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이 영화 속 무대에 가면 왠지 이런 식으로 행동할 것만 같다. 장률, <이리>
▲ 누구든지 이 영화 속 무대에 가면 왠지 이런 식으로 행동할 것만 같다. 장률, <이리>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대체 어떤 곳일까?”

 재중동포 장률 감독의 쌍둥이 영화 <중경>과 <이리>를 연달아 보고 나온 뒤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질문이다.

다들 짐작하겠지만 이 영화에는 짜릿한 스릴도, 애틋한 로맨스도,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도 없다.
 
그렇다고 평범한 일상을 스케치하듯 카메라에 담아낸 영화라고 재단하기에는 강

도가 너무 세다.

가끔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충격적인 장면이 튀어나오고,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게 하는 엉뚱한 장면이 화면을 가로지른다.

게다가 빤한 대사와 전형적인 장면들도 있다. 이 모두가 유기적으로 통합되지 않

고 느닷없이 불쑥 뛰쳐나온다.

의도적이었겠지만 마치 편집을 하다 만 듯 돌출적이고 단절적인 장면들이 계속

이어진다.

두 영화에 특이한 점은 또 있다.

 인물들 간에 뚜렷한 캐릭터의 차이를 찾을 수 없다.

 캐릭터의 소유자는 오히려 도시 자체이며 도시가 자신의 캐릭터를 인물들에 투

사한다는 것이 더 정확해 보인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다들 비슷비슷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중경>과 <

이리>에 나왔던 인물들을 서로 뒤섞어 놓아도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누구든지 이 영화 속 무대에 가면 왠지 이런 식으로 행동할 것만 같다.

사람들은 무표정하지만 속으로는 울분을 억누르고 있다. 다들 뭔가에 짓눌린 듯하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같은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들끼리도 교감이 없다.
 
인상적으로 기억나는 몇몇 장면을 보면, 같은 화면인데도 앞에 있는 사람과 뒤쪽에 잡힌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무시하듯

그냥 각자의 일을 한다. 마치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난 두 사건을 같은 공간 속에 인위적으로 밀어 넣은 것 같다.

인물과 배경이 한 화면에 잡히면 사람보다 뒤에 있는 풍경에 먼저 눈길이 가는 장면들도 적지 않다.

<중경>의 주인공은 중경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북경어를 가르치는 쑤이다.
 
같이 사는 아버지가 집에 창녀를 끌어들여 경찰에 연행되고, 경관 왕위가 호의를 베풀어 그를 풀어준다.

그 일로 쑤이는 왕위에게 몸을 허락하지만 이미 그에게는 아내도 있고 여자도 있다. 배신감에 그녀는 그의 총을 몰래 훔친다.

쑤이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다. 자기 아버지를 풀어주었다는 이유로 몸을 내주는 것도 그렇지만,

지하도로에 사는 걸인의 몸을 더듬는 장면을 보면 성적으로 뭔가 억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성적 욕구가 왕성한 아버지에 대한 질투 때문일까.

그나마 그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은 학원에서 북경어를 배우는 한국인 광철에 대해 동정 내지 연민을 느끼는 대목이다.
 
이리 역 폭발 사고로 모든 것을 잃고 중경에 온 그에게서 쑤이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미 잃을 것도 없고
 
삶에 대한 애착도 사라진 자신의 모습을 본다.

<이리>의 상황은 이보다 더 비루하고 건조하다.

30년 전에 일어난 폭발 사고의 여파로 인해 정신적으로 약간 모자라게 태어난 진서가 주인공.

분별력도 없고 계산도 할 줄 모르며 항상 웃는 얼굴로 동네를 돌아다니는 그녀를 세상이 어떻게 취급할지는 안 봐도 빤하다.

성적으로 유린당하고, 일을 해놓고 돈도 못 받으며, 동네 잔심부름은 도맡아 한다.

같이 사는 오빠 태웅은 그런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다.


<이리>에는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동생이 윤간당했음을 알고 태웅이 전우회를 찾아가 복수하는 장면과

오해가 있어서 경찰서 철창에 갇히게 된 불법체류 노동자가 돌발적인 행동을 취하는 장면이다.

물론 카메라가 행동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지만 감정적으로 억압된 영화에서 직설적으로 감정을 터뜨리는 이 장면들의 효과는 그만큼 크다.

템포가 느리면 다른 속도로 진행될 때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며, 심리적 거리가 멀수록 관객들은 상상력을 통해 그 간극을 메워야 한다. 장률, <중경>

두 영화는 처음에 하나의 영화로 기획되었다가 제작 과정에서 따로 독립하게 된 탓에
 
당연히 연결점이 많다.

<중경>에 나오는 한국인은 이리 역 사고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인물이며,
 
쑤이는 그의 소개로 한국에서 중국어 강사 자리를 얻는다

(<이리>는 바로 쑤이가 익산에 도착하는 모습으로 영화가 끝난다).
 
이리 역 사고 때 그곳에서 공연했던 가수 하춘화의 노래가 두 영화에 모두 등장한다.
 
그것 말고도 비슷한 상황이 많다.

젊은 여자가 주인공이라는 점, 가족 구성원 일부가 없다는 점,
 
중국어 학원이 주인공의 활동 무대라는 점, 노인들과 외국인이 등장한다는 점,

과일가게가 등장한다는 점, 사람이 죽는다는 점,

다방레지 혹은 매춘부가 나온다는 점 등등.

특히 주목할 공간은 외국어 학원이다.
 
외국인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이 공간이
 
여기서는 고향을 떠나고 싶어하는,

고향에 대한 애착이 없는 사람에게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해주는 일종의 해방구 역할을 한

다.
외국어 학원이야말로 또 다른 ‘작은 외국’인 것이다.

 쑤이가 중경 사람이면서 사투리를 쓰지 않고 북경어 강사로 일하고,

 그래서 그의 아버지가 딸에게 거리감을 느낀다고 말하는 장면은 그렇기 때문에 더 인상적

으로 와 닿는다. 진서가 중국어를 따라하는 것은 반사작용과 호기심이 뒤얽힌 것일 테지만,
 
이 광경은 뿌리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은유로도 읽힐 수 있다.

진서 남매가 살아가는 노인정이라는 공간 또한 이채롭다.

새로움이라고는 전혀 없고, 시시하고 활기 없으며,

늘 죽음의 그림자가 떠다니는 이곳에서 모여 지내는 사람들도 나름의 감정과 욕망을 갖고 있다.

노인들이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춤을 추며 돌아다니는 장면은 느닷없다는 생각도 들지만,

옛 사랑을 찾아 노인정을 찾아온 노인의 에피소드는 상당히 깊은 울림을 준다.

영화 마지막에 진서가 쑤이를 반갑게 맞이하는 장면과 더불어 <이리>에서 유일하게 희망의 메시지를 찾을 수 있는 대목이다.

감독이 영화에서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는 도구 중 하나는 영화의 템포이며 또 하나는 관객과 배우의 심리적 거리다.

영화의 템포가 관객으로 하여금 일상의 속도를 지우고 영화 속 세상으로 들어오게 이끄는 역할을 한다면,

관객과 배우의 심리적 거리는 관객이 얼마나 영화에 몰입해야 하는가 하는 정도를 결정한다.

<중경>과 <이리>에서 영화 템포는 느리며 심리적 거리는 멀다. 템포가 느리면 다른 속도로 진행될 때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며,

심리적 거리가 멀수록 그만큼 관객들은 상상력을 통해 그 간극을 메워야 한다.

장률의 두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해준다.
 
그곳이 익산처럼 오래전에 폭발로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 새롭게 시작한 곳인지
 
아니면 중경처럼 파국을 앞두고 비틀거리는 욕정의 도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감독은 두 편이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두 편의 영화가 동시에 만들어진 것은 두 개의 장소 때문이 아니라 두 개의 시간 때문입니다.
 
이제 겪어야 할 시간을 이미 다른 한쪽은 겪은 것입니다. 이미 겪은 것을 벌써 잊어버리고 있을 때,
 
나는 이제 겪어야 할 쪽을 보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런데 나는 결과적으로 이 두 영화가 근본적인 지점에서는 서로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파국을 경험했든 앞으로 겪게 되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너무도 비슷하다.

오히려 나는 두 곳을 묘사하는 감독의 시선의 차이, 그리고 관객으로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시선의 차이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중경>은 중국의 도시를 배경으로 중국 배우들이 출연해서 중국어로 연기하는 ‘외국’ 영화이고,
 
<이리>는 한국 배우들이 한국에서 한국말을 해가며 연기하는 ‘한국’ 영화다.

<이리>에 묘사된 모습이 <중경>의 그것에 비해 더 삭막하고 건조하게 여겨졌다면,

그럼에도 왠지 희망적인 메시지는 더 많이 숨겨져 있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익산이 중경보다 내가 살아가는 이곳과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리>에서의 묘사가 더 거칠고 현실과 유리된 듯하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내가 그만큼 한국 사회의 세세한 면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고 감독이 중국만큼 한국을 잘 알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내게 이 두 편의 영화는 비슷한 분위기와 세계관을 담고 있는 쌍둥이 영화가

서로 다른 장소를 배경으로 다른 언어로 제작될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서도 무척 흥미로웠다.
 
<이리>가 문득 <여자, 정혜>의 기억을 들추어낸 것도, <중경>을 보고 후 샤오시엔과 지아 장 커의 흔적을 느꼈던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