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겁지만 나이브한 녀석들. 2 편>
“야 40 대도 아니고 60대의 할망구들과 어울리면 무슨 재미가 있냐?”
경식이는 늘 그렇게 어깃장을 논다.
“우리는 지금 40대냐? 그리고 남녀가 만나는 것을 늘 그렇게 재미가 있어야 하는
각도로만 보지 마. 그냥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고 생각해.”
“웃기고 있네. 지가 무슨 화담(花潭)선생이라고?”
“화담을 하라면 하는 거지 못할 건 또 뭐냐?”

“저 문태라는 녀석 거의 화담선생 경지에 들어갔어. 녀석 먼젓번에  중앙일보
기획프로젝트로 여류화가랑 강원도 스케치 여행을 다녀왔잖아. 화가는 그림을,
녀석은 그 그림에 글을 달고... 그런데 나 그 글과 그림을 신문에서 보았는데
녀석의 담담한 경지가 느껴지더라.”

진재가 그리 말하니 경식이도 뭔가 반론을 제기하려다 그냥 삼켜버린다.
아마도 “단 둘이서?”라는 말이었을 게다.

어느 날 문태가 마침 그 화가 친구와 만나는 날 경식이가 전화다.
오늘 모처럼 바람이나 쏘이러 나가잔다. 택훈이와 함께, 그러니 수서로 오란다.
“나 오늘 니가 60대 할망구라 타박하던 그 친구랑 데이트가 있는데? 함께 만나도
좋다면 그 친구 집이 화곡동이니 니들이 논현동쯤으로 오지 그래.”
이쯤에서 늘 할망구 타령하던 경식이가 물러설 줄 알았다.
헌데 녀석은 갑자기 무슨 정성이 뻗쳤는지 논현동으로 오겠단다. 택훈이와 함께.

사실 택훈이는 은평동에 살고 문태는 잠원동에 사니 두루두루 중간쯤인
신사역쯤에서 만날 수도 있으련만
경식이는 굳이 지 집에서 가까운 수서로 오라던 터수였다.
헌데 녀석이 천만 뜻밖에도 논현동으로 온단다.

논현동에 도착한 경식은 휴지에 침을 묻혀가며 차를 닦고 난리도 아니다.
"야 진작 말했으면 세차(洗車)라도 하고 오는 거잖아.”
“왜? 할망구가 지저분하다 할 가봐?
그리고 넌 차에 걸레나 물도 가지고 다니지 않냐?”
택훈이와 경식은 마치 면접시험이라도 보는 학생처럼 잔뜩 상기되어 있다.
 
이윽고 저쪽에서 걸어오는 줄리아.
문태가 인사를 시킨다.
“여긴 친구 택훈이” 그리고 이쪽은 경식이, 이쪽은 줄리아.”
헌데 진행이 되질 않는다.
먼저 악수를 한 택훈이 줄리아 손을 놓지 않고 그냥 계속 잡고 있으니...

잠시 후 4명은 맑고 높은 가을하늘을 눈에, 그리고 시원한 바람을
가슴에 쓸어 담으며 달린다.
그런데 경식이 분명 색맹(色盲)이 아닌 데 파란 불에 멈춰 서 있고 빨간 불에 나간다
.
이러다 오늘 4명은 비명횡사하게 생겼다. 택훈이 운전대를 뺐었다. 조금 낫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경식이는 굳이 1시간 정도 등산을 하자고 보챈다. 나머지 3명이
모두 아침밥조차 구경도 하지 않고 와 거의 아사(餓死)직전이라 하는데도...
등산에 자신이 있는 경식이 폼을 잡고 싶은 게다. 우여곡절 끝에 경식을 주저앉히고
매운탕과 소주를 시켜놓고 몸을 푼다. 줄리아가 경식이 청에 못 이겨  노래 하나를
뽑는다. 졸졸졸 개여울 따라 노래가 조용하지만 멋지게 울려 퍼진다.

저 옆 떨어진 천막의 손님들이 박수를 친다.
“내게 밤늦게 전화해줄 수 없을 가요?
나 2시까지 아니 밤을 새워서라도 기다릴 테요.” 택훈의 작업이 바쁘다.
말재주가 딸리는 경식이는 문태에게
“갈 때는 네가 운전해.” 하며 애꿎은 술만 타작한다.
“혼자 마시면 되나요. 우리 건배해요.” 줄리아가 잔을 내밀며 말한다.
그렇게 두어 시간... 경식은 거의 그로기 상태이다. 줄리아가 양주 두병을
앉은 자리에서 비우는 주선(酒仙)의 실력인 것을 미처 모른 탓이다.

하지만 과거에 노래방도 경영했고 피아노도 제법 다루는 경식이
여기서 물러서지 않는다. 노래방에 가서 제대로 놀아보잔다.
잠시 후  노래방에서 경식이는 득의의 미소를 띠고 마이크를 잡았지만
영  목이 터지지 않는다. 그저 줄리아 앞에서 폼을 잡으려는 마음이 앞서다 보니
너무 힘이 들어가 뒷부분에서 영 무너져버리는 것이다.
 
줄리아가 문태를 살짝 친다.
“옆에 봐.”
“나도 아까부터 보고 있어.”
둘은 둘만의 비밀스런 웃음에 자지러진다. 물론 아무도 눈치 채지 않게
...
거기 택훈이 줄리아를 숫제 목을 빼고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줄리아는 멋들어지게 몇 곡을 더 부르고 앞에 나가 덩실덩실 춤을 춘다.
최승희가 살아온 듯이...이제 경식이와 택훈은 아예 넋이 다 나갔다.

“아, 예인(藝人)이다. 예인(藝人)이야.” 택훈은 신음(呻吟)처럼 내뱉는다.
오늘 문태는 자유자재이다. 트로트건 가곡이든, 고음이건 저음이건...
그날 밤 문태와 줄리아를 태운 택시를 배웅한 뒤 경식이와 택훈은
60대 할망구라는 말을 더 이상 뱉지 못했다.
오로지 다음 달에 불란서에 작품 전시하러 출국하는 줄리아가 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