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이 방은
짧게 스쳐간 생각이나
텔레비전을 보며 느꼈던 감동이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얻은 깨달음 등...
우리 삶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귀한 것이 분명하나
자칫하다 보면 놓쳐버리기 쉬운 일상의 한 귀퉁이를 잡아두는 메모장입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도 좋고
자기의 기억 창고에 저장을 하기 위한 암호같은 독백도 좋습니다.
그저 메모를 하듯이 편하게 쓰시면 됩니다.
갈수록 시간은 더욱 빨리 달려만 가고
우리 머릿 속 기억 주머니의 끈은 어느새 느슨해져
듣고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을 제대로 간수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떠오른 생각을 어떻게 하면 오래 잡아둘 수 있을까?.
언뜻 스쳐가는 좋은 생각들과
아주 짧은 순간에 얻은 깨달음을 기록할 수 있다면
우리 삶에서 남긴 큰 이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생각,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허망하게 잊혀지지 않도록
문득 떠오르는대로 이 메모장에다
스쳐가는 단상들을 꽉 붙잡아 두시기 바랍니다.
일본 가면서 사과 괘짝만한 박스 네개를 우리 시가로 보내면서
잘 보관 해 주십사 고 맡겼었다.
서울의 우리집보다 택도 없이 좁았던 일본의 우리가 살던 집까지 가져 갈 필요야 없지만
버릴 수는 없는 것들을 담아.
학교 앨범서껀 세식구의 옛날 사진들, 지금이야 다시 쓸 수 있을지 몽땅 내다 버려야 할지 모르지만
그땐 보물 처럼 아꼈던 음반과 턴테이블. 우리 엄마가 만들어 준 우리아이 애기 적의 이불과 요 베개의 껍데기.
내 녹의홍상이며, 이런거 저런거
그 박스들을 실어 오면서
어머니의 후미진 살림을 뒤져, 버려도 아까워하실것 같지 않은 양은 냄비를 하나 찾아 들고,
" 어머니 ! 이거 쓰시는 거예요? "
" 그 추접은 (깨끗하지 않은 ) 냄비는 뭐 할라고? 갖다가 쓸라믄 써라. "
"수건하구 행주 삶을 그릇이 마땅한 게 없어서요. "
나는 밑바닥이 쭈그러들고 뚜껑을 덮어도 새가 뜨는, 그렇지만 빨래 삶는데야 아무 상관 없는
냄비를 커단 비닐 봉지에 담아 현관 앞에 놔두고,
시장에 다녀 온 후 차에 주섬 주섬 싣고 왔다.
어제 수건을 삶으려고 냄비를 꺼내 보니
무슨 도깨비 장난 처럼 전날 내가 넣어 논 헌 냄비가 아닌
그만한 크기의 상표도 안 뗀 새 냄비가 들어 있네.
"어머니가 냄비를 바꿔치기 해 놓으셨지요? 저는 빨래 삶을 때 쓸거라 헌 거라도 괜찮은데요. "
" 팔순 넘은 시어메가 무슨 욕심에 새 냄비는 꿍쳐 두고 며느리한테 헌 냄비 갖다 쓰라커갰노? 빨래를 삶든 뭘 허든,
니 살림에 쓸 거 있거든 니 다 가져가라. "
이렇게 멀쩡하게 생각하고 이야기 하시다가도
종종 난데없는 말로 우리를 어이없어 웃게도 하시고 놀라게도 하신다. 약간의 치매끼도 있으신것 같고.
내 친구의 친정 어머니가 치매 초기 증세인지 하루 스믈네시간중 스므시간은 뭔가를 찾으신다더니
우리 엄니가 요즘(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맨날 뭔가 없어졌다고 찾으신다.
진주에 사시는 큰 시고모도 치매 진단을 받아 온 가족이 지금 머리 싸매고
대책 마련중이라는 전화가 왔었는데.
여기 저기 일가친척 어른들의 정신과 육신이 무너져간다는 소식을 들으며
' 아 ~ ~ 고향에 돌아왔구나 ' 실감이 난다 '
정신과 육신이 무너져 가는 것이 어디 어른 항렬만의 일이랴.
조금씩 변화를 느끼는 건 우리 세대도 마찬가지.
어찌하랴.
누구도 장담할 수 없고 비켜갈 수 없는 현실인 것을.
너무 이상해지기 전에 아름다운 퇴장을 할 수있는 것도 복이다.
우리는 퇴장하기 전에 빨리 남은 기력 다 소진하자.
나도 요즘 연주를 하든 뭘 하든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열심히 하게 되더라.
그냥 흐지브지 사라지는 건 슬프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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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어색한 군복을 입고 편지를 씁니다.
여기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아주 조금 더 별로입니다.
2년의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정말 이러면 안 되지만 미칠 것 같네요.
전역을 한 모든 친구들이 존경스럽습니다.
너무 늦었어요.
여기 오니 실감이 드네요. 90%가 90년생입니다.
답답하고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괴롭네요.
엄마는 쌤통이다 하고 생각하겠죠?
정말 쌤통입니다. 제가 저를 봐도.
고작 이틀. 아직도 훈련소.
정말 까마득하네요.
혹시 이 편지 보고 걱정 같은 건 하지 마세요.
지금 앞에서 분대장들이 막 소리지르면서 희망차고 편하다는 얘기를 쓰라고 하는데 거짓말은 하기 싫어요.
근데 전 참고 견디는 것에 조금의 내공이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버틸 걸 알아요.
요 근래 하기 싫은 것들을 정말 안 하고 살았었는데 싫은 것만 하게 되니 뭔가 좀 웃기네요.
다 커서 그것도 뒤늦게 군대 와서 이렇게 피곤한 소리만 해서 죄송해요.
옷을 보낼 때 이 편지를 같이 보내준다고 하는데 잘 전달될지 모르겠네요.
여기나 거기나 건강이 최고인 듯 해요.
여기 있는 것도 억울한데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진짜....
아무튼 제 건강은 제가 잘 지킬 테니 엄마 아빠도 건강히 잘 지내세요.
훈련소 연병장에서 마지막 엄마의 모습이 너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자꾸 생각이 나네요.
여기서 제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고 정리하기엔 아직 정신이 없네요.
차차 정신 좀 차리고 적응을 좀 해서 다시 편지 쓸게요.
아무튼 이 편지의 요지는 <훈련병 김산은 좀 짜증 나지만 잘 훈련 받고 있다>예요.
답장은 하지 마세요.
제가 다시 편지 하겠습니다. 아들 올림
p.s 첫날 불침번 걸려 서면서 제가 얼마나 편하게 살아왔는지 느꼈어요.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지만.
(밑에 만화로 그려진 활짝 웃는 군인 세 명이 있는데 거기다 말풍선으로 (얘보다 내가 나아) 이렇게 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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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7일 들어가 5월 18일 옷 벗어 보내며 썼으니 을매나 속이 폭폭하겠습니까만.....
이상, 너무 너무 행복해 보였다는 엄마였습니다.
아! 박스를 정리하려 하다 보니 밑바닥에 이런 게 써 있네요.
-엄마 사랑해. 지옥에서-
아무래도 소주 한잔 하고 자야겠습니다.
오늘에서야 이 글을 읽었습니다.
아드님이 훈련병이 되었군요. 훈련소에서 다시 신체검사 며칠하고 이후 훈련부대 배치 받아
전반기 훈련, 후반기 훈련...100일 휴가...진짜 자기 부대 배치 받아 이등병 생활 시작.
작년 6월에 장가간 아들 놈이 군 훈련 마치고 자대 배치 받은 때
제고홈피에 올렸던 글이 생각나서 퍼 왔습니다.
읽으시고 위안을 삼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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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002년 6월 29일) 군에 있는 아들 면회 갔다 왔다.
친구들이 면회온다고 했다기에 사진이나 찍어 줄까하고...
사실은 며칠전 전화에 너무 힘들어 하는 것같아서...
집사람은 친구들 온다는데 주책부린다고 가지 말라는 것을 혼자갔지.
아무도 면회를 안왔더군.
어제 친구들에게는 파견근무 나가게 되어 오지 말라고 전화했다는데
나는 그 사실을 몰랐고...
오전중에 북한군과의 교전소식
사망4명,부상 19명,실종 1명,경비정 한척 침몰이라는 피해 보도...
무거운 마음으로 면회 신청하고 기다리는데
1시간 만에 땀을 뻘뻘흘리며 나타난 이병 아들
하루 전날 갑자기 2주동안 헌병으로 파견근무하게되어
보초서다가 근무중에 갑자기 나오게 되었다네.ㅠㅠ
100일 휴가후 보름만에 보는 아들은
얼굴이 여드름 투성이가 되어있고(추측컨데 잠을 제대로 못자서)
양팔은 새까맣게 볕에 그을러있고
몸무게는 60키로에서 급전직하 54키로가 되어있더군.
너무 힘들어 보인다. 1시간 밖에 면회 시간이 없다네...
아들도
나도
거의 한시간 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면회실에서 앉아있었다.
간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는
고개를 떨구고...
참다참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다.
"안 울려구 했는데..."한마디에 나도 목이 맨다.
나는 다시 들어가서 벌어질 일들이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속으로만 걱정해주었지.
다섯마디만 할 수 있단다.
"네" "아닙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다시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 그러니 할 말도 못하고, 모르는 것은 물어볼 수도 없구
답답하기가 한이 없구,욕먹는 것이 일상이란다.
적지도 못하게 하고,쓰지도 못하게 하고,말도 못하게 하는
생활이 얼마나 계속 되려는지...
하루에 세시간 겨우 잔다네. 사람 대접도 못받고... 에궁.
면회도 두어달 동안은 오지 말랜다. 자기가 연락하겠노라고...
공연히 갔다 왔나 보다.
그러려니하면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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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규님! 공연히 심기만 더 어지렵혀 드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화이팅!!!!!!외침니다.
너무나 귀한 글을 이제야 봤습니다.
연병장 돌아 들어가는 아이를 보고도 행복한 미소를 지었던(눈물이 주루룩 흐르긴 했지만요) 내가 이 글을 읽으며 이제야 콧등이 시큰합니다.
눈물은 언제나 내게 금기사항.
한 번 터지면 계속 터질 것 같아 잘 울지 않습니다.
영화 볼 때는 편안히 잘 울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울지 않습니다.
이제는 끝나긴 했지만 아드님은 어쩜 그리 살이 빠졌을까요?
정말 마음이 아팠겠어요.
엄마가 우리 오빠 첫 면회 갔을 때, 엄마를 마주 보지 못하고 자꾸 무엇을 찾는 듯이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던 오빠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울더란 얘기를 듣고도 실감을 못했는데, 긴 세월을 돌아 이제야 손에 잡힐 듯 이해가 되고, 이제 돌아가시어 만날 수 없는 오빠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따뜻이 마음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상하게 군인도 못 되고 경찰청에 소속되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추스릴 아이를 생각하면 근심 이상의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세상에 어떤 경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없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나는 이런 혼란과 고난도 결국은 자신이 헤쳐나가야 하고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힘을 주었는가 이 생각은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요~
아들을 군대에 보내 놓고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복합적인 심정이 되는 것은
겪어 본 사람들만이 통할 수 있는 일종의 동병상련.
입고 간 옷과 신발을 착착 개서 박스에 넣어 집으로 보내며
꼭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같은 절박한 심정으로 깨알같은 글씨로 휘갈겨 쓴 편지.
내 속을 아프게 하던 녀석도 만고의 효자가 따로 없다. 그 순간 만큼은....
아들의 옷을 세탁기에 넣으며 가슴이 싸아 ~해져 찔끔 울고
박스를 탈탈 털어 보며 아무렇게나 휘갈긴 메모 한 줄에 또 가슴이 울컥하고....
옥규야.
드디어 아들이 숙제를 하러 갔구나.
더 늦기 전에 잘 갔다.
부디 건강하게 정해진 시간을 잘 이기고 돌아오기를 기도하마.
지나고 보면 너무도 후딱 가는 세월이더라.
지금 네 심정이 가장 폭폭할거이다.
하지만 그것도 금새 지나간다.
요즘은 논산 훈련소 사이트가 개방되어 있더라./
그 아이가 속해있는 부대에다 글을 올려 놓으면 정훈참모가 전달해 주더라.
이번 기회에 모자간의 애틋한 사랑을 마음껏 표현해 보셔.
훈련소에 있을 때는 편지 많이 받는 사람이 제일 부요하고 행복한 사람이더라.
암튼.....
이제 네 아들을 위한 국방부 시계가 똑딱이기 시작했으니
물구나무를 서 있어도 세월은 갈 것이다/
그 세월이 너와 아들 모두에게 유익하고 약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 아들 둘 숙제 다 마친 고참 엄마가. -
옥규야~
우리 아들은 3대 독자라 방위로 빠질 수 있었는데도 난 일부러 군대에 보냈어.
우리 남편이 너무 벌벌떨면서 키워서 불만도 많았고 남자가 나약한게 싫어서 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군대 갔다 오더니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 시간이 지나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더라.
암튼 그 땐 보내온 옷보따리 붙들고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하지만 시간이 가니까 휴가 너무 자주 나오는것도 귀찮더라. ㅎㅎ
요즘같이 뒤숭숭한때 걱정도 많고 맘이 많이 아프지?
편지도 많이 보내주고 기도해주고 그래라.
많이 성숙해져서 돌아오기를~
우리 장남 옷이 온 날 마침 대학시절 친구가 오랫만에 부산에 왔는데
"얘 보지마 보지마 나 가면 봐!" 하면서 얼마나 난리를 치던지.............................
우리집은 아들녀석 1학년 때 떼어놓은 경험이 있어서 저나 나나 군대 정도는 눈도 깜짝 안했다는거 아니니?
외할머니보고도 그랬대.
"그 어릴 적 생각만 하면 무서운 게 없어요" 라고.
이 늦깎이 에미들아.
걱정마라.
내가 살면서 안쓰러운 일이 정말 수만가지였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게 다 피가되고 살이 됬더라구.
살면서 잘 견디는 거 처럼 값진 건 없어요.
세상살이가 군대만 힘드나 점점 더 하지.
나 우리 애들 특별히 자랑할 게 없는데 이것들은 일단 잘 견뎌요.
그래서 안심하고 세상으로 내보낸단다.
소주는 내가 얼마든지 사줄테니 부산으로 오셔.
사는 김에 우리 동네 양곱창 맛있는 집도 있다.
우리 군대 많이 좋아졌네.
옷 위에 놓여있는, 너의 개성이 그대로 드러난 편지를 읽으며 많이 웃는다.
글 잘 쓰네. 언어영역은 살짝 형편없더니....
이제 일 주일이라고 생각하면 너도 까마득하겠지만 어차피 가는 시간은 가고 정해진 날은 온다.
군대 들어가는 날이 그렇게 빨리(?) 올 줄 알았니?
그래서 참는 데 내공 있단 너의 말 젤로 반갑다.
너의 사진을 바탕화면에 깔아 놓았다.
완벽한 계란형 얼굴에 부릅뜬 눈이며 험상궂은 이마의 모습이 거의 논산훈련소 훈련병 모델감이네.
일부러 안심하라고 그리 힘차게 소리지르며 사진 찍었나 싶은 마음도 들어 쪼매 울컥하더라.(나 혼자 생각인지도....)
너나 나나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 있지.
보나마나 요즘 정신이 없을 거야.
그냥 정신없이 훈련에 임해.
난 너 말대로 <훈련병 김산은 ...... 잘 훈련 받고 있다> 이 말을 믿고 맘 놓으련다.
그리고 한마디.
인생에 늦은 일은 없어. 순서가 바뀌었을뿐이지.
사람이 어차피 겪을 일은 겪고 넘어가더라.
네가 늦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 그래야만 했던 것일 수도 있어.
마음 편하게 먹고, 도 닦는 마음으로 지내.
그러는 너를 보며 나도 얼마나 도 닦았겠니 이놈아!
우리가 좀 더 성숙한 관계가 되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아무쪼록 몸조심하고(약속!) 너의 역량을 발휘하기 바란다.
다 괜찮을 거야.
넌 아주 좋은 사람이니까.
에구... 편지 전해주는 기간병 힘들겠다.
그래도 한 통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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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뻘쭘하네요.
남들 벌써 다 하는 일 모자라서 에구......
오랜만에 쓰면서 언니 친구들께 안부 여쭙고, 웃으시라고 못난 모자 편지 올렸습니다.
명옥이 언니 양곱창은 아주 땡기는 메뉴인데요! 감사 감사!!!!
게다가 거제도도 가깝지 않나요?
춘선이 말맹크로 국방부 시계는 돌기 시작했고....
하기야 어느 시계가 돌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저렇게 암튼 저는 잘 지내고 있답니다.
순희야.
양곱창 얼마나 맛있는데... 약오르지?
그건 전통있고 믿을 만한 곳에서만 먹어야한대.
어느 정도 배가 차면 곱창 전골에다 우동 사리를 넣어 먹거나 볶음밥 해주는데 고게 진짜 맛있다.
용용~~~~~~~~~~~~~~~~~~~~
옥규 아들이 군대갔구나.
우리 장남도 너무 늦어 훈련소에서 형님 대접받고 왔다니
너무 걱정은 안해도 될꺼야.
병무청에 뇌물이라도 바치고 현역으로 보내려 했건만 그마저도 안되어
집에서 옛말로 방발이로 다니는데
시간이 많으시니 돈이 필요하다고 매일 돈달라네.
배부른 소리로 들리겠지만 좀 바꾸고 싶다.
어떤게 좋은건지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다 지복대로 삹테지.
혜숙이 들어왔구나.
하도 안보여서 궁금했어.
나도 수다방에다 아들놈 욕 좀 하고 오는 길이야.
점점 미워지는 거 보니 빨리 장가 보내야겠어.
때가 됬나봐.
앞으로 한 3년은 무리같은데 어쩌냐? ㅎㅎㅎㅎㅎ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한동안 소식이 뜸하니 궁금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거니 하고 지냈는데
어느날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친다.
혹시....
집으로 전화를 해도 안 받고 휴대폰도 받질 않는다.
그래도 별일 없을거라 주문을 건다.
그리고는 잊어버렸다.
잠시 스쳐갔던 불안함도 오랫동안 못 만났다는 사실까지도.
엊저녁에 문자가 왔다.
그녀다.
"남편이 병원에 입원했어요. 얼마 남지 않은거 같아요."
짧은 메시지에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는 폐암으로 20여년을 투병했다.
처음 발병하여 수술을 할 당시에 아내 뱃속에 있던 아이가 올해 대학생이 되었다.
지독한 항암치료도 폐를 야금야금 잘라 내는 수술도 잘 견뎠고
아픈 와중에도 계속 직장에 다녔다.
좋다는 것이 있으면 물불 안가리고 뛰어다니며 구해다 먹이는 아내의 정성과
그의 타고난 강인함 덕분에 오늘까지 왔다.
항상 죽음을 어깨에 매달고 사는 건 우리 모두 같은 입장이건만
그는 결연한 태도로 하루에 하루를 보태며 살았다.
그랬는데....
이제 그가 잡고 있던 생명줄을 놓으려 하고 있다.
가족들도 이미 그를 보낼 준비를 마쳤다.
그의 아내는 불과 몇달 사이에 십년은 더 폭삭 늙어 버렸다.
아직 그의 숨이 남아있는 데 우리는 벌써 장례를 생각한다.
이런게 인생인가 보다.
그는 나보다도 나이가 더 어린데 먼저 간다고 나섰다.
마음이 참으로 착잡하여 어젯밤은 거의 뜬눈으로 지샜다.
오호 ~ 통재라.
상황 종료.
그제 우리가 문병을 다녀온 후에 그는 우릴 기다렸다는 듯이 그 밤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어제 다시 상경해서 이번엔 영정 앞에 울면서 인사를 했지요.
그래도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이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오늘까지 문상을 받고 내일 아침에 발인.
동작동 국립묘지에 새로 조성된 납골당으로 간답니다.
어린 상주들이 안쓰럽더이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내도 애처럽더이다.
조금만 더 버텨 주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남더이다.
호상이라 여길 때까지 사는 것이 좋겠다 싶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말입니다.
그게 마음대로 되는감? (한숨)
암튼 초상집에서 어린 상주 보는 것만치 가슴아픈 게 없어요.
언젠가 집에 온 옆지기 제자 왈
결혼하고 아이가 둘 생기니까 이제는 제가 아프거나 죽는 건
"직무유기죄에 해당해요." 라고.
자식을 키워 보니 성년이 됬다고 끝이 아니군요.
결혼시키고 아기 돌까지는 끝내 줘야 대강 지들끼리 살겠더라구요.
특히 둘째아기는 부모가 없으면 정말 힘들어요.
친정이든 시집이든 암튼 그때까지는 누군가가 도와줘야 한다니까요.
근데 춘선이에게는 웬 상황이 그리 자주 발생한대니?
첫 애를 낳던 날.
분만촉진제를 맞느라 링거병을 달고 누워 있었다.
진행 속도가 더딘 진통의 시간이 더 고통스러웠다.
남들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쑥쑥 잘도 낳는다는데
너는 덩치도 큰 것이 어찌 이리도 애를 못 낳느냐고 성화하시던 친정어머니.
결국 의사를 붙들고 애를 꺼내 달라고 하셨다.
아이는 우찌 되든 우리 딸 좀 살려달라고 하셨다.
지켜 보기 힘들어 술 한잔 했노라며 혀가 살짝 꼬부라진 말투로....
쓸데 없는 소리 그만 하시고 나가 계시라는 의사의 핀잔에다 내 신경질을 보탰다.
제발 좀 집에 가 계시라고....
안타까운 마음에 그러셨겠지만 나는 엄미가 밉고 서운했다.
나는 엄마의 술 취한 모습, 혀꼬부라진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싫은 범생이 딸이었다.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을....
우여곡절 끝에 나는 아들을 순산했다.
남편은 울진에서 대관령을 넘어 허위허위 인천으로 달려 오는 중이었고
친정 엄마는 내게 쫓겨나 집에 가서 잠들었고....
오늘이 그 날이다.
내가 첫 아들을 낳던 날.
오늘은 마냥 내 엄마가 보고싶다.
현우 애미야~~~수고많았네.
어제가 현우 생일이구나.
토욜이라 대전에 갔겠네.
울 아들은 6월 10일인디
얼굴이나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6월 10일이 좋은 날인갑네요?
우리집도 그날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남편이 재수읎이 똥을 밟았다고 한 날이 바로 그날이라우
=== 이거 올릴까 말까 ==== 2004년 6월 14기 게시판에 올렸던 글을 옮김
이거 올릴까, 말까, 내 자랑 같아서
이맘 때면 늘 그럴테지.
그 해도 뉘집이고 만발했어.
봄새 연초록 새순으로 담장을 타고 올라 붉게 핀 덩쿨 장미가.
가을쯤
쇠털 같이 많은 청명한 날중에 하루 잡아
딸을 치워도 늦지 않으련만
그 여름을 나기 전에 무신 사단이라도 날 것 같은지
울 엄마가 졸갑증을 내서
봄의 끝물인지 여름의 초입인지 어정쩡하게 찐득찐득한 날 결혼을 했어.
스므 해 전에.
그해 여름 난 죽는 줄 알았네. 낮이고 밤이고 더워서
" 월척을 낚은 낚시꾼이야 기념일 일지 몰라도 낚인 월척이야
재수 옴 붙은 날이지 기념일은 무슨 기념일
대어 낚은 당신이나 혼차 실컷 기념하셔 " 라고
깐죽거렸더니 남편은 뭐랬는 줄 아니?
" 나는 똥 밟은 날이야 "
어쨌거나 꿴 거하고 밟은 거이가 만난 것도 그럭저럭 이십년이나되었네.
이건 내가 한 수 위지 싶으면 다른건 남편이 꽉 잡고 있고,
이건 변명의 여지없이 내가 꿀린다 싶은 건
남편에게도 대책없는 헛점은 있고,
내 뼈골 뺀 공로가 무겁다느니 제 피땀 흘린 수고의 값을
더 쳐줘야 한다는 둥 서로 공치사하지만
누가 밑졌네 봉 잡았네 할 것도 없어. 그냥 그밥에 그나물이야.
그래도 올핸 뭐 하나 건져볼까 해서
낚시꾼 소리는 딱 꼬불치고
이십년 씩이나 됐는데 뭐 선물 같은거 없냐고 했더니
" 이적지 몸 주고 마음 주고 다 줬는데 뭘 또 주꼬 "
말이야 바른 말인지 몰라도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유약한 내가 아니지, 쫄라야지
몸으로 때우겠다고 하데. 때와 횟수를 두고 흥정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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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은 설겆이 5번 하기 ' 로 했네.
우린 부역도 엄연히 선물로 친다
받기만 하구 나는 입 쓱 닦았냐구
너 똥이 은혜 갚는거 봤냐
스므해 쯤 살고 나니까 이런 주책도 떱니다
선배님들 처럼 삼십년 쯤 되면 우째 될라는지
**** ***** ***** ***** *****
25년이 지났어도 똥 밟은 기분은 여전한가봐요.
난 아무 죄 읎슈. 멀쩡히 잘 있는 똥을 왜 밟아.
밟은 사람이 ~ ~ 지. 안 그류?
그류~~
우린 올해면 결혼 38주년이여.
이젠 이러쿵 저러쿵 말하기도 싫어.
연민으로 살든 어쨋든 그냥 저냥 사는겨~
"인생 뭐 있어? " 그러면서 ~
찬정이 덕에 아침부터 실컷 웃는다.
뭐? 똥이 은혜갚는것 봤냐구?
정말 웃겨~~~~~~~~~~~~~~~~~~~~
근데 꿈에 똥 밟으면 무지 좋은 거 아니니?
찬정이 남편은 노다지 캔거지.
찬정아.
니네 남편 정말 노다지로 생각하고 하시는 말씀임갑다.ㅎㅎㅎㅎ
우리도 37주년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만 아직도 허구헌 날
적군과 아군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맞어.
인생 뭐 있어?
화림아 다음 수다방 이름 이걸로 공모하자.
화림 언니 ~
여기 표 한 장이요~~
하지만 지금 여기서 암만 표를 모아놔두 소용없어요.
잊어버리지 말고 잘 기억해 놓았다가
다음 방 이름 지을 때 쯤 수다방에다 후보로 내야해요.
다들 너나없이 깜빡 잊어버리기 선수가 되어
수다방 이름 공모할 때 엄한 이름 응모할까 걱정이에요.
하긴... 설사 잊어버려도 그 담에 다시 하면 되구....
까이꺼 인생 뭐 있어?
고럼요 고럼요.
근데 이제는 수다방 이름도 문학소녀 버전에서 선술집 쪽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ㅎㅎㅎ
하긴 이곳이 봄날이니..........................................................
아! 으째야 쓰까이~~~~~~~~~~~~~~~~~~~~~~~~~~~~~
봄날은 항상 재밌어부려~
계속 무더위로 짜증나더니
엊저녁 늦게부터 비가 내려 더위가 한풀 꺾이네요.
아침마다 발코니의 꽃들과 인살 나누는데
보라색꽃 한 송이가 활짝 웃으며 날 반겨주더군요
희소식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죠.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돌아와서 그리스전을 보면서
이정수선수의 첫골이 터지는 순간
쟈스민 香을 봄날 식구들에게 보내기 위해 "찰깍"
주먹만한 화분에 심겨서
얼마 전 울 집으로 시집온 것을
큰 화분에 옮겨 심었더니
쟈스민 한 송이가 날 기쁘게 했어요.
나두 쟈스민 향이 좋아서 화분에 키웠었는데 통풍이 잘 안되서 인지 시름시름 하다가 결국 죽어버려서 꽃을 못봤는데~
저런 예쁜 꽃이 피는구나~
우리 집에는 야래향이라 부르는 쟈스민이 있어요.
향기가 족히 100리는 간다는 꽃이에요.
꽃이 처음 필 때는 저렇게 짙은 보라색이었던 것이
점점 색이 옅어져서 분홍이 되었다가 흰색으로 변하고 말지요.
그래서 언뜻 보면 한 나무에서 세가지 색깔의 꽃이 핀 것처럼 보이죠.
봄에 활짝 피었다가 다 졌는데
제 기분 내키면 아무때나 또 피더라고요.
통풍이 잘 되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해요.
로즈마리도 있는데 슬쩍 건드리면 향이 진동을 하는 허브에요.
이 또한 통기를 잘 해주지 않으면 쉽게 죽는다네요.
그래서 저는 이 두 화분을 위해 각각 베란다 창문 하나씩 배당해 주었답니다.
아주 추운 날만 빼고는 늘 열어 주지요.
그랬더니 아무 까탈도 안부리고 잘 자라고 있어요.
참,
광숙 언니 ~
저도 올 봄에 단풍 제라늄 한분을 들여놨어요.
이파리 자체가 단풍나무처럼 예쁜 것이 꽃도 조촐하니 곱네요.
언니네 집에도 그거 있지요?
요즘 애들은 하나같이 날씬하고 이쁘다
지난번 서울 지하철 플랫홈에서 본 그애도 뒷모습이 감탄사가 나오게 어찌나 날씬하고 이쁘던지
남의 딸이지만 힐긋 힐긋 흝어 보고 또 흝어 봤네..
핸드폰을 귀에 대고 통화를 하는데 그 이쁜 애가 글쎄 전화통에다
느닷없이 " 망할 년 " 그러데.
난 하두 놀래서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몸매도 이쁘고 모양새 있는 애의 입에서,
제 친구에게 스스럼없이 하는 말이겠지만
' 망할 년 ' 이라니. 그후에도 좀 더 통화하는 걸 들어보니(들려서) 겉모양 꾸민거에 비해
말솜씨는 영 아니더라구.
그 얘기를 들은 내 친구가 하는 말이 ' 요즘 여대생들 대화의 절반이 욕이라더라,
그러니까 모 대학에서 스므살 여자아이가 제 엄마 나이나 된 청소원에게 대뜸 욕지거리를 하는거지. '
* * *
서울 올라가는 차 안에서 메세지를 보냈더니 전화가 왔다.
"서울 와서 스케줄이 어떻게 되니? "
" 응. 우리 언니도 오랫만에 만나고 성묘도 같이 가고 ~ "
" 성묘는 어디로 가는데 ? "
" 으 응. 부평 "
" 아 ~아 ! 공동묘지? "
" 그래 "
아이 참. 그 말이 그 말이긴 해도 공동묘지라고 하니 듣기 참 그러네.
시립 묘지라고 해도 괜찮고, 요즘은 그곳 지하철 역이름도 가족 공원이든데 ~ 씁쓸.
나도 아주 오래전에 무심코 한 말 중에 그런 말이 있었다.
무슨 말인가 하던 중에 내가 ' 과부의 외아들 ' 이라고 했더니 그 말을 들은 내 친구가
' 홀어머니의 외아들 이라고 해, 같은 말이라도 어감이 그렇찮니? '
그 말이 어찌나 지당했던지 그 후 나의 어록에 ' 과부의 외아들' 이란 말은 아주 없어졌다.
어젯밤 우리 큰시숙의 제사였어요.
우리가 일본에 있는 동안은 그저 날짜나 기억하고 있었는데 십여년만에 제사 참사를 했어요.
돌아가실 당시엔 십대였던 조카 둘이 이젠 다 커서 오히려 할머니나 우리의 의지가 되고 있지요.
우리가 ' 거제도의 모든 것 ' 부터 한다못해 핸드폰 트러블까지 걔들에게 물어보면 모든 해답이 나오죠.
싸고 맛 좋은 집도 잘 알고,
통영 거제 일대 경치 좋은 볼 만한 곳도 다 꿰고 있고,
시내 무료 주차할 수 있는 곳도 잘 가르쳐 주고,
삼촌네 일이라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빽을 동원해 주는.
그전엔 우리 시부모님이 중심이고 리더였는데 오랫만에 돌아온 고향에는
그 자리가 바뀌어 있어요. 할머니는 정신도 깜박 깜박 하셔서 영 믿을 수 없고 조카들은 든든하고.
큰아들을 먼저 보내고 아직은 젊은 며느리를 제 갈길로 보내고 난 후 제사 때만 되면
' 지 눔이 내 제사를 지내야 할낀데 늙은 에미가 차려주는 (실은 우리 시누이, 외숙모, 이모들이 와서 일 다함) 제삿밥 묵으려고
하는 나쁜눔 ' 이라고 꿍시렁거리시면서도 손자가 장가들어 아이를 낳고 커다란 제 집을 장만하도록도
제사를 넘겨주지 않는 우리 엄니.
아이 키운다고 힘든 손주 며느리 사정 봐주시는 것도 있겠지만 우린 그 속마음 다 알지요.
아직도 우리 엄니는 이 집안의 중심에 서 있고 싶고, 입으로 이래라 저래라 뿐이더라도 내 집에서 일 벌리고 싶으신거.
어제 시가의 장남없는 차남인 우리 남편이 모두들 있는 자리에서 한 마디 꽝 했어요.
" 내년부터는 너희 집에서 느그 아버지 제사 지내라. 느그들 어릴 적에야 어쩔 수 없이 할머니가 지냈지만
자식이 成家 해서는 부모제사 자식이 지내는 게 맞다 아이가 . 어무이도 그런지 아소 "
제사가 끝날 무렵 사진 속의 형님에게도 . " 헹님요 . 내년에는 한웅이 집에서 지냅니더 . 자이아파트 ㅇ 동 ㅇ호니께 글로 오소.
인자 여기 와 봤자 국물도 없십니더 "
올 봄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로 실종된 것일까.
젊은 원혼들이 애통해 인당수 속으로 따라갔는지도 모른다.
소용돌이.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기 어려운 어지러움.
상상만으로도 멀미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