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이 방은
짧게 스쳐간 생각이나
텔레비전을 보며 느꼈던 감동이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얻은 깨달음 등...
우리 삶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귀한 것이 분명하나
자칫하다 보면 놓쳐버리기 쉬운 일상의 한 귀퉁이를 잡아두는 메모장입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도 좋고
자기의 기억 창고에 저장을 하기 위한 암호같은 독백도 좋습니다.
그저 메모를 하듯이 편하게 쓰시면 됩니다.
갈수록 시간은 더욱 빨리 달려만 가고
우리 머릿 속 기억 주머니의 끈은 어느새 느슨해져
듣고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을 제대로 간수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떠오른 생각을 어떻게 하면 오래 잡아둘 수 있을까?.
언뜻 스쳐가는 좋은 생각들과
아주 짧은 순간에 얻은 깨달음을 기록할 수 있다면
우리 삶에서 남긴 큰 이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생각,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허망하게 잊혀지지 않도록
문득 떠오르는대로 이 메모장에다
스쳐가는 단상들을 꽉 붙잡아 두시기 바랍니다.
어렸을 때는 명절이나 이름 붙은 날을 기다리기도 했었는데
시집을 오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어른(?)의 반열에 오르면서는 명절이 그리 달갑지 않다.
먹을것이 변변치 못하던 시절이야 먹을 게 가지가지 있단 건만으로도 흐믓하지만
지금이야 명절 아니라도 아무때고 못 먹을 것이 없는 세상이니 그것도 시큰둥이고
'설빔' 이라는 말 어릴 적엔 뛸 듯이 좋았던가 싶어도 지금은 귀가 번쩍할 소리도 아니다.
내가 명절이 싫은 큰 이유중의 하나는
담아두면 스트레스지만 난 한 귀로 듣고 맞바로 다른 한 귀로 흘리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인
우리 엄니의 꾸시렁거림이다.
차리시질 말던지 꾸시렁거리시질 말던지
진즉부터 바리 바리 시장을 봐 나르시며 연신 꾸시렁 꾸시렁
내용인 즉슨 맏며느리가 없으니 어디 미룰 데가 없이 이 나이를 먹도록 내 일로 남아 신역이 고되단 얘기다.
거기다 아들의 차례를 에미가 지내는 기구함을 읊으실땐 한숨까지 보태가며 .
우리 시가는 큰 집이 아니라서 제사가 두 분뿐이다.
누가 빼앗아 갈까봐 불끈 쥐고 안 놓으시며 당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으신
친정엄마의 속마음을 뻔히 아는 시누이는 짐짓
' 엄마 ! 그렇게 힘드시면 손주며느리한테 넘겨주시고 편히 계시지'
' 힘들다 힘들다 하지 마시고 엄마도 한 상에 얼마짜리 맞추면 되잖우 '
한술 더 떠서 ' 엄마두 예수 믿지 그래'
일이년새에 총기를 많이 잃으신 울엄니를 우리는 놀리기도 하고,
과장하여 감동하는 척도 하고, 유치하게 추켜드리기도 하고,
쫌 무시하기도하고, 가끔은 '오십만원짜리에 모실까, 육십만원짜리로 모실까' 하고 경고를 때리기도 한다.(요양시설 얘기)
'나라' 는 나라대로 ' 가정' 은 가정대로 힘이 되는 사람과 짐이 되는 사람이 있는 게 사실이다.
우짜든지 힘이 되든 짐이 되든 한 무데기로 엉겨 붙어 살긴 살아야 헐것인데 ~ 나두 몰것다.
앞으로 걱정을 미리부터 할 건 없고,
당장 내 숙제로 떨어진 차례상에 쓸 나박김치나 당구자.
천정아~
좀 쉬었니?
쉬자마자 또 명절이네.
하나도 안반갑지?
네 글 읽으면 언제나 오장육부가 시원해진단다.
솔직하면서 예리하고 정확한 표현을 하니까 그런가보다.
그래~ 돌지말고 미리 가불해서 걱정하지말고 오늘 하루 일만 계획하고 끝내
일단 나박김치 맛있게 담궈라. ㅎㅎ
찬정아~!
나박김치 담그면 좀 줘야겠다.
늘 담가주던 이웃집 순이언니가 올해는 안했다고 식혜만 주더라.
농담이여. 어찌해서 한그릇만 올리지 뭐.
우리는 차례지내고 닷새후에 시엄니 제사라 또해요.
이럴땐 다들 한번씩만 한다는데 첨부터 해버릇해서
그냥해요. 근데 세월이 갈수록 꾀가나네요.
한번으로 하면 제맘이 편치않겠죠~?!!
혜숙이는 착해서 복 받을 겨.
솔직히 요즘 세상에 꼭 어째야 한다는 법이 있나?
정성이 있으면 하는거지.
난 얼굴도 모르는 시 증조부모 제사를 얻어다(뭐 존거라구) 30년 가까이 지내기때문에
출석인원이 몇명인가에 따라 많이 했다 적게했다 완전 고무줄이란다.
우리 아버님 제사가 공교롭게 추석이다보니
처음 3년은 아침에도 하고 밤에도 하고 그랬는데
옆에서 그리 번잡하게 안해도 된다고 해서(그런 충고는 금방 받아들여요)
아침만으로 했는데 그럼 사실 여러분이 함께 받으시는거라 좀 그렇지?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말이 없는데 내가 뭘 짚고 넘어가겠어?
지눈 찌르기지ㅎㅎㅎㅎ
사실 이럴 때도 꼭 되니 안되니 얄미운 소리 해대는 사람이 있는데
우연인지는 몰라도 생전 출석도 안하는 것들이 꼭 입을 대더라구.
우리 시 큰어머님께서 평생을 제사에 하도 고생을 하신지라
생전에 집안의 모든 제사를 부부별로 묶어주시고 유언으로
당신은 딱 한번만 따로 제사 지내고 큰아버님과 합치라고 하셨단다.
내가 나중에 우리도 아버님이랑 어머님 합칠 꺼라니까 생전 오지도 않고 차리지도 않는 우리 동서왈
(이 사람은 젊은 시절에는 내가 제일 좋아했는데 요즘은 얌똥머리가 없어졌어)
집에 따라서는 어머님제사날로 합치기도 한대나?
그걸 몇 번 씩 강조하길래 얄미워서
앞으로 우리 애들에게 짐많이 지울 일 있느냐고 쏘아주었더니 그제야 움찔하더라구.
아니 자기가 와서 돕기를 하나 제대로 참석도 안하는사람들이 다른 날로 하면 오겠다는 거야 뭐야.
난 암튼 내 생전에 우리 시집 식구들이 우리집 일에 참견하는 선례를 완전히 바로잡아놓고 은퇴할 꺼야.
솔직히 할머니 돌아가시면 오지도 않겠지만
웃기는 사람들이 우리 애들이 할머니에게 잘하면 지네들까지 입을 대려고 그러더라구.
뭔가 시키려고 하고!
정작 지네 아들 며느리에게는 입도 뻥끗 못하고 좋은 시어머니인 척 하고 말이야.
내가 아픈 이후로는 그런 짓 하면 난동(?)을 부리고 막아서니까 요즘 교통정리가 많이 됬어.
나도 우리 애들에게 우리 직계외에는 절대로 무리하지말라고 시상에 이런 이상한 교육을 다 시킨다니까.
뭐든지 태도는 공손하게, 부모님과 의논하겠다고 그러라고 했지.
나머지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해결해준다고.
유산은 못 물려줘도 집안일은 개선을 시켜야지.
참 지겨운 건 어느집 할 거 없이 큰소리 치고 대드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안 시키고
그저 말없이 잘하는 사람에게는 점점 많은 짐을 가져다 얹는 게 일반적이더라구.
나 예수믿는 사람 맞남? ㅎㅎㅎ
근데요 약한 선은 강한 악을 못이긴다는 거 이거 알아야한다구요.
'불량 주부' 라고 자칭하던 언니들두 오늘은 별 수 없이
웃으면서 전 부치고 계신갑네요. 봄날이 조용한걸보니.
나도 오늘 시집와서 처음으로 설 차례상 준비를 오지게 하고 왔어요.
나는 경상도식 차롓상 차릴 줄 모르지만 일일이 물어보기는 더 성가셔서 내 맘대로 막 했어요.
우리 일본 가기 전엔 울엄니가 정정하시기도 했고, 손발 안맞는 며느리보다는 콩꼬투리만한
손녀딸데리고 일하시는게 더 나았는지 다 해놓으시고 '서울서부터 오는 메누리 기다리며 손 놓고 있을게 뭐 있다냐. 일 다 했다.
오랫만에 보는 애기 손자(우리 애) 재롱이나 보고 놀자' 하셨었지요.
어떤 해는 새벽에 서울서 떠나 길이 하나도 안 막히는 바람에 곧바로 가면 12시도 안 되겠던데
경주 들려서 놀다가 일 다 하셨을 무렵에 들어가며 길이 막혀 엄청 고생한 것 처럼 생쇼를 한 적도 있어요.
그때 핸드폰도 없는 때고 막연히 기다리셨겠지요. 그때 포석정 앞에서 찍은 철없는 세식구 사진 지금도 있는데.
난 불량 주부는 아녀. 좀 함량 미달인가 싶기도 혀도.
근데 며느리로 보면 완전 불량배 메눌.
울 엄니 좀 억울하시죠. 멋 모르는 넘들은 메누리가 ' 보통' 은 되는 줄 아니까
어따대고 깡패같은 메누리 숭도 못 보고.
전을 부치긴 했어도 평소의 20 %정도만 했다오.
우리 시댁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회양적도 과감히 생략!
(우리 식구들은 별로 안즐겨서)
솔직히 불량주부라기보다는 진보주부 가 더 맞는 것 같지않니? ㅎㅎㅎㅎ
난 너처럼 멋진 불량배 메눌이 참 이쁠 것 같다.
불량주부 하겠다고 선언하고
주방장을 사퇴한다고 작정했었는데
막상 닥치니까 그게 말짱 도루묵 되어버리는거 있조.
뭘 알아야 면장을 시키지....
성질 급한 놈이 먼저 팔을 걷어 붙이게 되어 있어요. 에효....
그래도 미리 남의 손 빌려서 음식 장만을 대충 다 해 놓고
무거운 것은 만만한 주방 보조를 부리면서 했더니
그럭저럭 명절을 잘 쇨 수 있네요.
날씨는 정말 많이 풀렸어요.
아침 안개가 자욱하네요.
기차가 대전역에 도착을 하게 되면 안내 방송에서 대전 블루스가 나온다.
우리집 앞에서 전철을 타고 35분쯤 가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구성진 가락.
유행가라고 함부로 얕볼 수 없는 고전의 경지에 든 느낌이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지만 작은 아이가 명절을 쇠고 돌아가는 길엔 늘 배웅을 했다.
가서 먹을 음식을 바리바리 싸서 양손에 무겁게 들려 보내려니 마음이 짠해서 그랬을 것이고
공부를 한다고 찌들어 사는 아이가 안쓰러워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대학 졸업 전에 이미 취직을 하여 지금 한창 신입사원 노릇을 하느라
집에서 밥을 해 먹을 일이 없다 하여 빈 손으로 보내면서도 따라 나섰다.
그냥 가는 모습이라도 보고싶고 대합실에서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싶어서.
아들만 둘인 집에서 한 녀석은 꼭 딸 노릇을 한다더니 그 말이 맞다.
작은 아이는 여느 집 딸 부럽지 않게 자상하고 따뜻하고 친절해서
내게는 언제나 다정한 친구요 말벗이 되어준다.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마음을 헤아려 어루만지는 말도 할 줄 알고
가만가만 조용한 말투로 자기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는 사람.
눈빛이 맑고 깊어서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녀석... 정말 잘 컸네..
- 네가 내 아들로 태어나 준 것이 정말 고마워.
그냥 지금의 네 모습 그대로가 나는 좋아,
너무 잘나면 내가 감당하기 힘들고, 너무 못난이면 내 열통이 터질테니....
지금 네가 이렇게 내 속을 썩이는 것도 다 아들을 키우며 꼭 겪어야하는 일종의 세금같은 것일거야.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누.
그러니 이 고비만 지나면 다 좋아질거야.
아이가 사춘기 고비를 넘기던 질풍노도의 시절에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일로 내 속을 뒤집어 놓을 적에
내 마음을 다스리려고 최면을 걸듯이 속으로 자주 이렇게 읊조렸다.
여태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살았다.
지금 나는 평생에 얻은 그 어떤 직함보다도 아무개 엄마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소중하다.
아무리 화가 나는 순간이라도 가급적 과장되게 격한 말로 상처를 주지 않기.
내 잘못된 고정관념의 틀 속에다 아이의 미래를 가둬놓지 않기.
언제든지 아이의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도록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나도 계속 공부하고 성숙하기.
삶의 목표를 물질만능에 두지 않고, 참된 가치를 찾아 가도록 늘 깨어있기.
가정이 곧 삶의 울타리고, 가족이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존재임을 본 보여주기.
자잘한 일상의 습관을 통해 삶의 질이 결정됨을 알려주기.
가급적 긍정적인 자화상을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존중하고 신뢰하고 사랑하기.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까지 엄마로서 지키고 싶은 덕목들이다.
대전발 급행열차는 이미 서울역에 도착을 한 지 오래거늘
나는 아직도 아이를 마음에 품고 여러 생각을 하고 있으니 참.....
이게 다 대전 블루스 가락이 너무 구성진 탓이리라.
후배라도 배울것이 너무 많은 춘선아~
네가 말한 엄마로서 지키고 싶은 덕목중 나는 과연 뭘 지켰나 생각해보니 별로 없는것 같아 아침부터 반성하고 있다.
그런데 왜 똑 같은 여건 속에서 키워도 한 아이는 맘에 드는 아이로 한 아이는 맘에 안드는 속썩이는 아이로 자랐는지
가끔 그래서 내 탓이 아니라고 회피도 해보지만 ~
역시 자식은 나의 자화상이기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
하느님께서는 늘 기도거리를 주시는 건지~
몸은 좋아졌지?
건강 잘 추스리고 좋은 글 많이 써라.
최고의 우수 애독자 명옥이~
근데 만약 우리가 릴레이 소설을 또 쓰게 되면 이번엔 너도 독자 말고 작가로 뛰어야 해.
사사조 방에서 닦은 그 실력 누구도 못따라 간다. 알았지?
화원에 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음산한 날씨지만
봄을 집안에 들여놓으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나는 어제 미리 와서 꽃을 보아 두었던 터라
그 많은 꽃들 속에서도 방황하지 않고 가지고 간 빈 화분에 어울리는 것을 금방 골랐다.
신품종이라는 게발선인장 세 포트를 오목한 옹기 뚜껑에 소복하게 모아 심고
길쭉하고 야트막한 흰 화분 한 쌍에는 보라색과 분홍색 마라고테스를 두포트씩 모아 심었다.
키가 크고 네모난 흰도자기분에는 노란색 베고니아 두 포트를 넣으니 꽉 차게 어울리고
물 맞추기가 까다로워 작년에 샀다가 말려 죽인 호주매화도 다시 길러볼 요량으로 옮겨 심었다.
이번 겨울 강추위에 살짝 얼어서 잎을 모두 떨군 댄드롱이 움 돋을 생각을 않기에 죽은 줄 알고
오늘 빈 화분 들고 가는 길에 내다가 쏟아버리고 다른 것을 심어 오려고 했는데
화원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밑둥에서 올라온 굵은 줄기는 아직 살아 있었다.
내가 워낙 좋아하는 꽃이라 너무도 기쁘다.
죽을 고비를 용케 잘 넘기고 초록색 생명 있음을 보여주는 앙상한 줄기가 그리 예뻐 보일 수가 없다.
죽은 잔가지들을 시원하게 쳐 내고 나니 내 속이 다 시원하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마음놓고 기다릴 수 있다.
잎이 나고 꽃이 피는 날이 분명 오리라.
살아 있으니까.
.
지난주에 봄날 언니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한참 아랫것인 제가 두루 두루 선배님들께 안부를 여쭤야 하는데 ~
' 집은 다 지어가니 ? '
' 아니요. 아직도 멀었어요. '
시멘트일은 웬만허면 겨울에 안하는 것이 좋다 해서 미루더니
날이 풀리면서는 일일이 같이 하길 바라는 이 공사판 대장인 남편이
격주로 일본 출장을 다니는 바람에 또 공사가 주춤거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늦장을 부려도 올해안에
자그마한 살림집 하나 짓는거, 더구나 기초까지 끝내 놓은 터에다
벽치고 지붕 덮는 일이 안될리는 없는데
저는 손이 잽싼 목수든 미쟁이든 여남은명 불러다 후딱 후딱 짓자고 성화를 부리지요.
남편의 성미에 씨도 안 멕히는 소린줄은 알지만.
서방 숭을 보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남편은 도무지 두가지 일을 같이 별려놓고 못 하는 사람입니다.
한가지 일을 마치고 손 털어야 그 담일을 시작하니 이거야 원 .
내일부터 일주일간 일본에서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갔으니
지금쯤 아들과 둘이 저녁밥 준비를 하고있을 겁니다.
공사를 하는 날은 인부들 오는 시간에 맞춰 저도 일찌감치 나섭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딱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서
종아리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앞치마를 입고 얼쩡거리다 보면
멀뚱 멀뚱 먼산 보고 있을 여가는 없습니다.
그러다 빠져나와 남의 과수원가를 돌아 다니며 물 오른 가장귀를 비틀어보기도하고,
남의 논둑이나 밭고랑으로 쏘다니다가 한참만에 와도
내 일손이 아쉬웠다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지난번 비에 쑥이 제법 컸고, 냉이는 지천입니다.
어제는 돌미나리 군락지(?)를 발견해서
한 바켓스 캐다가 우리 연못가 한켠에 심으려고 가니
쥔없는 야생오리 두마리가 놀다가 기겁을 하고 물에서 나와
날개의 물기를 털어가며 나는건지 구르는건지 허겁스럽게 달아나 버립디다.
내가 쫓아내지도 않았는데
글구
집이야 되든 안되든 빈터 여기 저기에 옥수수 씨는 심어 볼 작정입니다.
밤이면 고라니가 출몰한다니 말짱 걔 좋은일만 시킬지도 모르지만
옥수수가 여물면 여기에 자랑은 해야지요.
내 쉰넷의 봄날은 그렇게 갈 것 같습니다
찬정아~
너의 일상이 꽤나 멋져 보인다.
돌미나리와 야생 오리와 함께 하는 하루~가끔 봄기운이 완연한 대지의 공기를 음미하며 차도 한잔 하고 ~
부럽다.
짓는 김에 사랑방 하나는 넓직하게 꼭 지어라.
우리 봄날 식구들 놀러가게~
김칫국? ㅎㅎ
언니 !
떡 줄 생각도 하고 있으니까 맨입에 김칫국을 들이킨 건 아니예요.
남편의 고향이라하지만 태어났다뿐.
두살때 떠났다 오십여년만에 돌아온 곳이 무슨 고향의 의미가 있겠어요
앞으로 이십년을 살지, 삼십년을 살지,
고향으로 만들어가면서 살려고 하지요.
오세요.
편한 파자마나 하나 챙겨서.
그저 민밋한 것 같지만 빈틈없이 뺑이를 치는 일상. 거기서 도망치고 싶을 때나,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울적한 심사를 떨쳐 버리고 싶을 때,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혼자 있고 싶지만 정처없이 길을 나서서 객지 잠을 자긴 간이 쫄릴 때,
와이로로 받은 좋은 술을 격의 없이 나눠 마시며 웃고 싶을 때두,
아니, 나도 어딘가 갈 데가 있다고 마음 속에 ' 행선지 ' 를 마련해 놓기만 해도
한결 마음이 화창해지겠지요.
그런 조그마한 사랑채는 하나 지으려고 합니다.
나이가 드는 징조는 여러 군데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쉽게 눈치 챌 수 있는 징조는 바로
삶의 시선이 사람에게서 자연으로 옯겨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제 울엄니와 작은 시고모를 모시고
부산 근교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큰 시고모 내외분 문병을 갔습니다.
진즉부터 울엄니가 ' 한번 가자, 가자 ' 하셨지만
이런 저런 일로 하루 여가를 낼수 없기도 하고
치매라는 병이 당장 돌아가시는 병도 아니니 좀 나중에 가자했는데
' 느그들이 아예 한국에 읎으믄 내가 아무걸 타고라도 버얼써 다녀왔을건데 느이가
한국에 와 있는 줄 다 아는데 내 혼자 가믄 느이 면(顔)이 서질 않아서 안 그러냐 ' 하시니.
작년에 치매 진단을 받으신 여든 둘의 고모님의 증세는 그다지 심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고모부는 치매는 아닌데 고령인데다 평생을 ' 위해 바쳐 ' 살아 온 분이라 혼자 생활이 안되어 그냥 같이 입원.
고모 역시 정신이 오락 가락 하는거 말고는 다른 병환은 없으신듯
아이니컬한 얘기지만 그래서 어느 자식이 선뜻 그 마지막 효도를 맡겠다고 나서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일 이년에 끝날 일이 아닐것 같은 위험 부담(?)땜에.
2남 3녀나 두신 고모님네나 뉘집이나 요즘 다 사정은 그렇지요.
뒷감당할 돈이라도 있는게 다행이라면 큰 다행
우리가 일본가기전인 십여년전만해도 노인 요양병원이 일반화되지 않았는데
요즘은 시골 노인들도 땅뙈기 한자락은 꼭 쥐고 있다가 혼자 밥 끓여먹지 못하믄
그 돈 갖고 병원들어간다 합니다. 그게 젤루 신상 폔허다구.
어제 울엄니의 아들(남편)이 슬쩍 엄니의 의중을 떠봤습니다.
" 어무이두 여기 올라요? 맨날 혼자 집에서 심심하담서 고모도 있고 여기가 안 좋소? "
" 내가 심심할 여가가 어딘노? 둘이(손녀딸과) 사는 살림이라두 예삿일이 아니구 나 안즉은 까딱읎다"
' 에구 ~ 거짓말. 만날천날 먹을것도 안 그립고 입을 것도 안 그립고 사람만이 기립다고 하시더니 딴소리하시네.
넘의 손에 안 맡겨지고 자는 잠에 돌아가시믄 젤 좋지만 그기 맘대로 되는 일인가 '
' 나두 집에 가고 싶다 ' 하시는 고모님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서 오는 나는 기분이 착잡해 죽겠던데
거가대교를 넘어가 대처 바람도 쐬고,
오랫만에 시뉘 올케 만나 맘껏 이바구를 하고 오시는 울엄니는 기분이 좋으신갑데요.
' 인자 둘러 볼 사람두 다 둘러 봤구 아무때 죽어도 상관읎다 ' 하시니 내 마음이 짜 - 안.
89세 되신 우리 엄니.
정밀검사를 해 보니 딱히 큰 병명은 없지만
그렇다고 성한 장기도 하나 없으시다네.
그래도 마음만은 펄펄 날아
시골집 마당에 비죽이 올라온 잡풀도 뽑고 싶고
당신 가묘에 비석까지 세워 놓은 선산도 돌아보고 싶으시대.
불과 댓발자국만 떼어놓아도 숨이 차서 색색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슬하에 둔 6남매가 하나같이 무탈하고
다들 제 앞가림은 잘 하고 살아서
딱히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치는 일이 없으니
이만하면 복 받은 인생이라.
엊그제 아버님 기일에 모여 추도예배를 드리는데
우리 엄니 울먹이며 이래 말씀하시더라
.
' 난 그저 죽을 일이 걱정이여.
이제 내게 남은 숙제는 쉽게 죽는 일 뿐인데
어떻게 해야 여러 사람 고생시키지 않고 편히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눈 감았다 떠 보니 천국이었으면 좋겠네.'
어머니 말씀이 진심이더라.
그저 입에 발린 죽고 싶단 말이 아니더란 말이지.
노인이 되면 제일 큰 걱정이 바로 어떻게 죽을까 하는 것인가 봐.
우리 몸이 자연적으로 소멸해 가고 있음을 느끼게 될 때
어떻게 해야 아름다운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는 건
비단 나이가 많은 노인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닌거 같다.
담당 의사는 아들들에게
언제든지 가실 수 있으니 마음 준비를 하고 있으라더래.
노인의 예후는 누구도 속단할 수 없는 것이라고....
어머니 때문에 우리들 모두가 심란해 하니까
손위 시누이들이 나서서 이래 말하더라.
그래도 울어머니는 복이 많으신 분이라고.
언제 가셔도 서운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호상이라고.
그러니 너무 지레 슬퍼하지 말고 지켜보자고....
그래도 내 마음은
우 야 꼬..
아직은 아니지만 앞으로 우리동네가 될 그 동네 야그
나에게 고사리 꺾는 재미를 준 그 야산은 원래 우리 시이모네 산이였는데
몇해전에 외지인에게 팔려 조만간 전원주택단지로 조성되어
분양된다고 한다. 전망이 참 좋다.
시이모부가 젊어서부터 그산에다 오만가지 나무를 다 심고, 산야초를 많이 심었단다.
그렇다고 몫돈이 되는 경제림을 만들었단 얘기가 아니고
시이모가 그 산에서 사시사철 용돈벌이를 솔찮게 하셨다네.
두릅순을 따고, 엄나무순, 오가피순을 따도 다 돈이 되고, 매실을 따고, 산밤나무, 단감나무도 여러그루,
취나물, 고사리, 둥글레도 있고, 약초도 많다는데,
'택지 조성할 포크레인이 들어와서 다 헤집기전에 느이 집 가생이로 그 낭구들을 옮겨다 심어라.
늬 이모부가 그 나무들 다 심은거라 파 와두 괜찮어. 그리구 그 사람덜은 쪽 쪽 뻗은 나무나
나무로 알지 그런 낭구들은 낭구로 치지도 않어.
두릅나무, 엄나무, 가시오가피나무, 산초나무들을 옮겨다 심었다. 땅의 경계를 따라 쭉.
죄다 가시 투성이의 나무들이라 일이 좀 컸다.
집과 멀긴해도 무시무시한 가시나무들이 둘러싸여 있으니
' 우리 여기 들어와 살면 위리안치된거 같겠다? '
흙이 포슬포슬한 축대 아랫쪽엔 둥글레를 뿌리째 뽑아다 줄지어 심었는데
난 은방울꽃 같은데 둥글레라고 하니 잘 모르겠다.
그 동네엔
도시에서 은퇴하고 내려와 사는 사람들이 내가 알기만도 몇집 있다.
우리집 뒷편 이천평은 부산 ㅇㅇ대 학장을 지낸 양반이,
그옆의 사만평(임야포함)은 무슨 무슨 세관장을 했다던 이가,
건너편 한옥은 영어교사와 미술교사를 했다는 부부가 사는데 거기온지 6년째라네.
또 한사람은 십년째 집지을 궁리를 하며 혼자 콘테이너 하우스에 사는데
맨날 궁리만 하니 언제 집이 될런지 요원하다. 넓은 텃밭농사를 혼자 짓는다
사업하다 이젠 좀 쉬고 싶어서 다 정리하고 왔다는 사람의 집은 거의 다 지어져간다.
그런데 집집마다 남자들만 와서 호젓함과 자유를 만끽하며 산다.
도시에 있는 집에 볼일이 있어서 가면 어서 내려오고 싶어서 서둘러진다고하네.
늙음을 향해가는 남자들은 그 촌구석이 좋아 죽겄는데
같이 늙는 어부인은 그래도 도시를 못 떠나겠다고 하니 워쩌겄냐고,
그 어부인들 천번 지당하고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이다. 뭣도모르고 쭐레쭐레 따라온 난
아무래도 내 발등을 내가 찍은것 같다
맞어 맞어!
근데 뭐 인생이 그런 거지.
고저 남들이 다 가려고 하는 서울을 코앞에 두고 부산시민 된 여자도 요기 있다오.
한번씩 서울가기가 너무 힘들고 돈들고 불편해 죽갔시요.
아버지와 딸의 눈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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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오기전에 신축중인 집의 외장 작업을 마무리하느라 바쁜때이지만
남편의 친구 부친이 그저께 돌아가셔서 서울에서 오늘 일찌감치 화장한 유골을 고성 당항포 선산에
안장하러 온다 하여 같이 다녀왔습니다.
고인은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였습니다. 종신 무상 건강검진을 받으러 정기적으로 일본을 다녀야했다지요.
외관상 장애는 눈에 띄지않는데다 생산된(?) 2세에게서도 이상 징후 없구
88세까지 건강해 보이게 사셨으니 피폭자치고는 ~
당항포 바다가 보이는 선산자락엔 조성한지 일이년이나 됐을까싶은 묘가 3기 나란히 있는데
이번에 돌아가신 부친의묘를 가운데 두고
왼편엔 초취부인(1964년 작고)이, 오른편엔 재취부인인 지금의 할머니(아직 정정함) 의 가묘.
비석 하나에 세 사람의 이름이 다 새겨져 있습디다.
ㅇㅇ公 ㅇㅇ
儒人 해주 오씨 ㅇㅇ
新儒人 남양 홍씨 ㅇㅇ 지묘
生 난엔 세사람의 생년월일이 새겨졌고
卒 난엔 이미 돌아간 초취부인만 1964년 ㅇ월ㅇ일卒
이제 고인이된 분의 卒日도 새겨지겠지요
돌아오는 차안에서 남편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열살안팍 세아이를 남겨놓고 젊어서 죽은 전처를 가엽게 여겨 곁에서 애뜻이 봐주고,
새로 들인 부인이 전처의 자식 셋을 잘 기르고 사십여년간 해로한 재취부인에 대한 깍듯한 예우
" ㅇㅇ씨네가 그럴리야 없지만 영감님 먼저 돌아가면 후취로 들어와 자식두지 못한 할머니들 천덕꾸러기
되는 집 많은데 성민이 할아버지 저렇게까지 해 놓고 돌아가셨으니 탄탄하네.
사람 사는게 인륜도 중요하고 도리나 의리도 무시할 수 없지만
강제성도 있을 필요가 있어. 그지 ? "
뉴스나 영화에서 흔히 접하는 죽음은 그저 죽음일 뿐인데
내 주변 가까운 곳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너무도 심각하고 애닯다.
올해 89세 되신 우리 어머니.
이승과 저승에 발 한 짝씩을 딛고 계시는데
차마 이승에 둔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온 몸으로 아파하고 계신다.
심장도 신장도 폐도 다 낡아버렸고
머릿속 뇌의 기능도 뒤죽박죽이 되었다.
산소호흡기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숨을 쉬고
소변줄을 끼워 물을, 몸 속의 노폐물을 빼내고 있고
주사기로 투여하는 영양제로 간신히 연명을 하시고 있다.
그리도 자존심 강하고 기품 있던 어른이
밤 새 고함을 지르며 탈출을 시도하는 난동환자가 되실 줄은 정말 몰랐다.
환청을 듣고 환각을 보며 혼자서도 자연스레 대화를 하는 것도 치매의 한 증상이라지.
절대로 당신만은 죽을 때까지 제 정신 놓는 일이 없을거라고
주문을 외듯 자기 암시를 해 오신 우리 엄니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셨는지 아니면 이 또한 소멸의 자연스런 과정인 것인지
이야기 하는 중에 30년 세월을 자연스레 넘나들며
마음속 깊이 꽁꽁 숨겨 두었던 많은 감정들을 별다른 여과없이 쏟아내신다.
- 내가 여기 이러고 있으니 느그 아부지 밥은 어쩌까잉?
김치도 안 담아놓고 나왔는디....
암만해두 나가 집에서 쫓겨나것다.
니가 얼른 가서 아부지 김치 좀 담가 놓고 올텨?
어머니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이 남편 밥상 걱정하던 그 때였는지
30년 전에 이미 떠나신 아버지 밥 걱정에 애를 태우며
집에서 쫓겨날까 걱정하는 얼굴에 홍조마저 살짝 감돈다.
아무리 아버지 밥 걱정을 하지 마시라고 해도 막무가내.
할 수 없이 천국에 계신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 아버님 ~
아직 집에 김치 많으시죠?
오늘 엄니가 병원에서 주무셔야 하니까 기둘리지 마셔요.
예. 아무 걱정 말라고요?
알았어요. 어머니한테 걱정말라고 전해 달라고요? 예예....
전화하는 소리에 귀를 쫑긋이 세우고 계시다가
아무 걱정 하지 말라는 아버지 허락(?)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어머니가 애처롭다.
그때가 제일 그리웠던 것일까?
우리 엄니는 지금 정신없이 빠른 속도로 진도를 빼고 계신다.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 내리는 심신은
마치 폭주기관차처럼 죽음을 향해 미친듯이 달리고 있다.
바삭하게 삭은 껍질만 남기고 가버린 달팽이처럼
동그랗게 말려있는 앙상한 몸이 말할 수 없는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사투.
말 그대로 사투를 벌이고 계시는 것이다.
내가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했으나 대신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인생이란 각자 자기 몫의 삶을 살다가 가는 것 뿐임을 절감하게 된다.
그래도 마음 다해 정성껏 배웅해야지.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그저 뜨거운 눈물 한 줄기 뿐이지만
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많이 흘려 드려야지.
지금도 엄니는 중환자실에 누워서 이승에 붙인 발 한 짝을 떼어내 저승으로 떠나시려 안깐힘을 쓰고 계신다.
춘선아~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힘드니?
우리 아버님 보낼때가 생각난다.
노인병원에 계실때라 간병사 아줌마가 급한 전화가 와서 갔지만 임종도 못보고 그냥 가셨어.
못해 드린것만 생각나서 한동안 눈물 많이 흘렸는데 지금은 많이 잊혀지고 가끔 생각난다.
그렇게 저렇게 떠나 보내고 한쪽에선 새 생명이 태어날테고 그게 우주의 이치일진데 어쩌겠니~
몸 잘 추스르고 기운내라.
우리 아버지도 결국 임종은 아무도 못보고 홀로 가셨단다.
위험스런 고비를 넘기셨다고 해서 다들 안심하고 집으로 갔거든.
경험자들이 한달은 더 버티실 꺼라고.................................
우스개소리 잘하는 우리 여동생 말로는
원래 아버지는 높은 분들하고만 통하는 타입이라서
"난 하나님하고 이야기 할테니 너희는 장례나 잘 치르거라!" 하신 거래.
우리 어머니도 그럭저럭 장기전으로 가실 모양인데
제일 우려하는 건 어중간하게 회복되시는 거야.
그럼 또 집에 가신다고 우기실테고 .................................................................
병원에서는 오히려 우리 어머니 정도의 환자가 제일 위험하더라구.
전에도 화장실 가신다고 위험스레 혼자 내려오시다가 넘어지셨거든.
머리로는 뭐든지 혼자 하실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양이야.
근데 나도 병원에 입원해봤지만 침대에서 내려오는 게 너무 힘들어.
이번 병원은 다행이 침대가 일반 병원보다 많이 낮은데 그래도 아직 높고
문제는 의사나 간호사가 너무 힘들더라구.
계속 허리를 굽히고 처치를 해야하니까!.
세상 이치가 다 좋을 수는 없는 모양이야.
이나 저나 춘선이도 미국 가야 하는데 어쩌니?
춘선아~요즘 안 보이더니 많이 힘들구나.
아름다운 너의 글을 읽다보니 가슴이 짠하고
나의 미래가 보이는 듯해.
고통 속에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더라.
고생 안 하시고 가셔야하는데....
얼마나 안타깝니???
많이 힘들어서 어쩌지!!!
그래도 네 몸 잘 추스리고 제때 식사하면서 보살펴 드리거라.
게임이든 랠리 연습이든 공을 치고 싶어도
엥간히 변죽이 좋지 않고서는 낯선 코트에 가서
선뜻 ' 나도 같이 치자 ' 소리를 먼저 못 하지요. 초보라면 더욱 더.
애꿎은 라켓의 씨줄 날줄이나 손꾸락으로 고르며 벌쭘하게 앉아 있는 외로운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리는 나는 기꺼이
그런 낯선이를 불러들여 연습파트너가 되어줍니다.
어제 삼성중공업 코트에서 만난
조그만 애녀석(?) 하나는
내가 테니스장에서 가장 딱하게 여기는 그런 모습이였습니다.
혼자 라켓을 휘둘러 보다가, 공을 주워 벽치기를 해보다가 ,
잔디에 앉아 놓지 못하는 라켓을 쪼물락거리며 남들 치는 구경도 하고.
외롭고 심심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막 게임을 마치고 들어오던 내가
눈은 크고 살색은 거무튀튀한 어린 이방인에게
' 네 나라는 어디냐, 인디아냐? '
그렇다고 그럽디다. 부모따라 왔겠지요.
그 애가 오고싶어서 왔겠습니까. 이 물설고 낯설은 여기까지.
모르긴 몰라도 선주단에 묻어서 왔을테니 인도의 자-알 사는 몇프로중 하나일겁니다.
그 애에게서 우리 아이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습니다.
서울서 멀쩡하게 초등학교에 잘 다니다가 부모를 따라가
일본 공립 소학교로 전학가니 전학년에 달랑 하나 한국인이 된 우리아이도
저 아이 만큼이나 낯설은 세월을 견뎌냈겠지요.
지금이야 제 생애 절반을 넘게 살아 내 나라가 더 서먹한 지경이 되었지만.
' 나하고 같이 쳐 볼래? ' 끄떡 끄떡
' 영어 할 줄 아니 ? ' 또 끄떡 끄떡
랠리를 하는데 일부러 그럴리야 있겠냐마는
내가 쳐서 보낸 볼은 다시 내게 오지 않고 넷트에 박거나
아니면 옆 코트 끄트머리까지 뛰어가서 주워 와야 했습니다.
삼십분쯤 했나 ~ 걘 아직 끄떡없는 얼굴인데 내가 볼 줏으러 다니느라 지쳐서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도 못 했습니다. 걔네들 문화를 할 수가 없어서.
그애가 라켓을 라켓집에 넣더니 미련없이 씩씩하게 돌아가는데
외로움이 조금은 걷힌 얼굴을 보았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서로 다가서는 거지요.
그 매체가 스포츠일수도 있고, 대화일수도 있고, 밥 한그릇일수도 있고.
요즘 우리 홈페이지에서 쟁점이 되는 것이 있는데 봄날에다 이런 생뚱맞은 얘기나 하자니
" 내가 뭐 아남. 즈들이 알아서 허것지. 오늘 저녁 반찬이나 맛난것으로 먹었음 쓰것네 " 하는
' 뒷방 늙은이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근데 2만여 동문이 다 거기에 들러붙어
제 목소리를 높일 수도 없으니 일부러 딴청짓을 하는거지요.
나같이 일부러 딴청을 부리는 동문님들이 여럿 보입니다. 귀는 열어 놓고.
따듯한 마음이 전해지는구나.
나도 낯선이에게 선듯 다가가지 못하는 성격인데
찬정이의 글을 읽으며 때로는 능동적인 행동이 사람의 꽁꽁 닫친 마음의 문을 열어 주기도 하고
그늘진 구석에 빛이 되어주기도하고...
이젠 나이도 들만큼 들어서 웬만한건 노여워 하지 않게 되더구나.
그리고 나의 치부를 타인에게 까발려도 창피하게 느껴지지않는 뻔뻔함도 생기고....
나도 뒷방 늙은이 노릇을 하며 딴청 피우는 척해도 관심이 쏠리는 쪽엔 계속 눈길을 보내게 되는데
심기가 불편하여 글 한편 올려 놓구는
금새 꼬리 내리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러 놓고
뻔뻔하게 또 글을 쓴다.
내사 오해 받는것도 내 맘만 진실하다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하여 무관하다 생각했는데
내글로 인하여 편가르기에 일조한다든가
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더 있다던지
누구의 맘에 상처가 된다면
이는 안되는 일 일것 같에서 글을 내렸다.
내 바램은 우리 봄날 처럼 모든이가 애끼며 따뜻한 정 나누는 만남의 장이기를 바랬는데....
제 목소리 높인다고 다 알아듣고 이해되는 세상이 아닌것을 ...
그래도 누군가가 목소리 보태어 보다 나은 세상이 되면 더없이 좋겠지
찬정아~~
날씨는 점점 더워오고 장마비가 집공사하는데 어려움을 안겨줄텐데
그래도 예정되루 잘 진척되기 바란다.
마음 따듯한 찬정아~~~
더위에 지치지 말고 남녁의 싱싱하고 푸른 바닷물의 정기 받아 건강한 기운 언니들에게 팍팍 보내거라.
언니 ! 집은 장마가 져도 큰 걱정은 없게 외장은 얼추 해 놓았습니다.
남편이 출장갈 일이 잦아서 진도가 잘 안나가지만 우째 우째 .
내년 4월까지는 다 되겠지요.
거제도는 요즘 매실 따는 철이라 시장에 나가 보면 매실자루를 쌓아 놓고
파는 할머니들이 많아요.
아들이 따서 시장까지 실어다 주면 앉아서 파는거야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들도 잘 하지요.
다 제 몫을 하면서 살아 갑니다..
저도 우리 나무는 아니지만
매실을 따고 싶은 만큼 따서 설탕에 재워 놨습니다.
내가 따는 수고만 한다면 딸 매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따서 보내 드릴 수도 있는데
요즘은 다 편하게 사는 세상이라 자신이 계획한 일 아닌게 베란간 뚝 떨어지면
엄청 일스럽게 생각들 하니까 괜히 말 꺼내기도 그렇죠.
오늘은 돌아가신 우리 시숙 제사
이번부턴 조카네서 지낸다하니 가서 도와줘야 하는데
제 살림도 꾸무럭거리고 변변히 못 하는 제가
남의 부엌에 서서 쩔쩔매기도 싫고,
나에게 숙제를 내주면 집에서 해가지고 가겠다고 했더니
그 숙제가 나물.
내가 꺾어 삶아 말린 고사리를 울엄니가 가르쳐 주신대로 불려 삶아 볶으려는데
얼마나 삶아야 연해지는건지 고사리 삶는 냄비 뚜껑 열어보다 해 저물게 생겼어요.
으미 워쩌까이
찬정아
말린 나물 급히 연하게 하려면 끓는 물에 소다를 약간 넣으면 된단다.
근데 올 봄에 말린 거라면 잘못하면 너무 물러지기도 해요.
제가 이십여년전 서울에 살 때.
서울의 ㅇㅇ 대학병원에 ' 사후 시신 기증 ' 을 해놓았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때는 배우자나 직계가족의 동의서가 첨부되어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몰래 저지를 일이 아니었지요.
그후 그 일을 잊어본 적도 후회해 본 적도 없습니다만
갈등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죽고나서 다 준다 하지말고, 살면서도 좀 풀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기증의 책임감.
저는 원래 좀 아끼는 편이지요.
제 것만을 아끼는게 아니라 남의 것이라도 아낄 수 있는 것은 아껴줍니다.
생활이나 생각에도 허영심이나 허세는 없었는데다
그동안 일본에 살면서 몸에 밴 라이프 스타일이 내나라에서는 다시 적응이 필요하데요.
요즘은 자꾸 나 스스로를 깨우쳐줍니다.
야 ! 박찬정
살아서 가진 것은 아까워서 못 주더니 ' 죽은 송장 ' 하나 세상에 줬다고 ' 나 기증 ' 운운하냐.
짊어지고 갈수 없으니까 '못 먹는 떡' ㅇ 나 준다고 그런거 아니고.(그건 진짜 아냐)
네가 살면서 소중하게 여기고 아까워하는것 조금 덜어주는 것이
필요없는거 통째로 내주는 것 보다 훨씬 훌륭한 나눔이고 남김이다 너.
그건 그런데
내가, 그리고 우리가족이
얼마나 오래 살지, 또 안할 말로 무슨 우환을 겪을지두 모르는데
쫌 쟁여놓구 살어야 하는거 아닌가 말여?
남이 만원 쓸때 쥐뿔도 읎으믄서 안 꿀릴라구 이만원쓰고나서
이담에 제앞가림할 것두 읎다믄 주변사람들헌티
민폐가 이만저만 아닐텐데 우짜꼬.
잘 벌기도 힘들더니
적당히 잘 쓰기는 더 힘드네. 아이구 참.
???찬정아!!!
벌써 20년 전에 시신 기증을 하였다고?
정말 깨어있는 양심이구나.
다시 한번 나는 어떻게 살았나?
뒤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해주는 글 잘 읽고 간다.
고마워!!!!!!!!!!
순영 언니 ! 깨어있는 양심은 무슨 ~
우리아이가 어렸을 땐 ' 엄마는 죽으면 빨리 병원에 연락해야 한다 ' 고 그러면
너댓살 먹은 우리아이가 귀를 꼭 틀어막으며 그런 말 하지말라고 울쌍이더니
점점 크면서 ' 엄마 해부 공부 다 하고나면 태워서 가족이 원하면 뼛가루는 준다매.
그거 테니스장 라인 긋는 횟가루에 섞어서 뿌려주께. 좋지? 좋지?
테니스장에서 사는게 소원인 엄마니까 ' 그렇게 느물거렸지요.(우리는 엽기 가족)
그때 연세대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에 낸 시신 기증 유언서엔
"시신을 정중히 다루는것이 죽은이에 대한 예우고,
염습하여 매장을 주로 하는 우리의 장의 풍습과 정서를바탕으로 보면
쉬운 결정은 아닙니다. 단지
누군가 할 일을
나부터 한다는 생각과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는 죽음의 뒤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몸이 인류와 과학에 기여할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기꺼이 기증합니다.
건강하게 열심히 살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나
이 땅을 뜨는 날 기증의 약속은 가족 모두가 반드시 이행하겠습니다. " 라구
한참 아랫것인 제가 2회 선배님인 언니를 불러세워 얘기하긴 쫌 뭣하지요. 이렇게 만났을 때 아니면.
2회 선배님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말 그대로 분골쇄신(粉骨碎身) - 자신은 욕을 듣게 되더라도 대의를 위하여 발 벗고 나서주셨다는 의미로 받아주세요.
선배님들이나 되니까 일이 그만큼 진전되었다고 모두들 생각할겁니다. 저 역시도.
싸질러논 똥을 종잇장 하나로 살짝 덮어 둔 것 처럼 께름직함이 남아있긴 하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이 좀 덮어 놔둬야하는건가 ~ 참 그러네요.
언니 백두산 가신다면서요?
산뜻한 마음으로 돌아오세요.
내가 어지깨 버스를 타고 앉아
뒷자리 '대우조선해양' 근무복을 입은 아지매가 핸드폰으로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엿들은게 아니구 안 들을래 안 들을 수가 없었다. 앞 뒷 사람 전혀 의식이 없이 통화를 헀으니까.
윗지방 어드멘가 처가와 가까이 살고 있는 아들과 하는 통화같았다.
자 : 어무이 낼부터 휴가 아이라? 어디 갈끼요?
모 : 으. 글타. 먼 데는 안 가고 느그 아부지하구 하루 가차운데나 갔다올끼다.
아아는 잘 크나? 사돈들은 다 폔코?
자 : 애기가 아침부터 열이 있어 오늘 병원갔다 오니라 쟈가(애기엄마)가 회사도 못 갔심더.
약 받아와서 멕이니까 열이 사알 내리고 자네요.
모 : 우짜꼬. 병원에서는 뭐라커드노?
자 : 감기라캅니다. 으른이 덥다구 에어컨이다 선풍기다 들입다 쐬니까
애기들이 병난다쿠믄서 약 멕이믄 괜찮아질기라카데요. 요새 그래서 병원에 오는 애기가
많다카네. 걱정마이소.
모 : 온냐 온냐 ( 오냐 오냐) 괜찮아질끼다. 아아들은 다 아프믄서 큰다.
느그들은 올 여름 휴가 어데 못 가제? 애기 때미.
집에서 푹 쉬어라. 맛 있는거나 사다 묵고.
사돈들도 뫼시구 나가 밥도 한번 사 디리고 그래라. 곁에 사니 외손지 본다고 욕 본다 아이가.
모 : 병원비는 많이 나왔드나?
얼라들 키울 때는 은제나 수중에 돈을 가주구 있어야 된데이.
어맘(며느리)도 힘들끼다. 느가 퇴근하면 퍼뜩 퍼뜩 들어와가 도와줘야지 우짜것노?
나두 일 다니느라 가보두 몬하고, 느그 아부지 조석두 해줘야 허구.
우야든지 느그들 삼시 잘 챙겨 묵으라.
자 : 알았심더. 어무이 아부지도 잘 챙겨 자시이소.
아부지한테 전화 왔다구 전해 주이소.
모 : 느가 아부지한테 하믄 안되나? 아부지가 느그 전화 받으믄 억수로 좋아한다아이가.
???찬정아!!!!
오늘 새벽부터 캐나다에서 8개월 만에 귀국하는
딸내 식구들 먹일려고 음식 장만하느라고 궁뎅이도 못 부치고
바삐 움직이다가.....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끔찍이도 잘해 먹이는 줄 알겠는데
사실은 전혀 아니거든.
내가 여행 갔다가 올 때마다 딸과 며느리가
한국 음식 해서 한 상씩 차려 놓고 기다리는데
요번에 음식 안하고 나가서 사 멕이면 나중에 할말이
없어지니까 할 수 없이 한거란다.
(에미가 오죽 많이 돌아 다니는데도, 자기는 꼬박 꼬박
음식 해놓고 기다렸거든.)
잠깐 쉬느라고 컴을 켰다가 네글을 보고 한참 웃으면서
저 두 모자의 정감어린 통화 내용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다.
통화 내용도 내용이지만 어찌 그리도 자세히 쓸 수 있는지 모르겠구나.
통영에서 반갑게 만나보자. 안녕~~~~~~~~~
언니네 손자 큰 일 날뻔 했다면서요?
얼마나 놀라고 마음을 졸이셨을까요.
4층에서 떨어진 손자보다
놀래서 간 떨어진 가족들이 더 가엽어요 (안 다쳤다는 결과릉 보고 하는 얘기지만)
다른나라 사람들(특히 일본사람)이 한국에 와서 의아하게 느끼는거 하나
지하철이고 버스고 병원이고 아무데서나 핸드폰이 울리고
큰소리로 통화를 한다는거다. 그 소리를 들을때마다 챙피하다.
거제도 촌 아지매들만 그런게 아니고 전국적으로 다.
밖에 나올때는 진동으로 해놓는 습관이 아예 없는것 같고,
통화도 즈이집 안방에서 하듯이 목청껏.
처음엔 여기 저기서 벨 울리는거 정말 짜증났는데,
언제부턴가 내 전화벨도 아무데서나 마구 울리니 처음엔 놀래서 허겁지겁 받았는데
요즘은 느긋하게 받는다. 나쁜건 참 따라하기가 쉽네.
찬정아!!!!!
나쁜건 참 따라 하기가 쉽네.
이말에 완전 동감이다.ㅎㅎㅎ
우리 손자 때문에 인사 많이 받는구나.
이 녀석이 남자라 제 에미 말을 잘 안 듣는다고 우리 딸 끌탕이다.
생긴건 참 얌전하게 생겼는데 누나들과는 아주 다른 가봐.
하지 말라고 야단쳐도 하고 싶은 것은 꼭 하고 만다네.
요번 비행기 타고 오는 12 시간 동안 한번도 쉬지 않고
닌덴도를 했대.
착륙 멘트가 나오길래 닌덴도를 빼았아서 가방에 넣었더니
옆에서 금방 코를 골고 잠이 들드랜다.
하도 기가 막혀서 할 말이 다 없어지드라는 제 에미말......
애가 셋이니 우리 딸은 자기 생활이 없는거 같드라.
그러니 요즘 사람들이 아기를 못낳는거 같다.
애를 많이 낳아서 잘 키우는 것도 국가에 충성 하는거 라는 생각이 든단다.
나두 팥죽 못 쑨다우.
기왕이면 레시피 한번 정식으로 올려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