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보이는 창가에
자그마한 테이블을 놓고 앉아서
향이 깊은 차를 한잔 우려내 한모금씩 홀짝거리며
있는듯 없는듯 작게 깔아 놓은 음악을 벗삼아
고즈넉하게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는 그녀의 옆 모습은 정말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여기는 그런 풍경이 있는 곳입니다.
이 방은 일상의 분주함과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벗어나
책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쉼표같은 놀이터입니다.
내 삶을 바꾸어 놓은 잊지 못할 그 책 이야기도 좋고
따끈따끈한 신간 소개도 좋습니다.
책 속에서 찾아 낸 길 이야기도 좋고
백번 천번 읽고 또 읽어도 지루함이 없는 불후의 명작, 고전을 소개해 주셔도 좋습니다.
책에 나오는 주인공의 성격을 분석해 주셔도 좋고
사건을 분석해 우리 삶의 타산지석으로 삼아 주셔도 좋습니다.
가끔은 작가들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방에서 우리들 마음의 양식을 많이 나눌 수 있다면
이 또한 우리 삶에 커다란 보물 창고를 하나 들여 놓는 것이 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문을 열어 놓겠습니다.
책 한 권 들고 들어오셔서
따뜻한 차를 한 잔 나누시며
삶의 귀한 자양분이 될 진솔한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 이 방에 수록된 도서 목록 >
1. 수지 모건스톤 - 우정의 조건 (원제: Hello Sarah )
2. 쿠로야나기 테츠코 - 창가의 또또
3. 베티 스미스 -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 ( 원제 : A tree grows in Brooklyn )
4. 질 티보 - 쌈짱과 얌전이의 결투 ( 원제: La Bataille Des Mots )
5. 이 승헌 - 뇌파 진동 ( 부제: 원하는 것을 이루는 뇌의 비밀 )
6. 바바라 오코너 -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7. 닐 도날드 월시 - 신과 나눈 이야기
8. 전 혜성 -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사람으로 키운다.
9. 야마오카 소하치 - 대망
10. 김 려령 - 완득이
11. 이 문열 - 삼국지
12. 앤 타일러 - 종이시계
85년도에 지리산에 간 적이 있어.
어떤 신문사와 한길사라는 출판사가 주최한 역사 기행이었는데 역사에 대해 좋은 글을 쓰시는 선생님이 안내자로 동반한 여행이었지.
피아골 주위였어.
그 여행에서 몇 사람을 만났는데 그중에 한 분이 전채린이었어.
전혜린이 그토록 사랑했던 동생, 고 하길종 감독의 부인, 당시 공주사대 불어교육과 교수였을 거야.
그분과 함께 아들이 왔는데 어! 하고 돌아볼 만큼 눈에 띄었어.
왜냐면 크고 맑은 눈에 작은 덩치를 하고 어찌나 착해보이든지 저절로 눈길이 가더라구.
당시 의대 1학년이었어.
밤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둥그렇게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물었어.
왜 아버지처럼 영화를 하든지 엄마처럼 문학을 하지 않고 의대를 갔느냐고.
좀 말이 안 되는 질문이었지만 그 아이는 겸손하고 자연스러운 말투로 얘기했어.
아버지 촬영을 따라 사람이 많이 살고 있지 않은 섬 같은 곳에 많이 갔었는데 참 이상한 건 그런 곳에 약으로도 나을 수 없는 풍토병이 있더라고.
예를 들어 전주에서 콩나물 해장국이 유명한 이유는 전주에만 있는 풍토병인 배앓이 병에 콩나물이 가장 좋기 때문이라더군.
암튼 가는 곳마다 그러는 것도 이상하고 너무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의대를 가서 우리나라의 풍토병 하나라도 고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거에 인생을 걸자 이렇게 생각했대.
며칠 전에 신문에서 아르메스라는 명품 회사 한국 지부장이 1년에 한 번 씩 예술가를 위해 의자를 하나 주는 데 그 가격이 1500만원라는 기사를 봤어.
올해 수상자는 고 하길종 감독인데 아들인 하지현 정신과 의사가 아버지 대신 받았다는 기사가 뒤를 잇고.
그는 지금 건국대 병원 정신과에 근무하고 있더라.
그의 책을 몇 권 구했어.
지금 읽고 있는 책은 <관계의 재구성>이라는 책인데 실은 <소통의 기술>이라는 책을 기다리고 있어.
미디어 북이라는데 그게 뭐지?
주로 인간의 관계에 대해 천착하는 것 같더라.
가볍다 싶을 정도로 쉽게 씌여져 읽기에 편안한 책이야.
<관계의 재구성>은 영화를 통해서 인간 관계를 되짚어 보는 글이라서 더욱 재미있어.
화림이 언니가 보면 재미있을 거야.
다 읽고 특히 마음에 닿는 부분이 있으면 다시 더 쓸게.
옥규야~
오늘 회사 가는 날인데 그냥 가을 볕에 놀고 싶어서 안갔어.
예나 지금이나 땡땡이 치는 기분은 묘한 쾌감을 주니까 ~~ㅎㅎ
"관계의 재구성" 제목만 들어도 땡긴다.
꼭 읽어볼게.
난 카네기가 저자인 것으로 기억되는 "인간관계 지도론" 이란 책을 두번 읽었어.
옛날에 한번 읽었는데 내가 지금 하는 일에도 필요할 것 같아서 몇달전 또 읽었는데 역시 좋더라.
지금 누구 빌려 준거 같은데 암튼 책은 옆에 없지만 인간 관계의 자연스런 어울림에는 꼭 필요한 책이야.
에피소드를 계속 들어가며 인간관계에 대해 설명해서 쉽고 재미있게 읽을수 있어.
젊었을때 읽었으면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쉽게 풀 수 있어 많이 도움이 됬을테데 생각됬어.
아마 이 책 많이 알려져서 거의다 읽었을 것 같은데~
"남을 비난하는 것은 누워서 침밷기이다"
"명령하기 보다는 부탁하라"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직접적인 논쟁은 피하라"
"상대의 원하는것을 알아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관심을 가져라"
암튼 좋은 귀절이 많았어.
요즘 책을 안 읽었더니 허전해서 "뇌내혁명" 1권을 봤는데 2. 3권 사놓고 안봐서 보려했는데 2권이 읽지도 않았는데 없어져서 찾고 있는 중이었는데 "관계의 재구성" 부터 사서 봐야겠네.
옥규야~
이 가을, 두번다시 오지 않는 2009년의 가을 책도 많이 보고 영화도 많이 보고 여행도 가고 풍요롭게 지내라.
나도 옥규 만나서 자극 좀 받아야지!
하루의 대부분이 밥순이일로 허비되거든.
그렇다고 딱히 맛있는 것 해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밥시간은 자주 돌아오는거야?
우리집 식사시간
아침 5시30분, 점심 애들아빠 것 간단히 싸기(요즘 나가서 사 먹는 것에 지쳤다나요?), 저녁 5시30분
남들은 놀랄지 모르겠으나 덕분에 시간 여유 아주 많아요.
학교도 제일 일찍 갈 수 있고 저녁 후에도 많은 걸 할 수 있어요.
그럴 수 있는 것은 언니처럼 잘하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만큼하고 제 시간도 가지려고 해요.
덕분에 좋은 책 접할 수 있어서 항상 제 친구라는 것이 자랑스런 아무게양 덕분에
관계의 재구성 보고 있습니다.
그 속에 아 그렇구나 하는 대목도 많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
'똑똑한 아이, 좃대 있는 아이가 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는 사람,
상황이 변하면 거기에 맞추어 다른 역할을 유연하게 해 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친구야 고마워!
이 책 보면서 참 많은 생각도 하게 되고 아하 그렇구나 하게도 된다.
올해가 다 가기 전 네가 본 다른 책 또 하나 소개해 주세요!
문학의 탄생 - 시오노 나나미 외 지음 <웅진 지식 하우스>
- 가끔 일본이 부러울 때가 있다-
일본에 여행 가기 전에 많이 들은 말이 있다. 일본 사람들은 영어를 못 한다느니, 영어 발음이 나쁘다느니 하는 말.
결론적으로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2주 밖에 안 되는 짧은 여행이었지만 뭐랄까.... 인문학적인 소양이라면 이상한 비유일까?
일본 문화의 토대에 그런 것이 생각보다 아주 단단히 차 있다는 걸 느꼈다.
많이 인내해 본 적이 있는 사람들 특유의 소박해 보이지만 단단한 존재감?
일본에 대해서는 유전인자로 내려오는 본능적인 적대감이 있어 내가 봐도 우스울 정도로 뻣뻣해지고 비장해지는 경험을 여러 번 했으나, 여행할 때나 책을 읽을 때, 영화를 볼 때 되도록 그런 감정에서 자유스러워지려고 노력한다.
독문과나 불문과는 우리나라 대학에서 이제 거의 폐과가 되어간다는 말을 들었다.
대신 경영학과, 경제학과.... 등이 날로 학생수를 늘려간다고 한다.
철학과는 말할 것도 없고. 미학이라니?
순수 학문은 발 디딜 곳이 없어져가고 있다.
그건 우리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가치가 그렇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 우리는 돈을 씹어 먹고 살지도 모른다.
이런 즈음에 이번에 일본에서 나온 문학의 광장 시리즈는 나의 마음에 패배감을 주고 부러움의 불을 지핀다.
문학의 탄생, 성서 문학과 영웅 서사시, 르네상스 문학의 세 얼굴, 유럽 근대 문학의 태동, 근대 소설의 탄생까지 5권이 변역되어 나왔고, 곧 나올 책이 20권까지이다.
일본의 작가들이 부분 부분 맡아 자연스럽게 통합해 만든 책이다.
인문학적인 토대가 탄탄한 사회, 먹고 사는 일 말고도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인정해 주는 사회, 부자가 되지 않고도 인간의 가치가 인정되는 사회, 약자에 대한 배려가 통하는 사회.
우리나라가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나의 이런 바램이 우스갯거리가 될 지도 모른다.
중학생이 읽어도 될 정도로 평이한 말투와 많은 그림과 사진으로 방대한 역사와 신화의 흐름을 정리하는 이런 책을 만들고 이런 책을 편집하고 읽히는 일본이 나는 실로 부럽다.
밥도 안 되고 쌀도 안 되는 이런 일을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분위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일 거라는 생각이다.
외골수 바보들을 보듬을 수 있는 내공.
수학이나 물리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물리 부문에서 괜히 노벨상을 그리 많이 탔겠는가?
일찌기 세계를 향해 나아갔던 일본의 그 흐름이 오늘날 이렇게 돌아 옴을 본다.
-위의 책은 제가 볼 거구요, 권할 책이 있습니다.
<고등어를 금하라>라는 책인데요, 읽고 이야기나누고 싶습니다.
고등어를 금하라, 문학의 탄생, 르네상스 문학의 세 얼굴,
이 책들을 주문하고 입금하고나니 읽기도 전에 부자가 된 것 같다.
80년대 사회과학에 관한 책들을 보려고 할 때
일본이 그 분야에 많은 자료를 공유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부러워 했었는데...
그 때 어줍잖게 일본어 책들을 읽느라고 땀을 뻘뻘 흘렸던 생각이 난다.
내 인생에서 그때처럼 공부하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인문학적인 토대가 탄탄한 사회, 먹고 사는 일 말고도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인정해 주는 사회,
부자가 되지 않고도 인간의 가치가 인정되는 사회, 약자에 대한 배려가 통하는 사회.'
아, 꿈같은 이야기다.
인문학에 관한 위 책들을 집대성 하기 위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을 수 있다는 것도 놀랍다.
요즈음 가끔 옆지기가 일본이 우리보다 차원이 높음을 느낀다고 해서 좀 그랬었는데...
우야든동(누구버전) 읽을 책 많아 좋다.
학문의 즐거움 --히로나카 헤이스케
이번 지리산행을 준비하면서 계획한 것 중에 하나는 우리가 묵을 산장에 되도록 일찍, 어둡기 전에 도착하자였다.
그래서 될 수 있는대로 새벽에 일어나 일찍 밥 먹고 출발했다.
산장에서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있을 것 같아 가방에 어떤 책을 넣을까 고르다가 전에 아주 재미있게 읽은 <학문의 즐거움>을 가져가기로 했다.
연하천 산장에서는 어두워질 때까지, 세석 산장에서는 비상등이 밝아 밤 늦게까지 읽을 수 있었다.
축복받은 건망증으로 전에 본 책도 늘 새로워 참 재미있게 다시 읽었다.
수학 부문에는 노벨상이 없다. 대신 필드상이란 게 있다.
이 작가는 필드상을 받은 학자이다.
'특이점 해소'라는 것을 연구한 학자인데 특이점이라는 것은 선과 선이 교차로 연결될 때 만나는 교차점을 말한다.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될까? 그럴 때는 일주해서 교차되는 도로를 입체 교차시켜 주면 된다.
하지만 높이를 추가해서 교차점이 없어진 아래 그림자를 보면 여전히 거기에 교차하는 점 즉 특이점이 존재한다. 이걸 어떻게 해소하면 좋을까 이걸 연구한 것이다.
이미 1차원, 2차원, 3차원까지는 해소된 상황이었고 그 다음 4차원 내지 그 이상에 대해서는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에 이 사람은 자기가 이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이 사람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결국 일관되게 너무나 오랫동안 이 문제에 골몰하고 공부하고 연구한다. 잘 때도 먹을 때도 이것만을 생각한다.
부족한대로 세미나를 하고 혹평을 듣고 하면서 나름의 길을 찾아나간다.
자기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은 학자에게 이 연구에 대해 말했을 때 "당신은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로 풀 수 없습니다" 이런 말도 듣는다.
독자적인 연구로 2차원과 3차원의 연구를 끝내고 더 노력하면 4차원의 해소도 거의 확실해 진다고 느낄 즈음 격려를 기대하며 존경하는 동료에게 그 말을 했을 때 그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4차원의 특이점 해소가 거짓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러이러하게 하면 된다"
표정을 감출 수도 없을 정도로 낙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또 한 선생은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물기 위해서는 이를 단단히 하라"
결국 이 사람은 메사추세츠 주 전화번호책 두 권에 달하는 긴 논문으로 이 연구를 완성한다.
그 논문을 발표했을 때 그의 스승인 자리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히로나카가 이겼다"
이 말은 자리스키 선생도 몇 번이나 독자적인 방법으로 그 이론이 옳다는 것을 검증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연구로 첫 상을 받게 되는데 이 상이 재미있다. 본인에게는 상장만 주고 상금은 부인에게 준다. 5000불이었다.
그 날 이 사람은 부인을 데리고 티파니로 가서 반지를 하나 산다.
결혼식이고 뭐고 결혼반지고 뭐고 다 생략하고 오로지 공부만 하면서 살 때 그 옆에서 원고를 정리하고 집안 살림을 꾸려가던 부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그리고 1970년 필드상을 받는다.
대부분 수학자들은 태생부터 천재인 사람이 대부분인데 반해 이 사람은 자기 말에 의하면 '너무나 평범한데 끈기는 있는' 사람이다.
이 책은 말하자면 자서전인데 어린, 그리고 지금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듯이 쓴 책이다.
열 다섯 남매 중 일곱 째인 이 사람은 장사를 시키려고 입학 시험 전 날까지 일을 시키는 아버지 밑에서 장롱 속에 숨어 들어가 몰래 공부한다.
이 사람은 아버지가 훌륭한 상인이라고 생각하고 죽을 때까지 즐겁게 장사를 하시기를 원하고 그렇게 말한다.
책을 읽으며 느끼는 것은 참 자연스럽다 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참 다양하고 독자적이다.
이런 삶도 있다.
담백하게 몰두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윽한 그 깊이를 탐구하는 학자.
욕심도 없이 그저 즐거움으로 공부하는 이런 사람,
책에서 보여 준다.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수학에 관한 책이 아니다. 노력하는 사람에 대한 책이다.
아이들에게 권하면 좋을 책.
<눈으로 하는 작별> 룽잉타이
토요일이면 세 면에 걸쳐 책을 소개하는 신문을 집에서 보는데.
자폐처럼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이나 뭐 사는 곳에 잘 안 가는 나는 그런 기사를 보면서 출판의 흐름을 읽거나 이건 사야지, 이건 꼭 봐야지 이렇게 생각하다가 잊어버리곤 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을 끄는 책이 있어서 옆 방 선생님에게 부탁을 해서 구하게 되었다.
아직 다 읽지 못 했는데 정말 오랜만에 읽는 너무나 훌륭한 수필집이다.
이름만 보고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도 없었고, 수필집인지도 몰랐다.
첫장부터 시작해서 지금 중반까지 읽었는데 한 편 한편 끝내고 다음으로 넘어가기가 너무나 아까운 기막힌 재능(적절치 않은 표현이다)의 소유자의 글이다.
아끼며 되풀이 하며 읽고 있는데, 권하고 싶다.
한 편 한 편 이야기 해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나네
-아무런 사심없이 당신에게 시간과 정성을 선물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권한다.
옥규야
나도 이 책.....눈으로 하는 작별 (目送)
우리와 같은 나이를 살아온 동양의 중년 여인의 글을 통해서
이렇게 깊은 삶의 공감을 느끼는 감동에 나도 놀라는 중이야
우리가 올인했던 삶의 주제들
자식 이야기, 부모 이야기....우리자신이었던 그들과 이별해 가는 과정
딱 우리 이야기 ㅎㅎㅎ
이 책을 읽으며
우리 남은 삶을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을꺼 같아졌어
우리삶이 지극히 정상범위안에 있음도 확인하게 되었구.
진실한 글의 힘은
신비롭다 할까.
그리고 옥규같은 아름다운 동년배 여인을 동지로 삼은 덕에
외롭지 않다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매년 겪는 여름인데 참말로 덥다. 여름 보내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체력이 떨어지는 나이 탓이기도 하지만, 실은 발전, 성장만이 가치로 인정받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극심해지는 불평등이나 전쟁 등등의 이 세상 흐름에 대한 걱정이 커서 더 그러한 듯 하다.
세상에는 유능하고 발빠르게 앞서 나가는 사람도 있고, 아무리 뛰어도 늘 제자리 걸음이거나 남보다 뒤떨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한 유형의 사람이 있으니 남이야 어떤 길을 걷거나 말거나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겠다 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나의 이 어리석어 보이는 행보가 이 세상에 해가 되지 않고 그래서 후손에게도 생명을 주는 일이라면 난 이렇게 살겠다 이런 사람.
이번에 지리산에 가면서 갖고 갔던 책.
(갑자기 나가게 되어 나중에 이어 쓰겠습니다)
천천히 걸어 희망으로
쿠르트 파이페
방학이 다가오면 읽는 책의 종류가 살짝 바뀐다.
여행에 관한 책들이 끼어들게 된다.
특별한 계획이 있건 없건, 항상 휴가 전에는 낯설고 야릇한 호기심을 주는 이방의 풍물이 적힌 책들이 책상에 쌓인다.
그 책들은 아주 기분을 좋게 한다.
영화로만 보던 그런 곳들을 직접 간다고 생각하면 가기도 전에 가슴이 뛴다.
지금 못 가도 언젠가는 가겠지 그런 생각으로.
며칠 전에 몇 권의 책을 구입했는데 이 책은 그 중의 하나다.
이 사람은 독일 사람이다. 평생 정원 조경사로 일했고, 사랑하는 아내와 세 딸이 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근면 성실한 직업인으로 정년퇴임까지 마친 사람이다.
정말 성실했으나 평범한, 남에게 자기를 드러낸 적도, 그럴 생각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도 자기를 드러낸 적이 없는, 남에게 신세를 진 적도, 남에게 손해를 보고 싶지도 않은 그런 사람이다.
돈을 낭비한 적도, 감정이 흔들린 적도, 자기의 취미 따위를 위해 헛눈을 판 적이 없는 사람이다.
조경사로 58년을 일하고 64세 때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한 번도 자기의 꿈을 드러내지 못했던 그 사람이 생각한다.
걷자!
유럽 걷기 여행을 하자!
걷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하자!
-6개월 후에 당신을 다시 만날 거요. 당신의 사망진단서를 내가 갖고 갈 테니까요-
하며 반대하는 의사의 만류에도 이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다.
수술 후 3주 후 이 사람은 배에 인공 항문을 달고 수술 자리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앞 뒤 가방을 메고 손수 만든 작은 리어카를 끌고 걷기 여행을 시작한다.(이 리어카는 곧 망가진다. 그리고 여행 중에 손으로 끈다는 건;;......, 참고로 말하면 이런 환자들은 무거운 것을 들 수 없는데 배에 찬 장루 주머니가 터지기 때문이다. 너무 더울 때도, 물기가 많을 때도 빠지고 터진다. 실제로 이 사람은 여행 중에 장루 주머니가 터지는 경우가 많았고, 빈약한 숙소에서 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참 비참하고 초조한 시간을 여러 번 갖는다 )
독일의 쿠퍼뮐레에서 출발 이탈리아의 로마까지 장장 166일, 3,350Km의 긴 여정을 시작했고 그리고 끝낸다.
스페인의 산티아고처럼 옛 유럽의 순례자의 길인데, 그야말로 옛날 순례자의 길이므로 길은 원시 그대로인 경우가 많고, 그래서 이 사람은 정말 말로 할 수 없는 너무나 많은 고생을 하며 이 일을 해낸다.
과장도 없고, 즉흥적인 것도 없고, 격정적인 것도 없는 여행기인데 그게 오히려 더 진실감 있게 느껴진다.
읽다 보면 너무나 많은 어려움 속에서 투지와 인간의 꿈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그 길고도 험한 길을 걷는 평범한, 그 전의 인생과는 전혀 무관한 길을 걸으며 <당신은 돈키오테>라는 소리를 듣는 이 사람에 대한 경이감과 존경심이 저절로 생긴다.
여행을 반대하던(당연하지 않은가?) 아내와 딸들도 주말을 이용해 어느 지점에서 남편과 아버지와 만나 하루나 이틀 정도 같이 걷는다. 물론 몇 번뿐이지만.
스물 한 살짜리 손주와도 하루를 걸으며 이 사람은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줄까 이런 생각을 한다.
또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이것으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언제나 한다.
놀랍게도 이 사람은 여행 내내 텐트에서 자는 것을 고수했는데(물론 부득이한 경우에 여인숙에서도 잤지만) 가족들과 만날 때는 숙소에 신경을 쓰곤 하였다.
돈은 늘 빠듯했고 부부는 그 부분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그것이 둘이 함께 여행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내를 만나 걷다가 길을 잃는다. 이리 저리 걷다 보니 다시 제 자리,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방향을 보고 갈 길을 찾는다.
그때 나눈 이야기
“우리가 제대로 온 것 같아요?”
지그리트(부인 이름)가 물었다.
“그래요”
“당신은 항상 옳은 길을 다녔어요.”
“그러는 당신은 나와 같이 다녔지.”
“그래요.”
‘세상의 끝까지’
나는 속으로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여행을 하면서 보이는 이 사람의 변화이다.
남에게 신세를 져서는 안된다는 신조는 스스로를 곤란하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생각해 보라.
만약 당신의 집 앞길에 자기의 몸 만한 짐을 앞 뒤로 멘 65세 정도의 사람이 온몸이 흥건히 젖어서 극도로 피곤한 모습을 하고 도움을 청할 때 당신이라면 그 사람을 도와주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처음 그리고 한동안 이 사람은 절대로 도움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어떻게든 사례를 하려 한다. 다투기까지 한다.
이 사람은 아주 나중에 나중에 깨닫는다.
자기가 도움을 받는 게 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자기가 어쩌면 다른 사람의 꿈을 대신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를 보고 기뻐하는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이런 마음이 숱한 실수와 회환 속에서 어렵게 떠오르게 된다.
이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착하고, 세상 사람은 모두 하나다 이런 것을 느끼게 되며, 성실함과 계획으로 무장된 자기의 모습이 옹졸함과 열리지 못한 한심한 마음의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깨닫게 된다.
이 부분을 읽으며 여행의 힘이 이런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특히 독일의 전역을 지나, 독일을 능가하게 비싸고 타이트한 스위스를 지나 이탈리아로 넘어오면서 여행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뀐다.
이 사람의 이런 무모하고도 아름다운 여행이 자유롭고 따뜻하고 요란한 이탈리아 시골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행복하고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에 거의 마을 수준의 환영 모임이 만들어지는데, 처음 당황했던 이 사람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 인간에 대한 감동, 정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도를 깨치듯 느끼게 된다.
인간사 모두 그러하겠지만, 내 마음의 벽, 그것이 가장 높은 것이라는 건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다.
마지막 부분인 로마에서.
성 프란체스코 동상 앞에 선 그가 눈물을 흘리며 생각한다.
부끄럽지 않아.
문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뛰어난 여행기는 아니지만 이런 진짜 삶 속에 그따위 예술이나 문학 따위를 운운할 이유가 없다.
아자!
<어제 교보에 가서 몇 개의 책을 샀는데 그 중에 <일주일 만에 피아노를 죽이게 치는 방법>이라는 소설을 샀다. 실제로 피아노 치는 방법이 나온다.
재밌을 것 같다.
드디어 피아노 코드를 외울 수 있을까?
기대하시라!
옥규야~난 이코너가 있는지 몰랐네.
다 읽기엔 벅차고해서
바로 위에 있는
' 천천히 걸어 희망으로 ' 만
눈 크게 뜨고 읽었네.
주인공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순간 떠올랐어.
절망적인 순간에 가족을 떠나 걸을 생각을 어찌했을꼬?
어떤 생각을하면서 걸었을까?
물론 많은 변화야 있었겠지.
나라면 그 순간 어땠을까???
요즘 내 주위에 의사의 도움없이 살 수 없는 상황까지 간 사람을 많이 보고 있노라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네.
정말 힘들어하던데.....
???옥규야!!!
나에게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 쯤 되었으면 좋겠다.
해가 서산에 기울었는데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옥규가 읽는 책을 다 읽고 싶은데.....
언제 시간을 몰아서 또 책에 빠져 봐야겠다.
좋은 책을 계속 소개해줘.
소개 받은 책이라도 읽어야지~~~~~~~~~~~~
<야쿠바와 사자>
아프리카 어느 작은 마을, 전사가 될 소년을 가려내는 축제의 날.
전사가 되려면 모두에게 용기를 보여야만 해요. 혼자서 사자와 맞서야 하지요.
야쿠바에게 그날이 왔어요.
무섭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서 걷고, 골짜기를 건너고, 언덕을 넘고, 거친 바다와 우거진 숲, 바람, 물을 헤쳐나가 긴 시간을 숨어 기다려 사자와 마주했어요.
드디어 용감하게 창을 들어 사자와 싸워야 할 시간.
그런데 사자와 눈이 마주친 그때, 사자의 깊은 눈동자가 말을 걸어왔어요.
네가 본 게 맞다. 난 피를 흘리고 있어. 사나운 적수를 만나 밤새 싸웠거든.
힘이 바닥났으니 넌 손쉽게 날 해치울 수 있겠지.
자, 둘 중 하나다. 비겁하게 날 죽인다면 넌 형제들에게 뛰어난 남자로 인정받겠지.
만약 내 목숨을 살려 준다면 넌 스스로 고귀한 마음을 가진 어른이 되는 거야.
대신 친구들에게서 따돌림을 받겠지.
어느 길을 택할지 천천히 생각해도 좋아. 날이 밝기까지 아직 시간이 있다.
이른 아침이 되자 야쿠바는 창을 모으고, 지쳐 쓰러진 사자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보고 그리고 망설임 없이 마을로 향했습니다.
야쿠바의 친구들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전사가 되었고, 야쿠바는 마을 외딴 곳에서 가축을 지키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때부터 마을의 가축을 습격해 오던 사자들의 발걸음이 끊어집니다.
<야쿠바와 사자> 1 용기 <티에르 드되 글, 그림 길벗어린이>
전에 없는 가뭄이 계속되어 사람들도 동물들도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어요.
사자들의 왕 키부에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위해서 사냥감을 구해야만 했지요.
키부에는 결국 사람들의 마을로 향했습니다. 모든 사자들이 그림자처럼 그를 뒤따랐고요.
가축 우리에는 아직 물소가 몇 마리 남아 있었어요.
울타리 앞에 다다른 키부에는 단박에 남자를 알아보았어요.
소를 지키던 남자도 역시 한눈에 키부에를 알아보았어요.
볼품없이 비쩍 마른 맹수의 모습에서 키부에가 무엇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지요. 남자는 단호하고 분명하게 사자를 막아섰습니다. 둘에게는 모두 쉽게 물러설 수 없는 책임과 의무가 있었던 거예요. 사자는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고 남자는 창을 들었어요.
키부에는 남자를 쓰러뜨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발톱을 세우지 않았어요.
남자의 창도 몇 번이나 사자의 옆구리를 겨냥했지만 제대로 찌르지 않았어요.
멀리서 이 싸움을 지켜보던 사자들은 자신들 중 가장 강인한 사자와 맞수가 되어 싸우는 남자를 보고 두려워 하나 둘 꽁무니를 뺐고, 남자와 사자는 힘을 모조리 써버려 꼼짝달싹도 못한 채 서로를 깊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새벽을 맞아요.
날이 밝아오고 키부에가 자리를 뜨고, 간밤 소란에 긴장한 마을 사람들이 와 남자에게 물어요. 무슨 일이 있었나? 남자는 말합니다.
"아무 일도........ 친구가 다녀갔을 뿐."
<야쿠바와 사자>2 신뢰 <티에리 드되 글, 그림 길벗어린이>
닷새 뒤 저녁, 키부에는 자신의 은신처 가까이에서 물소 반 마리를 발견해요.
그렇지만 키부에는 떠날 결심을 해요.
그 남자 야쿠바에게는 털끝만큼이라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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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신뢰로 엮어진 관계가 있는가 하면, 신뢰를 키워가는 관계도 있다.
불행하게도 신뢰인 척 했던 관계도 있겠지.
동물과 사람 간이든 사람과 사람 간이든, 서로 자유롭게 소통하는 관계는 아름답다.
어떤 식으로든간에 소통이 어려울 때 그것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고, 소통이 불편해지면 관계도 의미 없어지고 설명이 필요해진다.
관계의 아름다움을 단박에 보여주는 이런 종류의 만남이 내 마음을 또 뭉클하게 한다.
역시 나는 동화책 체질!
수첩을 늘 지니고 다니다가 읽고 싶은 책이나 읽어야 할 책이 보이면 얼른 적어 놓는다.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는 처음 알았을 때부터 꼭 읽어야지 생각하고 적어 놓았는데 책방에 가지 못해 구하지 못했었다.
이번 여름 모임에서 7기 유순애 언니가 황송하게도 참석한 모두에게 그 귀한 책을 선물하셨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 속에 그 글과 그림을 아껴가며 읽었다.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지!
그 분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사람을 가까이 볼 수 있었다는 기쁨!
긴 세월 일관되게 진실하고 단단히 사시면서, 무한한 사랑과 기쁨 속에 자신과 그 주위의 사람을 엮어가며 밭을 일궈오신 그분에 대한 존경심으로 마음이 벅차오른다.
밝고 긍정적인 마음이 세상을 이렇게 행복하게 해 주는구나 하는 것을 존재로 보여 주신 분.
다 읽고 가슴에 한참 꼭 껴안는 책이 있다.
이 책이 그렇다.
고맙습니다 박정희 어머니! 아름다움을 보여 주셔서요.
벌써 읽었구나.
나 보던 책이 있어서 아직 못봤는데 빨리 읽어봐야겠다.
귀한 책을 무거운데 들고와서 한사람씩 모두 나누어줘서 정말 고맙더라.
익숙한 것만 먹고
익숙한 색깔의 옷을 선택하고
익숙한 사람들을 만나고
익숙한 길을 걸어가는 삶...........
봄날에 입문해서도
그저 익숙한 수다방만 기웃거리다가
어느날 잡아두고싶은 단상을 열어봤고
한참 있다 끝말잇기방을 열어봤었는데...
오늘에서야 이렇게 저물어가는 가을하늘을 내다보며
감동적인 책을 소개하는 이 코너를 만나게 되었네요.
자그마한 체구의 옥규선배님의 넘치는 탐구욕은
어디서 나오시는지....
부럽고 자랑스럽고...
긴 가믐속의 저수지처럼
바닥을 드러내는 내 지식의
저수지 수문을 열어놓고
옥규선배님의 커다란 호수에서 흘려보내주시는
물줄기를 채워야겠습니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김승옥의 소설을 생각하며-
소설가 김승옥이 등단 50년을 맞이한다는 기사를 아침에 보았다.
김승옥
그는 내 20대, 너무나 중요한 작가였다.
대부분의 그의 소설은 그의 20대에 씌여졌다.
나중에, 글을 접고 칩거하는 그의 재능을 안타까워하던 이어령씨가
여관에 거의 감금하다시피 하게 하고는 쓰게 했다는 소설은
나이가 좀 들어서 쓴 것이지만 20대에 쓴 그의 소설에서는 좀 빗겨가고 있었다.
정수가 전부 빠진 것일까? 20대의 그의 소설은 거의 찬란하다고 할 수 있다. 내게는.
우연히 손에 들게 된 그의 조그만 문고판 소설 제목이 <환상수첩>이었을까?
연녹색 문고판 작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환상수첩>이란 제목의, 그 책에서는 제일 긴 소설이 실려 있었다.
그때 그 글을 읽고 느낀 충격이라니.....
실은 그의 소설의 소재들은 거의 모두 어둡다.
거의 사회의 약자이고, 변두리를 헤매는 사람들이고, 뺏기는 사람들이고, 뭔가 규정짓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내용도 실은 비극에 가까운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소설이 화사하다.
왜 그랬을까? 그의 젊음이 느껴져서였을까? 그의 젊은 문체가 그런 내용을 빛나게 했던 것일까?
그 책에 실려있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마를 치는 것 같은 신선한 충격을 받고
아예 그 책을 끼고 살았다. 읽고 또 읽고.....
특별하게 잘 쓴 글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책 전체에 나와 있는 모든 단편들이 모두 이상하게 연관성을 보이며 모두 훌륭하다.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묘사와 은유와 문체가 <나에게는>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20대에 이런 소설<들>을 쓸 수 있는 이런 작가에 대한 놀라움으로 한숨을 토해내기도 여러 번이었다.
하나 하나가 모두 좋았다.
그는 일찍 모든 것을 쏟아낸 탓인지, 그 후로는 글을(내가 알기론 두 편의 소설이 더 있었다. 난 좀 실망했다) 쓰지 않았다.
그리고 신앙의 세계로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적인 일이다.
그의 원숙한 글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고,
그가 문학보다 더 중요한 일에 매진한다는 것도 독자로서는 아쉬운 일이지만
그건 그분의 인생이다.
20대의 그의 글만으로도 그는 충분하고도 넘치게 훌륭하다.
없는 듯이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문득 들으면
찡~ 하고 아랫가슴을 누르게 하는 젊은 날의 혼돈과 그리움, 사랑.
내 젊은 날, 고통과 혼란의 여정에 하나의 책으로 참 마음에 드는 길벗의 모습을 보여 준 그가 고맙다.
그의 건강을 빈다
그가 신춘문예로 등단한후 함께 동인지를 만든 김 현씨가 문득생각나서
그리고 보면 김 현씨도 작고하신지 이십이삼년이 되었네
오십도 되기전에 떠나셨는데 같은대학 같은과에 다니시면서 최하림씨랑
세분이 동인지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문학동지가 되어 주옥같은 글들을 썼는데
나는 여고시절 독일어 선생님 수업에 무얼 들어야 할지 몰라서
책상밑에서 딴청을 하며 읽던 책중에 그의 소설도 끼여 있었다.
아니 나보다 불과 5년위에 이사람은 어떤 세상을 살기에 이런 글을 쓸 수가 있을가 하면서 보냈던 내가
이십대 중반에
어찌어찌 결혼해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 같이 사는 사람이 만나는 문학인중에
해마다 여행을 같이 다니고 그 속에 빠져사는 사람에게서
글쟁이 들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접하면서 신기해하던 시절
소설말고도 알게되던 그들의 이야기들이 옥규글을 보면서 그의 작품보다
먼저 떠오르게되네.
그래도 단편적인것만 떠오르지 이젠 내 기억 저편속에 가물가물 모두 세월속에 묻혀가네
그의 불꽃같은시절에 다 소진해버린 창작력이 다 사위어 버리고 종교인으로 거듭났다고는 하나
나는 교과서에 실렸다는 <무진기행>이나 < 역사>등의
아름다운 소설 로 소설가로 그를 기억하리라
이젠 자기몸 하나도 제대로 못 추스려서 해마다 이십여년간 찾아가던 김현씨 묘소도
작년부로 종치고 세월속에 옆사람도 시간을 잠재우고있네그려
김 승옥씨 작품을 이야기하는 옥규 글을 읽다가
친구인 김현씨가 생각나고 그가 체구와는 아주 별개인 여성스럽게 고운 고음으로 부르던
심 수봉의 "그때 그사람" 이 생각나는 오후이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아이디어는 무엇이며 없어도 상관 없는 아이디어는 무엇인지를 헤아리기 위해
영국의 지성인 17명(저마다 의견이 다른 전문심사위원)이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온 눈부신 아이디어 50가지를 선정하고
네티즌들의 온라인 투표를 거쳐 순위를 정하여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아이디어'라는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물론 한국말로 번역되는 과정에 책 제목도 바뀌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 온 이 책을 읽으면서
호기심이 발동되었지요. 결벽성이랄까?
순위를 미리 안 보고 읽어보는겁니다.
중간 부분을 가니 안달이 나긴합니다. 선순위가 궁금해서리.
책의 나열 순서는 50위부터 찬성과 반대의견, 아이디어가 탄생하게 된 배경과 세상에 미친 영향을
각주까지 넣어서 1위까지의 순서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목차를 뛰어 넘었지요. 순위를 안 보려고.
50 -결혼 (무한 경쟁을 종식한 낭만적 족쇄)
49 - 방직과 방적 (패션의 시작은 실잣기와 베자기부터)
48 - 등자 (기마부대와 새로운 전쟁의 탄생)
47 - 비행기 날개 (새처럼 날아 하늘에 오르는 경이)
46 - 일신교 (당신을 통해 우리를 들여다보다)
45 - 명예 (과시적 명분과 행동하는 도덕 사이)
44 - 서사시 (웅혼하고 거침없는 영혼의 메아리)
43 - 氣 (생명체의 흐름에 관한 동양적 세계관)
42 - 자본주의 (가까스로 살아나온 자유와 탐욕의 동반지대)
41 - 복지국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 원대한 이상)
40 - 돛 (바닷길을 가로지른 매혹의 날개)
39 - 구리와 철 (현대 과학 기술의 거의 모든 인프라)
38 - 은행 (자본주의 산실 그러나 위대한 잠금장치)
37 - 증기기관 (지치지 않는 강철다리, 콧김을 내뿜는 말처럼)
36 - 도기 (삶을 윤택하게 만든 식탁 위의 예술)
35 - 커피와 차 (살롱에서 혁명의 거리까지 퍼진 신비의 음료)
34 - 포도주 (인간이 빚어낸 지상 최고의 물방울)
33 - 연애 (성욕과 끌림 너머의 숭고한 메타포)
456 페이지 중에 175 페이지를 지나갑니다
아직 뒤에 나올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나름 기대해 보는 아이디어로는?
불의 사용/ 천국과 지옥/ 컴퓨터/ 예술/ 과학/ 글자 / 0의 발견/ 인공수정...........
읽다보니 영국적인 상황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구나! 이런 시각도 있겠구나 동의도해줍니다.
32 - 대량생산 (도살장에서 착안한 혁신, 대중소비 시대를 열다)
31 - 운동법칙 (뉴턴, 간단한 수식으로 우주를 설명하다)
30 - 대학교 (지성의 전당, 신성한 상아탑)
29 - 중국어 간자체 (간소화 된 실용문자의 탄생)
28 - 냉각 (냉기로 신선함을 유지하는 시원한 상상)
27- 마르크스 주의 (20세기를 지배한 혁명의 엔진)
26 - 정부 (정의와 연대를 보장빋기 위한 필요자)
25 - 미적분 (변화하는 순간을 포착한 수학의 신기원)
24 - 농사 (풍요 속의빈곤을 낳은 대지의 딜레마)
23 - 자아 (해방 혹은 개인으로 조각난 현대인의 초상)
22 - 전기 (송전선을 타고 흐르는 도시의 핼액)
21 - 양자이론 (고전물리학의 패러다음을 뒤 엎은 대전환)
20 - 인쇄술 (위대한 사상의 민주화를 열다)
19 - 여성해방 (폭력과 비인간적 처우로부터 삶을 지키는 목소리)
18 - 빵 (밀과 효모가 빚은 향긋한 유혹)
17 - 백신 (멈추지 않는 죽음의 그림자를 걷으라)
16 - 전화 (전선을 통해 말을 전달한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
322페이지입니다. 새롭게 깨달은 것은 중국어가 지구상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란겁니다
에스파냐어권 3억 2900만명, 영어권 인구는 3억 2800만명, 중국어권 인구는 8억45000만명이라지요.
15 - 숫자 0 (그리스의 산술체계를 뒤 흔든 무한의 짝)
14 - 민주주의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해 질 권리가 있다)
13 - 바퀴 (근육의 힘에서 기계의 힘으로)
12 - 논리 (사고의 질서를 갖추고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
11 - 희망 (근거 없는 망상이 때론 삶의 비타민이 된다)
10 - 컴퓨터 프로그래밍 (기억하는 기계와 상상하는 인간이 만날때)
9 - 하수도 (오물로 뒤 덮인 도시 개조 프로그램)
8 - 과학적 방법 (끝 없이 의심하고 탐구하라. 답이 보일 것이다)
7 - 진화론 (우리의 유전자도 생존경쟁의 산물이다)
6 - 노예제 폐지 (악습의 고리를 끊어 버린 기나긴 사투)
405페이지를 넘기다 말고 책장을 넘길까말까 하다가 여기서 멈추었습니다.
이 게시판에 글을 올린 후에 5,4,3,2를 보려구요.
그런데 어찌어찌 하다가 1위를 보고 말았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글자가 얼핏 보인겁니다. ㅋ
네가지가 남았는데? 혹시 상상력과 분석력이 뛰어난 당신이라면
무슨 아이디어라고 추천하시겠습니까?
갑자기 여름날씨가 계속된다고 해도 이곳 지리산은 지낼 만 했었는데
오늘은 햇살이 여간 따갑고 공기는 후덥지근한지...밖에 보다는 실내가 좋습니다.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아이디어'라는 책 재미있네요.
핵가족,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문자기록,
내게 가장 놀라웠던 '떼이야르 드 샤르뎅'신부님의 진화론 또 뭐가 있으려나?
상상력 부족으로 이만...
저는 요즘 생각의 탄생을 보고 있고
엄청 두꺼운 상담과 생활지도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아, 부러워! 지리산 원제 가 보려나요?
우리 말로 번역된 책명은 "오! 이것이 아이디어다' - 존 판던 지음,강미경 옮김.
5 - 불 (굽고 끓이고 밝히는 영리한 다스림)
4 - 음악 (인생을 위로하는영혼의 치즈케이크)
3 - 피임 (마침내 이룩한 아이 낳지 않을 권리)
2 - 문자 (인간의 역사, 제 2막을 열다)
신영님! 지리산 언제 어느 때라도 오세요!!!!!!!!!!!
저는 오늘 동네 사람들과 봄나들이 갑니다. 관광버스 대절하여 여수엑스포간다던데요?
마지막 1 번은 여전히 여백이네요.
여수 댕경오셔서 써 놓으실라나?
저에게 어려운 숙제를 던져주고
야속하게 떠나시는군요. ㅎㅎㅎ
아! 궁금타...
내심 궁금해 하며
무얼까 궁리를 하면서
스마트폰?
이런 생각을 했는데
다시 들여다보니
이미 답이 있었네요.
인터넷이라고...
그러고 보면
제가 한 발 앞서 나갔 것 같네요.ㅎㅎㅎ
남편에게 고향에 한 번 안갈테냐고 묻곤 했는데...
단풍드는 계절에
다시 한 번 졸라보려고요.
최종길
최종길은 1931년 4월 28일 충청남도 공주군 반포면 상신리라는 계룡산 동북쪽에 면한 두메산골에서 아버지 최상희와 어머니 성금례 사이에 태어났다. 최씨 집성촌이었고 증조부는 벼슬을 지낸 분으로 당시 유족한 편이었으나, 돌림병으로 두 분이 돌아가시게 되자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할아버지 때부터 어렵게 지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최종길의 아버지는 척박한 땅에서 ‘비 오면 심고 비 안 오면 못 심는’ 수준으로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고 하루 종일 일에 매달렸지만 아이들을 교육시킬 정도의 여유가 늘 없었다. 최종길의 아버지는 딸과 아들을 구분하지 않는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고, 그것은 자식들에게 언제나 공부해야 한다는 마음을 심어주게 된다. 장남인 종남이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는 날, 그날도 최종길의 아버지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점심때가 지나 너른 바위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졸업식을 막 마치고 돌아온 큰아들 종남이 거름지게를 지고 산쪽으로 올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날 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아버지는 큰 결심을 하게 된다. 당시 인천에 올라와 있던 작은 아버지 댁에 종남을 맡기고, 아버지는 돈을 벌러 만주로 올라간다. 인천에 올라 온 종남은 처음에 인천 제마 공장 노무과 급사로 취직했으나 워낙 똑똑하기에 곧 노무과의 정사원으로 특채가 되었고, 곧 공주에 있던 가족들도 모두 인천으로 올라오게 된다. 거리에 서 있는 외등을 보고 '누나, 왜 빨랫줄에다 불을 매달아 놨지?' 이렇게 종길은 인천에 올라오게 된다. 송현초등학교로 전학한 종길은 총명한 두뇌로 곧 급우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의 부인이 되는 백경자는 이 송현초등학교 4년 후배가 된다. 가난하지만 깊히 결속되어 있는 이 가족에게 가장 큰 기쁨은 종길의 뛰어난 성적이었다. 못 먹어 추레하고 옷에 이가 가득해 몰골이 형편 없는 종길이었지만 누나인 종숙씨의 동생들에 대한 헌신은 정성에 다함이 없었다. 송현 초등학교 졸업생 대표로 답사까지 했던 종길은 세금 낸 영수증이 있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인천 중학교 입학이 보류된다. 해방 직후 결국 인천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학익동에서 응봉산 중턱의 인천중학교까지 걸어서 통학하게 된다. (이때 그 먼 거리를 뛰어다닌 실력으로 경기도 마라톤 대회에서 제물포 고교 사상 처음으로 1등을 하게 된다) 당시 인천중학교(6년제)의 학생들은 길영희 교장의 교육철학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고, 그의 지사적 풍모에 감화 받아 평생의 가치관과 철학을 형성하게 된다. 종길은 키가 작아 항상 5~6번을 했는데 커다란 눈을 빛내는 이 명석한 소년을 눈여겨 본 길 교장은 늘 '대망을 가지라'는 말로 이 소년을 격려한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배우지 못하고 가난했지만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을 구해주기 위해 산지사방으로 다니며 책을 구하였다. 이 때 한글로 된 책 뿐 아니라 영어로 된 책도 구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들 형제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선진국의 문화와 철학, 정치 사회적인 흐름을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종길의 모든 형제들은 자연스럽게 항상 모여서 공부를 하였고, 그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큰 자극이 되었다. 그들에게 배우고 싶어하는 이들이 집으로 몰려 들었고 그들을 모아 종길은 수학과 영어를 가르치게 된다. 그 형제들은 아침 일찍 커다란 두레반상을 펴 놓고 모두 모여 공부를 했다. 동생들이 성장하면서 유학이며 군 입대이며 이런 이유로 그 두레반상은 크기가 작아졌지만 큰형인 종남의 아침 공부는 계속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들 형제는 서로가 희망이었고 사랑이었고 꿈이었다. 그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형제를 위해서는 화약을 지고도 불속으로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서로 아꼈고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했다. 그중에서도 종길에 대한 형제 자매들의 헌신과 사랑과 경외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51년 전쟁의 와중에 군복무를 마친 종길은 시험을 쳐서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는 복잡한 그 당시 상황에서 모든 관심과 정열을 공부에 쏟아 부으려 애썼다. 절도가 있는 그의 모습은 언제나 주변 친구들의 귀감이 되었다. 법대에 진학한 종길은 학문이 지니는 본연의 목적, 그 자체에 충실하고 싶어 고시 공부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는 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두고 더욱 공부에 매달렸고 틈틈이 어학에도 깊은 노력을 기울였다. 평소 닦아놓은 영어 실력을 기본으로 하여 독일어 원서를 읽으며 독일어 공부에 박차를 가하였다. 법대를 졸업한 종길은 길 교장의 권유를 받아 제물포 고등학교의 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그 당시 길영희 교장은 훌륭한 선배를 후배들에게 접하게 함으로써 자극을 주기 위하여 그런 행정을 하였다 한다. 그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제물포 고등학교에서 영어 독일어를 가르치는 한편 막연하지만 유럽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럽으로 유학 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유럽으로 떠나게 된 동기는 이러하다. 형이 근무하는 동일방직에서 새 기계를 독일에서 들여오게 되는데, 도무지 그 독일 기술고문으로 온 사람의 통역을 할 사람이 없었다. 형의 소개로 종길이 통역을 하게 되는데, 그때서야 제대로 통역이 되었고, 그런 종길의 총명하면서 성실하고 근면한 모습에 호의를 갖게 된 독일인이 내가 도와 줄 일이 없느냐 묻게 된다. 그 물음에 종길은 외국에 나가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하고 결국 이 사람의 도움으로 스위스 취리히 법과 대학으로 가게 된다. 일 년 후 다시 민법과 국제 사법의 대가인 독일의 케겔 교수의 지도를 받기 위해 독일로 떠나게 된다. 그는 밝고 따뜻하면서도 쾌활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교우관계가 좋아 당시 그곳의 친구들한테 '기숙사의 햇살'이란 말을 듣기도 하였다 한다. 스위스에서 그의 숙식을 제공했던 자매는 그를 너무나 좋아하며 아꼈고, 그가 죽은 뒤 오랫동안 그의 자녀들에게 생일 선물과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내왔다고 한다. 종길은 탁월한 명석함과 집중력으로 결국 1962년 3월 31일 '한국 민법 및 국제사법에 있어서 이혼'이란 논문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그 과정의 어려움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게 종길의 학문 세계는 틀이 잡혀 가고 있었고, 일본이 주도하는 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세계 민법학의 원류에 곧바로 연결되는 장대한 민법학의 세계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살며 연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 모든 일을 한국에서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고국의 강단으로 가겠다는 마음을 완전히 굳힌다. 긴 유학 생활을 마치고 왔을 때 그의 나이 32, 부모님과 형제들은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당시 인천 인덕의원 집 딸이자 인천기독병원 산부인과 레지던트였던 백경자를 만나게 된다. 약혼식은 공화춘에서, 결혼식은 제물포 고등학교 강당에서 했다. 그때 제물포 고등학교 운동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결합에 대한 세간의 기대와 이목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가족의 사랑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 또한 자신의 가족을 몹시 사랑하였다 한다. 늘 가족 사진을 찍어 바라보고,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눈빛은 행복하게 빛났다고 한다. 자기를 어머니처럼 키워주셨고, 병원에 다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아이를 볼 수 없는 아내 대신 그들의 아이를 봐 주시는 누나에 대하여 그는 늘 애틋한 정을 느꼈고, 그 누나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데 소홀함이 없었다. 2년간의 강사 시절을 거친 최종길은 1964년 전임강사가 되었고, 1965년 조교수로 승진하였다. 그는 독보적인 민법 교수로서 우수하고 정열적인 강의를 펼쳤다. 땀을 닦으며 열정적으로 하는 수업을 많은 학생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의 관심은 출세나 권세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학문과 그것이 밝혀가야 할 진실에 있었고 그의 지극한 대학 사랑은 결국 학문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그는 연구 논문 외의 잡문은 거의 쓰지 않았다. '학자는 연구 논문이 우선'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고, 10년 재직 기간에 그는 53편의 논문을 발표한다. 그 중 2년은 미국에서 연구 생활을 했으므로 실제 집필 활동을 한 것은 6, 7년에 불과하다고 볼 때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학자적 성실성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논문은 깊숙하면서도 차분하고 평탄하면서도 호소력이 있었다 한다. 논리정연하고도 군살 없이 그러면서도 알기 쉽게 서술하면서 무엇이 우리에게 적절한 것인가에 대하여 힘차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동료 교수는 그의 논문이 주는 감동을 '교향곡의 웅장한 마지막 장'과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 국민들의 법 감정과 관습을 소중히 여겨 우리의 관습을 바탕으로 한 법 이론을 구성하려고 애썼고, 약자 보호가 민법학의 중요한 이념임을 일깨우고, 억울하고 약한 국민들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이 법률가가 해야 될 본연의 임무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는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하고 싶었으나 1967년 8월부터 학생과장이라는 보직을 맡으며 학생 지도와 행정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 세월의 소용돌이 속에서 참담한 고뇌의 시간이 계속된다. 거세져가는 학생 시위, 제자들을 탄압하는 독재 정권, 상아탑을 지켜야 하는 자신, 보호해야 할 제자. 이 사이에서 그는 최선을 다해 수업하고, 학생을 야단치고, 타이르고, 부둥켜안고 호소했다. 그의 학자적 양심은 학생들에 대한 사랑으로 늘 불안하고 아팠고, 위험에 처한 학생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힘든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의 학생 사랑은 각별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라 할지라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놀라울 정도로 단호하였다고 한다. 그는 대학 구내에 경찰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천명하고 대신 학생들의 자진 해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답변했다. 1969년 9월1일 43명의 법대 학생들은 도서관에 모여 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마이크로 가두방송을 진행했다. 경찰은 진압을 위해 학내에 진입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수도가 끊긴 무기한 단식 투쟁 속에서 학생들은 탈진해갔다. 이 학생들에 대한 걱정으로 최종길의 진실을 다한 설득과 눈물어린 절규의 시간이 이어졌다. 한 오라기의 권위도 가식도 기만도 느껴지지 않은 그의 말에 학생들이 하나 둘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두 팔을 벌리며 천천히 학생들에게 다가갔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따뜻하게 포옹했다. 이런 일을 통하여 자칫 사제 간에 상처만 입고 끝나버릴 상황을 하나의 교육과정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 가족들의 걱정에 그는 늘 웃으며 괜찮다고 했지만 독일 친구 칼 하인쯔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얼마나 이런 상황에서 탈출하여 학문적 양심과 자유를 구가하길 바랬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싶어- 그는 1970년 하버드 대학의 엔칭 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미국에서 같이 연구한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는 유난히 무서움을 잘 타고 길눈이 어두웠다고 한다. 매일처럼 다니는 길도 반대 방향으로 가기 일쑤였다고 한다. 고국에 대한 근심은 여전했지만 오래만의 휴식은 그를 다소나마 안정시켰고, 너무나 지쳐 있었던 그는 가족들을 몹시 그리워했다고 한다. 연구 생활을 일 년 더 연장한 후 그는 가족을 불러들인다. 그 1년이 그 가족에게는 너무나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아들을 친구처럼 대했고, 가족들의 사진을 찍으면 꼭 슬라이드 사진과 인화지 사진 두 개로 만들어 보관하여 추억이 담긴 앨범을 두 권 만들어 아들과 딸에게 선물하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1972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최종길은 9월 학기부터 강의를 재개했고 2년간의 충전으로 그의 학문적 열기는 충만했다. 그는 한국 민법학계의 중진으로 평가받고 있었고, 의욕적으로 민법 교과서 집필에 매달렸다. 그 해 10월에 선포된 유신만 아니었다면 그는 충분히 행복한 연구 생활을 할 수도 있었다. 다 알다시피 그 당시에는 학생운동가의 제적, 입영, 구속과 아울러 대학 내 서클의 해체, 교내 간행물의 폐간, 학생회의 기능 정지 등 광범위한 탄압이 있었고, 수많은 학생들이 영어의 몸이 되었다. 많은 지식인들은 보신과 침묵의 길을 강요당했으나 최종길은 강요된 침묵을 거부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물론 학생이었다. 그는 늘 말했다. ‘교수와 학생의 신뢰가 가장 중요해. 교수는 학생의 존경을 받아야 하고 또한 학생들을 사랑하고 아껴야 하지. 그런데 그것은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은 일이야.’ 라고. 그는 교수회의 석상에서 정부의 강압적인 시위 진압을 비판하였고, 학생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특히 당시 중앙정보부의 학원 총 책임자였던 김덕창과 자주 입씨름을 벌였다고 한다. 1973년 10월 2일을 기점으로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에서 유신 이후 최초의 시위가 점화되었다. 그러나 그 해는 침묵이 강요되던 엄혹한 시대였다. 이 정권의 시위 진압은 무자비할 정도로 잔인했고, 유신이라는 금기의 성에 도전한 학생들은 살인적 폭력 진압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법대 도서관장이었던 최종길은 이 같은 사실을 목도하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회의 석상에서 결코 묵과할 수 없는 만행에 대하여 중앙정보부를 비난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스승으로서 모른 체 하면 안됩니다- 그 말이 교수들도 그냥 있어서는 안 된다 합류해야 된다는 말로 각색되었다는 후문도 있다. 그는 회의석상에서 -서울대 총장을 통해 대통령에게 항의해야 합니다- 하고 말했고 그 발언은 금기에의 도전이며 위험 수위를 넘은 초강경 발언이었다. 최종길을 자진출두 형식으로 중앙정보부에 불러들인 것은 그 며칠 후였다.
최종길을 중앙정보부로 데려 간 이는 이이러니컬하게도 그를 너무도 존경하는 그의 동생 종선이었다. 종선은 중앙정보부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감찰반이라는 최고의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냥 참고인 격으로 물어볼 게 있으니 형을 데리고 오라는 말에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형을 데리고 간 사람이 바로 동생이었던 것이다. (형이 비명횡사를 한 후 이 동생은 자책감과 분노와 두려움과 절박함에 이 사실을 남기고자 정신병자 노릇을 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종길의 인천중학교 동창인 이재원이라는 사람이 유럽을 거점으로 활동한 간첩이기 때문에 참고인으로 조사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기억도 희미한 이재원과 지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생각했지만 아무 것도 관계가 없으니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당시 종길은 민법 총서 원고를 마무리 하느라 밤잠을 줄이고 있는 상태였다. 40쪽 정도만 더 쓰면 완성이 되는 원고였다.
종길은 동생 종선의 말을 듣고 -어쨌든 그 중학 동창이 빨갱이가 된 것이 사실이라면 딱하게 되었구나, 동창놈이 빨갱이가 됐고 그 때문에 순수하게 수사 협조 받는 게 목적이라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 협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 오랜만이니 술이나 한잔 같이 하자꾸나- 하며 형제는 즐겁게 술을 마셨다.
그러나 1973년 10월 16일, 형을 데리고 간 날 종선의 마음에 묘한 불안감이 싹트고 있었다. 그러나 애써 웃으며 -형님, 이 못난 동생의 직장 이때 한번 봐 두십시오.‘ ’어허 말로만 듣던 남산에를 다 들어가 보게 되었구나‘ 이것이 그 형제가 이승에서 함께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종길은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나오지 못했고, 가족들은 10월 19일 새벽 1시 30분경 종길이 사망했음을 통보받았고 시신은 이미 어디론가 치워졌다. 기관원에게 겹겹이 둘러싸인 채 진행된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는 가족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무슨 가족들이 곡도 않느냐고 핀잔을 주는 묘지의 인부들에게도 아무 대꾸하지 않으며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고인이 사랑했던 딸 희정은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뛰어놀았고, 아들은 울지 않으며 아버지가 누워있는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였다 한다. 내려오는 길에 종길의 아내 백경자가 시동생 종선에게 말했다. '애들 아빠가 쓰던 책 원고가 다 끝나 가는데, 조교분에게라도 완성시키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안돼요! 내가 커서 꼭 쓸 거야. 내가 쓰게 해 줘요’ 아홉 살 아들이 말했다
64매에 이르는 피의자 신문조서에는 최종길의 서명 무인조차 없었다. 피의자 신문 조서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본인의 자필 진술서를 받는 게 중정 수사의 통례였다. 그러나 최종길의 자필 조서에는 동생에게 부탁받은 이야기, 유학시절의 생활과 학비 조달관계, 문제의 이재원과 접촉하게 된 경위, 대화 내용 등이 기재되어 있었고, 형제들과의 우정, 가족들의 이야기가 쓰여 있을 뿐이었다. 중정의 서류에는 피의자가 용변을 끝냄과 동시에 화장실 유리창 문 밖으로 뛰어내려 26미터 아래 아스팔트 상에 떨어져 자살함으로써 본 조서 작성을 중지하였음이라고 기재되어있었다. 그 조서는 그가 죽은 후 작성되었다.
그 친구들 말에 의하며 그는 아주 겁이 많고 고소공포증이 있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 매사에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었고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손톱만한 희망이 있으면 거기에 기대를 거는 사람이었다 했다. 또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을 만큼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자살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를 담당했던 차철권은 천지신명께 맹세코 최종길의 따귀를 한 대도 때리지 않았다고 했다 한다. 조사만 했다고 했다.(나중에 판례집을 보면, 약간의 조사를 했다고 써 있다) 그의 천지신명은 누구였을까. 최종길의 사후의 모습을 본 의사는 그런 상태로는 창문을 열어 뛰어내리기는 커녕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최종길은 온몸에 멍이 든 채, 특히 엉덩이가 잉크를 문신한 것처럼 온통 멍이 든 채 그렇게 죽었다.
최종길이라는 희망을 안고 살았던 형 최종남은 거의 자폐증 환자처럼 말을 잃었고, 마지막 길에 최종길과 동행했던 종선은 결국 정신병원으로 몸을 감추게 된다. 단두대에 서기 전 프랑스의 루이 17세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에게 나타났던 것과 같은 백반증 증세로 머리와 얼굴 피부가 하얗게 변해버린 아내 백경자. 최종길에게 특별한 신임과 사랑을 보냈던 독일의 케겔 교수는 내무부 장관 앞으로 강력한 항의서신을 보냈고, 최종길의 아들 최광준을 독일로 초청하여 퀼른 대학 법학부에 유학시키고,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제 3공화국 시절 간첩이라는 이름에는 누구건 쉬쉬하는 판국이었으므로 최종길의 사인을 규명하는 일은 묻히는 듯 하였다. 그러나 1974년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에 의해 명동성당에서 추모미사가 감행되었고, 사제단은 최초로 그가 자살한 게 아니라 고문에 의해 살해되었음을 공개하게 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총탄에 맞아 죽자 기뻐하는 자식들에게 최종길의 어머니는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 한다. -죽음 앞에는 조의만을 표하는 것이다.- 어두운 방에서 홀로 가슴을 치며 숨죽여 통곡하면서도 남은 자식들 앞에서는 평온하고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의 일갈이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출판 ------------------------- 이 책을 오래 전에 읽었다. 읽은 후 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 천한 세상이 이런 고귀한 사람을, 이런 고귀한 사람을.............. 그 생각만 들었다. 안타깝다는 말로도 부족한 그런. 이 글은 책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축약하여 적은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독일의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에게 한다는 말 엄마 아빠는 그때 뭐 했어요? 난 뭐 했을까? 뭐 했지?............ 모르는 것도 죄가 될 때가 있다. 진심으로 그분의 명복을 빈다. 최종길의 판례는 아래에서 볼 수 있다. http://blog.naver.com/worknrest?Redirect=Log&logNo=90006439773
옥규가 적절한 시기에 정말로 좋은 자료를 올려주었네.
너무나 쉽게 이 분을 언론에서 매도한 모습으로만 폄하하려는 사람들이 안타까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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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가슴 아픈 일 이구나.
우리 시대엔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난 치매 환자 처럼
그 시절 그 아득한 일들을
없었던 듯 태연히 아주 잘 지내고 있음이 기가 막히다.
그런데 그런 기가 막힌 일들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당당히 판치는 세상이 더 기가 막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걸까?
역사적 의식도 반성도 남에 일 이니
우리의 미래가 있기는 한 것인가?
가슴이 더 답답해지고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난 뭐 했을까? 뭐 했지?............
모르는 것도 죄가 될 때가 있다.'
옥규야, 어제 잠시의 대화
내겐 '아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 이었구나' 했다.
무식이 죄다.
그럴 때 네 생각을 들려주렴 그럼 또 아 그렇지 할 것 같다. 고마워!
더 이상의 댓글이 없길래 좀 그랬었는데 신영이가 왔구나.
우리가 사상이라던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냥 인간적으로만 생각해봐도
누가 갑자기 끌려가서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는 것 자체로도 엄청난 충격 아니니?
그것이 외국도 아닌 그냥 가까운 이웃의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지.
설사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해도(사실은 전혀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본인은 물론이고 그 가족들이 평생 겪었을 고통에 대해서
나서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런 말도 안되는 현실을 최소한 가슴아프게는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가해자는 또 자기가 살아남으려고 그렇다쳐도
겉으로는 별 상관도 없어보이는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극악무도한 죄인 다루듯이 함부로 말하는 것에 소름이 끼치더라.
그 당시야 군부독재시절이니 그저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 보통 사람들이야 그저 아무 말 안하고 살아야했다 치지만
요즘에도 예전 반공 포스터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하면서
피해자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구.
내 생각에 오히려 가해자들은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마음 속에서는 그 피해자들에 대한 편견이 없을 것 같아.
자신들에게 있어서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 할 뿐이겠지.
신영아.
난 요즘 뉴스를 보면서 그 시절에 그런 일이 있었나? 하는 적도 있었단다.
소위 대학을 나왔다는 사람이............................................
어느 쪽으로 생각하는 가는 둘째 치고 그리도 무심하게 살았다는 게 참 부끄럽다.
(졸업하자마자 결혼하고 남의 나라에 가서 지딴에는 사느라 좌충우돌 했다고 변명은 하지만)
적어도 억울한 죽음은 없어야하고 늦게라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지.
난 솔직히 뭐가 진실이지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야.
그냥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어떤 사람이든 그 생명은 존중되어야한다는 거지.
하도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길래 혼자서 속상해하던 중에 옥규가 올려서 어찌나 반갑던지...............................
명옥아~
난 그 사람 누군지도 몰랐어.ㅎㅎ
이 글 읽고 우리 남편에게 물어보았더니 잘 알더라.
서울 법대 교수였고 억울하게 돌아가셨고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 뭐~ 그러더라.
오래전 우연히 "김형욱 회고록" 이란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됬어.
너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됬고 정치판의 비정함에 놀랐어.
그 사람은 결국은 프랑스에서 사료가는 기계에 갈렸다는등 별 이야기가 다 있었어.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 발전을 이룩한 반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중에 대통령된 사람들이 다 착복하고 감옥가고 난리들이니까 박대통령의 공적만 부각되고 인권유린에 대한 실정은 많이 희석되버린점도 있지 않을까?
계속 실망하다가 이젠 정치에 별 관심도 없어.
국민 개개인의 의식이 살아있어야 하는데 나부터도 도통 관심이 없으니~
어쨋던 최종길 교수 당사자 가족의 고통은 말로 할수 없었겠지.
그래서 백경수도 사촌언니의 생활을 곁에서 봐왔으니 너무 억울해서 그런글을 올렸을꺼야.
옥규가 쓴 글읽고 맘이 많이 아팠지.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가족이 이제는 상처를 치유하고 평온한 삶을 살기 바랄뿐~
오랫만에 글 써본다.
그 시절그때 내 주변엔 알게 모르게 관련된 사람이 많았었다.
물론 인일동문과 제물포고등학교출신들은 인적으로 직 간접으로 연결된 사람이 많을꺼구.....
그 유명했던 동백림 사건으로 많은 유럽 유학생 인재들이 양심의 소리를 하면 쥐도새도 모르게 잡혀들어 갔고....
서울공대출신 수재 이재원이 잠시 제물포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을 하다가
결혼 한달만에 청운의 꿈을 안고
네델란드로 조선학 공부를 하러 유학길에 오르고
자리 잡히면 부르겠다는 울친구 언니는 기다리다 기다리다 소식도없는 남편을 엄청난 사건으로 가슴에 피멍이 드는데
이 역사의 소용돌이의 현장에서도
남편 향한 일편단심 변함이 없었는데
행방불명된 남편 이재원의 소식이라도 알려 미국으로 이민 갔었다.
종내는 남편이재원의 생사도 못 알아보고 귀국하여 몇년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상과 이념이무엇인지?
아직도 분단된 조국의 슬픔을 간직한 분단1세대의 한은 지구를 굽이굽이 돌아 통일의 그날이 오면 풀리려는지?.....
그시절 무서운 유신독재시절 유럽에서 이재원과 단지 만났다는 이유 하나로 줄줄이 잡혀 들어갔고
양심의 소리에 행동했던 최종길교수는 역사의 희생물이 되어 어이없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고....
참으로 이시대의 실천하는 양심이 절실히 요구되는때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지켜 나가야하는 이정표가
억울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세상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될것 같다
선배님들
이 아침에 우리 조카들이 생각나고,언니가 생각나서
자꾸 눈물이 납니다.
희정이는 참 예쁘고,광준이는 듬직하니 잘 생겼어요.
형부는 너무 어려워서 가까이 대화를 해 본 적은 없었지만
참 인상이 좋으셨던 분이셨고
살아 계셨다면 제가 가까이 뵙고 귀감으로 삼아도 좋은 인격이셨다는 걸
이 글로 더욱 알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이번 여름에 강릉에 갔을 때
조선왕조 오백년의 극작가 신봉승님의 강연을 듣게 되었어요.
1933년생 이시니 일제치하,해방, 6.25, 4.19,5.16...
우리의 역사를 고스란히 다 격으신 역사의 증인이시죠.
아직은 우리의 질곡의 세월을 가슴 아파하고
다시는 그런 아픔을 또 격을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하는 분이 계시지만
좀 더 세월이 흐르면 '그런 일이 있었던가? '또는
아주 옛 이야기 하듯 아님 남의 일이라 생각할 때가 올 것 입니다.
그런 일 다 잊고도 우리 후손들이 잘 지낼 수 있다면 걱정 할 일이 아니겠지만
요즘 우리 사회처럼 온 곳이 병들고 멍들어 갈 땐
그나마 그런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하여 그 사람들 조차 사라지고(이 사회에 경각심을 갖는 사람들) 나면
우리 사회는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 해집니다.
아침에 잠시 이야기를 몇 사람과 나눴는데
사람들의 말 한 마디를 들을 때 마다
더더욱 가슴은 싸 해집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그런 생각이 들어 절망의 심정 일 때도 있었는데
어느 결엔가 민주주의가 우리 곁에서 일어났듯
이 즈음에도 절망 속 에서도
그런 일이 소리 없이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위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나간다>
처음 읽은 위화의 소설은 <허삼관 매혈기>였다.
그 소설의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어쩐지 무협지 제목 같은 느낌도 들었고, 슬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어쨋든 그 제목이 마음에 들어왔다.
그 소설을 읽고 난 후 또 굉장한 이야기꾼이 나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형제>, <인생> 외 몇 개의 다른 소설집을 찾아서 보았다.
<허삼관 매혈기>와 <형제>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타고난 이야기꾼들이 있다.
슬픈 이야기도 뭔가 우습게, 헛바람이 피식 빠지듯, 일상처럼 써내려가는, 그것도 아주 걸지고 아귀가 딱 맞게.
그런 작가들이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도 그런 작가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그의 산문집이 나왔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나간다>
오랜만에 푹 빠져서 재밌게 읽었다.
최근 우리도 그러하지만 중국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이다.
짧은 시간 속의 엄청난 중국의 변화는, 게다가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국가로의 급속한 변화는 사회 속에 어떤 공동 현상을 만들 수 밖에 없다.
어디로 달려가는지도 모르고 무엇이 중요한 건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달려가는 상황 속에 있다보면, 달리는 사람이나 보고 있는 모두 아무 정신이 없게 될 수 있다.
이럴 즈음에 위화는 지금의 중국을 나타내는 단어를 몇 개 골라 그 단어에 대한 소개와 함께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무척 재밌다.
<형제>라는 소설을 볼 때 그 사이에 끼어있던 인터뷰 기사가 있었다.
그 인터뷰를 보고 이 사람의 내공이 정말 깊구나, 참 좋은 작가가 나와서 아주 기쁘네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어린 시절 에피소드를 주제와 연결하는 능력이 탁월하고, 능수능란할 뿐만 아니라 깊이가 있다.
게다가 읽는 재미라니.....
일독을 권한다.
혹시 안 읽으셨다면 우선 <허삼관 매혈기>부터 ^^
위화의 에세이를 읽기 전에 먼저 허삼관매혈기부터 읽었습니다.
일본의 작가인 오쿠다 히데오의 정신과 의사 아라부의 이야기인,
<공중그네>, <인더풀>, 그리고 <면장선거>를 참 재밌게 읽었는데
위화의 허삼관매혈기와도 조금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 책들을 연상하고 연관지으면서 더욱 즐겁게 보게 되었어요^^.
허삼관의 가족 내에서 펼쳐지는 에피소드를
어쩜 그리 솔직하면서 눈물나게, 때로는 웃음을 짓게 썼는지요....
한달음에 무척 편안하게 쏘옥 다 읽었습니다.
그러나 깊은 페이소스를 느끼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같습니다.
그리고
열가지 단어로 말하는 중국의 일면인,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나간다>를
어제부터 손에 쥐고 읽었고
나머지는 오늘 이른 새벽에 시작해서 조금 전까지 다 읽었습니다.
<산채>라는 단어와 <홀유>라는 단어는 우리와는 생경하지만,
그 속에 중국인의 유머와 해학이 들어 있어서
아하...하면서 짚어 내려 갔습니다.
허풍도 그들을 만드는 원동력인 중국...이해가 조금은 되더군요^^ㅎㅎ
위화의 글쓰기와 독서부분은
역시 그를 좋은 작가가 되기까지와 연결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쉰의 이야기까지도요...
병원에서 일을 했던 부모님의 뒤를 이어서 발치를 하는 일(치과의사)을 했던 그가
어릴 적부터 줄곧 관심을 가져 온 글쓰기에 매달리기까지의 이야기도 매우 드라마틱 합니다.
중국의 변화무쌍한 30년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책입니다.
그러면서 글이 좋아서 술술 읽게 합니다.
위화의 내공을 느낄 수 있었고, 깊은 성찰을 하는 위화임을 알게 합니다.
시간이 있는 날 서점에 가서 그의 소설 <형제>를 사려 합니다.
참 고맙습니다.
좋은 책을 만나게 해 주셔서요...
<허삼관 매혈기>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위화의 에세이는 선배님 덕분에 알았거든요^^
두 책을 다 읽어서 뿌듯합니다.ㅎㅎ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어린이에게 주는 동화>만을 읽은 레오 톨스토이를
오늘부터 만나려 합니다.
우선 세 권의 <안나 카레니나>를 구입했습니다.
이 책을 읽고나면~~~도스또예프스키를 다시 만납니다.
전에 읽었던 책들이 중역이어서 조금 그랬는데
이번에 읽을 책은 모두 새롭게 러시아판을 직역한 책입니다.
출판사,<열린책들>에서 나온 것들이지요^^
<악령>과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죄와 벌>과 <백치>에 도전합니다.
저요~~~이제부터 죽었습니다...ㅎㅎㅎ
임옥규 후배님
등록된 댓글을 따라 오다가 우연히 최종길교수님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고
그후로 이곳에서 후배님이 추천해 주시는 글들을 읽었습니다.
전에는 이곳에 이런 글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쳤군요.
섬세한 문체로 책을 소개하며,가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좋은 글들---
감동입니다.
댓글은 못 달고 지나치더라도,후배님의 글을 유심히 그리고 찬찬히 들여다 보겠습니다.
사랑과 존경을 보내며---
에구 언니~~
무슨 그런 심한 표현을.....
그저 사랑만 받겠사와요;;;;;
11기 광희 언니 때문에 11기는 늘 임의롭고, 편안해서 동기의 우정 같은 걸 느끼지요.^^;;
멋진 분들이 많아서 늘 창문으로 멀리 바라보던 11기 언니들.
노래를 잘 하던 그 언니며, 글 잘 쓰던 그 언니며, 탁구 잘 치던 그 언니들이며.....
이젠 미국을 생각하면 생각나는 언니도 생겼네요^^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나는 하나의 노래 이곳을 지나간다 I, the song, Walk here >
안미륵 엮음
날씨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정말 대단해요.
출근 길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몸에 스며드는 것처럼 느껴지고,
낯선 음악도 어찌나 친숙하게 다가오는지 속으로 놀랍다 생각하고 있어요.
선율 하나 하나가 탱글탱글 튀면서 내 몸과 잘 섞이는 것 같은 느낌.
저녁에 자리에 누웠을 때 읽고 있는 책이 있어요.
이 책은 인디언들의 노래를 묶은 책인데요,
요즘의 날씨와 어울려 차분하게 제 맘에 쏘옥 들어오네요.
이 책을 엮은 이의 얘기가 재밌어요.
안미륵이란 분인데, 이 사람은 거의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네요.
아버지는 인디언 추장들의 명연설문을 모은 한 권의 책을 집필하는 중이었고,
가족 앞에서 그 글들을 실제로 연설하듯이 소리 내어 읽으셨대요.
아버지와 잠시 서귀포에 내려가 살 때 바닷가 그 집에서는 늘 인디언들의 연설과 노래가 울려퍼졌고요.
아버지와 미국 서부 일주 여행을 한 적이 있대요.
거기서 '비 내리는 나무'를 갖고 왔는데, 대나무 속에 팥알 처럼 생긴 작은 씨앗들이나 조약돌들이 들어 있어 흔들면 비 내리는 소리가 났대요.
실제로 한국에 돌아와 어느 날 흔들고 놀고 있는데 맑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더라나요.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더래요.
제주도 바닷가 절벽에 차를 세워 놓고 차의 오디오로 세상이 울릴 정도로 인디언 북소리를 듣던 기억.
아버지는 말하셨다지요
그것이 백인들의 탐욕에 밀려 세상을 떠나야만 했던 인디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이라고.
한 편 한 편 모두 좋은데 우선 하나.
아름다움 안에서 걷기를
하루 종일 걷기를
다음 계절까지 걷기를
꽃가루가 뿌려진 오솔길을 걷기를
내 발 밑에 메뚜기들과 함께 걷기를
내 발 옆에 이슬과 함께 걷기를
아름다움과 함께 걷기를
내 앞의 아름다움과 함께 걷기를
내 뒤의 아름다움과 함께 걷기를
내 위의 아름다움과 함께 걷기를
내 아래의 아름다움과 함께 걷기를
내 주위 모든 곳의 아름다움과 함께 걷기를
늙어서도 아름다움의 오솔길을
기운차게 걷기를
늙어서도 아름다움의 오솔길을
다시 살아서 걷기를
아름다움 안에서 모든 것이 끝나기를
아름다움 안에서 모든 것이 끝나기를
나바호족 기도
아마도 그것들은 별들이 아니리라.
먼저 세상을 떠난 우리의 사랑하는 이들이
우리를 내려다보면서
자신들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우리에게 빛을 내려 보내는
천국의 입구이리라.
Perhaps they are not stars
But rather openings heaven
Where the love of our loved ones
Pours through
And shines down upon us
To let us know they are happy
이누아트족 전설
<지금 아이들과 -달팽이의 별-이라는 영화를 보러 가요,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으로요.
옆의 맹학교 아이들도 같이 본대요.
한쪽 아이들은 화면만 보고, 한쪽 아이들은 소리만 듣겠지요.
나중에 시를 몇 개 더 올릴게요~~>
옥규야~
인디언들의 시 정말 좋구나.
시 더 올려봐~
지혜로운 인디언들~백인들에게 상처받고 삶의 터전 다 뺏기고 극복하기위해 얼마나 몸부림쳤을까?
시도 거의 깨달음의 수준이네.
"달팽이의 별" 본거 같아.
서로 보완해주는 장애아부부들~
남자는 시를 썼던가?
아주 소질이 있더라구~ 근데 내가 다른걸 보고 착각한걸지도 모르겠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청어람 미디어)
이 책을 쓴 호시노 미치오는 일본의 사진 작가이다.
이 사람은 책방에 들렸다가 우연히 사진첩에서 알래스카의 모습을 본 후 완전히 넋을 빼앗겨
거기에 가서 살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된다.
그는 19 살 때 알래스카로 떠난 이래 20년 간 알래스카의 자연을 담아낸다.
19살 때 그는 매료당한 그 사진첩에 있는 어느 마을의 이름을 보고 무조건 편지를 쓴다.
저는 일본 사람입니다. 알래스카에 가고 싶습니다.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저를 재워주고 도와주실 분이 있으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어느 한 마을에 편지를 보내고, 반 년 후 그 마을의(알래스카 쉬스마레프) 한 가족이 그를 초대하게 된다.
그 에스키모 일가와 여름 한철을 보내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대학을 졸업한 후, 야생동물 사진가
다나카 고조 씨의 조수로 2년간 일을 한 후 1978년 알래스카 대학 야생동물 관리학부에 입학하여
알래스카의 대 자연과 야생동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사진 작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1986년 러시아 캄차카 반도 쿠릴호에서 취재 작업을 하던 중 불곰의 습격으로 사망했다.
그는 쿠릴 호반에 친 텐트에서 자는 중이었고 그의 나이 43세였다.
이런 불곰은 그곳에선 수시로 만나는데, 마취총이나 위협하는 총을 쏘거나 하면 가 버린다고 한다.
아마 그가 잠이 깊이 들었을 때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었나 보다.
한동안 그의 마지막 사진이라고 해서 떠돈 사진이 있었는데( 텐트 안으로 들어오는 곰을 찍은 것이다) 나중에 그게 합성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 책은 그가 쓴 책 중의 하나인데, 알래스카의 동물과 식물, 사람들의 모습을 절제된 분위기로
아름답고 안타깝게 보여준다
책에 있는 사진을 폰으로 찍었는데 형광등 빛이나 접힌 책 때문에.....
그는 곰 사진도 많이 찍었다. 특히 어미와 함께 있는 어린 곰들을 많이 찍었는데....
며칠을 가야 마을이 있는 멀고 뚝 떨어진 허허벌판에 일인용 텐트를 치고 참 많이도 지냈고, 그런 곳에서 곰이나 이리도 많이 만났는데.....
카리부의 여행,
헬리콥터가 알래스카 북극권 5월, 그를 내려 놓으면 다시 그 헬리콥터가 올 때까지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카리부의 여행을 기다리며 헬리콥터를 기다려야 한다.
남쪽 삼림지대에서 월동한 카리부는 수십 마리, 수백 마리씩 떼를 지어 1천 킬로미터나 되는 여로를
거쳐 북극권으로 모여든다. 여기서 새끼를 낳고 마침내 거대한 무리를 이루어 북극의 들판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남쪽으로 여행길에 오른다.
그는 그 모습을 사진 찍기 위해 그곳에 혼자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없는 길로 가는 그들을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 한 달 동안 그곳에서 혼자 지내며 그들을 기다리다 찍은 사진
야영을 하며 연어를 구워먹는 작가 연어를 손질하는 아낙, 에구.... 빛이 비쳐서...
가을이 되면 인디언 여인들을 숲을 헤매며 과일을 채집하고 에스키모포테이토를 모으는데, 흙을 꼭꼭 디뎌가면서 쥐구멍을 찾는다. 쥐는 겨울에 대비하여 에스키모포테이토라 불리는 새끼손가락만한 뿌리를 저장해 놓는데 그것을 찾는 것이다. 여인은 구멍에 손을 넣어 파 거기에 있는 포테이토 중 반만 꺼낸다. 그리고 자기 주머니에 있는 생선 말린 것을 그 옆에 놓아둔다.
왜? 라는 작가의 질문에 여인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는 얼굴로 가만히 쳐다본다.
얽히고설킨 생명의 결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
그들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그것에 감사해 하며 그 속에서 함께 살 줄 아는 마지막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얼마 전에 어느 아이가 선물로 준 책인데 어제 비로소 꼼꼼히 읽었다.
다 읽은 다음에 감사 인사를 하려 했지만 참을 수 없어 읽는 도중에 해 버렸다.
그 아이가 그렇죠? 그렇죠? 그러니까 알래스카 가셔야 한다니까요~ 이런 문자를 보냈고.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할 때 영하 30도 되니까 눈동자가 얼던데 거기는 영하 50도에서 60도래
했더니
ㅎㅎ 눈동자가 언다는 말 정말 생생하네요~
그러더니 또 한 마디 했다.
그 사람 참 그 사람답게 죽은 것 같아요.
...................
좋은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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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이시형 옮김, 청아출판사)
나이가 들어서 뭘 잊어버리는 게 어느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 하더라도, 아주 감동적으로 읽고 간단히 적어 놓기까지 한 책이나 영화의 내용을 거의 잊어버리는 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읽고 좋았던 책이나 보고 좋았던 영화를 기록해 놓는 일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지난 일기장을 가끔 보면 좋을 때보다는 답답할 때, 슬플 때 쓴 것들이 많아서 어떤 때는 지난 일이라 하더라도 또 다시 분통이 터지기도 하고 다시 마음이 답답해지기도 한다.
하도 서글퍼서 어떤 공책은 확 버리기도 했는데....
힘들다고 쓴 글들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신세한탄으로 끝나거나 나열이거나 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더 답답함을 느꼈던 것 같다. 스스로에게.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기록>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놀라게 되고, 인간의 가치나 가능성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얼마 전 어떤 책에서 '내가 그런 사람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것은 너무나 놀랍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며 세 사람의 이름을 거론한 걸 읽었는데 두 사람은 잊었고 그 한 사람이 빅터 프랭클이란 건 기억한다.
바로 이 사람.
이 사람은 빈 대학의 신경정신과 교수이며 미국 인터내셔널 대학에서 로고테라피라는 정신의학법을 가르쳤다. 정신요법 제 3학파라 부르는 로고테라피의 학파를 창시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빈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고, 3년 동안 무려 네 번이나 수용소를 옮기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나온 사람이다.
수용소를 옮긴다는 것은 '이번에는 정말 가스실이겠지?' 이런 공포를 네 번이나 (하긴 수용소에서의 생활이 그런 두려움의 연속이긴 했지만) 겪었다는 뜻인데.
그런 속에서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고 또 삶의 품위를 잃지 않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지킨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서 절망에 빠져 혼란으로 미쳐가는 동료들에게 끊임없는 상담을 해 주며 삶의 의욕을 부추키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이 책에 기록되어 있다.
명백하게 몰상식한 이런 시련 속에서도 더 큰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지 않으면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북돋아 줄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산다는 것은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이 사람의 생각이었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떠한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자주 인용한다.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이 철저히 박탈당하고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뿐인 수용소에서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능력을 보여준 사람들이 분명히 <많이>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이 책은 그 기간의 세세한 기록이다.
그 중에 한 부분만.
-우리는 어둠 속에서 큰 돌멩이를 넘고 커다란 웅덩이에 빠지면서 수용소 밖으로 난 길을 따라 비틀거리며 걸었다. 호송하던 감시병들은 계속 고함을 지르며 총의 개머리판으로 우리를 위협했다 .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 때문에 누구든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남자가 갑자기 속삭였다.
"제발 마누라들이 수용소에 잘 있으면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을 몰랐으면 좋겠소"
그 말을 듣자 아내 생각이 났다.
하늘에는 별들이 하나씩 빛을 잃어가고 아침을 알리는 연분홍빛 짙은 먹구름이 뒤에서 서서히 퍼져가고 있었지만 내 머리 속은 온통 아내 모습뿐이었다.
그녀가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녀가 웃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진솔하면서도 용기를 주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그녀의 모습은 밝게 빛났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시를 통해 노래하고 그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여전히 더 말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게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난 어려운 병에 걸려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언젠가 누구에게나 있을 그런 상황.
병의 고통도 무섭지만 이별의 고통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무지를 견디는 일은 더욱 힘들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란 것은 이렇게 여러 방향으로 길이도 모르게 깊이도 모르게 무한 가능성을 또한 가지고 있다는 것.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3년 간 대책없는 공포와 고난 속에서 지내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그의 부모, 아내, 아이들이 모두 가스실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다시 빈 대학에서 미국의 대학에서 강의하고 환자를 치료하며 지내다 92세에 죽는다.
이 책은 분명히 어두운 책이지만, 치열하고 강하게 살아내며 그 삶의 의미를 타자에게까지 확산하고자 노력한 사람이 쓴 아주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글이라서 그런지 한숨이 나오면서도 굉장히 안정적으로 읽힌다.
재미있다고 말하는 건 이상하지만 아주 흥미롭고 의미있는 책이다.
뒷장에는 로고테라피라는 요법에 대한 설명이 요약해 나오는데 아주 인상적이다.
힘이 되는 말이 많다. 특히 나이든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옥규야~
항상 좋은책 소개해줘서 고마워.
근데 요즘 애니팡 하느라구 책을 안읽게 된다.ㅎㅎ
니가 소개해준 책들 수첩에 적어놓긴했어.
책방 가게 되면 살려구~ 근데 책방을 안가게 되네.
<빨갱이 바이러스> 박완서
박완서 선생님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뵌 것은 돌아가시기 두 해 전 겨울, 충무에서였다.
장애인 전문 병원 설립을 목표로 하여 만들어진 푸르메 재단에서 주최한 장애 학생 겨울 캠프에
수화 통사자로 참가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푸르메 재단에 돈도 기부하시면서 그 재단을 돕는 홍보대사 역할을 하시는 듯 하였다.
제일제당에서 운영하는 굴 공장을 견학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내가 그분 옆에 있게 되었다.
그곳은 위생 때문에 그런지 아주 추웠고, 그리 두텁지 않은 옷을 입은 여자분들이 흘러내리는 물에
연신 굴을 씻는 일을 하고 있었다.
보기가 민망스러울 정도로 추웠다.
선생님이 소근대는 말투로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 분들한테 구경하기도 말 걸기도 죄스럽네요 하셨다.
선생님은 무척 야위셨고 얼굴빛도 좋지 않기는 하셨지만, 강단이 있어 보였고 그래서 건강하게 오래 사실 줄 알았다.
얼마 있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 놀랍고 안타까웠다.
바로 그 전 해에 박경리 선생님 장례의 장례위원장을 맡아 큰 일을 해 내셨는데......
내가 자유롭게 독서를 하게 되었던 1975년 즈음에는 또 하나의 한국문학 부흥기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각종 월간 문예지가 튼실하게 발행이 되었고, 그것을 통하여 많은 작가들이 시와 소설을
발표하였다.
그때 정기적으로 나오던 월간문예지만 해도 여럿이었고, 각 잡지마다 색깔이 달라서 흥미로움은 배가되었다.
친구들이 생일 선물로 문예지 연간 구독을 해 주던 시기였다.
그때 문학사상에 그분이 <도시의 흉년>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셨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나목>이라는 자전적 소설로 등단을 하신 선생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쉬지 않고
작품을 발표하셨고, 거의가 자전적 내용을 골자로 한 집요한 소설쓰기를 계속하셨다.
칼칼하고 깔끔한 성미가 글에 그대로 드러나는 글들이었다.
가끔은 반복되는 주제나, 너무나 요설체인 그분의 글투가 싫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거의 빼놓지 않고 읽었던 듯 하다.
60이 넘으면서 이어지는 그분의 글에는 이미 진정하고 간절한 주제의 무게가 실려 있었고,
어떤 글은 읽고 난 후 소설의 짜임새 있는 구성과 내용의 깊이에 대한 감동으로 책을 가슴에 안기도
하였다.
그런 소설은 많지만 그 중에 <환각의 나비>라는 소설이 기억에 남는다.
이분은 소설쓰기의 어느 단계를 넘었구나 이런 느낌을 받았다.
- 죽을 때까지 현역작가로 남으면 행복할 겁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선생님은 생각하신 바대로 그렇게 사시다가 가셨다.
돌아가신 후 나온 유작집이 <기나긴 하루>다.
그 책에 실린 소설 중 하나가 <빨갱이 바이러스>다.
끔찍한 유년의 기억을 가슴 속에 묻어 두고 평범하게 사는 여인이 시골 고향에 왔다가 우연히 큰 비에 차를 놓쳐버리게 된 서로 모르는 세 여인을 만나게 되고, 사람이 없는 자기 집에 데리고 와 하루를 재워주며 나누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세 여인, 아니 네 사람은 우연히 만났고, 앞으로 우연히라도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부담 없는 관계를 바탕으로 세 여인은 밤에 자기 가슴 속에 묻은 얘기를 한다.
'소아마비', '보살님', '뜸'
소아마비 여인의 고백
소아마비 여인은 경박하다고 느낄 정도로 밝고 통통 튀는 성격인데, 실은 자기가 소아마비가 아니고
아파트 3층에서 뛰어내려서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자기를 너무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그것이 사랑이 아니고 집착이자 의처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혹과 폭력이 난무하는 가정, 그런 강박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여인이 뜻밖에 위험하게 된 상황에서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상해와 장애를 입고 난 후 남편이 안심하게 되었고, 그 여자는 자유롭게 된다.
그런데 그 후 여자는 자기에게 정말로 그런 끼가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가정도 잘 꾸려가면서 한편으론 다른 남자들과 사랑의 행각을 분방하게 벌이며 자유를 느낀다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였다.
듣고 있던 여자는 속으로 생각한다.
<X만도 못한 년, 하는 쌍욕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우린 다들 소아마비쪽으로 시선과 몸을 집중하고
너무 붙어앉아 있었다. 그의 고백을 솔깃하게 즐긴 게 아니었을까> 이렇게.
<'뜸'의 이야기>
이것은 뜸 자국이 아니에요, 남편이 담뱃불로 지진 거랍니다.
우리는 흔한 보통 부부였어요. 그런데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기를 낳고 보니 뇌성마비였어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남편은 아기를 내다버리라고 종주먹을 대며 난리를 쳤어요.
견디다 못해 점찍어둔 입양기관 앞에 버리고 왔지요.
그 후에 두 아이가 태어나요. 네, 모두 정상이고 아주 예쁘죠.
행복이 이런 것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고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가 고맙고 달기만 하더라구요.
절대로 입밖에 낼 수 없는 일이었고, 그런 일은 우리 인생에 없었던 일로 생각하며 살았어요.
우리의 행복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요.
그런데 말예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불행이 오지 않을까 이런 방정맞은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겠는 거예요.
그래서 몰래 그 버린 아이를 찾아나선 거예요.
생각보다 쉽게 찾았죠. 그 기관에 정기적으로 다니면서 난 카톨릭 영세도 받고 봉사자가 되어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지만 모든 봉사자들에게 똑같이 환한 웃음을 짓는 천사 같은 아이를 보면서 안정을 찾게 되었죠.
그런데 그렇게 안정을 찾아가는 나를 보고 남편이 참지를 못하는 거예요.
술만 취하면 폭력을 휘두르면서 아이를 어디다 갖다버렸느냐.... 하면서 이렇게 나에게......
내 상처는 몸 밖에 있지만 남편의 상처는 몸 안에 있다는 걸 느껴요.
우리 둘 다 고통을 견디기 위해선 상처가 필요한 사람이에요
아이에게 가는 걸 남편에게요? 절대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이는 약해요. 그렇게 되면 버린 아이도 키운 아이들도 지키지 못하게 되지요.
'보살님'의 고백
보살님은 한마디로 팔자가 좋은 여자였다. 여유있고 넉넉한 인품의 남편과 쾌적하고 아늑하게 살던
사람이었다. 남편이 죽고 텅 빈 집에서 다른 나라로 발령이 나서 식구들을 데리고 떠난 딸의 큰아들만 데리고 지낸다.
그런 손주를 위해 독과외 선생을 두고 평화롭게 지내던 어느 날. 아들뻘도 안 되는 과외 선생과 티브이를 보다가 무서운 장면이 나오자 그의 품에 안기게 되고, 그 상황이 주는 뜻밖의 황홀함에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이론이 들어갈 수 없는 그런 설레임에 그저 행복을 느끼며 그와 장을 보고 깔깔대며 즐거움을 만끽한다.
집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할머니를 찾아나섰다가 물이 불어 깊어진 개울 바위 틈에 빠져 죽은 손자의 주검을 발견하게 된다.
통곡하는 그 여인에 대해 가족들은 위로만 할 뿐 그 누구도 의혹을 갖지 않는다.
그 후 돈을 요구하는 과외 선생의 말을 듣는 순간 자기의 현실이 어떤 것인가를 느끼게 되고,
그의 안에서 물욕과 정욕이 비기고 텅 비는 걸 느끼게 된다.
<고뇌 끝에 암자를 이룩하고 기도를 드리며 살고 있지만 내 죗값이야 어디 가겠어요.
사실은 그러지도 못해요. 아직도 가진 게 꽤 되니까요>
세 사람의 고백은 모두 입에 담을 수 없는 망칙하고 천박하고 무섭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개인이 선택한 죄였다.
그러나 그들은 말한다.
완전범죄였는데, 말해버리고 나니 되게 개운하네요. 살 것 같아요
이런 말들을 들으면서 그녀는
<문득 내 안의 상처가 남의 상처와 만나 하나가 되려고 몸부림치는 걸> 느낀다.
하지만 나에게도 무슨 <말>을 하라는 무언의 압박에 나는 말할 게 없다는 말로 자리를 피한다.
<나>는 마치 그들의 유도심문을 빠져나온 것처럼 아찔하다.
시멘트 바닥처럼 단단한 저 밑에 숨겨 놓은 나의 비밀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전혀 나 개인의 죄도 아니었는데.....
하루는 이북에 속했다가 하루는 이남에 속했다가 자반뒤집기를 하는 소위 38선 부근에서 그녀는 태어나 자랐다.
집안에는 역사의 소용돌이도, 위대한 혁명도 한낱 가문에 미치는 재앙으로 여기는 할아버지가 있었고,
서울 가서 전문학교까지 나온 삼촌이 있었다.
그녀는 막연하지만 그런 삼촌의 옷자락에서 막연히 동경하게 된 교양인의 냄새를 맡는다.
6.25 에 신혼의 삼촌은 인민군으로 나간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다.
집안 식구들은 삼촌에 대해 입에 담지 않았고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느 날 무슨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오줌이 마려워서인지 잠이 깨었는데, 무서움을 참으며 툇마루에
나간 그녀는 마당에 아버지와 엄마와 삼촌이 있는 걸 보게 된다.
아버지와 엄마와 삼촌은 싸우고 있었고, 아버지의 손에는 삽이 들려 있었다.
이런 동기간은 없는 게 낫다고 하면서 죽여버리라는 엄마의 말에 아버지가 삽을 높이 쳐들었다.
말을 했지만 정말 그럴 줄은 몰랐던 엄마는 놀라서 아버지에게 매달렸고, 그 순간 나는 얼굴을 가리고 비명을 삼켰다.
실제로 그 장면을 보지 않았으면서도 나는 삼촌의 몸이 두 동강이 나는 장면을 본 것 같은 기억을 갖게 된다.
어디가 현실인지 어디가 꿈인지 구별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집에는 기이한 평화가 찾아오게 된다.
그 이후로도 이북 땅이었다가 이남 땅이었다가 결국 이남 땅으로 된 상황에서, 체제를 택해 이북에 남은 식구나 친척이 없는 집이 하나도 없는 그 마을 사람들은 시달리게 되고, 마을은 피폐해지게 된다.
그녀는 말한다.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못한 골육상잔의 기억은 돌파구를 찾지 못해 나하고 한 몸이 되었다.
(삼촌의 몸이 묻혀있다고 생각하는) 그 마당과 나의 입은 동일하다. 둘 다 폭력을 삼켰다.
폭력을 삼킨 몸은 목석같이 단단한 것 같지만 자주 아프다-
내가 풍기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했죠?
하는 내 물음에 '소아마비' 여인은 말했다.
우리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뭘~~
그런 말을 들으면서 그녀는
그렇지, 그들은 그렇지. 그러나 <아직> 어떤 상처하고 만나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상처를 가진 내 몸이 대책없이 불쌍하구나 하고 느낀다.
이념 갈등이 동기간의 골육상쟁으로 치달은 당시의 기억이 '빨갱이'라는 단어에 응축되었고,
그것은 아직도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나의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인식하기 전에 각인된 원죄의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 지난 지가 그리 오래 되었고, 이제는 헤어진 가족들이 살아서 만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는 지금에도 고착화된 분단체제가 한국사회의 전진을 얼마나 왜곡해 왔는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종북이라는 낙인어가 여전히 횡행하는 현실을 보건데 이런 상황은 진행형이라는 것을 아프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적인 방식으로 그 병인을 영구 제거하자는 것이 이 소설의 취지이기도 하지만,
다음 세대를 향한 선생의 간곡한 당부도 담겨 있는 것이다.(신형철 해설 참조)
공동선이라는 것은 정말 공염불일까?
정치는 국민의 의식을 넘을 수 없다 하는데,
이런 분단의 고착을 유지하는 데 힘을 보태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서운 낙인을 눈깜짝하지도 않고 찍어버리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정말 콩 한쪽도 나눠먹는 것이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일까?
더 심하게 양극화 되어가는 경제적 차이와 더불어, 완강하게 외곬으로 빠져드는 생각의 완고함이 두려워지는 건 나만일까?
육십이 코 앞인 나는 마치 사춘기 입구에 들어서서 세상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시작하는 아이처럼
많은 것이 혼란하고 이상하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직도 삽을 들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
책을 보면 가만있겠어요?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
11월8일에는 헌금 특주도 있어서 연습도 해야하고 하루가 너무 짧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