심을 품어 방화로 보이는 화재도 있었지만 목격자가 없어 묻혀 지곤 하였어요. 이런 불을 도깨비가 놓았다고 종종 불렀어요. 이를 막기 위해 동네에서는 집집마다 당번제로 돌아가며 야경꾼을 두었는데 큰형은 북을 두드리며 한밤중에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것을 아주 신나했어요.
다음 날은 뒤뜰 양지바른 곳에 큰형이 군용담요로 텐트를 쳤어요. 거적을 깔고 들어서니 아늑하니 참 좋더군요. 때론 활을 만들어 수수깡 앞 끝에 못을 꽂아 함부로 하늘로 쏘아대고... 시위를 떠난 화살에 동심도 따라 올라갔지요.
오후에 사촌형과 나무를 하러 올라간 큰형이 산불을 내어 동네 상여막이 다 탈 뻔했어요. 나무는 하나도 못하고 산소 갓에 불을 놓았다가 바람이 불어 큰 불로 번졌지요. 지게와 낫은 다 타고...머리칼과 눈썹도 다 그을리고... 겨울방학 중 일직으로 학교에 가셨다 돌아오신 아버지께 혼쭐이 났어요. 멀쩡한 갈퀴를 마귀할멈으로 만들어 놓은 것까지 포함해 무진장 혼났지요. 사실은 용대가 주범인데요. 그리고 개학이 가까워지자 큰형은 다시 인천으로 떡 싸들고 올라갔지요. 하숙집에 줄 누런 양회포지에 싼 백설기를 책가방 가운데에 반듯하게 넣어...
그 후로 몇 해가 흘렀어요. 어딘가에서 돌아온 옆집 아주머니의 절규하는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놀라 달려갔지요. 마당 귀퉁이마다 굵은 소금을 뿌리며 슬피 울고 계셨어요. 사연을 알고 보니 몇 년 전 큰형과 방패연 문제로 싸움을 벌였던 옆집 형이 새우젓 배를 탔다가 노가 바닷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건지려 그 추운 바닷물에 뛰어 들었다가 그만 익사하여 돈이 없어 시신을 고향집에도 못 데려 오고 그곳에 대충 묻고 와 엉엉 울고 계셨어요. “돈이 웬수여! 돈이... 보내달라는 학교도 못 보냈는데... 그 죽은 놈이 글쎄 제 어미를 보더니 코피를 주르르 흘렸시다.” 자꾸 목 놓아 우셨어요. “아이고! 아이고!” 땅을 치며 통곡하셨어요. 고추바람에 대추나무도 따라 울고 어린 용대의 마음도 따라 울었죠. 모든 것을 잊으려 밤새 하얀 눈이 내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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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도 한줄 한줄이 마치 신지식 님의 동화를 읽는 듯 아름답지만
앞으로도 자주 시를 올려주세요.
시라는 것이 허사나 췌언이 배제된 감정의 응축이니...
난 시를 좋아하는데 여산의 시도 느낌이 참 좋군요.
자월도!
"야 나이들어서는 바닷가에 살 게 아니더라.
밤에 그 파도의 울음을 듣고 있느라면
정말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에 도대체 잠이 오지 않아."
어느 친구가 그리 말했죠. 물론 그말에 동감하지만 산이든 바다든
지금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그 느낌이 다를 것같아요.
정말로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있으면 마굿간 짚더미도 아늑한 사랑방이 되고
싫은 이와 함께라면 에덴동산이라도 지겹기만 한 바늘방석과 같을 거에요.
특히 그 친구는 당시 자월도에서 독립운동을 2년 째 하던 상태라
파도소리가 더 아프고 처량히 엄습했겠지요.
이 아침 여산의 시로 인해 바로 그 앞 작은 위성 섬과 함께
자월도가 다시 나를 부릅니다.
늘 청안하시지요?
용대는 어릴 때 제 아명이었답니다.
저희는 삼남일녀랍니다.
위로 덕바위 형님, 두살 터울로 누님... 현재 연로하신
부모님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효녀이지요.
그리고 세살 아래 저이고 두살아래 해병대출신
막내 개구장이랍니다.
옆집은 정말 아이들도 많이 낳지만
돌을 넘기지 못한 아기들도 과반이 넘는
당시 열악한 의료환경의 대표적
희생자 집안이었어요.
다행이 형 또래로 튼실하게 장성하던 아들이
배를 부리던 곳에 취직해 새우젖배를 타다 큰 변을 당하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였는지요.
그 슬픔은 산골마을을 더욱 우울하게 만든 사건이었어요.
어린 제 마음도 알 수 없는 서글픔에 지금까지 뇌리에
남았답니다.
숫눈에 모든 슬픈 기억을 지우려 노력했지요.
제 글을 읽어 주시고 공유하신 밴치마킹하고픈 멋지신 선배님,
늘 여여하세요.
근데 이번 글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수가 없군요.
어쩜 너무도 소박한 한 소년의 아름다운 글인것 같았어요.( 죄송합니다. 그저 내 느낀대로의 마음을 담을수 밖에 없네요^^)
마치 한폭의 감동적인 영화를 보는듯 했습니다.
사뭇 가슴이 뭉클하고 그 가난했던 지난날 우리들의 삶들이 피부로 와닿는듯 했어요.
어쩔수 없는 가난속에 잘사는 옆짚의 아이들과 비교되며 자식을 키우는 어미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리고 결국은 그 자식을 고생만 시키다 잃어야 한 가슴, 그래도 목숨은 붙어서 살아가야 했던 시절!
지금은 먹을것 입을 것 다 있고 등 따듯해도 못살겠다고 자살을 해서 부모의 가슴에 못박는 때인것을!...
그래도 어린 마음에 그런 아픔의 모습들이 깊이 가슴에 남아 10대의 기억을 그렇게 지금까지도 마음에 담고 있었군요,
형제들과의 있어진 일들을 진솔하고 코믹하게 담아서 너무 무겁고 가슴아프지 않게 멋진 글로 엮어주신 분의 이같은 글을 읽으니
부족한 표현 이나마 몇줄의 글이라도 남기는 것이 눈팅한 사람의 인사일것 같아서 그저 부끄런 흔적이나마 남기고 갑니다.
너무 좋은글을 올려주신 것에 다시한번 큰 감동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지금 그곳은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일텐데...
나도 영주후배가 너무 보고 싶어요. 너무도 부드럽고 따스한 마음을 가진 사람!
이번 겨울 컴교실을 참석치 못한 아쉬움을 어떻게 다 표현하겠어요?ㅠㅠ
특히 스포츠 댄스들을 배워 모두 함께 흥겨운 음악에 맞춰 즐기는 모습들은 배아픔의 극치였답니다.^^
여름 컴교실! 듣기만 해도 좋은데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이렇듯 늦게까지 잠안자고 홈피를 둘러보며 일일이 마음써주는 영주 후배의 수고는 가히 두손을 들수밖에 없네요.
이명순 선배님,
참 따스하신 선배님을 알게 되어 영광입니다.
진솔하신 마음도 제게 주셨군요.
늘 청안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5,60년대 어렵게 살던 시골의 상황이 제 머리속에
판도라 상자되어 돌아가는군요.
이웃집은 가진 농토도 별로 없고 딸린 식솔들은 너무나 많아
늘 배고픔의 연속이었지요.
가끔 저의 암탉이 담장을 넘어가 그 집에게 알을 낳아주곤 하였어요.
어린 마음에 속상하기도 했지만 눈 감아주면 그 집의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었을 테니까요.
감자와 고구마로 끼니를 떼우고...그것도 두끼의 식사....
또래 애들은 부황이 나고 영양실조로 부스럼이 온몸에
생겼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뒤주에서 쌀 댓박을 퍼 가져다 주시고
부스럼덩이 제 또래 옆집 친구에게 주사를 곧잘 놓아 주셨죠.
그러다 흔히 말하는 페니실린 쇼크( 아나필릭스)가 일어나
제 친구가 거의 죽을뻔 하였지요.
다행히 목숨은 건지고...
돌파리 간호사인 어머니도 놀라고 모두가 놀랐지요.
하마터면 어머니는 구속될 수도...
그 후로는 동네에서 주사 놓는 봉사일은 안 하셨지요.
선배님, 당시의 살무니골 풍속도랍니다.
행복하세요.
담장을 날아까지 가서 옆집에서 알을 낳았단 얘기가 왜 그리 신기하게 여겨지고 흐믓한지요?^^
그래도 옆집은 인색하지 않으신 부모님의 도움을 많이 받으신것 같네요.^^
저도 어린시절 페니실린 주사 알레르기 반응으로 거의 죽을뻔 했었어요.
저는 정식으로 병원에서 맞았는데도!. 지금 기억에 인덕의원 이었던가? (어머나, 어떻게 병원 이름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지?)
동인천 에서 송현동 방향 어다쯤 이었던것 같은데?...^^
정말 아주 먼옛날 얘기예요. 근데 이곳 미국에서도 병원에 가면 페니실린 반응에 대해 꼭 알려 주어야 한답니다.
지금도 저는 심하진 않지만 페니실린이 들은 약은 아직도 몸에 rash가 생기곤 해요.
어머니께선 그런걸 모르시고 모두에게 좋은줄 아시고 그리하셨으니 정말 큰일날뻔 하신거지요.^^
저의 어린시절의 추억도 영종이라는 섬에 많이 묻혀 있어요. 그래서 님의 글이 더 마음에 그림처럼 와 닿았을 거예요.
방학이 오기를 손꼽아 배를 타고 영종으로 달려 가면 외사촌들과 낫가리 술래잡기도 하고 냇물에서 붕어도 잡고
냇가에서 목욕하다 짓궂은 동네 사내아이들 때문에 혼비백산도 해보고, 진달래 꽃 꺾으러 가서 산나물도 캐보고
도마도, 참외 오이서리도 해보고!...
밀거적에 누워 모기쫓는 쑥내음을 맡으면서 밤하늘의 별을 세던 그 아름다운 소녀의 추억들이 줄줄이 떠오릅니다.^^
외가댁의 선조들이 영종땅을 개발하신 좀 괜찮은 집안이었다는데 지금은 그 후손들이 그 모든 재산을 모두 들통을 낸 셈입니다.
지금의 영종땅은 금싸라기라던데 이제와 땅을 친들 뭐하겠습니까?ㅋㅋㅋ
아직도 외가댁의 한 두 가족은 영종에 살고 있지만 찾아보면 지난날 그 추억의 모습들은 다 사라져 버렸어요. ㅠㅠ
단아하고 이슬처럼 청초롱한 모습을요...
어쩜 강화의 저랑 영종도에 놀라 가셨던 선배님이랑
놀이와 서리의 추억도 같군요.
더욱 친근감이 가는군요.
저도 개울물을 막고 목간하는 여자친구들의 옷을
선녀와 나뭇꾼처럼 숨겼다가 다음날 담임선생님한테
불려가 벌을 받았답니다.ㅎㅎㅎ
그것도 교감선생님의 조신한 아들이라 선생님들은 놀라셨죠.
모범생인 듯 하였으나 마음 속에는 언제나 장난질이
꿈틀 거렸어요.
페니실린 알러지 반응에 적절이 대처하심은 아주 잘하신 거예요.
카드로 몸에 지니심도 좋구요.
요즘은 좋은 3,4세대 항생제가 많이 나와 페니실린계 항생주사가
많지 않으나 혹 교차반응과 내성이 있을 수 있으니 잘하신거예요.
경구투여도 문제지만 주사제는 바로 반응하니 미국병원에서
정말 잘하셨어요.
외가가 영종도셨군요?
섬 생각이 나 선배님도 잘 아실 자월도에서 제 추억을 두런두런 들려드리고 가렵니다.
늘 행복하세요.
군 복학후 자월도로 하계봉사를 간적이 있어요.
청바지도 뚫는 자월도 섬모기는 거의 살인모기 수준이었어요.
봉사 후 M.T를 섬 이장님 집에서 가졌는데 고마움에 표시로 여학생들의
방에만 모기장을 쳐 주셨어요.
남자들은 잘 방이 없어 저를 잘 따르는 남학생 후배와 홑이불 하나 가지고 그 집 마당 정자에서
잠을 청하는데 모기의 극성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잠결에 후배를 이끌고 주섬주섬 찾아 간 천국이 있었으니
맨날 마루바닥에서만 자다 정말 오랜만에 본 황제의 침실같은 뽀송뽀송한 이불이 깔린 모기장속 이었어요.
그 동안 피로가 겹쳐 세상 모르고 꿀같은 단 잠을 이루었죠.
허나 다음날 이른 아침, 그 방에서 자야할 여학생들은 밀거적에 시체들처럼
모닥불의 재가 얼굴을 덮어 아침이슬에 얼룩이 진채 잠들어 있는 모습에 충격과
미안함으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어요.
늦게들 이야기를 나누다 방에 들어와 보니 시커먼 남정네 둘이 모기장에 떡 하니 널부러져
있으니 여학생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본의 아닌 밀거적 시체놀이를 하게 된 것이었죠.
서울의 8개 약대를 이끌며 참다운 봉사정신과 리더쉽을 보였던 당시 약총회장이
인일여고 출신 늘씬한 여학생이었답니다.
그 회장의 너그러운 용서로 그 상황을 애교로 봐 주어 잘 넘어 갔지요.
자월도의 밤은 아름다웠죠. 썰물 때는 소나기가 쏟아지듯 쏴하는 소리가 대단했답니다.
그 곳을 회상합니다.
자월도의 밤 글/윤용혁 모닥불 지킴이 그녀는 모든 사랑을 양보했다 모두가 짝을 이루어 사라진 바닷가 깊은 밤 홀로 남아 꺼져가는 모닥불을 지켜야 했다 쇼팽의 잔잔한 야상곡이 흐르고 더위에 지친 고요한 밤바다 밤하늘 샛별만큼이나 반짝이며 선배의 옛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맑은눈을 가진 그녀는 지금은 모두 옛여인이 되었다 남을 위해 사랑도 포기하는 따듯한 마음씨의 그녀는 자월도의 밤보다 더 아름다워 뭇 남성들의 마음을 감화시켰다 바닷가 모래밭을 줄지어 행진하는 게들 놀랠까 숨죽이는 파도소리 사각거리는 고운 모래알의 밀어에 한 여인의 못다한 사랑은 추억을 남긴채 아련한 과거로 흘러갔다 |
바닷가 모래밭을 줄지어 행진하는 게들이 놀랠까 숨죽이는 파도소리?!!!
사각거리는 고운 모래알의 밀어에
한 여인의 못다한 사랑은
추억을 남긴채 아련한 과거로 흘러갔다?!
잠자던 감성을 일깨워 주시는 글이군요.^^
게들이 놀랠까 숨죽이는 파도소리!~ 정말 너무 아름다운 표현이네요!
근데 그 못다한 사랑의 추억을 남긴 그녀, 남을위해 사랑도 포기했다니?
과연 어떤 일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읽는이의 생각을 머물게 하는 여운이 남기에 멋진 詩가 되는 건가요?^^
마음 담은 정성스런 답글에 감사를 드립니다.
여산 선생께서 이 저녁 제 기억을 자극하시네요.
저도 이제 많이 늙었나 보아요.
자꾸 지난 추억을 되새김하게 되는 것을 보니.....
아직은 추억보다는 내일의 꿈을 말하고 싶은데
적어도 환갑날 되기 전까지만 이라도......
바쁜 벌은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고 스스로 채찍질을 하곤 합니다.
그랬지요.
그 시절 대부분의 이웃들이 가난했지요.
특히나 옆집 그 친구네는 무엇 찢어지게 가난했지요.
형제들은 왜 그다지도 많았는지......
옆집 아주머니는 년년생으로 애를 낳았다고 하시데요.
그것도 콩밭매다 말고 들어와 혼자 태줄을 끊고서...
무척 건강하셨지요.
하긴 돌아가실 때도 혼자 읍내 병원에 진찰받으러 가셨다가 그날 저녁 죽으셨다고 하데요.
그집 며느리가 아주 좋아 할 수밖에.......ㅋㅋ ㅎㅎ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교회에서 만났지요.
반색하시는 아주머니에게 용돈으로 삼만원을 드렸지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가 그 아주머니에게 해드린 것은 그것 뿐이에요.
무슨 필링이 온 것 같았지요.
그냥 그날은 드리고 싶더라고요.
그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드릴 것을......
큰체구에 허기져 하던 그 친구 모습이 불현듯 생각납니다.
중학교 진학은 커녕 새우잡이 배를 타야 했지요.
그런 친구를 어쭙잖은 유도실력으로 업어치기로 매치곤 했던 내가 조금은 부끄럽습니다.
그냥 그 친구는 무저항으로 세워놓고.....
시범보인다고....ㅋㅋ ㅎㅎㅎ
낙법도 모르는 그 친구는 땅바닥에 던져지곤 했지요.
넘어져 준 대가로 내가 주는 옥수수가루로 찐 빵을 얻어 먹기 위해서.......
집에는 아버지가 학교에서 가져오신 옥수수가루로 찐 빵이있었지요.
그 빵으로 허기진 이웃집 애들에게 선심도 쓸 수 있었고요.
그렇다고 아버지가 학교에서 옥수수 가루를 훔쳐오신 것은 절대로 아니에요.
아마 분배하고 남은 것을 가져 오신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너무나 박봉이었으니 애들 나눠줄 옥수수가루와 분유가루를 일부 가져 오셨는지는.......
다행히 우리집은 아버지가 박봉이나마 월급을 받아 오셨지요.
억척스런 어머니 덕분이에요.
삽자루 들고 적지 않은 농사를 남정네 못지 않게 지으셨지요.
큰돼지를 두마리나키우셨고요.
훗날 일손이 많이 가는 인삼밭도 재배하셨지요.
철이 없었지요.
마치 나는 당연히 사랑을 받고 누리는 것인 줄 알았지요.
그 모든 것이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이라는 것을 잘 몰랐지요.
여산 선생이나 내가 어린시절을 비교적 유복하게 보낼 수 있었던 것이......
적어도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는 않았잖아요.
억척스런 어머니 덕분으로.....
설날 어머니의 굽은 등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제탓이지요.
어머니의 등을 굽게 만든 것은 ........
두서없이 그냥 몇자 적었습니다.
건필하십시오.
의좋은 '용'형제님, 글 읽으면서 내내 흐뭇하다가
뒤에 가서는 마음이 너무 쓰라렸어요.
아들을 잃은 엄마의 얘기 때문에
앞의 얘기가 하얗게 잊혀질 정도였답니다.
고생만 하시다가 가신 그런 분들을 보면
어쩌면 운명을 타고난다는 말이 맞나 하는 생각이 다 들어요.
어릴 적 얘기가 어쩌면 그렇게 내가 본 듯이 눈에 그려지는 걸까요?
남들에게 없는 풍부한 얘깃거리, 추억을 갖고 있다는 것도 복이에요.
생전 도시에만 산 사람들과는 많이 다르지요.
마음의 여유도 조금 더 많으시겠지요?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께서 연을 만들어 주셔서 남동생들이 신나게 놀았어요.
두분 형제들께서 얼마나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는가..알수 있구요.
어머님의 헌신으로 귀한 아드님들 인천으로 유학보내시고 자랑스러워하셨을까..알수 있고요.
이웃집의 아들잃은 집은 얼마나 슬펐을까...
왜 옛날에는 모두들 그렇게도 힘들게 살았을까요?
용혁후배의 이야기는 꼭 우리 집 이야기 같아서 재미있어요. 좋은 날 되세요!
강화가 섬이었지만 주로 산과 마당이 등장했는데 오늘은 섬사람의 애환이
5~60년대의 피폐한 한국의 풍경과 함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새우젖배 타고 나갔다 죽은 이웃 집 형이 더욱...
늘 정겨운 시골 냄새나는
한폭의 한국화를 보는 기분에 젖게하는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숫눈이 슬픈 기억도 지우지요!
그런데 아마도 용대가 용혁씨인 모양이군이군요. 그럼 3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