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회 - 게시판담당 : 권칠화
4녀 1남중 3은 한국에,2은 미국에.....
그러다 하나가 중간에 외국에 가 있으면 못 만나고,또 못 만나고.....
서로들을 그리워 하다가 작년 여름에 가족 다움 카페를 만들어 그리움의 회포를 조금씩 이나마
풀기 시작 했는데.... 올해가 친정 아버지가 태어나신지 100주년이라 기념하는 의미에서
우리 4자매가 모여 볼까 궁리 하다가 용감한 막내 영수가 힘을 실어줘 마침내 우리는
27년 만에 LA 공항에서 눈물의 만남을 가졌다.
1,10,11,13회 인일 가족 동문 모임에 21회 막내 제고 남동생까지 한자리에 같이 하고 싶었으나
너무 바빠서 누나들의 화려한 여행을 위해 금일봉만 두둑히 내고, 4남편들도 이번 기회는
아내들을 위하여 배려 하기로 합의하여 우리 4자매만 모였으니............
각자 상상하기 바람.^^^^
정말 너무 행복 했었다.
도착하여 이틀은 LA관광, 이후 7박 8일의 멕시코 Carbo San Lucas, Puerto Vallata의 쿠르즈 여행,
Las Vegas, Grand Canyon,Redrock Canyon,LA에서 Coast Highway를 따라 뉴포트 비치,라구나 비치.........
한 시간의 틈도 없이 놀고,또 놀고,웃다,울다,뒹굴고,또 뒹굴고......
중간 중간 전화,가족 카페,이메일을 통해 응원을 보내오는 가족들의 무한한 사랑의 응원을
받아가며, 매일 홍삼,청국장 가루까지 먹으면서 건강을 유지 하면서 확실하게 즐겼다.
속 깊은 조카가 " 우리 엄마로써,아내로써 오랜 세월 애쓰며 사시다가 이제사 제자리로 돌아가신 것 같아
자기 마음이 좋다면서 "어머니 미안해요"하는 절절한 사연에 우리 모두는 소리 내어 울었다.
우리 모두는 이번 기회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우리 4 엄마가 없어도 혹 아내가 없어도 각 가정이 잘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2년 후, 한국에서의 만남을 ( 온 가족) 기약 할 수 있었기에 희망을 가지고
헤어질 수 있었다.
우리 왕 언니 1회 최 영실은 저 높이 상공에 몸을 싣고 올라가 태평양 한가운데서도
애국가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그리고선 두 여인은
"쨔샤!!!!! 황 ** !!! 니가 날 알아!!!!! "
"쨔샤!!!! 임 **!!! 니가 날 알아!!!!! "
목이 또 터져라 불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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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이 넘어 갔네. 내 생애 정말 행복한 시간들 이었나 보네.^^^^^
그는 온종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LAs Vegas 의 베네치아 호텔에서. 멋진 오페라 공연을 볼 수 있어 좋았다. 내가 이태리에 여행을 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
와우, 정말 1페이지 간단히 넘기고 2패이지로 들어 갔네.
지난 한 일주일간
일본 오사카 근처의 한 골프 리조트에서
남편과 골프치고 온천도 하고 돌아 왔어.
그동안의 사진들을 주욱
보노라니 네자매의 여행기가
어찌나 재미있고 즐거워 보이는지
보는 사람도 행복해진다.
계속 기대합니다.^^
혜동아!!!
아주 잘 쉬고 왔구나.
여행이란 참으로 좋은거야 그지?
인생을 그렇게만 살았으면 좋겠더라.
모르지. 평상시에 늘 그렇다면 여행의 진가를 모를지도.....
너도 갔다 온 사진 좀 올려 보렴.^^
Would you take picture for us? 하자 마자 자기 친구 보고 사진 찍으라 하고
자기 자신은 뛰어 들더니 "Cheeeeeeeeeeeeese" 하더군.^^
나를 낳으시고,우리를 낳으시고,우리를 길러주신 우리 어머니이신 고 김 신영여사.
17일간의 행복 속에서도 내내 보고픈 어머니는 우리들 가슴에서 떠나질 않았다.
내 여행 가방 속에는 17일 내내 어머니가 돌아 가신 후 내게 물려진 어머니의 백팩이
항상 같이 했고,우리 모두와 함께 마음으로 이야기 했다.
태평양 높이 떠서도 난,언니와 함께 아버지,엄마를 목이 터져라 불러대며 그리워 했고,
단 한 번이라도 만날 수만 있다면 엄마나 좋을까하고 몸부림도 쳤다.
우리 4자매가 만나고 있으니 더더욱 보고 싶었다.
그런데......
우리의 엄마가 돌아 가셨어도 독일 작가에 의해 다시 태어나 우리의 가슴 속에서 요동 치고 있다.
소나무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예문이는 화가인 남편과 함께 꾸준한 미술 활동으로써 유럽 화가들과
교환 작가전을 해오고 있는데 올해는 이태리,독일을 오가며 활동 하는 중에 독일작가가 소나무 갤러리에
유하며 전시회를 준비 하던 중에 한국의 여인상을 보고 싶어하여 우리 엄마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고 .
미국에서 여행하고 서울로 돌아가 5시간 자고 바삐 공주에 내려가 남편이 준비하고 있는 전시회에 가보니........
우리 어머니이신 김 신영여사가 그 곳에 있지 않는가!!!!
예문이가 전해 주는 그 장면의 사진은 예문이의 눈 속에서 눈물의 반짝임과 함께 벅차오르는 감동이 흐르고 있었다.
더욱이 사진 속의 동정을 연결 시켜 곱게 수를 놓기도 했다.
우리들 자식들도 못한 일을 저 멀리 독일 화가가 해내었다.
너무도 감사하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여인은 한국을 떠나면서 고맙게도 그 작품을 예문에게 선물하고 돌아 갔다.
김 신영,우리의 어머니가 다시 우리 곁으로 오신 것 같아 빨리 만나러 가고프다.
요즘 괜시리 엄마가 더 보고 싶다.
17일 간의 네 자매의 행복을 모두 김 신영 여사께 바친다.
엄마,사랑해요.
독일 어느작가의 작품으로 승화된 한국여인상인
친정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절절한 글을 읽노라니
애 간장이 녹아내리는 듯 하구나. 훌!쩍!
사진으로 처음 뵈옵는 어머니의 모습이지만
다정하고 푸근하시고..
딸들에게 친정엄마의 자리는 얼마나 큰 것인지..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 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고...
오늘 아침 일어나니 눈이 퉁퉁 부어 있네.
칠화가 다녀갔구나.
또 눈물 나게 한다. 네가.
무엇이 나를 클클하게 만들어 내 엄마 사진 싣고 그리워 하는건지.......
모든 짐 내려 놓으니 이제 틈이 나는걸까.
잘 살아야지. 열심히 아름답게 살아야지.
그래야 내가 없을 때 우리 딸이 나를 그리워 할께 아닌가.
네자매의 즐거웠던 시간들을
어머님께 바친다며
그리운 어머님의 사진을 올려 놓으니
더욱 뜻깊게 마무리가 되는구나.
우리들도 보면서
자매간의 깊은 사랑
어머님에 대한 애정 등등
배울 점이 많았다. 고맙다.
배울 점이 많았다고 하니 내가 공연히 쑥스러워지네.
지금도 우리 4 자매의 여행을 생각 하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자꾸 보고 싶구, 어머니,아버지가 자꾸 그립다.
어머니께 바치는 17일 간의 행복을 다시 그리며 2년 후의 만나는 그 기쁨을
가슴에 안으며 조용히 마감하려 했었는데........
혜동이가 깜깜한 방에 다기 불을 지피더니만 오늘 조회수가 1000을 넘으니
내 마음에 잔잔한 감동이 찾아 온다.
과연 누가 다녀 갔을까? 친구들,선배님들,후배님들.....
다 보고 싶은 얼굴들 일터인데....
우리 3 씨스터들 한테는 글을 올렸다고 이야기도 안 했다.
나 빼고 나머지 3 씨스터는 다 조용히 살아 가는 스타일 이니까.ㅋㅋ
우리의 만남을 기뻐해 주고,응원해 준 모든 분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감사 합니다.
다녀 가시지만 말고.잠깐의 글이라도 남겨 주셨으면 얼마나 반가왔을까요?
쵸코렛 타임!!!!!1 모든 것이 다 달콤 한 쵸코렛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이 노래를 예문이와 맞추어 부르는데 걸린 시간이 너무나도 엄청나......
Carbo san Lucas에서 샤핑하는 예문,수야를 기다리며.
이렇게 우리 4자매의 27년만의 만남은 끝을 내렸다.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 보다는 우리 모두가 해내었다는 감사함에 눈물을 흘렸다.
이제 70을 바라보는 왕언니 조차도 한순간의 낙오도 없이 건강하게,유쾌하게 모든 순간들을
사랑하며 감사하며 서로 용기를 붇돋우고 위로했다.
이제 2년 후,우리는 또 만날것이다.
더욱 더 건강한 모습으로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서........
끝으로 ,이 모든 것을 위하여 새벽제단의 기도로써 기획하고 애써 준 우리들의 막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오직 언니들을 사랑하는 마음 그 하나로써 하나의 빈틈도 없이
꼼꼼하게 모든 진행을 맡아준 수야에게 무한한 사랑을 보낸다.
영수야 !!!! 사랑해!!!!!!!!!
며칠전 예문이와 저녁 식사하며
4자매의 미국여행 이야기 들으며 어찌나 부럽고 흥분 되던지...
그 귀한 딸들을 훌륭하게 키우신 어머니가 더욱 장하셔서 큰 박수를 보낸다
영희야, 수야야 정말 보고싶구나
2년 동안 기다리며 나도 노래 열심히 연습할께
건강하고 기쁘게 잘 지내거라. 너무 사랑스럽다
아!!!!!
선생님!!!!!!
이 곳에 댓글을 달아 주신것을 모르고 1달이 흘렀어요.
너무나 죄송하고,반갑구,감사하구......
건강 하시지요?
예문이를 통해 선생님의 소식을 듣곤하죠.
약 20년전 선생님께서 친구가 쓴 글 속에서 나의 이야기가 실렸다고 책을
전해 주신 것을 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어요.
언제나 관심을 가져 주시는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깊이 간직하고 있지요.
내년에 만나서 우리 함께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불러요.선생님.
꼭 더욱 건강하시고 또 건강하세요.
선생님, 보고 싶어요.
아직도 선생님과 같이 만날 수 있는 행운을 가진 예문이가 부럽게 느껴져요.
최영희 후배!
영희 후배의 이름을 보고 냉큼 들어왔어요.
지난번 엘에이에서 만나보아서 반가웠어요.
공항에 배웅해주신 남편분의 친절함과
세세하게 보살펴준 후배의 배려에 감사드려요.
도착해서 영희후배에게 전화를 놓으니 연결이 안되어
메세지만 남겼었는데...들으셨어요?
영희 후배 자매여행 사진들을 보며
같이 여행하는 것 같았어요.
이번에 동문 크루즈를 탔던 추억이 있어서 더 그러겠지요.
내내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을 맞으세요.
언제 또 만나요~~
옥인 선배님!!!!
여기까지........
우리가 꼭 골목안으로 들어 와서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예요.ㅎㅎ
감기는 어떠신지요?
신년회에 참석치 못하여 모든 동문들께 죄송 했는데 언니까지 못 뵈면 어떡하나 안타까워 하고 있는차에
경수가 언니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 주어서 Last Chance로 언니를 만났지요.
감사 하게도......너무나도 반가웠어요.
근데 이상한 건 인일 홈피 덕분에 너무나도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는 거지요.
"인일이 뭔지......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은 추억들을 만들어 드릴껄..... 껄껄껄 하고 있습니다요.ㅋㅋ
건강하시고 ,
자주 인사 드릴께요.
참,이메일 주소 남겨 주세요. 멋진 사진이 있지요.ㅎㅎ
어느 새 17일간의 행복을 가진지도 거의 2년이 되어 간다.
문득 이글을 썼던때를 기억해 올라가 보니 조회수가 벌써 5622가 되었네.
그 동안 어느 분들이 다녀가셨을까??????
궁금하다. 그리고 감사하다.
우리들의 행복했던 시간을 우리와 같이 해 주신것 같아서......
우리 부모님은 4녀 그리고 막내 아들 하나를 두셨다.
얼마나 귀하셨을까만 특별히 아들을 편애하시지 않으시고 다 같이 귀히 키우셨다.
우리 4자매는 여행을 시작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우리 남동생도 같이 여행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바램도 가졌지만 워낙 회사일로 바쁘니 그리할 수는 없기에.......
4자매의 사진을 볼때마다 나는 내 남동생에게 많이 미안했다.
아직도 미안하다.
우리 4자매는 여자끼리 오손 도손 이야기하는데 그 동생은 혼자 얼마나 외로울까하는 생각도 든다.
지난 주, 가족 홈피에 "심심할때 읽어 봐:하는 사진을 동생이 올렸다.
위의 우리의 엄마이신 김 신영 여사가 제일 좋아하실 것 같아 이 곳에 옮겨 본다.
이렇게라도 하면 우리 동생이 덜 외로울 것 같다.
괜한 걱정일까?
영희 후배 반가워요.
얼마나 동생이 자랑스러울까요..
많이 보고 싶지요?
이제 다시 여행기를 보며 세월의 빠름이 느껴지네요.
가을이 오고 있어요.
요즘 한창인 다알리아를 보내요.
안녕 하세요? 옥인 언니!!!
깜짝 놀랐어요.언니가 제가 글 쓴걸 어떻게 아셨을까 생각해서 홈피를 자세히 보니......ㅎㅎ
제가 전혀 클릭 해 본적이 없는 곳이었네요.
4녀 1남이기에 언제나 혼자인 남동생에게 미안하구,우리 부모님이 기뻐 하실 것 같구...해서 살짝 올려놓은 것이지요.
감사해요.관심 가져 주셔서요.
건강 하시지요?
언제나 음악과 유럽의 정취를 전해주시고.....
언제나 감동하고 있지요.
꼭 비엔나에서 언니를 만날 수 있으리라 꿈을 꾸어요.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제가 어릴때 우리집 마당에 다알리아가 많이 피었었어요.
지금 인천의 선인재단 정문이 우리집 자리였지요.ㅎㅎ
그랬어요? 깜놀씩이나 ㅎㅎ
나는 시간이 없을때는 newest comments와 '최신 올린 글 더 보기'를 훑어보다
반가운 이름이나 흥미있는 주제의 제목이 보이면 클릭하지요.
이번에도 그리했고요. 영희후배도 그리 이용해 보아요. 효과가 좋답니다.ㅎㅎ
비엔나에 오게되면 미리 연락주세요.
제가 종종 출타가 많아서요.
나는 어릴적 다알리아 기억이 별로 없는데,
이곳에 와서 이리 무리지어 피인 꽃들을 보면서 감동했어요.
2년 전 4자매여행기는 지금 읽어도 감동적이에요.
내내 사이좋게 지내시고
다음에는 자랑스런 남동생도 합쳐지는 여행을 하시기를 기원해요.
이글은 인일 홈피의 컬럼난에서 최예문의 글을 옮겨 온 글 입니다.
형제, 자매라는 것...
우리는 4녀 1남이다.
큰 언니와 둘째 언니가 9년 터울이고 나는 그 밑의 연년생으로 셋째, 한해 걸러 여동생, 그리고 다시 연년생의 남동생이다.
둘째가 늦다보니 기쁘셔서 연년생으로 여럿을 나으셨다. 아들 낳느라 여럿을 나았겠네...듣는 이들은 얼른 그 생각부터 하게 될 텐데 우리는 정말 그런 줄 꿈에도 모른 채 철이 들었다. 부모님이 1.4 후퇴 때 피난 나오신 실향민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시골...이런거 절대 모르고 자란 대신 남녀 차별이라던가 남존여비...이런 것도 절대 모르고 자랐다. 남동생이 어렸을 적 하 촐랑거리고 까불면 어머니가 '아이구 내가 이렇게 날려고 그런게 아니었는데...' 하던 말도 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다들 존중받고 자랐다.
큰 언니는 워낙 터울이 많다보니 우리 중학교 다닐 때 결혼을 했다.
나머지 넷은 유치원부터 시작해 초, 중, 고, 대학교를 모두 같은 시대에 다니고 웬만하면 다 같은 학교 정문으로 들락거렸다.(대학만 빼고)
자연 친구들도 대충 다 알고, 선생님들도 대충 다 알고, 학교 생활, 자라온 이야기 대충 다 안다. 아니. 너무나도 서로를 잘 안다. 자매들은 더 그렇다. 게다가 한시간 나갔다 오면 두시간 상황 설명 실감나게 하셔야 되는 엄마에 맞춰 우리 딸들 모두 삼십 즈음해 결혼하도록 매일 저녘이면 식탁에 둘러앉아 미주알 고주알 웃고 떠들고 하였으니....
밥 먹다가도 팝송 나오면 노트 가져다 영어로 받아적어서 초등학교 다니던 내게 경이롭고 어머니보다 더 어려웠던 큰 언니, 겨우 한 살 터울임에도 엄청나게 언니 노릇하고 챙겨주며 늘 나를 격려하던 둘째, 맨날 신문 보고 책 읽느라 동네 사람들이 얼굴 구경하기 힘들다던 집안 제일로 얌전(?)이였던 나. 애교도 많고 행여 남동생이 동네 아이들에게 얻어맞으면 역성 들어 싸움도 잘하고 딱지도 잘 따오고, 또 어머니께 야단 맞으면 오히려 더 큰소리치던 가끔 깍쟁이 넷째, 그리고 그저 딱지, 구슬만 주머니 가득 채우고 다니던 어리디 어리던 막내...
그런데 바로 얼마전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사고로.
아버지 돌아가시고 이제까지 근 17년간을 포함해 어머니는 변함없는 우리의 큰 중심이고 든든한 백그라운드셨는데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래서 우리는 며칠을 정말 오랜만에 함께 지냈다.
정직하고 열정적이고 엄마 닮아서 독립투사 같고 요즘도 행여 밤 9시 25분인가 전화하면 EBS 영어회화 보느라 전화 끊으라는 큰 언니는 이미 손주도 셋이나 두었는데 이제 엄마 대신으로 우리를 염려하여 구미구미 우리를 챙겼다. 둘째는 요즘도 조그만 체구에 동동 거리며 사업도 잘 감당해내고 틈틈이 교회 성가대 하느라 바쁜데 멀리 바다 건너 살며 갑작스런 비보에 오지도 못하고 멀리서 전화로 애를 끓였다. 아이도 셋이나 키우며 하는 일 많으면서도 여유작작한 넷째는 씨애틀서 급작히 오며 L.A 들러 언니의 꽃과 편지글을 들고 와 엄마 영전에 놓아드리는 슬기로움을 보이고 '나 갈 때까지 기다려야 돼!" 전화로 울부짖어 입관을 발인하는 당일날로 늦추게 하였으며, 중학 어느 무렵이던가부터 의젓해지던 막내는 제 아내와 함께 우리의 오빠처럼 아버지처럼 제 할 몫을 다 하였다. 우리는 모든 절차들을 함께 의논하여 치루고 여동생 다시 멀리 집으로 보내기까지 울고 웃으며 어머니를 추억하고 위로를 나누었다.
아, 형제란 게 이런 것이구나, 가족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어렸을 적 같이 자라던 모습과 심성이 이제 50을 넘나드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전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발휘되고 수용되는 점이 한편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신기하다. 또 다섯의 셋째로 이쪽에 치일까 저쪽에 치일까 늘 어정쩡하니 살다가 형제 좋은 것도 결혼해 몇 년 지나면서야 알기 시작하고 아이 하나만 가졌던 것이 늘 한켠에 걸리더니, 이번 일 겪으며 형제, 자매가 이다지 소중하고 고마울 수 가 없다. 혼자인 내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하다.
이제 우리는 다시 제각기 헤어졌지만 급히 만들어진 어머니 싸이트에 사진과 자료, 글 올리며 가슴속의 애통함과 위로를 나눈다. 우리는 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슬기롭게 이 슬픔을 극복하고 아직 끝나지 않은 어머니의 사랑이 우리 서로서로에게 계속 이어지고 피어나리라는 것을 ...
어머니가 남겨놓으신 이십여년간의 일지를 파일로 만드는 작업도 내 몫으로 남았다...그러니 어머니 보내드리는 일이 아직 다 끝나지 않은 것 같아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때때로 전화 드리며 '김신영 여사, 안녕하세요? 최예문입니다~~~.' 목소리 높여 말하면 '아, 최예문 여사?'하시던 친구같던 엄마가 그립다.
내가 좋아하는 라구나 비치에 우리가 간 날이 위의 부부가 제작한 작품 발표회이자 축하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그 작품은 영원히 남게 될 작품이었다.
화려한 타일로 장식하여 라구나 비치의 아름다운 야외 극장 주변을 수 놓은 아름다운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