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만 내려다 보고 흘러내리는 땀은 닦지도 못한 채,
묵묵히 한발 한발 힘겹게 내딛는 소녀의 모습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나약하고 호강에 겨워 불평을 하고 있는지 한없이 부끄러웠다.
짐도 없이 내 몸 하나 달랑 올라가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그렇게 불평만 했을까?

까무잡잡한 피부에,슬픔을 간직한 , 소녀의 깊고 깊은 쌍거풀 진 눈이 계속 나를 쫓아왔다.
이를 악물고 올랐다.
드디어 멀리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3400에 위치한 산장이다.

앞서 도착한 일행이 손전등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눈물이 왈칵 솟았다.
2층 산장에 들어서니 , 늦게 도착한 우리를 위해 모두들 일어나 기립 박수를 해 주었다.
기립 박수 속에서도 마루 바닥이 빙글 빙글 돌고 있다.

山에서는 모두가 한 마음이 되는가?
무사히 올라온 하루를 서로 축하하며 , 마음 속까지 짜릿한 맥주를 들이켰다.
아마 이 술은 내가 기억하는 한 제일 맛잇는 술이 되었다.
이런 짜릿함 때문에 남자들이 술을 마시는가?

내일은 새벽2시에 일어나 , 정상까지 5시간 정도를 올라 가야 한다.
유럽인들은 대개 하루 정도를 더 쉬고 오른다는데 , 우리는 급한 성격 때문인지
후딱 해 치워야 직성이 풀린다.

여자들은 한명만 빼고는 몽땅 깨끗이 포기하기로 했다.
더 이상 욕심 내지 않기로 작정하니 , 고소에도 불구하고 잠이 쏟아진다.
그래도 새벽에 일어나 , 정상에 오르는 일행을 배웅하고 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선두가 도착했다. 일출을 보고 서둘러 내려오는 길이라고.

풀 한포기 없는 바위 산인데 ,
바람때문에 날아갈 것 같았고 ,
추위에 두통과 고통이 심해
열 발자국 걷고 쉬고 , 또 걷고 . 결국 일출을 보고는  사진 한장 후딱 찍고 내려왔단다.
바람때문에 더 이상 지체하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날 아침을 먹고 내려오는데, 두통도 어지러움증도 하나도 없어 참으로 신기했다.
오히려 힘들게 올라오는 이들에게 인사를 건냈다. 
천천히 천천히 ---.
조금만 힘내세요. 산장이 바로 앞이라고.
오를때는 보이지 않던 산들이 ,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스콜이 또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 이제는 너무 너무 시원하다.

드디어 다 내려와서 내가 말레이시아 정부로 부터 받은 번호가 204406번이다.
이 산을 오른 204406번째 사람이라는 인증서이다.
얼마나 소중한 증서인가?
비록 4095m 정상 까지는 못 갔지만 , 3400 까지 갔다 왔다는 것이 아쉬우면서도 자랑스러웠다.

증서를 받아들고, 자축하는 뒤풀이에서 가이드는 나를 "평생 못 잊을 여자"라는 고백을 했다.
왜냐하면 87번째 등산객을 안내하면서 "아! 저사람은 중간에 포기한다" 라고 찍으면 백발백중 이었는데,
이번엔 예상이 어긋났단다.
나를 포기할 사람으로 찍었는데 올라갔다고... 그래서 못 잊을거라고............

셀파들과 헤어질때는 아쉬워서 몸에 지닌 악세사리는 다 빼서 선물로 주었다.
반지, 머리핀등을 건네면서 여동생이나 여자친구에게 주라고 당부했다.
순수하고 우직한 이들에게 무엇이든 다 주고 싶었다.

캔맥주 박스를 힘들게 짊어지고 가던, 가냘픈 소녀의 슬픈 눈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무엇때문에 산에 의지해서 살고있는 사람들의 눈은 왜 깊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한때 대학시절 수녀님들을 도와 춘천 교도소에서 정기적으로 봉사 활동을 한 적이 있다.
회색 높은 담위에 철조망이 겹겹히 둘러쳐져 있는 정문을 통과하면 망루위에 총을 든 경비병이 섬찟했던 그곳.
여자 수용소의 방을 들어서면,
다들 겨울에도 맨발인데, 마룻바닥은 얼마나 닦았는지 아른아른 하고,
얼굴에 화장까지 한 여자들이 우리를 피해 황급히 눈길을 돌린다.
그러나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그 눈빛이 얼마나 애절하고 슬픈지... 그네들의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비록, 세상의 죄를 지었지만
그네들의 눈은 그렇게 순수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한없는 슬픔을 끌어내곤 했다.
보아주는 이도 없는데 왜 화장을 하냐고 했더니 그곳에서도 몰래몰래 연애를 한다고.
종교활동 시간에는 남녀가 합동으로 강당에서 강의를 듣는데,
그때 서로 눈이 맞아 쪽지를 몰래 주고 받는단다.
아마도 힘든 수감생활을 그런 식으로나마 견디고자 했나 보다.
그런데 그들의 눈빛에서 나는 오히려 슬프도록 순수한 마음을 보았다.

살다가 지치고 정말 힘이 부칠때, 나는 이러한 눈빛들을 떠 올리고 나 자신을 추스른다.
말레이시아의 슬픈 눈을 가진 현지소녀나,
수감 생활에 지친 여인의 애절한 눈,
그리고 번호 204406번을..

못잊을 세월속의 나의 첫번째 여행지 키나바루.
다시 그길을 가라하면 갈 수 있을까?
벌써 10년 전의 추억이 되 버린 키나바루.
그래도 그날만 되면 그리워져 다시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