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1998년 8월 16일, 말레이시아에 있는 4095.2m의 키나바루(kinabalu park)에 가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외를 나가는 것이라 무조건 설레이고 기뻤다.
47세라는 나이에 처음 해외 여행이라니...
좀 창피하기도 했지만, 내 여권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동안 1년에 절반을 해외 출장중인 남편 때문에,
집안 일에서 한순간도 짬을 낼 수가 없어 그 흔한 미국이나 유럽 출장 길에 따라 나서지도 못했는데,
대충대충 집안의 큰일들이 마무리 되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선 길이었다.
그때는 설레이기만 해서 4000m 라는 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좋기만 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라는 말이 그때의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음을, 머지않아 깨달을수 밖에 없는 상황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쿠알라룸프루에서 사바주로 가는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다시 5시간에 걸쳐 버스로 이동, 바로 키나바루 입구에 도착했다.
산 아래라 공기가 맑고 깨끗해, 밤에는 별들이 그냥 우수수 쏟아질 것만 같은 별천지의 세상이다.
보이는 건 산 뿐이고 해발 1800m에 위치한 산장에서는 맑은 공기 때문인지 쉬이 잠이 오질 않는다.
그곳 산장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 일치감치 키나바루 입구에 도착하니, 절차가 꽤 까다롭다.
보험을 들어야 하고, 셀파를 배정 받고, 허락이 떨어진 후에야 산에 오를 수가 있었다.
매년 세계적인 산악 마라톤이 이곳에서 열리는데 그때마다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이 생겨 꼭 보험에 들어야 한다나.
유럽인들이 특히 많다.
우리의 가이드는 태권도 금메달 리스트로 말레이시아에 사범으로 왔다가 그만 키나바루에 반해 주저 앉아버린 전문 산악인이다.
이번이 87번째 오르는 것이란다.
셀파들이 짐을 다 들고 우리는 맨몸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열대 지방의 나무들이 오르면 오를수록 높이에 따라 달라지고, 세계의 명산임을 입증하듯 쉼터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만나는 이들마다 인사는 "천천히, 천천히."
고소증에 시달릴까봐 미리 약을 먹었는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견디기가 힘들었다.
또 하루에 한번 쏟아지는 "스콜" 때문에 옷은 흠뻑 젖고, 땅에서 뿜어대는 열기는 가히 살인적이다.
숨이 탁 탁 막힌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고 구토가 나고. 3000m를 넘으니 어지럼증까지 일기 시작한다.
준비해온 산소를 마시면서 가는데도 소용이 없다.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소변은 나오지도 않는다.
내가 왜 여기에 왔을까?
다리는 풀리고 주저앉아 울고만 싶었다.
우리 팀만 14명인데, 뒤에서 멀치감치 따라오는 셀파들이 걱정이 되는지 자꾸만 쉬어가자 한다.
차라리 셀파들이 물건을 버려두고 나를 업고가면 안될까... 등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만약 내가 포기하면, 당연히 남편도 나 때문에 포기해야되고, 그러면 일행중 누구는 우리를 따라 나설테고...
결국은 한 사람 때문에 몇 사람이 못가는 결과가 오면... 끔찍한 일이다.
그냥 철없이 해외여행이라니까 앞뒤 가리지않고 따라 나선 내 자신이 기가 막혔다.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라는데... 그말이 딱 맞았다.
너무 힘이 들어서 남편에게 "셀파들이 날 업고 가면 안될까?"했더니 벼락같이 화를 낸다.
셀파들이 얼마나 힘이 드는데, 너를 업고 가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과 같은 거라나...
결국 남편과 대판 싸우고 부어터져서 걸었다.
"내가 만약 여기서 심장마비로 죽으면, 너는 아마 평생을 죄의식 속에서
살아야 할거다." 속으로 수없이 욕을 하면서 올라가는데,
내앞에 조그만한 여자가 올라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깜짝 놀랐다.
나보다 더 작고 마른 소녀가 캔맥주 2박스를 등에 지고 가는 것이 아닌가?
가느다란 다리가 금방 부서질것만 같았다.
가이드에게 물으니, 헬리콥터로 물건을 실어나르는 것보다, 인건비가 더 싸기 때문에, 직접 사람이 산장까지 맥주를 운반하는 것이란다.
3353m에 있는 산장까지 캔맥주 2박스를 메고 오르는 현지인 소녀.
일당은 우리나라 돈으로 2만원.
좋은 경험 하셨네요.
산학님
4000m 고산이라면 산악인들도 힘들어 할텐데요.
한라산 백록담을 오르는 것도 숨이 차던데요.
말씀을 듣고보니 우리 집 사람 첫 해외여행 생각이 나서 웃었습니다.
10여년전 대만을 간다고해요.
여교사들끼리 5박 6일로.........
그때까지 해외여행이 전무했으니 무척이나 기대감에 들떠 있더라고요.
돈 잘버는 약사 남편을 둔 제수는 거의 세계일주를 했으니......
대만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아내를 공항영접을 해서 모범 남편이란 칭찬도 들었고요.
그런데 대만 어디를 갔다왔다는 이야기를 못해요.
그럴 수밖에......
여행비를 아낀다고 홈스테이를 하는 조건이래요.
어느 교회 선교부흥회 일원으로 간 것이라 5박 6일 내내 기도하고 찬양만 하다 온 것이래요.ㅋㅋ
이후 방학 때만 되면 자주 나가더라고요.
저보다도 더 많이......
남편 팽겨 쳐 두고 해외 나간다고 우리 어머니께 혼도 났지요.
물론 제가 허락한 사안이지만.......
불허한다고 안 갈 것도 아니고요. ㅋㅋ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단돈 20000원에 고산 정상을 오르 내린다는 소녀 이야기가 가슴 짠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산학님 젊은 날 사진 같은데 무척 애띤 소녀 같아요.
참 보기 좋습니다.
그 옆에 부군이신 듯한 분도 인품이 너무 좋으시고요.
좋은 시간 되시길.....
만점짜리 남편이십니다.
든든한 방패 역활까지 하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기도만 하고 왔다는 부인.........생각할수록 귀엽습니다.
전 세계를 다니며 기도를 하니 남편이 출세를 안 할 수가 없지요.
우리는 나가면
그 순간 집은 싹 잊고 만답니다.
NO 204406 이 뭘까 생각해 보는데 잘 모르겠어.
궁금하네.
가느다란 네가 평지를 걷는 것만 봐도 안스러웠는데
고지를 오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내가 같이 힘들어.
맥주박스를 메고 가는 애는 몇 살이었을까?
아직도 그 일을 하고 있을까?
내친김에 궁금해서 2000번째는 누구일까 1000번째는? 1번은? 찾아 보았어요.
회 수 |
년 도 |
기 수 |
이 름 |
제 목 |
첫번째글 |
2003.6.28 |
11 |
전영희 |
졸업횟수와 실명으로 반드시.... |
1000 |
2004.7.4 |
11 |
전영희 |
불타는가슴 |
2000 |
2005.9.1 |
13 |
김영규 |
언니배웅하기 |
3000 |
2008.11. 23 |
7 |
도산학 |
NO204406<1편> |
과연 4000번째 주인공은 누가 될까요?
*** 지난번에 표만드는거 배웠는데 또 깜빡. 표가 엉성하죠? 내용만 보세요.다음엔 잘 할게요.
이제야 키나바루를 접하네요
우린 꿈도 못 꿀 너무도 멋진 苦行입니다
204406번째 인증서를 들고
아빠는 얼마나 기뻤을까 상상해 보며
204406-2편 기대합니다
산학 님!
1편만을 보고서는 어떻게 전개될지 몰라서
2편 올리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휴~ 일단 숨을 크게 내 쉽니다.
결국은 사랑으로 가득한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대할 때 용기와 순수한 아름다움이 반짝이겠지요.
그런데 산은 어느 산이든 다 좋지만 특히 모든 것을 떨구어 낸
맨 얼굴의 겨울 산은 더 매력적이란 말에 역시! 하고 눈을 크게 떴습니다.
인적이 끊긴 한적하고 쓸쓸한 겨울바다를 좋아하는 분은 많지만
눈도 덮이지 않은 맨 얼굴의 겨울 산! 참 여운(餘韻)이 남는 말입니다.
맞는지요?
이층 복도도 그렇고 이슬람 문양의 문들도 보이고 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연주하는 남자 분이
꼭 용상욱님 같으네요,
좋은 음악 감사합니다.
앞으로 산학 님의 여행기를 계속 기대해도 되겠어요.
특히 기행詩도 가끔요.
이곳은 알함브라 궁전이 아니고 인도의 타지마할 廟殿 입니다..
2005년인가? 6년의 실황 녹화 영상이고요.
저 연주하는 분 저처럼 지구의 重力을 어지간히 받겠지요?
어디를 가나
성당은 그곳이 그곳인 것만 같고
궁전도 그곳이 그곳인 것만 같은데
타지마할 이네요.
인도도 한번은 꼭 가야 할 것만 같은데
아직은 기약이 없네요.
중 2 시절 선배에게 자전거타기를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밀어줄 테니 핸들만 조정해봐.
쓰러지는 방향으로 핸들을 틀어.”
10분이 지나서는 “이제 발도 저어봐”
“형 진짜 발과 핸들을 동시에 조정해도 잘 가네” 말하며
당연히 뒤에서 밀어주는 줄 알고 뒤돌아보니
형은 저 멀리서 웃고 있는 게 아닙니까? 그만 나뒹굴었지요.
어쨌든 그렇게 20분 만에 자전거를 배우고 바로 다음 날
형과 나는 인천 송현동에서 서울 필동으로 내달렸지요.
철도 길에서는 직각으로 건너고 사람들 앞으로는 절대로 가지 말고
한 템포 늦추어 뒤로 지나가라는 주의만 단디 듣고요.
서울 와서 형 친구에게 잘 얻어먹고 다시 인천으로...
그러나 그 때는 한 겨울 칼바람에 사추리가 얼어붙고
다리는 알이 배고 목은 타는 듯 하고 숨은 턱에 차고
정말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죠.
나는 “너는 할 수 있어.”라는 형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소사쯤에서 지나가는 트럭들에 S.O.S.신호를 수도 없이 해보았지요.
그러나 트럭들은 무정하게 그냥 지나가고...
결국 캄캄한 밤이 다 되어 초죽음이 되어 인천 집에 당도했던 옛날이 생각납니다.
오죽하면 “내가 여기서 심장마비로 죽으면 넌 두고두고 후회할 거야.”라는 욕을
속으로 수도 없이 씹어 삼키셨을 까? 그 때의 山鶴 님의 심정을 類感해봅니다.
하지만 역시 이루고 나니 제게도 그 성취감은 지금껏 남아 있네요.
서울 가보자는 제안도 제가 먼저 꺼냈으니까요.
저와 그 선배 뱃장이 잘 맞았지요.
그리고 저처럼 무모하면 뭐가 이루어지기도 잘 하지만
뭐가 와르르 졸지에 백지로 무너지기도 잘 합니다.
그 선배는 저를 데리고 설악산에 갔고, 저에게 남인수의 청춘고백 이외에
성악곡이라는 게 있다는 걸 가르쳐 준 바로 그 선배입니다.
그 선배는 정말 못 하는 게 없던 팔방 미인이죠.
그림, 피아노, 노래, 공예, 집 천장에 올라가 전기 배선을 전부 바꿔놓기 등.
심지어는 재봉질, 바느질이나 수예도 여자보다도 더 잘하고, 사진기술과 구도 잡는 안목,
수영은 인명구조원 자격증까지 갖고 있는 재주 덩어리죠. 힘은 장사였고...
그러니 어느 집에서든, 아니 당시 이런저런 잔 고장은 많고 수리맨이 적었던 시절,
특히 아주머니들에게는 환영받는 사람이니... 절대 혼이 나지 않았지요.
그 형이 제게 못한 것이 하나 있네요. 저를 당시 크리스찬으로 만들지 못한 것.
그래도 그 형 따라서 서울 영락교회는 여러 번 가보았지요.
그 형님이 그립군요. 언젠가 그 형님을 소재로 虛構 단편소설을 시리즈로 연재해서
친구 한 명을 보름정도 깜쪽같이 속인 적도 있는 정말 그리운 형인데...
이 노래도 그런 쟝르같아요.
유러피안들이 자기네 고유 언어로 부르는 곡들은
원곡보다 색다르고 묘한 분위기에 자꾸 듣게 되더군요.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말이죠.
또,
연주곡도 다양한 악기로 연주된 캐논곡들을 모아보면 모두가 느낌이 달라요.
음악을 모을 때 그렇게 해서 60기가 정도 수년간 모았었는데
지난 겨울 하드가 맛이 갔어요 제가 잘못 다루어서.
요즘은 음악 잘 안들어요.
감상에 자꾸 빠지는 것을 방지하게 위해 심장에 윈도우 방화벽을 쳤습니다.^^
영상배경용 음악 선곡을 위해서 모으는 곡이외엔 잘 안들어요.
나도 최근에 두어 번 이사 다니면서
내가 그동안 여러가지 음원을 통해 녹음했던
테이프 1000 여개, CD,500장 LP200여장 정도를
누구 주거나 기증하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그냥 폐기처분했지요.
그 테이프 한 시간 짜리 만들려면 최소 3~4시간의 분량을 편집한 것이었는데...
허지만 버리고 나니 또 그런대로 견디겠더군요.
여학생들은 학생시절 팝송을 많이 듣고 또 곧잘 부르잖아요.
전영희 님도 그랬을 것 같은 데..
저는 듣기만 했어요. 된장 발음이 버터 발음으로 영 바뀌지 않아서...
마지막부분에 다다르니 숨이막힙니다.
헬리콥터외 소녀의 인건비....이런 세상살이에
가슴알이를 하며 난 그저 그들을 보고만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