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이 방은
짧게 스쳐간 생각이나
텔레비전을 보며 느꼈던 감동이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얻은 깨달음 등...
우리 삶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귀한 것이 분명하나
자칫하다 보면 놓쳐버리기 쉬운 일상의 한 귀퉁이를 잡아두는 메모장입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도 좋고
자기의 기억 창고에 저장을 하기 위한 암호같은 독백도 좋습니다.
그저 메모를 하듯이 편하게 쓰시면 됩니다.
갈수록 시간은 더욱 빨리 달려만 가고
우리 머릿 속 기억 주머니의 끈은 어느새 느슨해져
듣고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을 제대로 간수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떠오른 생각을 어떻게 하면 오래 잡아둘 수 있을까?.
언뜻 스쳐가는 좋은 생각들과
아주 짧은 순간에 얻은 깨달음을 기록할 수 있다면
우리 삶에서 남긴 큰 이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생각,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허망하게 잊혀지지 않도록
문득 떠오르는대로 이 메모장에다
스쳐가는 단상들을 꽉 붙잡아 두시기 바랍니다.
나는 원래 노인들에게 접근(?)하여 비비적거리는 버릇이 있다.
아까부터 옆자리 할머니에게
" 할무니 ! 내가 등 비누질해 드릴까요? " 그 말을 하고 싶어 안달을 하며
어눌한 손놀림을 곁눈질로 흘금거리고 있었는데
선뜻 말을 못 붙이는 건
그전에 옆에 앉은 할머니에게 등 닦아 주겠다고 했다가
' 별 이상한 여자 다 보겠네 '며 '치한' 취급당한 경험이 있어서,
(일본 사람들은 몸이 서로 닿는 걸 무척 싫어하고 실례로 여겨서,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려해도 먼저 양해를 구하고 떼어준다)
오늘 옆에 앉은 할머니는 한쪽 팔이 영 안 좋아 보이네. 팔이 잘 안 돌아가나봐.
" 할머니 ! 제가 등 비누질해서 닦아 드릴께요. "
이 냥반 펄쩍 뛰지는 않지만 예기치 못한 일이라는 표정.
" 할무니 ! 팔 아프신 거 같아서 제가 닦아 드리고 싶은 거예요.
제 친정에도 외할머니가 계셔서 제가 가끔 목욕도 시켜드리고
머리도 감겨 드렸거든요.
개운하다고 참 좋아하셨는데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세요 . "
할머니는 고맙다고 하다가,
면목없다고 하다가,
미안하다고 하고,
또 고맙다고 하고, 고만해도 되는데 줄창 ~
내가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할머니가 탈의실에서 오도마니 앉아 있다가 팩에 든 쥬스를 하나 사다 주며
또 고맙다는 말을 두세차례 한다.
내가 로션을 바를 때도
양말을 신을 때도 옆에서 계속 이야기를 붙인다.
며칠 전부터 괜히 아프다고 하고, 팔이 아파서 좋아하는 빠찡고도 못 간다는 얘기,
자식들한테는 얘기 해 보나마나 라는 얘기
노인들 얘기는 받아 주면 끝이 없는 줄 알면서 오늘은 설렁설렁 받아 준다.
쥬스 한 팩 얻어 먹은 값하느라고.
할무니 등 닦아 드린거는? 그거야 내 재미로 한거지.
# # # # #
아이구! 지금 내가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아니구만.
요즘 내 머리 속이 텅 비었다.
아니 비우려고 애를 쓰고 있는 증이다.
너무도 불필요한 것들로 가득차 있는 창고를 정리하는 것처럼.....
묵은 생각과 감정들을 끄집어 내는 작업은 의외로 간단하지가 않다.
칡처럼 뿌리가 깊이 박혀 있는 것도 있고
대패질을 하지 않은 거친 나무결 같은 것도 있고
목백일홍처럼 단단한 나무에 박인 옹이 같은 것도 있다.
내 속에 감추어져 있는 슬픔.
내 가슴 한복판에 깊은 우물이 있음을 본다.
이 또한 살아 있다는 증거일테지.
재롱이가 떠나면서 내게 많은 것을 깨우쳐 주었다.
한 마디로 요약할 수도 없고
딱 꼬집어서 표현할 수도 없는 복합적인 깨달음이다.
올해 내 목표는 책을 쓰는 것이다.
생각의 틀에 갇히지도 말고
감정을 미화하거나 상황을 포장하려 하지도 말고
내 마음이 시키는대로 머리가 잘 정리하여 주었으면 좋겠다.
창고 정리가 끝나는대로 일을 시작해야 내가 원하는 기한에 맞출 수 있을텐데.....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더 어렵다.
재롱이 잃고 의연한듯 보여
나만큼 절절하진 않았나보다.....
했는데 깊은 속에 쌓여 있었구나.
난 컬럼에 글을 올려 놓고 생각날 적 마다 들어가 읽곤 했단다.
나 나름대로의 치유 방법이었지.
한 2주간 몹시 힘들더니 어느순간
가슴의 응어리가 빠져 나가더라.
아마도 기도중에 치유받았을꺼야.
춘선아 ~!
우리가 살아 가면서 얼마나 많은 이별을 겪겠니
어릴적 키우던 강아지가 약을 먹고
고통중에 죽어가던 모습을 보고 엉엉울며
몸부림치던 일로 부터 수많은 이별을 겪었지.
사람과의 이별...
동물과의 이별...
화초와의 이별...등등
그어떤것도 혈육과의 이별에 따르진 못하더라.
사랑하는 동물과의 이별은 잘못해 준것들만 생각나더라.
그렇지만 하늘에서 보실때 네가 가슴아파 하는 모습을 보시면
얼마나 아파 하시것니.
부모가 자식이 애닲아 하는 모습을 보는것 아니겠니?
나도 너를 생각하면 그마음이 읽혀져 애닲단다.
그래~글로 풀어내라.
그러면서 승화될꺼야.
제3의 인생의 이모작이 이뤄지기 바라며
마음으로 응원해줄께~~~~!
댓~다
그 핸 장마도 지는둥 마는둥 유월부터 무지하게 더워
에어컨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가전 메이커가 다른 제품 생산 중단하고 에어컨 찍어내기에
죄다 매달린다고 하던 그 여름, 삼풍 백화점이 무너져 내리던 그해 여름부텀
생떼같은 거금 레슨비를 꼬박 삼년간 들일 생각하고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목동아파트는 단지마다 두 세곳씩 테니스 코트가 있었는데 그중 3면짜리 코트가 바로 우리동 뒷편에 있었고,
남편이 이미 B+ 급으로 얼굴을 깔아 놓고 있었지요.
나는 낮엔 직장에 다니니까 야간에 하는데 레슨 20분 받고, 공 줍고,
누가 난타 연습이라도 같이 하자하면 ' 아이구 ! 이리 고마울데가 ~ '
누가 선심 쓰듯 게임에 끼워주면 ' 이거야 원 황송해서 ~ '
그렇지만 그런 성은(?)을 입는 날은 가뭄에 콩 나듯 있는 일이고,
레슨 마치고 나서 혹시 누가 게임에 끼워 주려나 기대하고 얼쩡거리거나
혼자 벤치에 앉아 발장난을 치고 있어도 아무도 시합에 끼워 주마고 불러 주는 사람이 없어
슬그머니 들어와 버려야 했던 ,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눈물나게 서러운 시절이었지요.
요즘 여기서 그런 옛날 얘기를 하면 일본 아저씨들은
" 박상(朴樣)이 어때서? 얼굴 이쁘지, 테니스 잘 치지, 한국 남자들 참 쌀쌀맞구먼 "
" 아니, 테니스 치는데 얼굴이 무슨 상관있어요? 공 보고 치지, 얼굴 보고 쳐요? "
" 으 응 나는 공 보고 안 쳐, 얼굴 보고 치지. ㅎ ㅎ ㅎ "
남편은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만 칠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대는 더욱 사람이 많아서 여자이며 초보자인 내가 끼기엔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어쩌다 남편이 페어를 엮어 한 시합하고 나면 남편이 그만 들어가라고 눈치를 줘서
두번 세번은 꿈도 못 꾸죠. 줄창 다섯 시합만 해 보면 요령을 터득하고 잘 할것 같은데.
'줄창 다섯번만 해보면 게임을 잘 할 수 있을것 같다'는 말을 나중에 남편이 골프을 시작해 두세번 휠드에
나가본 후 같은 소릴 하며 '일주일만 휠드에서 살면 100은 끊을텐데' 그러데요.
나는 그때 누가 테니스 치자고 하면 밥 먹다가도 숟가락 놓고 뛰어 나갔어요.
지금은 좋아하긴 여전해도 그 정도는 아니고,
가끔 원정도 갔는데 거긴 고대 안암병원 코트였지요.
남편의 친구 부부가 주선해서 불러주며,
" 오늘 시간 있으면 ㅇㅇ 엄마 같이 오면 좋은데, 바쁜 ㅇㅇ엄마가 강북까지 올 수 있을까? "
" 무슨 소리하냐, 우리 마누란 테니스 치자고 하면 강북이 대수냐 이북도 간다. "
찬정아 ~!
내동생놈 야그좀 하랴?
막내 남동생인데 어릴 적 부터 운동을 좋아했어
나하곤 다르게 몸이 날렵하고 빨랐지.
공부도 제법하고 운동도 잘하니
초딩시절에 안팎으로 날렸지.
그놈이 체대를 간다고 할때 우리집은 모두 넘어갔지.
그때만 해도 공부만 중요시 할때 거든.
지맘대로 체대를 가서 테니스 전공하더니
지맘대로 지방국립대 조교로 내려가대.
거기서 체육관 청소하며 혼자 결심했단다.
꼭 국립대 교수 테니스 대회에서
일등먹어야지....하며 이를 갈았단다.
지금 50대 중반인데 40대에 전국국립대 교수 테니스대회에서 일등먹고
일등 훈장을 마빡에다 달고 그동네 유지가 되어 테니스장을 휩쓴단다.
지금도 어쩌다가 엄니 뵈러오면
인천에 가서 친구들 만나며
테니스 치며 시간 보내다 온단다,
오기만 하면 허벅지를 내보이며
신나게 자랑한단다.
제일 문제아가 제일 잘 풀렸지.
정년퇴임하면 테니스장 운영할꺼라나.
암튼 테니스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건강하고
다른 운동은 눈에 안들어 오나봐.
40대로 밖에 안보여.ㅋ
열심히 운동해서 너만은 늙지 말아라 ~~~!
박상(朴樣)이 얼굴 이쁜건 시인 하는거네?ㅎㅎㅎ
나도 테니스를 생각하면 슬픈 이야기가 떠오른다.(맨날 슬픈 이야기인가? 하여튼 내 청춘의 암울한 시기였지)
1980년도 초에 엄마 돌아가시고, 우리 할머니가 쓰러지시고... 이러구 저러구... 하여튼 집에는 나랑 할머니랑
둘만 살던 시기가 있었지. 할머니의 중풍과 치매병을 내가 돌보며 그해 5월 부터 나의 전쟁은 시작이 되었고.
업치락 뒤치락 그렇게 하루하루 지냈단다.
그때 큰 언니가 테니스 렛슨을 받자고 해서 아파트 단지에 있던 테니스코트장에 등록을 했다.
문제는 할머니.
찬정이도 알다시피 라켓을 한번 잡으면 그 매력에 빠져서 제정신을 못 차리잖니?
아침 일찍 할머니가 드실 죽을 대충 끓여 강제로 떠 먹여 드리다 시피 하곤.....
라켓을 들고 테니스장으로 Go Go~~ 죙일 찬정이 처럼 눈치도 봐 가며 공도 주워 줘가며
오후 까지 테니스를 치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집으로 옮긴다.
으으으.... 베란다에 허옇게 어떤 물체가 얼핏 비춰져서 깜짝 놀라 뛰어 올라가 보면
할머니가 오락가락 정신에도 사력을 다하여 베란다로 기어 나오셔서 그대로 누워 계시더라.
낑낑 대고 할머니를 들어 올려 방에다 모셔 놓고,(실수 해놓으셨으면 후다닥 치우고)
남은 죽을 또 떠 먹여 드리고 나도 대충 먹고 또 테니스장으로 Go Go~~ㅎㅎ(웃을 일이 아니요)
결국 할머니는 그 해 초겨울에 돌아가셨다. 두고두고 죄송한 마음 뿐이다.
그 후, 나의 다리를 잡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때가 스물 여섯살. 아버지가 퇴원 하시고 아버지와 같이 있던 오빠도 오고,
동생도 제대하고 다시 식구들이 모여 사는데, 아예 테니스장 앞 동으로 이사를 갔네.
수고했다 고생했다 네가 최고다. 효손이다....온통 치하를 받으면서.(정말 민망했다)ㅎㅎ
아침에 모두 출근을 한 뒤에
내 방 창문을 열어 바로 창 밑의 테니스 코트의 상태도 일단 점검하고,
내 렛슨 순서는 대충 몇 번째 인가? 오늘 테니스 복장은 바지를 입을까 치마를 입을까... ㅎㅎㅎ
우리 언니네 두 아이는 테니스장에서 다 자랐다.
아니, 그 때 우리 코트의 젊은 엄마들의 아이들은 테니스 공에 한번이라도 안 맞아 본 아이들이
거의 없었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계속 렛슨을 했고, 區 대회, 市 대회... 승승장구(믿거나 말거나)했는데,
악바리로 했으면 혹시라도 더 클 수 있었는데, 승부욕이 별로 없는 나는그냥 인천 시내에서만 주로 놀았다.
테니스를 치던 수 십년(?)간 이마 부분만 빼곤 완전 동남아 계열 색깔이였었다.
찬정이 처음 봤을 때, 투피스를 입은 찬정이 종아리 부분은 검게 탔는데
양말을 신었던 발 부분이 하얘서 속으로 웃었던 기억이 나네.
라켓을 놓은지 몇 년이 되니까 엄지랑 손바닥에 깊게 자리 잡았던 굳은 살은
이제 거의 없어져서, 다시 새로이 시작 하려면 물집 잡혀서 벗겨지고 또 굳고 하는
그런 일을 겪어야 할텐데, 겁나서 이젠 못한다.
그저 가끔씩, 폼은 달라도 비슷한 탁구를 치는데, 다음에 옥규 한테 도전해 보려 한다.
써 놓고 보니 별로 안 슬프네.
광희야~
오늘은 그냥 호칭빼고 이름만 부를께.
광희도 엄마와 일찍 헤어졌구나...그래서 동생같은 기분이 더 드나봐.
엊그제 2월7일이 울엄마 하늘나라 가신날이었어.
그날이 되기전에도,
지난 주에 수도원 순례하는 가톨릭 신부님과 일행들과 동행하면서 내나이때 돌아가신 엄마를 추모했단다.
나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순례하며 기도하는 여인들을 보면서
하늘에 계시는 울엄마도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겠지 하며 위로를 받았지.
광희야 겁내지 말고 다시 시작해봐. 테니스든 스케이트든 ... 더 늦기 전에 ...
그리고 힘내고~!!!
옥인언니,
2월 7일은 마침 일요일이었는데, 저희 시어머님도 꼭 그 날 하늘에 가셨답니다. 양력으로요.
그래서 교회에 가서 추도예배를 드렸답니다.
언니 어머님과 같은 날 떠나셨네요.
시어머님 께서는 너무도 조용히, 이미 아신듯 차비를 다 하시고 떠나셨답니다.
그에 비해 저희 엄마는 아주 힘들게 가셨구요.
내가 정말 무엇을 하고 싶은가? 곰곰히 잘 생각해 봐야겠어요.
어설프게 건드렸다가는 하루하루 시간이 이제는 너무도 아쉬워서
웬만하면 알차고 의미있게 쓰려 하고 있어요.
아자~!!! 힘을 내고~~!! 언니도 화이팅~!!!!
춘선아~
재롱이 잃은 슬픔이 꽤 컷구나~
난 강아지를 만지지도 못하고 개를 별로 안좋아하거든.
만지면 뭉클하는 그 감촉이 이상해서~
그래서 내가 정이 많은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쌀쌀맞은가? 그런 생각도 들더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더니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되는 일도 있고~
어떤 종류의 아픔이던 그 아픔은 결코 헛되지 않거든.
재롱이 잃은 슬픔을 글로 승화시키고 마음 잘 정리해서 좋은 작품이 나오기 바란다.
찬정아~
톡톡 튀는 너의 글 언제나 재미있다.
너희 남편도 재미있으시다. ㅎㅎ 이북도 간다는 말이~
뭐든 그렇게 열정적으로 빠질 수 있다는 건 너무 좋은 일이야.
나쁜 쪽으로 빠짐 안되겠지만~
난 옛날에 테니스 레슨 몇달 받다가 그 선생님이 못친다고 구박해서 기분 나빠서 그만 뒀어. ㅎㅎ
내가 비싼 밥 먹고 왜 이렇게 야단 맞아야 하나~ 하면서~
강아지를 키우며 혼자 살던 여자가
강아지 죽고 난 후에 자살을 했다는 뉴스를 들을 때면
어떻게 저럴까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말예요.
제가 겪어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어요.
애견은 개가 아니라 진짜 가족이더라고요.
저는요.
사람의 인생보다 7배속으로 빨리 돌게 세팅해 놓은 강아지를 통해
생로병사의 모든 과정을 아주 밀착해서 관찰할 수 있었고요.
그 모든 성장과 쇠퇴의 과정을 지켜 보면서
책에서 배우지 못한 생생한 감정의 흐름을 깨우칠 수 있었어요.
특히 노년의 그 앙상한 초라함과 민망한 추함.....
그 늙음에 대한 연민과 애증 때문에
때로는 분노하고 억장이 무너지듯이 슬퍼했는데
바람부는 날 촛불이 꺼지듯이 너무도 갑자기 허망하게 떠나 버렸어요.
재롱이는 내게 막내 아들로 다가왔다가 95세 먹은 노쇠한 모습이 되어 떠나 갔어요.
같이 사는 동안 한번도 나를 배반한 적이 없는 충직한 반려자였고요.
가끔은 친구도 되고, 웬수도 되고, 스토커도 되었던 탓에
아직도 많이 생각이 나고 눈물짓게 되고 그래요.
나도 재롱이처럼만 살다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죽기 전날까지 밥도 먹고 아픈 내색 별로 안 하고
병원에 입원해 딱 이틀 동안 검사 받고 치료받고는
함박눈이 소복소복 내리던 날에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던 주인과 눈물로 충분히 작별 인사를 나눈 후에
크게 숨을 몇번 들이쉬고 편안히 떠났으니
그야말로 9588234 를 한 것이지요.
95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 병원에 입원하고 사흘만에 죽었으니까요.
중환자실을 전전하지도 않았고
병석에 오래 누워 사랑하는 사람을 지치게 만들지도 않고
끝까지 제 정신 지키다 간 재롱이.
암튼 그 녀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아주 귀한 교보재 노릇을 했어요.
춘선아~
네 글이 아침부터 눈물바람하게 만든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을 이해 못했는데 네 글 읽고 오늘에야 처음으로 이해하게 됬다.
사람은 배신해도 개는 은혜입은 사람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은 들었어.
평생을 곁에 두었으니 슬픔이 무척 오래갔을것 같구나.
우리 엄마가 암으로 76세란 나이에 돌아가셨을때 너무 빨리 가신것 같아 많이 슬펐는데 뒷처리를 너무 완벽하게 하시고
나 죽을때 절대로 수명연장하려고 억지로 애쓰지 말고 그대로 가게 하라고 하셨어.
병원에서 암으로 판명되고 두달 사신다고 했는데 정말 딱 두달사시고 가셨어.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암도 축복이라고 하더라.
모든 뒷처리를 다 할수 있는 시간을 주기 때문이라나~
우리도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뒤에 두고 떠나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한번뿐인 생을 잘 살 수 있을까?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이유는 영혼의 완성을 위해서라는데 얼만큼 여러번 태어나야 그놈의 영혼이 완성되는 걸까?
나 살기 급급해하고 있으니~
요즘 한비야의 책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을 읽고 있는데 감동적인 귀절이 많아.
남미의 어떤 집에 민박하면서 가난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그 가족을 보고 자기도 옛날 어려웠을때 학비를 도움 받았다고 하면서
그 사람은 이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다른 사람한데 되돌려주고 싶다고 그 집 아이들의 학비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대목이 있어.
너무 솔직하고 마음이 따듯하고 정의로운 여러점이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유리창으로 은구슬같은 빗방울이 또르르 굴러내리고 있네.
눈도 오는것 같은데~
오늘 하루 좋은일 많기 바란다.
있잖니, 춘선아 나는 애견을 안키운 관계로
미안한 얘기지만 사실 이해가 잘 안갔었어.
대학 친구가 결혼 안했는데 개를 키워.
어미가 간 후에 강의도 안가고 두문불출일 때
유난 떤다고 생각했어.
근데 며칠 전 음대동창회 임원회의때 바이올린 하는
유명한 선생이 내옆에 앉아서 강아지 사진을 보여주면서
얘는 에미고 담화면을 보여주면서 애는 새낀데
다 죽었대. 그야말로 두문불출 연습도 안하고..
그랬다는거야. 동영상 찍은게 1시간정도 있다면서
보여줄 기세더라구. 너무 슬퍼하면서...
얼굴을 쳐다보면서 아~! 진짜 이렇게 슬프구나~ 했다.
이제 개는 안키우고 동네 고양이 밥준대.
처음엔 혼자 오더니 식구 다 몰고 온대.~~
이그~ 정이 뭔지~!!!
우리 동네 중고숍을 겸한 골동품 가게 진품당(珍品堂)은 토. 일요일만 문을 열기 때문에
그런 날 아침나절에는 사람들이 붐빈다.
나는 골동품에는 물건을 보는 안목이 없어서 잘 안 사고
그냥 보기만 할 적도 많은데 가끔은 횡재를 만나
박스도 말짱한 신품같은 중고를 헐값에 건지기도 한다.
' 어쩌면 이렇게 한국과 일본은 생활 문화가 많이 닮았을까 ' 느낄 때가 참 많다.
거기에가면 인두도 있고, 시루도 있고, 돌확도 있고, 좀 다르기는 하지만
화로도 있다. 지금은 장식품이 된 물레방아도 우리 것과 똑 같다.
맷돌도 같고, 두레반상도 같다.
근대화의 산물이 아닌 유구한 역사를 지닌, 하찮지만 우리네 살림살이에
친근했던 이 것들은 누가 먼저 쓰게 됐을까.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왔을 거 같다는 생각.
꼭 두 나라에서만 주거니 받거니 했다고는 생각 안하지만.
우리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 東武東上線 전차를 타고 가다보면 시키시(志木市)가 있다.
거기는 옛날에 신라가 망했을때 유민이 와서 정착하여 살았고,
히타카시(日高市)의 코마가와쪽에는 고구려가 망했을 때 유민들이 와서 정착했다.
(시키시에는 유적이 별로 없지만 코마村에는 그 후손들이 아직도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으며
한국에서 정치인사들이 방문하고 가기도 한다)
그 선조들은 요즘 말로 말하자면 보트피플인 셈인데
우리가 유추해 알다시피 농사짓고 근근히 살아가는 백성들이야 나라 이름이 바뀐들,
누가 임금의 자리에 있든 무슨 상관이 있어서 목숨을 걸고 바다 건너 멀리 피난을 할까
그리고 천여년 전에 배를 띄워 식솔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온다는 재력이
보통사람들은 생각해 볼 수 없으니까 유민들은 왕족이나 귀족이다.
배를 타고 왔으면서도 바닷가에 정착하지 않고 내륙 깊숙이 숨어(?)들은 것도 그렇고.
그때 그 일행들을 통해서 그런 물건이 일본땅에 보급되지 않았을까 ?
일본에서는 올해가 한일수교(일본인들은 일한수교라고 말하지만)100주년이라고 떠든다.
처음에 들었을 땐 ' 얘네들이 뭔 소리야. 한일 수교는 1965년 박정희 정권때 미국이 참견질을
하면서 된 거 아닌가 ' 했는데 1910년 한일합방을 기준에 두고 하는 소리더라구. 이런.
우린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은 피눈물로 얼룩진 36년인데. . . .
100주년 기념이란 말엔 동참할 수 없다.
일본은 요즘 쬰심이 많이 상했다.
토요다 자동차가 문제가 있었는걸 숨기고 미국에 팔았다가 발각이 나서 토요다 사장이
미국에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실토를 했고,
한국과의 축구시합에서 일본이 다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역전패 한것도 어이없다 하고,
동계 올림픽만 해도 그렇지 얼음판의 빙질이 딸리나, 뒷바라지가 딸리나
꿀릴게 없다고 생각되는데 즈이 인구의 3분의 1밖에 안되는 한국은 메달을 널름 널름
잘도 따건만. 김연아는 어떻고. 누가 보더라도 월등히 아사다마오를 눌러 버렸잖아.
하다못해 일본내 김치 매출이 자국의 닥구앙 매출을 넘어섰지.
속으론 곪는지 어쩌는지 잘 모르지만 한국의 위상이 나아지는 것 같아서 좋다.
친정이 잘 살아야 시집 간 딸네들도 기를 펴는 것 처럼.
오랫만에 주절 주절
찬정아~오랜만!!!
지우고 싶은 역사가 많지?
그래서 가슴이 쓰릴 때가 한 두번이 아니지~
35년 간의 합방을 자랑스러워할 것이 아니라 사죄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지난 94년 독일 여행하면서 들었는데
독일은 유태인에게 미안해 하면서
지금 자라고 있는 세대에게
다시는 남의 나라를 침공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일본은 이제라도 우리에게 사죌 해야하지 않을까?
우리의 국력이 일본을 앞서야 찬정이나 우리 교포들에게 힘이 되지않을까?
일본과의 운동경길 하면 꼭 이겨야만 속이 시원한 건 왜일까?
벤쿠버올림픽에서의 우리 선수들의 활약이 대단해서 조금 우쭐할 수 있지!!!
국력=체력, 체력=국력 이란 말이 떠오르네.
찬정아~테니스 열심히 하고 있지?
내 딸도 아니건만 김 연아가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을 보며 간이 오그라들었다.
혹시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무사히 모든 프로그램을 다 마치고 났을 때
가슴이 벅차 우는 그녀를 따라서 나도 울었다.
그냥 벅차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느낌이다.
온 나라가 마치 한 동네 사람들처럼 소문도 빠르고 지지고 볶으며 산다.
감정이입이 너무 잘 되는 것이 가끔은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하지만
그래도 남의 일, 내 일 구분없이 들뜨고 흥분하고 분노하며 절망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정녕 단일 민족 공동체임이 틀림없다.
우리.
<나의> 라는 의미로 써야할 경우에도 대치할 수 있는 표현.
우리 집, 우리 엄마, 우리 아들, 우리 남편, 우리 딸, 우리 아버지 등.....
결코 공유할 수 없는 경우에도 우리라는 표현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기에
가끔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소모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김 연아가 올림픽에서 경기하는 모습을 컴퓨터에 받아 놓고 몇 번이나 돌려 보았다.
볼 때마다 그녀를 따라 운다. 여전히 또 벅차서..
남이 울면 따라 우는 바보.
김연아의 눈물보다 더 감동적인 것이 최근에 없었어.
김연아 눈물의 정의는 한올의 힘마저 스케이트에 보탠 최선을 다한 사람의 홀가분함에서 찾아야 할 것 같어
따라 울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러니 춘선이만 바보가 아닌걸 ㅎㅎ
그런데 걱정이 팔자인 나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그녀에게 도돌이표를 강요하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기네
이런 경우 강요는 넘 잔인한 건데.......
경선이 오랫만에 들어왔네.
아마 너 학원에 안 온날 일꺼야.
우리 풀륫 하면서 그날은 거의 쉬면서 김연아 시합 장면을 컴으로 보며 모두 눈시울을 적셨단다.
오늘 영어예배 시간에 대전 국제 학교 상담 교사인 샤메인이 나와서 짧게 간증을 했다.
자기 이야기를 3인칭 문장으로 써서 읽어 주었는데
너무도 담담하게 자신의 고통을 기술하여서 더 큰 감동을 주었다.
기억이 나는대로 그녀의 글을 옮겨 보자면.....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의 작은 도시에 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부부에게는 아들 하나 딸 둘이 있었는데 그 중 가운데 아이가 샤메인이다.
아버지는 커다란 유조차를 모는 트럭 운전사였고
어머니는 알뜰하게 아이들을 돌보며 집안을 잘 가꾸는 주부였다.
그들은 너무나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행복은 엉뚱한 순간에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아버지의 트럭이 고속도로에서 박살이 나는 순간 모든 것이 다 바뀌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엄마의 지극한 사랑과 교회와 이웃의 보살핌으로
가난하지만 배고프지 않았고 장난감도 가지고 놀 수 있었고 학용품도 넉넉하게 쓰며 자랐다.
샤메인이 13살이 되기 까지는...
혼자 살기에 지친 어머니는 재혼을 했는데 그다지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새아버지는 술과 도박과 폭력을 좋아하는 그저 그런 남자였던 것이다.
아이들은 심히 피폐해져 갔다.
결국 첫째인 아들은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정신 병원을 들락날락하는 신세가 되었고
셋째 딸도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감옥을 제 안방처럼 드나들다가 결국은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었다.
둘째인 샤메인만 이를 악물고 공부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서 목사님 아들인 금발의 청년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그들은 10년 동안 아프리카 케냐에 가서 살았다.
거기서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아 튼실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는데
샤메인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분노가 가득차 있었다.
재혼을 하여 가정의 행복을 지키지 못한 엄마에 대한 원망.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늘 이리저리 휘둘리며 사는 형제들에 대한 애증.
다 미친 사람들 속에서 혼자만 제 정신을 차리고 살아간다는 자괴감.
이러한 것들로 인해 샤메인도 서서히 병이 들어 가고 있었다.
매일 매일 그녀는 분노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는 것처럼 살았다.
그러던 그녀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모든 분노의 감정을 그 분 앞에 다 쏟아 놓았다.
하나님은 침묵하셨으나 그녀의 마음은 서서히 치유가 되어
어머니와 형제들로 인하여 더 이상 분노하지도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고 담담히 사랑할 수가 있게 되었다.
대충 뭐 이런 이야기.....
그러니까 겉으로는 뭐하나 나무랄데 없는 사람들도 속으로 병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거지.
요즘 우리 목사님의 설교가 너무나 마음에 와닿는데.................................
병든 사람이 병든 줄 모르고 남을 교육하려고(꼭 선생님이 아니라도)드는 세상이 너무 안타까워.
춘선아~
샤메인의 분노 이해할 수 있을것 같아.
때로는 잊고 싶은 현실이 잠재의식 속에선 곪고 있었을테니까~
주님을 만나서 자기와도 화해하고 모든걸 극복하게 되서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학생들도 복이 많다.
너같은 선생님을 만나서 풀어낼수 있는 시간을 갖게하니까~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오늘 일찍 나가야 해서~
지난주에 남편이 한국엘 다녀 왔어요.
우린 각자 볼 일이 있으면 한번씩 다녀 오긴 해도
늘 집안의 행사이거나 출장이거나 언제나 부랴 부랴 일 끝내고 오기 바뻤지요.
이번참엔 일주일 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나 본 모양이예요.
우리나라도 많이 발전했고,
세련되어졌고,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고 하데요.
돈 씀씀이도 얼마나 큰지 오늘만 살고 말 사람들 처럼 겁없이 돈을 쓰더라고.
돈 가진 사람이 돈을 써야 경제도 돌아가지만 남이 쓰니까 안 꿀릴라고
땡빚을 내서라도 쓰고 보자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부추기는 것 같다고 합디다..
일본은 현재 돈이 있어도 안 쓰고, 없는 사람은 없어서 못 쓰는 디플레이션이라
경제의 순환이 안 되어 돈 좀 쓰라고 작년에 전 국민 모두에게 현금을 나누어
주기도 있었지요.
한국에 가 있는 동안
작년 가을 아들 결혼을 시킨 남편의 선배 부부가 저녁을 사며
며느리의 친정이 떵떵거리고 사는 부자인데다 아들없는 집의 맏사위이니
아들의 장래는 따 논 당상이라고 하도 자랑을 해서 처음엔 잘 된 일이라고
진심으로 축하해주다 나중엔 속물 처럼 보여서‘ 이 양반 돈에 한 맺힌거 있나~’
그 집? 그 집도 돈엔 전혀 걱정없는 집이지요.
일본에 있는 중국인 교수가 테레비 토크쇼에 나와 한 이야기에
근 몇 년 사이에 돈 맛을 톡톡히 들인 중국인은 돈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아주 믿는 답니다.
돈의 속성에 조금은 성숙된 한국인은 돈이 있으면 행복해진다에 반신반의하고,
일본인은 돈이 행복하게 해준다라고는 믿지 않는다네요.
물론 일본인들 돈에 철저하지요. 그전에는 일본인도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시행착오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돈이 다가 아니구나 깨달은 거겠죠.
또 하나 얘기꺼리는 나중에
돈이 다가 이니지만 돈이 있어야 사람 노릇도 하고 그러는거이 삶이니까~
암튼간에 있는넘들이 더 무섭다니께~~
남은 얘기 하나 또 해줘.
니가 글을 감칠맛있게 써서 재미있어.
화림이 맘이 내 맘이다.
그렇게 돈이 다면 왜 재벌집 자식들이 자살하고 이혼들 하고 그러겠어?
삶의 질을 높이는 수단로서의 돈이 중요한데 사람들이 그 수단에 얽매여서 나중에는
인생의 진정한 목적이 뭔지 그냥 헷갈리게 되는 것 같더라.
사실 그냥 돈이 목적이라면 좋은 집에 좋은 차타고 좋은 거 먹고~~~~~~~~~~~~~~~~~~~~~~~~~~~~~~~~~~~~~~
그게 뭐냐구?
난 이웃에 피해 안주고 피아노를 마음놓고 연주할 수 있는 집이 갖고 싶고
애들 하고 싶은 공부 팍팍 밀어주고
여행도 다니고 연주회 구경도 가고 싶어서 돈이 있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지금 이 몸매에 고급 옷도 장신구도 필요 없고
내가 좋아하는 시골 밥상은 돈 전혀 상관없는데.......................................................................
그리구 이건 못가진 자의 자기 합리화인지 모르지만 사람은 배부르면 노력 안해요.
안그러니?
아침에 CBS FM을 켜 놓고 귓등으로 음악을 들으며 흥얼 거리는데,
진행자의 잔잔한 목소리에 실려 故김점선 화백의 에피소드가 들려 옵니다.
얘기가 귀에 쏙 들어 오는 순간, 앞의 내용을 미처 못 들은 것이 아쉬워서
CBS에 들어가 이리저리 찾아 보니... 그 원문이 그대로 올려져 있네요? ㅎㅎㅎ
3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달 / 체로키 族
연못에 물이 고이는 달 / 퐁카 族
암소가 송아지 낳는 달 / 수우 族
개구리의 달 / 오마하 族
한결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달 / 아라파호 族
-김점선 화백 그림-
마흔을 훌쩍 넘겼던 어느 날, 부모님이 다녀 가시고 남편이 나를 불러 말했다.
-자기는 무서운 년이래...
내가 대학을 졸업하자 아버지는 내게 한 푼의 돈도 더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대학원에 가야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더없이 완강했다.
아무리 그런다고 내가 포기하겠나, 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동생들을 다 모아놓고 연설을 했다.
"너희들은 오늘부터 다 자퇴해라. 너희들의 월사금은 다 내가 쓰겠다.
너희들 중 한 명도 밤새워 공부하는 꼴을 보지 못했다.
우수한 놈도 없고 학문에 열정이 넘치는 놈도 없다.
미래에 대한 야망도 없는 너희들은 어정쩡한 놈들이다.
그러니 너희가 돈을 쓰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낭비다.
너희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교통표지판과 날아오는 고지서만 읽을 줄 알면 충분하다.
너희들은 한글을 깨쳤으니 그만 공부해라.
그렇지만 나는 우수하다. 지금 공부를 중단하는 것은 민족 자원의 훼손이다.
내 민족의 장래에 먹구름이 끼는 것이다."
동생들은 입을 쩍 벌리고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그 광경을 부모님이 보고 말았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않고 등록금을 주셨다.
그날 남편은 부모님으로 부터 그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까지도 부모님이 그렇게 선선히 등록금을 내 준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부모님은 남편에게 "쟤는 무서운 년이니까 너도 조심해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모님은 나처럼 '무서운 년'과 10년 넘게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편에게 존경과 연민을 표했다.
백수였음에도 남편은 평생 내 부모님한테 무한한 동정과 연민을 받았다.
오로지 나, 김점선과 살아준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 화가 김점선님의 글
광희가 수고해준 덕분에 재미있는 글 읽었네.
정말 "무서운 년" 이네.ㅎㅎㅎ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집념과 열정이 없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것 같아.
오늘 새벽에 일찍 일어나게 되서 옥규가 보라던 "줄리앤 줄리아"를 보게 됐어.
취미로 하던 거지만 최선을 다해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니까 결국 책까지 내게 되더라.
그 많은 요리가 선보이는데도 어쩜 난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이 한번도 안드는지~
만드는 시간, 또 치우는 시간을 생각하면 정말 하기 싫어.
첨으로 나를 만나서 우리 남편이 안됬다는 생각이 들더라.
요리하기 좋아하는 여자 만났으면 좀 더 건강해졌을텐데~ 하는 미안함.
그런 의미에서 명옥이 남편은 복이 많으신거지?
그걸 아실라나~~
핸드폰이 울린다.
불이 켜진 액정 화면에 발신자 번호와 함께 이름이 뜬다.
애인.
이 나이에도 애인?
막연한 상상 속의 로망이 아니라 현실이다.
인생은 가꾸는 노력에 따라 명랑 만화가 될 수도 있고 슬픈 영화가 될 수도 있는 것.
나는 즐겁고 유쾌하고 달콤한 로맨스 코미디가 좋다.
인터폰이 울렸다.
화면에 낯선 아저씨 얼굴이 보인다.
"누구세요?"
"택배에요"
우체국 택배로 보낸 작은 상자.
뜻밖의 사람이 보냈다.
집주소를 어찌 알고....
아주 향이 좋은 목욕 비누와 거품수세미.
손에 쏙 들어오는 자그마한 소설책 한권.
- 사라 쿠트너의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작고 정갈한 글씨로 촘촘하게 채워 놓은 예쁜 카드 한 장.
포장재가 모두 다 핑크색이다.
화창한 봄볕을 맞으며 걷다보니 내 생각이 나서 보내는 것이란다.
이렇게 감격스러울 데가....
책 제목에 자꾸 눈이 간다.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얼핏 책장을 넘겨 보니 스물 후반의 여자가 주인공인 이야기다.
나도 그 나이에는 그렇게 다 산 사람같은 표현을 즐겨 하곤 했었는데 요즘 세대도 그렇네.
책을 단숨에 읽어 치우기가 아까워서
아이스크림 핥아먹듯이 조금씩 읽기로 했다.
그게 맘대로 될라나?
책이 아주 술술 잘 읽힌다.
책을 음미하고픈 마음이 들면 다 읽고 나서 또 읽으면 되겠지.
내가 소설책을 선물로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내 손으로 소설책을 사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 였는지도 모르는 판에 선물은 무슨.....
그래서 이렇게 내가 떨리도록 감사하고 감동하는 모양이다.
오메 이쁜 것.
보내 준 사람에게 답례로 무얼 줄까 궁리하게 된다.
이렇게 서로 정들여 가다 보면 혈육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될까?
사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정말로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4월 중순 쯤 갑사에 가면 키작은 길동무를 만날 수 있다.
노란 저고리에 연두색 치마를 입은 것같은 조촐한 모습의 황매화가 그것이다.
오늘 미국에서 온 친구를 만나고 왔는데 맘이 착잡하다.
대학 졸업 후 교편생활 하다가 언니들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이민간지 31년 ~
독신이고 지금은 미국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지금 그만 두면 연금이 우리나라 돈으로 120 만원.
혼자서는 살 수 있지만 "나자렛 성가원"의 이인복 교수의 도움 요청을 받고 귀국한 것이다.
오늘 나랑 또 한 친구, 그리고 미국에서 온 친구. 이인복 교수님 , 부군 심재기 교수님 이렇게 5이서 식사를 했다.
심재기 교수님은 옛날에 서울대에 재직하시면서 우리 학교에 강사로 오셔서 배운 기억이 있다.
이인복 교수님도 연희성당에서 레지오 활동할때 오셔서 강의하실때 눈물 콧물 흘리며 감동받은 기억이 있다.
두분이 많이 연로하셔서 성가원을 이끄시기에 힘에 부쳐 보였다.
그 동안 쭉 도움을 주던 우리 친구에게 실장을 맡아 달라고 간곡히 요청하신 것이다.
나 같으면 그 돈으로 그냥 편히 살겠구만 성가원의 버림받은 사람들 돌보러 온것이다.
일단 삼주 있어보고 자신이 생기면 미국 들어가서 짐 다 챙겨서 들어올거란다.
그 친구는 늘 가난했다.
언제나 자신의 수입 반 이상을 어디 어디에 희사하며 살고 있으니~
그런데 교수님 부부가 가시고 우리 셋이 남아서 얘기 하는데 더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한다.
미국에서 성당 구역장을 하고 있는데 자기 구역에 신장이 너무 안좋아서 투석하고 있는 사람에게 신장을 하나 떼어주기로 했단다.
깜짝 놀라서 너 나이가 얼만데 젊을때면 몰라도 지금은 안된다고 우리가 극구 말렸는데도 의사가 65세 까진 괜찮다고 했다고
지금 줄 수 있는지 검사는 했는데 결과는 아직 안나왔단다.
그것도 피붙이도 아니고 그냥 좀 아는 사람을 ~
자기가 마음이 가는 사람이라 주고 싶다니 ~ 다른 것도 아니고 신장한쪽을 ~ 정말 걱정이다.
말린다고 듣는 애도 아니고, 오는 길이 심란해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남을 도와주고 봉사하는 기쁨으로 사는 친구지만 이번 경우는 정말 걱정이 된다.
검사 결과가 부적합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이식 받을 사람은 생각안하고 친구만 걱정하는 내가 이기적인지 혼란스럽다.
화림아!
난 솔직히 너보다 훨씬 더 이기적인 사람이쟎니?(화림인 잘 모르나?)
내 주위 사람들은 그냥 너무 성자스럽지않기를 바란단다.
그 친구도 독신이 아니었으면 좀 다르게 살았을지도 모르지.
사실 우리같은 엄마들에게는 내가 내 것이 아니쟎니?
그래서 유유상종이라고 우린 우리끼리 잘 이해하고 통하고 그런거야.
우리가 그 입장이 안되봐서 다는 모르지만 봉사하는 사람들은 대개 주는 기쁨이 넘치더라.
우린 걱정스러운데 자신은 주고 싶어서 난리인거지.
아무튼 화림이가 말려봐야 들을 것 같지도 않네.
그 친구는 남에게지만 자기 친아버지에게 준다는 것도 사실 문제더라구.
입장 바꿔봐라.
우리 새애기가 지금 자기 친정 아버지에게 떼어준다고 할 때 찬성할 수 있겠니?
난 욕먹을 각오하고 마구 반대할 것 같다.
"넌 아버지 딸이기도 하지만 네 아이 엄마고 한남자 아내다" 라고 말이야.
실제로 가까운 주위에 간염이 30년 이상 지나 간 경화를 거쳐 간암 된 사람이 있어.
당장 어찌될 것 같지는 않은데 간 이식이 제일 확실하다고 그랬대.
시집가서 아들 둘 낳고 사는 딸이 자기 간 떼어준다고 했다는데 아버지는 고민은 해도 하고 싶은 모양이더라.
근데 그 아버지의 말은 딸이나 사위 걱정이 아니고
자기 간은 이미 간염에 감염되어 있으니 이식해도 결국 간염은 낫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네.
근데 난 제 3자라 그런지 그 딸의 아이나 남편이 과연 기쁜 마음으로 승락했는지? 싶고
그 아버지가 곧 70을 바라보는 나인데 이기적으로 느껴지더라.
간은 재생한다고는 하지만 그 수술에 따른 여러 후유증이~~~~~~~~~~~~~~~~~~~~~~~~
30대부터 투병생활 하며 직장 다니느라 본인도 힘들었겠지만 마누라나 아이들이 참 고생 많았어.
우리도 덩달아 매일 걱정하고 조금이라도 치료비 보태주려고 나름대로 많이 했는데
사람이 너무 오래 아프니까 아주 이기적으로 되더라구.
사실 지금은 너도 나도 다 아프고 수입도 줄고 힘든 나이가 됬쟎니?
거기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
오직 자기만 아픈거지.
본래는 전혀 그런 사람 아니었는데...........................................
많이 비뚤어지고 질투심도 많아지고 경우가 없어졌어.(본인은 여전히 자기가 아주 의롭다고 생각하는 듯 해)
언제나 자기만 힘들고 다른 사람들은 아주 편하게 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요즘 나도 아프고나니까 이제는 그 쪽에 더 이상 양보 안해도 될 것 같은 일종의 안도감이 다 생겼다.
그러다보니 관계에도 문제가 생기더라.
역시 이쪽에서 무조건 양보했기때문에 이루어진 화목이었었나봐.
자기들은 둘째치고 일단 내 마음에서 그 가족이 영 싫어져버렸다.
전에 우리 교회에 교제하는 커플이 있었는데 여자가 35세 남자는 28세로 둘다 선교사 지망생들이었거든.
그 남자 엄마가 우리 성가대원이었어.
아무리 신앙심이 좋기로니 남자 엄마가 사색이 됬지.
우린 모두 그 엄마 편이었는데 우리또래의 독신녀집사님만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자신만만 두둔하더라.
독신들은 역시 현실보다는 꿈을 먹고 사는 경향이 많은 것 같아.
암튼 그 커플은 깨지고 여자는 호주를 거쳐 (거기서 훈련하나봐) 아프리카선교사로 갔어.
화림아.
아들 딸 결혼시킬 때 연애할 때, 믿음 좋은 분들이 대단히 고민 많이 하더라.
자식들이 자기 보기를 위선자 취급한대.
매일 사랑 운운 하더니만 결국은 세상사람보다 나은 거 하나 없다구.
믿음좋은 젊은이들의 함정이 유난히 형편 어려운 사람에게 끌리는 것도 있쟎니?
암튼 다 맡기고 산다고 하면서도 부딛치는 게 한두가지가 아냐.
사는 게 무슨 곡예하는 것 같다.
난 양희에미가 드디어 울렁증이 사라졌다고 해서 암튼 다행스럽고 기쁜 하루란다.
명옥아~
심란스러워서 여기 방을 자꾸 들여다 봤단다.
다른 사람 얘기 듣고 싶어서~ 에구 상담해줘서 고마워.
그 친구는 언니들 한테도 얘기 안하고 검사했데.
난리날까봐서~
어제도 이인복 교수가 우리를 반색을 하면서 "나자렛 성가원" 후원 지로 용지를 10장씩 주면서 모아달라는데 (한구좌가 만원)
나는 친구 체면봐서 하나 써 줬지만 요새같이 어려운때 누구한테 말하기도 어려워.
그리고 신앙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 두세군데는 후원 하고 있더라구~
이명박 정부가 복지 후원을 너무 줄여서 힘들다고 하시더라.
아주 지쳐보이셔서 참~ 봉사도 할 수 있을 만큼만 해야 한다고 다시금 생각하게 됬어.
사실 연희성당 다닐때는 봉사라는 이름으로 많이 시간 보냈는데 그 때 나도 조금 지쳤고 지금은 일주일에 한번 미사만 다녀.
그리고 "하느님, 저 옛날에 많이 했잖아요~ 봐주세요. 지금은 돈벌어야 해요" 하면서~
그 친구는 남을 돕는다고 하지만 그러다 자기 몸 망가지면 자기도 남 폐끼치는거 아니니?
이젠 한국에 연고도 없는데 만일 뭐가 잘못되면 친군데 가만 있을수있니?
그렇다고 나도 삶이 편안하지만은 않은데 참 걱정이에요.
존경은 하지만 골치아픈 친구에요.
참 이상하게 이 방은 골방같이 아늑한 느낌이 들어서 여기서 속내를 풀어낸다.
양희엄마 일은 축하~
정말 이런 이야기 우리끼리나 할 수 있는 건데 혼자 사는 사람들은 생각이 많이 다르더라.
우리도 친정이고 시집이고 형제들이 많이 있쟎아?
참 남의 생활에 끼어든다는 게 어렵더라구.
어려울 때 물어보기도 조심스럽고.
사실 별 도움도 안되면서 꼬치꼬치 묻는 것도 얄밉쟎아?
부모님 슬하에 있을 때 형제지 각자 가정 있고보면 결국 자기 가정이 우선할 수밖에 없지.
난 그게 또 옳다고 생각해.
생활에 부담 안주는 한도에서 한 두번 도울 수는 있지만 결국 거기까지 아니니?
상식적으로 사는 사람들끼리는 잘 지낼 수 있는데 사는 방법이 우리와 다르게 헤프다가 힘들면
어렵네 봐주라 하는 경우에는 사정도 모르는 부모들이 편들고 나서고 결국 속으로는 웬수되기 딱이야.
내자식은 여기서도 과외도 제대로 못시키는데
주제넘게 조기유학이다 주식이다 해서 날리고
그 감당을 형제들이 안해주면 서운해하는 경우 내주위에도 있어.
욕하면서도 우리나라 정서가 결국 어느정도는 해주게 되는데
반대로 내가 힘들 땐 전혀 받을 수 없으니까 감정이 소급해서 폭발하더라.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가는 생각 안하고 지금 살고 있는 형편만 가지고 도와라 하면 엄마나 되면 모를까 누가 하겠니?
내용이 전혀 다른데 나도 솟치는 게 좀 있어서 튀어 나오네.
암튼 독신들은 많이 냉정하더라.
눈치 볼 식구가 없어서 그런지.........................
내 몸인데 !
또는 난 자식 없으니까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화림이 말대로 우리나라 정서가 내 피붙이 아픈데 모른 척 할 수 없쟎니?
결국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몫이 되어버리지.
자기 계산에는 없었겠지만 나중에 앓아 눕게라도 되면 결국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니들에게 폐끼치게 될텐데
아무 것도 몰랐던 언니들이 얼마나 서운하겠어?
배신감도 느껴질테고.
난 사람은 다 비슷하다고 생각해.
약간의 차이야 있지만 어떤 한 면만 보면 성자같아도 그 반면에 야멸찬 부분이 대개 있더라구.
누구든지 허영심이나 욕심도 있고.
그 욕심이 봉사나 희생일수도 있다는 이야기지.
자기도취도 있고.
교회에서도 전도하기 위해서라 할지라도 너무 욕심부리지 말라고 하거든.
결국 그게 하나님을 빙자한 내 욕심이 될 수 있다고 말이야.
화림이가 아무리 걱정해도 그건 너 혼자만의 걱정일 뿐이야.
형제에게도 말 안하고 결정한 사람이 친구 걱정 몇마디에 마음 바꾸겠니?
세상에 그런 사람도 있어야 혜택 받는 사람이 있겠지.
난 사람이 스스로 예정을 하고 결심을 한다 해도 그 실행은 역시 하늘에 달렸다고 믿거든.
어차피 될 일은 되고 안될 일은 안되요.
막는다고 안되고 안막는다고 될 일도 아니야.
그냥 마음 편히 가지고 그 친구를 위해서 기도나 해라.
검사 결과에 따라 안될 수도 있쟎아?
그래~ 명옥아~
니가 이렇게 솔직하게 속 시원하게 얘기 해 주니 정말 도움이 된다.
기도 밖에 달리 도리가 없음이 정답이다.
오전에 마침 미국에 있는 다른 친구한테 전화가 와서 그 얘기를 했더니, 어떤 사람이 신장을 누나를 떼어줬는데 받은 사람도 죽게 됬고 떼어준 사람이 너무 계속 힘들어서 모르고 하는 짓이지 할 짓이 아니라고 너무 힘들다고 했데.
그래~ 내 맘대로 안되는 일이 너무 많은데 하느님께 의지할 수 밖에~
화림언니 ~
좋은 친구 얘기 잘 읽었어요.
명옥언니, 화림언니께서 쓰신 댓글들을 읽으며
어쩜 이렇게 내 생각과 같을까 ...했지요.
이럴때 마다 사람들의 느낌은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돼요.
상황에 따라
신장이 두개 있을때는 생명을 나누어주라 있는걸 꺼야...
아냐 두개가 꼭 필요하기 때문일꺼야...
인간인지라
이렇게 양면성이 있지요.
결정한 친구에게 옆에서 자꾸 반대 의견을 내는것도
그 친구분께는 스트레스일수도 있어요.
좋은일 하면서 건강하게 행복하게 지내기를 기도해 줄수 밖에요.
그래~ 순희야~ 고마워.
그 친구는 몇대조 조상이 "윤유일" 성인이라고 들었어.
우리랑은 많이 다르게 산단다.
우리 친구끼리 현실감각이 너무 없다고 걱정하지만 자기는 늘 행복하게 사니까~
미래에 대한 걱정도 그 애 앞에서 하면 야단맞아.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들꽃을 보라~ "야.
하느님은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는데 인간이 어떤 틀을 정해 놓고 자기 욕심에 늘 난리를 치며 살고 있는걸꺼야.
기도를 하다보니 "부적합하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당신께 맡깁니다"가 되더라.
순희야~
이 치료하면 힘들텐데 무리하지 말고 잘 지내라.
언니들 잘 지내셨어요?
역시 이 곳은 참 따뜻합니다.
사람이 사는 곳 같아요.
언니 친구분 40대만 되어도 말씀 안드릴건데
이젠 아니잖아요.
보통사람도 아무일 없어도 여기저기 아프고 힘들기 마련인데
혹시 맞아서 수술하시면 어쩌나 염려됩니다.
제 친구 신랑이 간이 안좋아 이식만이 방법이라 하여
30대 초 아들이 이식을 해 드렸어요.
이식 후 아들이 얼마나 아파하는지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수술 못하게 하는건데 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 후 워낙 의술이 발달되어 지금은 장가도가고 괜찮기는 하지만
앞으로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르지요.
60대에는 그 모습을 봤어서 인지 정말 말리고 싶어요.
하지만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이니
얘기는 해 줄 수 있어도 결정은 당사자 몫이죠.
그저께 아침 평화방송을 보는데
신부님께서 하느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일이 뭘까요? 하셨어요.
강연을 듣던 사람들이 주님의 뜻 실천하기, 봉사, 희생.....
그런데 신부님께서 자기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일이 가장 좋아하시는 일 이라 말씀하시더군요.
예수님이 십지가의 고통을 감내하신 것은 그만큼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 하시며
목숨까지 받칠 정도로 사랑하신 우리를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 이라고요!
언니 친구분도 춘선이 말처럼 착한사람 컴플랙스는 아니시겠지만
자신을 좀더 아끼고 사랑하실 수 있기를 같이 기도드려요.
언니들 사랑해요!
신영아~
답글 줘서 고마워.
이 나이에 어떻게 신장 줄 생각을 하는지, 아무리 나눔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해도 걱정이란다.
미국에 있는 다른 친구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그 친구에게 부조금을 대신 주라고 한국오면 주겠다고 했는데
이번에 만났을때 줬더니 (100 불이라 내가 12만원을 줬거든) 당장 "나자렛 성가원"의 어려운 여자들 줘버려서 내가 "내가 너 땜에 못살아" 그랬더니
"왜 못살아 이렇게 살아야지~" 그러는거 있지.
너무 그러니까 옆의 사람이 스트레스 받는다.
모르는척 하자니 괴롭고 같이 돕자니 힘들고 그런다.
그래서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기로 했어.
마음이 내키는 만큼만 해야지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거 같아.
같이 걱정해주고 기도해줘서 고맙다.
난 가끔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이렇게 한가지 주제를 놓고 대화를 하니까 많은 도움이 된다.
앞으로도 이 방 많이 이용하자꾸나.
요즘에야 도통했지만 집안행사 같은 게 있을 때도 돈 들 어렵게 모아주면
그걸 (우리생각으로는) 너무 쉽게 펑펑 써버린다든지 뭐 그럴 때 있쟎니?
저렇게 쓰라고 준 거 아닌데 하는 생각에 아깝기도 하고 말이야.
그런 생각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난 "내 속에서 일단 나간 것은 내 꺼 아니다!" 라는 주문을 외우곤 했지.
"한번 준 건 그 사람이 막말로 버리더라도 그 사람의 소관!" 이라고 항상 스스로에게 못을 박아.
나두 반대 입장이 된 경험도 많거든.
친정에 가면 엄마가 이리저리 용돈 쥐어 주시면서 뭐할 때 쓰라고 용도까지 정해버리시면
고맙기보다도 그냥 막 화가 치밀어 오르더라구.
"지금 내게 얼마나 절박한 것들이 많은데!!!!!!!!!!!!!!!!!!!"
낭비같이 보여도 그 당사자는 자기가 꼭 하고 싶었던 걸 하는거지.
화림아.
신장 떼어주는 문제는 좀 다르지만 네가 준 돈을 그 친구가 쓰는 것 까지는 그냥 신경 쓰지 마.
게다가 그 돈은 갚은 거라며?
문제는 그런 사람 옆에 있을 때 우리가 불편하다는거쟎아?
내가 살아보니까 결국 문제는 자기를 얼마나 다스릴 수 있느냐더라구.
상대방은 수시로 변하고 언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그 때마다 슬기롭게 대처하려면 결국 내 마음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해.
내가 내 맘 못 다스리는데 어떻게 남의 맘을 움직이겠어? ㅎㅎㅎㅎㅎ
아주 예전에 읽은 정채봉의 글 속에 주인공 이름이 "난나" 였어.
"나는 나야 !"라는 의미라네.
명옥아~
나도 내 손에서 나간 돈까지 신경쓰진 않아.
그런데 이번엔 좀 달라.
나보고 너한테 받은돈 성가원의 어려운 여자들 줘서 여유돈이 없다고 담에 만날때 그 여자들 필요한 뭐뭐뭐를 사오래.
알았다고 했지만 속으로 아니 그럼 그 돈 다 줘버리지 말고 그걸로 사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나두 우리 친구에 비하면 내가 무척이나 냉정한것 같아서 기분이 거시기 (?)해 진다니까~
암튼 너무 훌륭한 친구지만 거기에 반에 반도 못되는 나같은 사람은 시무룩해져.
나도 옛날에 누가 돈 꿔달라면 왜 그렇게 성경의 "받을수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받을수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바로 나에게 하는 것이다" 라는 귀절 (로마서로 기억하는데) 이 걸리는지 꿔줬다가 못받은게 한두번이 아니야.
시행착오를 겪은 지금에야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야한다고 생각해
요즘은 돈이 없으니 차라리 속이 편하다.
누가 돈 꿔달라고 해도 괴롭지 않으니까 말야.
정말 인생 만만치 않은것 같아.
이 나이가 되도 아직도 이럴땐 어떻게 해야하나 모를때가 너무 많거든.
"난나" 무척 의미있게 느껴진다.
인생의 중반을 훌적 넘기고 난 어느날 문득
내 마음문 앞에 셔터가 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막연하게 마음에는 문이 달려 있고
문고리는 오직 안에서만 열고 닫을 수 있게 장치가 되어 있을거라 생각해 왔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내 의지만 있으면 내 마음의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닌거 같습니다.
셔터가 내려진 내 마음 속에는 내가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잠가버리고 떠나버린 빈 마음.
아니 어쩌면 내가 떠난 것은 마음 중의 한 방인지도 모릅니다.
방.
내 마음 속에는 방이 몇개나 있는 걸까요.
내가 닫아둔 골방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내 마음 문 앞에는 셔터가 내려와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
우리 교회에서도 예배시간에 어머니 마음을 불렀는데
저는 처음 반 소절밖에 부르지 못했습니다.
소리가 나오질 않았습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내 어머니 얼굴.
미움과 원망조차 그리워집니다.
노래를 3절까지 다 부를 동안
내 목에선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되고 말았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애틋하게 그리운 이름, 어 머 니.
우리 교회는 찬양대가 어머님 은혜를 찬양곡으로 부르더라구요.
1.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게 또하나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아
2'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넓은게 또하나 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요 부분이 좀 아리까리 하네요)
푸른 바다 그보다도 넓은 것 같애
이런 노래는 다 함께 한번 더 반복하면 더 좋을 걸 싶었어요.
연말연초 연속 바쁜 일에 부뎃기다보면 꼭 몸에 무리가 오지요.
멀리서 찾아 온 손주의 재롱이 잠시 약이 되긴하겠지만...
아픈 중에도 그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을 생각하며 미소지어야지요.
새식구 모두라시니 걱정이겠습니다.
겨울 지리산 정기를 보내오니 씻은듯이 쾌차하셔서 다시 활기 찾으세요.
꿩대신 닭이라는데...
12기 대신 지리산 도사되려다 만 벌지기이지만
장풍으로라도 보냅니다.
이사야 43장 1절로 7절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