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겁지만 나이브한 녀석들. 1 편>
약혼녀와 데이트 약속을 하고 옷을 차려입고 막 나가려는 데 전화벨이 황급히 울린다.
경식이가 휴가 받아 나왔다고 만나잔다. 어쩐다? 녀석도 오늘이 휴가 마지막 날이라
하고 약혼녀와는 무려 한 달 만에 모처럼 만나는 약속인데...
진재는 잠시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이 진재의 고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그 당시는 휴대폰이 없었다.)

명동,  최불암 모친이 운영하는 막걸리 집 은성(銀星)에
경식은 벌써 막걸리 두되를 시켜놓고 앉아 있었다. 녀석은 진재를 보자마자
“야 너 나 여자 하나 소개시켜주라. 군바리 되니 위문편지 하나 보내주는 사람 없으니...”
“임마 입대하기 전에 미리 확보해놓아야지,
지금 군대에 가 있는 놈에게 누가 데이트해주겠냐?”
 
둘은 아직 벌건 대낮인데도 그렇게 실없는 소릴 지껄이며
막걸리를 두되씩은 조이 마셔댔다.
갑자기 경식이 일어나며 나가서 탁구를 치잔다.
“야, 야 술 마시고 무슨 탁구야?”
“운동을 해서 술 깨야지.” 녀석은 벌써 저만큼 앞서 걷는다. 진재는 조금
주저주저하더니 “야 너 먼저 가있어. 내 바로 뒤따라 갈 테니.”

마침 바로 근처 은하수 다방에 나와 있던 약혼녀를 데리고 탁구장에 들어서는 진재.
경식은 눈이 부시지 않는 좋은 쪽 자리를 미리 잡고 배트를 점검중이다.
둘은 늘 그렇게 자리다툼, 배트 다툼에 신경전을 펴왔다.
어쩌다 승부를 가릴 때는 철저히 자리를 중간에 바꾸고.
 
그런데 여인을 본 경식은 여인이 앉은 모습이 정면으로 보이는 쪽,
즉 눈이 부신 쪽으로 얼른 바꾸어 선다.  둘은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어
장타를 날리고  내려 꽃이는 스매싱을 날리기도 하며 방금 전까지 막걸리 두 되 씩
마신 사람이 외출한 냥 싶다. 오늘 따라 백 드라이브도 잘 치는 경식이,
90도가 넘어 120도 각도에서 거는 강력한 드라이브와 엄청난 스매싱과 커트를
섞어 치는 특기의 진재. 둘은 정말 신났다.
여인을 앉혀놓고 무슨 짓들인지...  그렇게 2시간이나 흘러갔다.
여인은 가끔 수건으로 땀깨나 흘리는 진재의 얼굴을 닦아준다.

경식이는 물오른 물고기처럼 점점 힘이 돋는다. 반면 진재는 서서히 지쳐가고...
이럴 때 장기전으로 몰고 가서 스태미나로 상대를 제압하는 게 경식의 오랜 악습이다.
그 때 여인이 오늘 집에 일이 있어 그만 들어가야 한단다.
진재가 여인과 함께 가며 작별을 고한다.

이십 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경식, 진재, 영철이가 무려 5시간이나 당구를
치고 나서 술잔을 나눈다.
“아무튼 이놈 참 스태미나 하나는 알아줘야 해.
야, 지금 우리가 이 나이에 무슨 극기 훈련 할 일 있냐?"
 
“이놈에겐 얼른 초반에 져줘야 해, 그렇지 않으면 지가 이길 때까지
밤새도록 붙잡고 늘어지는 놈이야.
아 이 녀석 옛날에 내 약혼녀도 있는 자리에서 계속 놀자는 바람에 나 정말 혼났다.
그런데 이 녀석 햇빛에 눈이 부신 자리를 좋다하질 않나, 그리고 막상 시합을
할 때는  반드시 탁구대 위치를 서로 중간에 교환해야 한다고 박박 우기던 놈이
그날은 계속 그 자리에서 치는 거 있지!”
 
“임마 난 그 때 내가 하도 여자를 소개시켜달라고 지그럭대니까 나를 위해서
네가 내게 소개시켜주려고 불러온 여자인 줄 알았지.  그리고 이 녀석
그날 그냥 "경식이라고 내 친구야." 라고 지 약혼녀에게 나만 소개시켜놓고
다른 말이 없는 거야.  그래서 난 끝까지 헷갈렸지.  솔직히 나 귀대(歸隊)해서
이놈 약혼녀 상상하면서 대열(大悅)에 취하기도 했었잖아.”

“응 나도 솔직히 1학년 마치고 중도에 군대 간 이 녀석에게 난 벌써
약혼했다 하는 게 조금 밋밋했었지.”
“그건 그렇고 뭐라고?  그럼 너 진재 와이프를 품은 거잖아?”
“야, 야 됐다.  너희들이나 나나 누구 마릴린 먼로 한번 품어보지 않은 사람 있냐?
실제상황이 아닌 데 뭘.”
 
“예수님이 요한복음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쳐라 했을 때
Without Sin이라 번역이 되었지만 난 그걸 포괄적인 죄라고는 해석하고 싶지 않아.
마음에 품은 음욕 쪽으로 무게를 두고 싶어.  즉 마음속으로는 한번 쯤
음욕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지.”

“반면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는 이혼한 여자,  즉 Divorced Woman에게
장가드는 것도 간음이라 한 걸 보면 그 면에선 참 골통이었어.”
 
“야, 야 교회도 다니지 않는 마귀 같은 놈들이 성경을 폄훼하지 마.”

“야,  넌 불혹(不惑)을 넘은 지금도 그렇게 단세포(單細胞)와 같은 말을 하냐?
교회 안다니면 다 마귀냐?   임마 너 회사 새로 차리기에 내가 회사 잘 번창하라고
기껏 회사명을 멋지게 지어주었더니 여사원과 바람이나 피우던 놈이
교회 가서 회개만 하면 넌 천사냐?”

“야, 야 그만 됐다.  우리 만나서는 종교이야기는 하지 말자는 게 불문율이잖아.”

그렇게 여자라면 홰를 치던 싱거운 녀석,  그러나 남의 아내를 눈감고 그리며
大悅에 숨 가빴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나이브한 녀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