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이 방은
짧게 스쳐간 생각이나
텔레비전을 보며 느꼈던 감동이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얻은 깨달음 등...
우리 삶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귀한 것이 분명하나
자칫하다 보면 놓쳐버리기 쉬운 일상의 한 귀퉁이를 잡아두는 메모장입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도 좋고
자기의 기억 창고에 저장을 하기 위한 암호같은 독백도 좋습니다.
그저 메모를 하듯이 편하게 쓰시면 됩니다.
갈수록 시간은 더욱 빨리 달려만 가고
우리 머릿 속 기억 주머니의 끈은 어느새 느슨해져
듣고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을 제대로 간수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떠오른 생각을 어떻게 하면 오래 잡아둘 수 있을까?.
언뜻 스쳐가는 좋은 생각들과
아주 짧은 순간에 얻은 깨달음을 기록할 수 있다면
우리 삶에서 남긴 큰 이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생각,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허망하게 잊혀지지 않도록
문득 떠오르는대로 이 메모장에다
스쳐가는 단상들을 꽉 붙잡아 두시기 바랍니다.
전차에서 생긴일 - 11. 안광희 2005.12.08 11:47:09
14기 동문중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박찬정동문의 글을 <나도작가>에서 찾았습니다.
그동안 14기의 주필중 한명일 정도로 만만찮은 글솜씨와 재치있는 내용등으로 선배, 동기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있다 알고 있습니다.
팬들도 많이 있다고 하는데, 이번 내용은 <나도작가>중 <통학 기차간 연애담이나 에피소드>에 올려진 것입니다.
내친김에 박찬정동문의 글도 한번 찾아 읽어보시고 외국에 살고 있는 동문들의 그 사는 모습도 들여다 보면서
격려의 말과 박수도 함께 보내주세요.
14. 박찬정 ( 2005-09-02 01:01:44 )
전차에서 생긴 일에 남자가 낑겨 있는 것 까진 맞는데 연애담은 아닌 얘긴데,
4년전 러시아워에 야먀노테센을 탔는데 무지하게 혼잡했지요.
어찌어찌 비집고 1차선 (앉은 사람의 바로 앞에 섬) 점거.
마침 내 앞에 앉은 늙수구레한 셀러리맨(으로 보임)은 졸고 있었는데,
전차가 흔들리며 쏠리는 바람에 내가 중심을 잃고 앞사람을 덮쳐버린겁니다.
근데 하필이면 그 아저씨의 놋요강단지 같이 벗겨진 대머리 정수리에 내 입술자국이 찍힌거여요.
휘청한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어서 모두 자신을 수습하느라 여러사람의 시선을 받진 않았고,
정작 본인은 졸고 있던터라 어떤사태가 벌어졌는지 파악을 못하고 있는것같더라구요.
누가 휴지라도 건네주며 가르쳐줄까봐 천신만고 확보한 1차선 입석을 포기하고 딴곳으로 비집고 들어가
찝찝한 입술을 닦고 또 닦았습니다.
............................찬정아, 밤새 찾아서 얹어 놨다. 혹시 누가 찾아 올려 놓을까봐 은근히 신경 쓰고 있는건 아니지? ㅋㅋ
?
ㅋㅋㅋ
광야온이 이걸 찾아 왔네요.
언니 만화로 보니 더 새롭고 재밌네. ㅎㅎ
역쉬 천재 소녀 ~
찬정아 ~
니 글은 참 쫀득하고 감칠맛이 있어.
좋은 글은 힘 빼고 과장하지 않고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문장은 가급적 간결한 것이 좋고...
너무 지나친 수식이나 길게 늘인 문장은 임펙트가 부족하지.
너도 같은 생각인거지?
앞으로 더욱 좋은 글 기대할게.
니가 찾기 어려운 거 광야 온이 찾아왔네.
고맙제?
이걸 보믄 그 아그 ㅇ ㅈ ㅎ 는 뭐라고 할까?
정모에서 만나믄 내가 물어봐야 쓰것다.
벌써 기대가 되누먼.
아그들 보고잡다.
ㅇ ㅈ ㅎ 이 누구여?
내가 혼내 줄께.
칫~!
갸 힘쎄냐?
나보다 쎄냐?
나보다 크냐?
.
.
.
.
앗~~~!
클났다.
갸가 갸냐?
에구 도망가자.
(난 세상에 태어나 한갑자가 지날동안 나보다 힘쎄고 큰 ㄴ은 첨이여.
낼모래 만나믄 나 팰지두 몰러.....광야~! 니 치마자락에 나 좀 숨겨주라.)
에고~ 드디어 광희가 나타났네.
이렇게 가물에 콩나기로 나타나니 인기 만점 ~ ㅎ
작전 아녀?
용캐 잘 찾아냈네.
첨에 찬정이의 그 글을 읽고 혼자 킥킥대며 웃었던게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유수와 같은거 맞지?
하늘이 회색빛 ~ 날씨도 꾸무럭 ~ 빨래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어쨌거나 커피가 더 땡기는 날이니 오늘은 이 방 덕에 그냥 웃으며 커피나 또 마실란다.
모두들 보고 싶네 그려~
광희 언니
그 만화가 벌써 십년전 것이네요.
글 보다 만화가 더 재밌어요.
난 갸 땜에 쫄아 있어요. 저번참에 맞을 짓을 한번 한데다가
또 찝쩍거렸으니 갸가 가만히 있겄어요?
내 코도 석자지만 순호 언니도 큰 일이예요.
싸우는 시엄니보다 말리는 시누ㄴ 이 더 밉다잖아요.
춘선 언니
저도 글을 써놓고 보면 그런 점이 불만스러운데 실력이 미흡하여 잘 안됩니다.
언니가 지난번에 봄날에 올려놓고 수정도 하고 퇴고한다고 하셨는데
저도 여기 올려놓고 수 없이 고치지요.
주옥같은 가르침 고맙습니다.
대전에서 뵙겠습니다.
찬정아~그런 일이 있었다고!!!
웃지 않을 수가 없네.
광야는 역시나야!!!
오랜만에 종도 연주하던 날 얼굴 봤지롱.
정모때 꼭 온다지요.*^*
ㅇㅈㅎ 걔가 무진장 바빠요
운영위 회의를 비롯 시교육청 출장에....................
그담은 말 못해*^*
자고로 길이 아니면 가돌 말고
말이 아니면 할덜 말라던데
모두가 예스할 때도 예스 하고
모두가 노 할 때도 예스 하는
우유부단한 성격탓에 mcn
널뛰듯 하며 느는 이 거짓말이요
임기웅변으로 김씨들 속에서
애잔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사는 가엾은 후배를
틈만 나면
섹쉬함을 질투하시고
풍요로움을 탓하시니
이 성냥팔이 소녀
이번 대전정모전에는
졸업하지 않은 53기라도
데불고 가든
해야지
서러워 서러워
눈물이 나와서
더는 흑 흑
글도 몬 잇겠습니다.
젊은 애들의 대화는 주로 자신 이야기를 하고,
나이든 사람 특히 아줌마들은 자신 이야기보다 남 이야기를 더 많이 한다고 합니다.
가족, 친구, 이웃사람 얘기는 물론 얻어들은 얘기, 하다못해 드라마 얘기까지
죄다 자신의 인생에서는 살짝 비켜간 사건을 이야기의 소재로 삼는다는군요.
저도 나이가 좀 든 축이고 아줌마니까 남 얘기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자들의 영원한 도마위 식자재, 시어머니 얘깁니다.
86세의 시어머니에게 치매끼가 있다는 건 제가 하두 떠벌려서 다 아실겁니다.
어제 국민의료보험공단에 노인 장기요양인정신청서를 제출하였습니다.
2주이내에 사회복지사와 간호사가 방문하여 대상자뿐 아니라 가족과도 상담한다 하네요.
그리고 2차 진료기관에서 다시 치매진단을 받아야 하구요.
치매정도 등급을 메기는 기준문항이 있어서 읽어 보았습니다.
신체 능력, 인지능력 등등 여러가지 영역이 있지요.
자세히 읽어보고는 속이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마저 들었습니다.
기준문항으로 보면 울엄니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보행가능, 화장실출입가능, 전화 걸기 가능. 세탁기 조작 가능마저.
예. 아니오 단답형으로는 모든 게 이상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잠깐 만나고 가는 사람은 괜히 생사람 잡는다 하겠지요.
그런데 보행은 억지로 이십보 정도이고, 화장실 물 안내리기일쑤, 수돗물 잠그는 것은 늘 잊어버려 몇시간이고 쏵.
전화는 한번 걸었다하면 대여섯번(금방 걸었던거 잊고 또 걸어)
세탁기 돌릴줄 알면 뭐 합니까? 다 된 빨래를 널지 않아서 며칠씩 통안에 있을 때가 허다한데.
수시로 보고 겪고 전화통화라도 하는 가족이나 형제들 진단으로는 중(中)급정도의 치매라고 하는데
정작 울엄니 본인은 ' 내가 어디가 어때서 ' 라고 하십니다.
재가 요양 보호사가 오는 것도 싫다.
요양병원에도 안 간다.
아들네나 딸네 집에서 같이 사는 건 죽기보다 싫다. (그건 오히려 잘 된 일입니다)
'뭘 어쩌자는 건지 참. 에이 ~ 나도 모르겠다 ' 그러다가도 걱정이 됩니다..
신체 건강하고 정신도 건강하다면 백세를 산다한들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장수하는 것이 복인가 재앙인가 그런 얄굿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남편이 이런 슬픈 얘기도 했어요.
그전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무척 슬퍼서 많이 울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어머니 보면 돌아가셔도 눈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네요.
에효효...
울엄니두 션치 않으시면서두
그런 상담원이 오면 먼저 인사까지 하고
더 자신을 치장해 멀쩡해 보이시니
걸릴일이 없다가두
주소,전화번호,요기서 걸리고
5곱하기 7은 몇이예요? 응! 35지
500원짜리가 7개있으면얼마예요? 응~! 35원
요기서 걸려서 3급혜택 받으셨었어.ㅉㅉ
어쩐다냐....찬정이 시엄니도 흔한 노인성치매 신가 보네.
치매노인 본인은 시간이 갈수록
숨쉬는 생명체일 뿐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시는데
우리 친정아버님과 시아버님 두분도 당뇨성 치매셨는데 엄청 진행이 빠르시더라.
두분다 칠십대 후반에 발병해서 2년여 고생하시다 팔십에 가셨는데
팔십이면 우리도 십여년세월뒤면 그 나이가 되네.
사시는동안 하시는 사업으로 한가락하시면서 나름대로 성공적으로들 사셨지싶었는데
말년에 당뇨성치매로 무너져내리는걸 보면서
인생사 허망하더라.
그렇게 내 부모님들이 가시는 길을 보았지만서도
어쩌다가 문득 생각은 나지만 ........보통은 잊고있고 생각을 안하지.
요즈음 깜빡 깜빡 건망증이라고 편하게 생각하면서도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젠 내 문제가 되는것은 아닌지...........................
참.....장성노인요양병원 화재도 치매노인이 방화했다더라
치매....어쩌면 시한폭탄을 곁에 두고사는 위험군이지 싶은데 ...사회적으로도 큰 걱정거리이다.
산이 할아버지는 심장병은 오히려 행복한 병이라는 생각을 하네.
91세 되신 시엄니랑 결혼 초부터 살다보니 이젠 아니다 싶어져요.
내 나이가 얼만데!!!!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네요*^*
그저 가실 때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가시기만을 바랄 뿐예요.
요양병원 화재로 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는데 그 자식들은 얼마나 가슴이 아플꼬!!!
남의 일이 아닌 나의 미랠 보는 듯 참 슬퍼지는 나이네요*^*
은희언니~형부께서는 퍽 다행이죠!!!
항상 건강하시기만을 빕니다.
노인 모시고 사는 사람들 힘드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요즘 우리 어머니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제가 같이 살지 않으면서도 그렇습니다.
돌아가시고 나면 모시던 며느리든 딸이든 퇴직금조의 톡톡한 보상이 있어야 되지않나 그런 생각도 들고요.
그냥 가족이니까 아니믄 팔자려니하고 밀어붙이기로는 서로 힘든 노릇이예요.
일본의 상속제도는 배우자 1/2 이고, 그 나머지 가지고 아들 딸 공평하게 나누는 거로 알고 있어요.
우리는 일단 형제간 삿대질해가며 쌈박질해 보다가 재판소까지 가게되면 그렇게 분배되는 집이 많은데
그 사람들은 뭣이든 와리비끼문화라서 계산은 딱 부러지게 합니다
일본인 친구가 홀로 된 시아버지를 계속 모시고 살았어요.
그 나라 노인들은 같이 살아도 우리처럼 가족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독립적으로 합니다.
병원 예약도 혼자 해서 혼자 가고, 입원을 해도 가족이 옆에 붙어서 간호 안 해요.
자신이 필요한 소소한 물건은 스스로 구입합니다.
물론 자신이 받는 연금에서 매달 생활비도 꼬박꼬박 주부(며느리든 딸이든)에게 건네지요.
주는 쪽도 받는 쪽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유산이 좀 있어서 나누는데
아들 둘, 딸 둘 그리고 모시고 산 맏며느리까지 넣어서 1/5씩 나누더라구요.
아버지가 생전에 며느리에게 신세졌기 때문에 그 며느리의 몫을 따로 쳐준거래요
그걸 보고 야박한 듯 해도 그것도 괜찮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전에 테레비 프로에서 봤는데 전직아나운서 누구는 자신이 장남인데 혼자 남은
어머니 모시는 사람에게 부모님 재산 다 주겠다고 했더니 막내 동생이 모시겠다고 했다데요.
그러면서 ' 난 어머니가 좋아서 같이 사는거지, 재산때문은 아니라 ' 고 토를 달더라나요.
우리나라도 이제는 법으로 상속분이 정해져있어서 쌈박질은 안해도 되더라.
단지 우리나라 정서가 그걸 이행안한다고해서 법원까지 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
살아 생전 수고한 분에 대해서는 그 가족의 정서에 따라 멋대로고!!!
아들 며느리가 아무리 헌신적으로 잘했어도 당사자 어른이 맨날 불평과 험담만 한 경우에는
멀리 사는 형제들의 눈에는 아주 못된 자식으로 되어 있더라구.
그리고 아무리 포장을 해도 돈앞에서는 욕심뿐인데 그걸 포장하느라 장남이 잘했느니 못했느니하면서 자기들 합리화를 시키더라구.
장남의 수고를 인정해버리면 자기 분이 줄어들까 싶은 모양! ㅎㅎㅎ(사실 아닌데)
뭐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지들이 욕심쟁이니까 상대도 의례 그러려니 하는거지.
세상일은 법이고 뭐고 그냥 나의 몫만으로 인정해버리는 게 제일 속 편해요.
받은 만큼 누리는만큼이 내 복이려니.....................................
사실 재벌도 아닌 바에야 몇 푼 더 상속받느니 안보고 사는 게 훨씬 속편하고 좋아요.
계산들 잘 했으니까 앞으로는 큰 형이라고 무리해서 뭘 더 잘해 줄 필요도 없으니까요.
설사 본인이 그럴 마음이 있다고 해도 마누라를 설득할 여지는 전혀 없거든요.
지나간 것만으로도 평생 할 말 없는데.ㅎㅎㅎ
이제는 노인문제가 부모님이 아니고 우리의 문제로 다가서네요
97세로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를 겪으면서 난 오래 산다는 것이 무척 겁이나는데 남편은 아닌 모양이고.......
한국남자들은 자기가 직접 수고하는 일이 별로 없어서 그런 모양인데
자식들 폐안끼치려면 암튼 내 남은 인생은 남편 수발로 끝날 모양이에요.
사람 앞날 누구도 예측 못하는 거고 나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은
제 정신 가지는 동안 만이라도 자식들에게 잘해두자 싶네요.
노인 장기요양인정 신청 그 후 이야기
어제 오후에 국민의보에서 어머니를 진단하러 나왔어요.
느닷없이 치매진단하러 왔다고 하면 역정부터 내실 것 같아
' 어머니 ! 그게 아니고 어쩌고 저쩌고 이런 저런 혜택이 있고, 거의가 다 꽁짜고 ~ '
구라까지 쳐가며 나와 시누이가 어머니를 설득하며 협조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기대하긴 어려웠어요.
모두가 공모해서 자신을 바보 등신으로 못 박아 놓으려 한다고 생각하시거든요.
할머니 이름이 뭐지요? 술술
나이는? 술술
집 전화번호 아세요? 술술
집 주소는? 부산 영도구 보건소옆 최 ㅇㅇ 라구 하면 편지가 다 옵니더
(엉뚱하게 40년쯤전에 살던 집을 찍어대며 질문과 어긋났습니다.
500원짜리 동전을 내놓으며 이거 얼마예요? 500원
500원짜리 동전을 일주일동안 모으면 얼마가 되지요? 700원
여기서부터 완전히 엇나가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내가 뭐든지 다 할줄 알고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인데
그런 시답잖은 말 시킨다며 빨리 가서 너희들 볼 일이나 보라고 역정을 내십니다.
(대답이 궁하거나 기억이 안 나거나 잘못된 일이 발각되면 누구한테든지 가라고 합니다)
의보 조사원은 그대로 물러나지 않고 요령껏 상담을 다 마쳤습니다.
그 후 다른 방으로 옮겨 가족 상담
나는 며느리니까 그래도 어머니 인격을 생각해서 못 하는 말도 조카와 시누이는 아주 적나라하게 까발리데요.
그 착한 조카와 무던한 우리 시누이가 말이예요.
치매가 얼마나 주변 식구들을 힘들고 지치게 하는가 새삼 느꼈습니다.
남 얘기가 아닙니다. 언젠가 나에게 닥칠치도 모르는 일입니다.
신체, 정신 말짱할 때 가고 싶은 데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하고 싶은 일 하며,
마음껏 사랑하고 삽시다. '나중에 하지' 미루다가 건강을 잃으면 꽝 입니다.
신체, 정신 말짱할 때 가고 싶은 데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하고 싶은 일 하며,
마음껏 사랑하고 삽시다. '나중에 하지' 미루다가 건강을 잃으면 꽝 입니다.
그래두 찬정이엄니는 대단하신거여.
제주여행 때문에 한달만인 지난주일에 탁아방
갔을 때 오랜동안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봉사하던 분의
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안나서 물어보지도 못하고
슬그머니 다가가 이름표보고 생각났단다.
에효효효
찬정이 말 맞아!!!
그저 팔다리 성할 때 돌아다니자고*^*
수노언니처럼!!!
우리 6기도 50주년 2019년까지 기다리다
입 돌아가고 관절 아프고해서
참석 못하는 친구 생길까봐
입학 50주년으로 2016년 하와이 가기로 했단다.ㅎㅎㅎㅎ
?
내가 손을 잡아 주마
삼 년전 한창 집을 짓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나는 집터의 한갓진 곳을 골라 흙을 파고 돌을 골라내어 꽃씨를 뿌렸다.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지는 잡초를 제압하려면 무엇이든 심는 수밖에 없었다.
해외여행 중 씨앗가게에서 소량 포장된 씨앗들을 사온 적이 있다.
귀에 익은 꽃 이름이 아니긴 해도 겉봉의 꽃 사진을 보니 알 것도 같았다.
제 삶터를 떠나 이국 멀리 온 씨앗은 낯가림도 없이 그 해부터 줄기가 튼실하고, 꽃을 흐드러지게 피웠다.
자재가 이리저리 쌓여있는 건축 공사장이지만 환하게 핀 꽃을 보면 마음이 사뭇 즐거웠다.
그 다음해에는 따로 씨를 뿌리지 않았어도 더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무성하게 자랐다.
다복솔처럼 소복하게 싹이 난 것을 몇 차례나 뽑아내어도 지난해에 떨어져 땅속에 묻혔던 씨앗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자리를 지켰다.
나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가꾸시던 소박한 꽃밭을 꿈 꾸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 그린 우리집 조감도에는
아기자기하게 과꽃이 피고, 백일홍과 맨드라미가 가득한 꽃밭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되어도 싹조차 틔워 보지 못했다.
예전에 어머니가 가꾸시던 꽃밭은 저절로 되는 듯 보였다.
언 땅이 풀리면 꽃씨를 뿌리셨고, 봄비가 한 차례 지나가고 나면 봉긋하게 싹이 올라왔다.
솎아 내어 옮겨 심어도 제각각 시절에 맞추어 꽃을 피웠다.
그럴듯한 정원도 아니다. 봄이면 마당 한쪽에 돌을 나란히 괴어 꽃밭을 일구지만
겨울이면 우리 형제들이 복닥거리고 노는 마당이었다.
칸나와 다알리아는 맨 뒷쪽에 심었고, 맨드라미 봉숭아 백일홍 그리고 과꽃은 그 앞에,
채송화와 한련은 맨 앞에서 돌에 턱을 괴고 피었다.
비 오는 날 이웃에서 색다른 꽃모종을 얻어와 심기도 하셨지만
어머니의 소박한 꽃밭은 어느 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사할 때 꽃밭까지 들고 다니시는 것 같았다.
칸나와 다알리아는 알뿌리를 캐고, 일년생 꽃은 씨를 받아 두었다가 언제나
키를 맞추어 같은 순서대로 심으셨다.
꽃밭을 머리에 이고 와 살짝 내려놓으신 것처럼.
사월에 첫아기를 낳아 세이레동안 친정에서 어머니의 산 구완을 받았다.
산바라지를 하시면서도 어머니는 꽃씨를 뿌리셨다.
산후조리를 마치고 내 집으로 돌아오던 오월 초순에는 영산홍이 환하게 피었었다.
넝쿨장미가 만발하여 혼자 보기 아깝다느니, 봉숭아가 색색으로 피기 시작한다느니
어머니는 수시로 꽃 소식을 전하셨다. 산 구완하며 안고 어르던 외손자가 아른아른
눈에 밟히는 어머니는 꽃을 보러 오라는 말로 둘러대곤 하셨다.
유월의 햇살이 눈부시던 날 꽃밭에서 갓난쟁이 손자를 안고 찍은 사진 속에는
한련화가 화사하게 피어 있다. 어머니는 외손자가 크는 것을 내내 지켜보지 못하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이사를 가셨다. 봄 꽃 만발한 꽃밭을 이고.
나는 올해도 갖가지 꽃씨를 뿌리고 기다렸지만 지난해 떨어진 씨앗의 새싹들이
꽃밭을 점령해 버렸다. 망연해 있을 즈음 아는 이에게서 떡잎 두 장이 난 작두콩
모종을 얻었다. 배양토가 든 종이컵에 심어져 있었다.
"아! 이런 방법이 있었네."
나는 곧바로 배양토와 모판을 구입하여 한련의 씨를 심었다.
연약한 실뿌리를 흔들지 않기 위해 물을 분무기로 안개비처럼 주었다.
한련은 싹을 틔우고 꽃밭에 옮겨 심으니 꽃을 피웠다.
배양토 모판은 한련을 이끌어 준 손이다. 옮겨 심어 몸살을 심하는 하는 식물도 있지만
땅에 뿌리를 내리기 어려운 조건에서는 모판에 심어 모종하는 것이 발아와 성장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그것이 씨앗뿐이랴.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내 나라를 떠나 외국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는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나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우왕좌왕했다.
기존의 다수 힘에 밀려 어처구니없이 양보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때 나의 손을 잡아 준 이웃이 있어 낯선 이들과 공존하는 힘을 얻었다. 귀국한 후에도
오랫동안 떠나 있은 탓인지 매사에 서름서름했다.
공연히 텃세를 부리며 달가워하지 않는 마을 사람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이끌어 주고 터전이 되어 준 고마운 이들이 있어 자리 잡고 살아 간다.
세상이 각박해져 간다지만 그래도 뿌리치는 손보다 잡아서 이끌어 주는 손이 더 많지 않을까?
내년에는 배양토가 든 모판에 꽃씨를 뿌려 싹을 틔어야겠다.
"얘들아! 너희들 힘에 벅찼구나? 이제 내가 손을 잡아 주마."
이렇게 깊이있게 지나온 시간을 정리할 수 있는 건
지금 있는 곳과 보내는 시간이 그럴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런 것을 지향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대로 만들어지는 거니까.
좋은 글 잘 읽었고 정말 고마워요.
난 요즘엔 일기는 커녕 수첩에 짧게 기록하는 것조차 하지 않으니....
난 요즘 어린이용으로 나온 100권짜리 만화 위인전을 매일 보고 있는데
나한테 무척 도움이 되고 아주 재밌어.
하지만 짧은 단문의 문장과 상상의 여지를 주지 않는 그림이라는 매체가
나를 아주 심심하게 만든다는 것도 사실야.
어릴 때는 만화를 봐도 나의 상상의 세계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 같아.
오랜만에 이런 저런 반찬을 만들고, 오이지 갖고 온 친구랑 이야기 하고,
비 잔뜩 머금은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 앞 책상에 앉아 있으니 좋네.
아무래도 남도는 윗쪽보다는 더 덥겠지?
잘 지내소~~~
남편은 사춘기
열흘째 살금살금 숨 죽이며 살고 있다.
조심스럽게 남편의 눈치를 살피고, 긴 시간 부엌에 서서 주전부리나 반찬을 만든다.
평소에 내가 쥐고 있던 텔레비젼 리모콘도 남편에게 양보했다.
하루에도 수 없이 잔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꿀꺽 참는다.
차라리 남편 앞에서 얼씬거리지 않는 편이 나아 뚝 떨어져 본체 만체 하기도 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붓던 낙찰계가 깨졌거나 서방질을 하다 들통이 난 줄 알겠지만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때로는 억울해서 슬그머니 부아가 날 때도 있다.
아무 죄 없는 나를 남편이 금단현상을 해소하는 샌드백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내가 피우라고 권한 적이 있길 한가,
끊으라고 성화를 부렸나.
맷집이 좋은 편이 못 되는 내가 남편의 펀치를 얼마나 인내심 있게 견딜지 알 수 없다.
내가 맞받아치기 전에 금단현상에서 놓여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남편은 새해 들어 스스로 금연을 결심했다.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흡연을 마치 격리해야 할 사회악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의 영향이 컸다.
담배 값이 껑충 오른 것도 한 몫 한 것 같다.
남편의 금연 시도가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그 결심이 그리 오래 가지 못 했다.
평생 해온 남편의 직업은 집중력과 끊임없이 아이디어가 요구되는 일이다.
잠깐씩 손을 놓고 생각을 가다듬을 때 담배 한대 피워 무는 것은 그 나름의 휴식이고 재충전이었다.
이제 핑계는 없어졌는데 습관은 남았다. 이번에는 단단히 결심한 모양이다.
금연을 시작하기 전 남편이 나에게 당분간만이라도 잔소리를 하거나 자잘한 일로 성질을 돋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나 역시 최선을 다해 협조하겠다고 손가락을 걸어 주었다..
삼십 년 피우던 담배를 끊기가 쉬울 리 없다.
남편은 2차 성장기에 나타나는 성의 징후가 없을 뿐 영락없는 사춘기에 돌입했다.
걸핏하면 짜증을 부렸다. 하릴없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서성이기도 했다.
변덕스러워졌다. 술자리가 금연에는 치명적이라며 거절했다.
과자 부스러기를 연신 우물거리니 금연하려다가 당뇨병으로 갈아타는 것 아닐까 염려되었다.
하지만 중독성에서 헤어나기 위한 돌파구일터이니 말리지는 않는다. 구멍 하나는 열어놔야 숨통이 트일테니까.
참는다는 것은 큰 스트레스다.
아이는 중학교 다닐 때 사춘기를 겪었다.
아이의 기분은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를 탔다.
나긋나긋하다가도 불량스런 얼굴로 대들곤 했다. 투정은 군말 없이 받아주길 바랐고 참견은 거부했다.
기분 조절에는 재미있는 책에 몰입하는 것이 좋다고 늘 생각해 온 터라 아이에게도 권했다.
하지만 시키면 튕겨 나가는 시기 또한 그맘때였다.
예전에 나의 친정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나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아이를 지켜 보기도 했다.
"사람의 자식이 사람 되겠지, 개 돼지야 되겠소. 너무 속 끓이지 말고 지켜 봅시다."
우리가 한창 속 썩일 나이에 ‘무자식이 상팔자’ 라고 어머니가 푸념을 하자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아버지는 자식을 믿으셨던 것일까, 기대가 적었던 것일까.
부모님이 기다려 주는 동안 우리 형제들은 벗어났던 궤도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내가 인내심을 가지고 세월을 삭이는 동안 아이의 질풍노도도 잠잠해졌다.
산 등성이 하나를 넘은 아이와 참고 지켜 본 나는 동반 성장했다.
아이의 사춘기 이후 십사오 년 만에 이번엔 징후가 조금 다른 남편의 사춘기를 지켜본다.
흡연의 욕망과 금단현상이 쌍으로 덤비고 남편은 흔들리며 버티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절대로 무릎 굴기를 바라지 않는다.
머지않아 싸움은 끝날 것이다.
금연에 성공하면 대첩(大捷)기념비를 세워 주겠다고 농담을 하며 남편의 고군분투를 응원한다.
마침 아침에 본 신문에 <고별연>이라는 글이 있어 재밌게 읽었는데 찬정이 글과 너무 비슷하네.
유홍준씨가 담배를 끊으며 쓴 글이야.
위로가 될 것 같은데 그 댁 남편에게 말이야.
<고 별 연> 유홍준
새해로 들어서면서 나도 담배를 끊었다.
아직 금연에 성공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는 안 피웠다.
지난해 그믐밤 마지막 담배를 한대 피우면서 이것이 고별연이라고 생각하니 쓸쓸한 마음이 절로 일어났다.
내가 담배를 피운 지 45년이다.
200년 전, 나하고 종씨인 유씨 부인은 17년간 써오던 바늘이 부러지자 이를 애도하는
<조침문>이라는 글을 남겼듯이 한생을 같이해온 이 기호품과 결별하자니 깊은 감회가
일어난다.
담배의 해독을 부정하지 않지만 순기능도 없는 것은 아니다.
옛날 영화를 보면 일터에서도, 공원에서도, 전쟁터에서도 휴식의 상징은 담배였다.
글을 쓰다 펜이 멈출 때 담배 한대 물고 잠시 사색에 잠기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특히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엔 담배가 약이다.
정희성은 ‘동년일행’에서 이렇게 읊었다.
“괴로웠던 사나이/ 순수하다 못해 순진하다고 할밖에 없던/ 남주는 세상을 뜨고/
서울 공기가 숨쉬기 답답하다고/ 안산으로 나가 살던 김명수는/ 더 깊이 들어가 채전이나 가꾼다는데/ 훌쩍 떠나/ 어디 가 절마당이라도 쓸고 싶은 나는/ 멀리는 못 가고/ 베란다에 나가 담배나 피운다.”
또 누구는 말한다, 싸우지 않고는 살 수 없었고, 술이 아니면 잠들 수 없었던 저 캄캄한 시절에 담배마저 없었다면 그 간고한 세월을 어떻게 견뎠겠냐고.
유신 시절 감옥에서 출소한 어느 민주인사는 바깥세상이 감옥과 다른 것이라곤 담배 피울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뿐이라고 했다.
담배는 사람 사이를 가깝게 해준다.
라이터가 귀하던 시절 남의 담뱃불을 빌려 불을 댕기는 모습은 인생살이의 살내음을 느끼게 한다.
<8·15 해방시집>에 실린 이용악의 ‘시골사람의 노래’는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밤기차 안에서 “어디루 가는 사람들이/ 서로 담뱃불 빌고 빌리며/ 나의 가슴을 건너는 것일까”라며 침묵 속에 오가는 온정을 그렸다.
사실 나는 20년 전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둘째 권을 펴내고 나서 담배를 끊었었다.
그러던 내가 4년 만에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된 것은 1997년 <북한 문화유산답사기>를 위해 방북하면서였다.
북측 인사들은 만나면 담배부터 권했다. 그때마다 나는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모처럼 친선적 관계를 맺고자 찾아가서 손사래부터 치는 것이 멋쩍었고 그들은 나를 무슨 골샌님처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두번째 방북길에 올랐을 때는 담배를 듬뿍 사가지고 가 선물로 내놓고 그들이
‘백두산’ 담배를 권하면 나는 남한의 ‘한라산’ 담배로 응했다.
그러나 피우지는 않고 시늉만 냈다.
그러다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정상에 올라 신령스러운 천지 못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을 때 북측 안내원이 다가와 “교수선생, 백두산 정상에는 ‘백두산’ 담배가 제격 아니겠습니까”라며 권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순간에도 한 대 피우지 않는다면 그건 감성의 동물인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담배를 건네받아 불을 댕겼다. 핑 돌거나 거부감이 일어나면 바로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천지가 더욱 황홀해 보였다.
이후 나는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
90년대 말에는 수입 담배가 일반화되었지만 양담배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딱히 입에 맞는 것이 없어 이것저것 피웠는데 2003년 무렵 ‘클라우드 나인’이 나왔다.
나는 담배만큼은 편의점에서 사지 않았다.
지하철 안국역 입구 가판대에선 우리 어머니보다 훨씬 나이 많아 보이는 할머니가 가게를 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보면 단골손님에게 보내는 다정한 눈인사를 건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담배를 사러 갔는데 할머니가 새로 나온 담배라며 이걸 뭐라고 읽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클라우드 나인이네요. 이게 국산이에요?”
“그렇다네요. 오늘 놓고 갔어요. 그런데 이름이 꼬부랑말로 이렇게 길어 어떻게 외운담.”
“그냥 ‘큰일나요’라고 하세요.”
이후 고별연까지 내가 피운 담배는 ‘큰일나요’였다.
문화재청장 시절 한번은 대통령 기록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대통령께서 청장님과 저녁 식사를 한 뒤 담배를 바꾸셨는데 무슨 사연이 있었냐”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엄청난 골초이셨다. 식사를 하고 나면 담배를 연거푸 두대를 피우는 것이었다. 가만히 보니 대통령은 타르가 1.0㎎인 ‘에쎄’를 피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5.0㎎인 클라우드 나인을 한번 피워 보시라고 권했더니 맛있다며 묻는 것이었다.
“이게 어디 제입니까?” “국산입니다.” “클라우드 나인이 무슨 뜻입니까?”
“속어로 ‘뿅 갔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 단어를 써도 됩니까?”
“외국에도 수출하다 보니 자극적인 이름이 필요했나 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담배 이름은 마약쟁이들의 비속어를 썼다고 비난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담배인삼공사 임원을 만났을 때 클라우드 나인은 아홉개의 구름이라는 뜻이니 이것은 한글소설 <구운몽>에서 나온 것이라고 둘러대라고 일러주었다.
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7세기로 <조선왕조실록>에선 광해군 때부터 담배 얘기가 나온다. 담배라는 말은 영어 타바코에서 나온 것이고 옛날에는 연초라고 했다.
이후 많은 애연가를 낳아 영조 때 허필이라는 문인은 호를 연객(烟客)이라고 했고, 이옥은 <연경>(烟經)이라는 저서를 짓기도 했다. 연초는 연차(煙茶)라는 매력적인 이름으로도 불렸다. 녹차, 홍차 같은 차로 불린 것이다.
위창 오세창 선생이 옛 명인들의 편지를 모아 엮은 <근묵>에 실린 정조대왕의 간찰은
어느 신하에게 “게장 한 항아리와 창덕궁에서 재배한 연차 두 봉지를 보낸다”는 물목이
들어 있다. 신하를 챙겨주던 정조대왕의 자상한 모습과 함께 담배에 어린 따뜻한 정을
새겨보게 하는 대목이다.
10여년 전부터 나는 매월 마지막 일요일이면 조계사 세미나실에서 열리는 ‘말일파초회’에서 옛사람의 간찰을 읽는다. 이때 쉬는 시간이면 재완이, 채식이와 밖으로 나와 소나무 아래서 연차를 피웠다. 우리는 이 다정한 만남을 ‘송하연차회’라 하였다.
그래서 요즘 세상에선 혈연, 지연, 학연보다 더 친밀한 것이 흡연 사이라고 한다.
이렇게 좋아하면서도 내가 담배를 끊은 이유는 담뱃값이 올라서도 아니고, 건강이 나빠져서도 아니다.
세상이 담배 피우는 사람을 미개인 보듯 하고, 공공의 유해사범으로 모는 것이 기분 나쁘고, 집에서도 밖에서도 길에서도 담배 피울 곳이 없어 쓰레기통 옆이나 독가스실 같은 흡연실에서 피우고 있자니 서럽고 처량하고 치사해서 끊은 것이다.
하기야 담배를 그만 피울 때도 됐다.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보면 삶의 즐거움을 쭉 열거한 ‘인생락’의 맨 마지막에 농손락(弄孫樂)이 나온다. 손주와 노는 농손락을 얻으려면 금연할 수밖에 없단다.
금연은 정말 힘들다. 찰스 디킨스는 역설적으로 말했다.
“담배를 끊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다. 나는 백번도 넘게 끊었으니까.”
20년 전 경험에 의하건대 금연은 매정하게 결별하는 의지밖에 없다.
금연 뒤에 찾아올 기쁨을 기대하며 끊어야 한다. 이제는 아침마다 칵칵거리지 않게 되고
양치질할 때 나오는 조갯살만 한 가래도 없어질 것이다.
방에선 곰팡내가 사라질 것이고, 얼굴엔 살이 뽀송하게 오르며 피부도 맑아질 것이다.
이렇게 한껏 자위해 보지만 여전히 담배를 미워할 뜻은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내 인생의 벗이 되어 주었던 것에 깊이 감사하며 강제로 이혼당한 기분이 든다.
나는 고별연 연기를 뿜으면서 사무치는 아쉬움 속에 이별을 고했다.
잘 가라, 담배여. 그동안 고마웠다, 나의 연차여.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제가 근래에는 다른 꿍꿍이 속이 있어서 끄적거린 것들을 비밀노트에 짱 박아 놓고 있어요.
그래도 이 방 문고리를 가끔은 잡아 당겨 봐야 할 것 같아서
어제 저녘답에 시렁 욱에다 가벼운 거 한 장 사알픈 올려 놨는디.
에구머니 ! 한밤중에 옥규 언니가 묵직한 것을 떠억커니 올려 놓는 바람에 시렁 뿌사지게 생겼스요.
내가 전에 남편의 만행을 좀 들춰내고 흉을 봤더니
어느새 내 남편이 땡처리품으로 소문이 나 있더라구요. 참말로.
우야튼 오늘로 스므나흘째 금연중입니다. 대견한 일이지요.
?이리기웃 저리기웃..ㅎㅎ
?지금이 고비이신듯....
가게 카운터뒤로 백여종도 넘는 담배가 꽉차 있었쥬.
골초는 아니어도 심심해서, 신문읽으면서, 식사후에 등등...
친정식구들은 오면 금연시키라고...
"폐암에 걸리면 지가 걸리지 내가 뭐...."
"옆에서 냄새를 맡는이도 위험하데..."
거실에, 화장실에, 부엌에 온데에 재떨이를 준비해준 나는 조강지처???ㅎㅎ
법이 바뀌어 카운터뒤에서는 흡연이 허용되던 것이
이젠 가게밖으로 나가서 피우라고.
추운 겨울에도 코트입고 밖에 나가서 피우는 불쌍한 인생들..ㅉㅉㅉ
어느날, 남편이 내게 "집에 뭐 달라진것 없어?"
아무리 훑어보아도 모르겠다.
"재떨이가 없잖아 ~~." "You kidding~~!"
이리저리 훑어보니 정말 깜쪽같이....
여행에서 사온 콜랙터블도 다 ~아 버렸단다.
그 후로 금연 십 년도 넘었다.
가끔 얘기중에 아직도 냄새를 맡으면 좋단다.
손님들에게 남편얘기를 들려주면서
"너도 한번 해봐. 그렇지만 네가 담배를 끊으면 난 손해막심이다.
다신 널 볼수도 없을것이고....ㅎㅎ
사실 우리 남편같은 사람이 얼마나 독하고 무서운 남자냐?
내가 이런 무시한 사람과 사는 여자다."
"그러지말고 담배를 한 개피씩 줄여봐라. 그럼 금단증상도 덜 할것 같구만?"
역시 남자들은 추켜세워주면 아이들처럼 으쓱하면서
착한 양이 되는것 같은데....너무 세워줘서 탈이긴해요?
그래서 주위에 사람들이 하는 말.
"어수룩한 듯 한데 남편머리위에서 놀고 있어요."ㅎㅎㅋㅋ(지 자랑?ㅉㅉ)
인선 선배님은 어딘가 멀리 계시지요? 미국? 캐나다?
담배를 파시다보니 담배 냄새를 구신같이 잘 맡으시나 봅니다.
그 멀리서 이 구석진 방 담배 냄새를 다 맡으시다니요.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담배라면 저도 지겨워요.
마누라가 남편의 건강에 무심해서 담배를 피워도 가만히 놔둔다는 둥
모두들 저를 야단 치는데 잔소리한다고 듣나요? 집안만 시끄럽지.
광숙 언니 말씀 맞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결심하고 참도록 하는 수 밖에요.
올해들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끊었다고(아직은 모르지만) 하데요.
담배 이야기~
글은 재미있는데~ 아~ 지겨운 담배.
유홍준 교수의 글을 읽으니 내가 남자였으면 아마도 건강에 나빠도 돈이 많이 들어도 나도 피웠을것 같은 담배~
인관 관계를 부드럽게 해주고 휴식을 취할때 뿅 뿅 도넛을 날리며 허공을 바라볼때의 안락함~ 못 끊는것도 이해는 간다.
삼대에 걸친 담배이야기~
지겹지만 이 방이 왠지 은밀하게 느껴져 하게 되네~ㅎ
우리 아버님도 골초 남편도 골초 아들도 골초~
아마도 몇십년 담배 연기를 ~ 아니 지금도 계속 맡고 있는 나의 폐는 ~건강하다면 하느님의 도우심이 아닐까?
아버님이 쓰시던 방바닥은 언제나 여기저기 빵구가 뜷려있었다.
들고 계시다가 조시다가 재를 그냥 바닥에 떨어뜨리시고~ 이불도 여기저기 담배 빵꾸~ 불안나기 천만 다행.
다행히 아들은 어느날 생각해보니 자가기 한일은 담배 태우는 일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몇년전 하루 아침에 독하게 끊었다.
아마도 냄새에 여자들이 자꾸 피했기 때문일듯~
남편은 담배값이 두배로 오른다길래 할수 없이 두보루를 몰래 사놓았다가 결국 못끊어 이게 마지막이라며 다 줘버렸다.
못끊겠지~ 그 좋은 걸 어찌 끊겠나~
에구 ~지겨운 담배.
?한국에 담배값 올리는 정책이 다소간 어리숙하네요.
아님 사재기하라고 시간적 여유를 주는것도 같고...
이곳 캐나다, 온태리오주는
담배값을 올려도 도매상이 이미 문닫고 난 후에, 돈이 있어도
제대로 살 수가 없게 밤 12시를 기해서 올려요.
오늘 멀쩡하게 돈주고 산 값이
내일 액수를 맞춰서 담배사러 오면 값이 올라 있는거예요.
특별히 봐줘서 어제값으로 주마... 내일부턴 어림도 없다...
공장에서 올리고, 정부에서 올리고
죽어나는 담배애연가들...끊을수도 없고...참으로 딱합니다.
막대한 담배세를 거두면서
담배피우는 이들을 무슨 범죄자 취급하기도 하고
가끔은 길거리에서 마리화나냄새도 풀풀나기도 하고.
오히려 담배보다 값이 싸다고....
한국같으면 철창신세가 될텐데....
에고 ~~~끔찍한 담바고~~
그 옛날, 친정아버지는 밤에(통금시절) 담배가 떨어지면
거의 밤잠을 못 주무시고 안절부절 하시다가
통금해제가 되면 득달같이 달려가 담배를 사시기도...ㅋㅋ
아주 골초인 담배손님이 한동안 안보여서
다른가게로 다니는가보다 했더니, 어느날 비쩍 말라서 나타났는데
후두암에 걸려서 담배를 끊었다고..
끊었다기 보다는 더 이상 담배를 피우고픈 맴이 없어졌다고....
담바고타령이나 불러 볼까나 ~~~
아직도 있을까
그때는 그랬다.
눈 감고 어림짐작으로 가도 될 만큼 익은 길이다.
명동에서 을지로 건너 광교를 지나면 복개된 청계천대로가 나온다. 건너편이 종로다.
광교에는 맞춤 양복점이 나란히 있고 이제는 옛 이름이 된 한일은행 종로지점과 조흥은행 본점이 있다.
종로로 들어서는 길모퉁이에 보신각이 있다.
사,오층 건물이 즐비했던터라 2층 구조의 보신각 종루는 주위와 키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
보신각 옆에 모란꽃 피는 밭이 있다.
모란꽃이라고 내 나름대로 이름 지었을 뿐, 나는 모란과 작약을 구분하지 못 한다.
여름으로 넘어가는 이맘때면 소담스럽게 꽃을 피웠다.
지금의 보신각은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고 올려다 봐야하는 빌딩들에 에워싸여 있다.
번화한 도로에 면한 길가의 모란꽃밭을 상상하면 생경스럽다.
아직도 있을까? 있다면 지금쯤 꽃이 피었을 텐데.
한 걸음에 달려가 내 기억 속에 있는 삼십여 년 전 그림을 확인하고 싶은데 나는 너무 멀리 와 있다.
월남전이 끝나던 그 해 그 여름.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이민을 가는 사촌오빠 배웅을 갔다.
그때는 공항에 배웅객이 많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내가 배웅을 나선 데에는 유별한 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는 경기고를 나오고 서울의대를 지원했다가 낙방하자 재수를 택했다.
학원을 다니는 지금의 재수생과는 달리 그때는 혼자 공부했다.
숙부인 아버지가 서울 근교의 작은 절을 소개했다.
그 절의 요사채에서 일 년간 대입공부를 했다.
아버지는 그 해 몇 번인가 닭백숙이나 곰국이 든 주전자를 들고 그 절에 가셨다.
나는 그때마다 아버지와 동행했다.
산문(山門)앞에서 주전자를 내게 들려 주시며 기다리라고 하셨다.
산문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 무서웠다.
요사채 쪽마루에 앉아 먹으면 될텐데 왜 오빠를 절 밖으로 데리고 나와
산물이 내려오는 골짜기에서 먹게 할까 어린 나는 이해하지 못 했다.
그래도 신작로에서 절까지 올라가는 산길이 아버지가 혼자 가시기에는 무서울거라는 생각에 번번이 따라 나섰다.
오빠는 서울의대에 합격했다.
군의관 시절 결혼을 했고, 몇푼 안되는 군의관 월급과 고등학교 교사였던 올케언니의 월급을 모아 미국행 비행기표를 샀다.
이민짐이라 해도 단촐했다.
아버지는 공항에서 자게가 박힌 듯 만 듯 한 까만 국기함을 오빠에게 건넸다.
물론 그 안에는 태극기가 들어 있었을 게다.
그리고 사십 년이 흘렀다. 오빠는 자신의 꿈을 이루었고 그 후 몇 번인가 한국에 다녀갔다.
이제까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리는 없다.
오빠는 까만 자게함에 넣어 준 태극기를 아직 가지고 있을까?
산문 밖 골짜기에서 먹은 닭백숙 맛은 기억하고 있을까?
다 잊었다 해도 한국인이라는 자신의 뿌리를 잊었을 리는 없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한 달 후 식목일이었다.
묘목 한 그루를 가져가고 싶다고 하자 아버지가 담장 밑에 있는 해당화나무에서 포기 가름을 해주셨다.
이웃 학교와 경계담이 있는 한갓진 곳을 골라 심었다. 그리고 무심하게 잊고 있었다.
그 다음해 무르익은 봄날 그 나무에서 해당화 몇 송이가 핀 것을 발견했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 있는 것만도 용한데 여남은 송이의 꽃까지 피우다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이제껏 심은 것조차 잊고 있던 나는 꽃을 보자 욕심이 생겼다.
외진 곳보다 눈에 잘 띄는 곳으로 옮겨 심고 싶었다.
생물 선생님을 모시고 가서 보여드리고 꽃이 진 후 옮겨 심은 자리가 운동장 옆 화단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만에 학교에 가보니 해당화가 무성하게 옆으로 퍼져있었다.
잔가시가 많은 해당화 가지 때문에 지나다닐 때 조심해야 할 것만 같았다.
예쁜 꽃을 보여주고 싶었던 욕심이 오히려 불편을 주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미안했다.
해당화 나무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까? 차라리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잡목 사이로 좁다란 숲길이 나 있다.
간혹 걸어가는 사람이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전거를 타고 그 길로 들어가 시야에서 멀어진다.
그곳은 오래 된 나무밭이었다.
일본의 도쿄와 사이타마, 가나카와, 치바현은 야산이 거의 없는 평야지대이다.
예전 촌에는 집 가까이에 땔감 조달을 위한 잡목밭이 집집마다 있었다.
낙엽과 베어 낸 곁가지는 취사와 이로리*의 연료로 썼기때문에 나무밭은 겨울이면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였다.
이제 키바다케(木畑)의 역할은 물론 그런 말조차 잊어져 간다.
그 숲길은 나무밭을 가로질러 나있다.
가끔 자전거를 타고 그 근처에 있는 테니스 코트에 갔다.
숲길로 가면 어디가 나올까 늘 궁금했다.
숲길을 지나면 나지막한 언덕이 나오고, 그 언덕에 서면 멀리 전차 선로가 보일지 모른다는 막연한 상상을 했다.
나는 늘 그 숲길 반대편 아스팔트길을 따라 집에 돌아오기 바빴고 그 숲길을 가보리라고 벼르기만 하다가 떠나왔다.
일본을 떠나온 후 종종 일본에 가지만 거기엔 갈 일이 없다.
그 숲길로 자전거를 타고 간 그들이 그립다.
아직 그곳에 숲길이 있을까?
나이 들어가는 티를 내는 것인지 살아온 날의 필름을 되감아 볼 때가 있다.
군데군데 필름을잘라내고 싶은 후회의 장면이 왜 없으랴마는
지나간 일들은 잡목림 사잇길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뒷모습처럼 다 아름답다.
이틀 동안 비가 흠뻑 왔어요.
그래서 좀 진득하게 PC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비가 그친 오늘 나가 보니 오이, 고추, 호박,토마토가 몰라보게 커졌네요.
빗물에 불을 건 아니겠지요.
오랫만에 들어와 찬정언니 추억의 뒤안길을 함께 따라가니
사이사이 저의 그 시절도 오버랩되네요.
추억이란 넌픽션영화의 감독은 나니깐 편집도 내맘대로 할 수 있는거죠.
슬펐던 기억마져 파스텔톤으로 아름답게 베이스를 깔면
몽환적이고 더 깊이 감성의 샘을 자극하게 되는듯 싶어요.
난 이리 멋진 찬정언니가 좋아요.
선배님들한테 선듯 언니란 호칭을 못 썼었는데
오늘은 왠지 언니라 하고파요.
찬정언니~~~!
아~~좋다!!!!
생후 십팔 개월된 애기 손님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오랜만에 만났으니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한 시간을 가지려던 우리의 계획은 물 건너 갔습니다.
두어 시간 애기 봐줄 사람을 사놨건만(?) 할머니 치마꼬리마저 놓치면 천애 사고무친 것으로 알고
대굴대굴 구르며 우는 바람에 데리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가 육이오동이(육이오 사변나던 해 태어난 사람) 라고 말 한 적 있으니 예순 여섯살인가 봅니다.
아줌마라면 아줌마고 할머니라고 하면 좀 서운하긴 해도 수긍하는 나이 아닌지요?
그이도 작년까지는 산지사방 훨훨 날아 다녔습니다.
남매를 다 결혼시켰고, 남편은 아직 현역이니 가로걸칠 것이 없지요.
지난 봄 그의 발에 족쇄가 채워졌습니다. 자청한 일이기는 합니다.
돌 지난 외손주를 도맡아 키우고 있습니다.
결혼 5년 되는 딸이 직장때문에 출산을 마냥 미루자
낳기만 하면 키워주마고 딸을 윽박지르듯 해서 작년 봄 외손주를 봤습니다.
1년간은 엄마가 휴직을 해서 애기를 키웠고.
올 삼월에 직장에 복귀하며 거제도 외가에 맡겨졌습니다.
몇개월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애 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굳이 말 안해도 알고도 남았습니다.
늘 말쑥하게 차려 입고 다니던 그가
헐렁한 바지에 커다란 바랑같은 등짐을 졌고,
염색하러 갈 시간이 없어 흰머리는 성성했습니다.
밤이 으슥하도록 안 자고 놀자 하는 바람에 할머니 얼굴엔 피곤함이 그득합니다.
그와 연배가 비슷한 친구가 토굴에서 도를 닦다 내려오는 길이냐고 농담처럼 말했습니다.
자리 잡고 앉자마자 그 바랑에서 꺼내어 내놓는 것은
전부 애기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형편대로 맞추어 살아야 하는 것이고,
자식 사정을 부모가 봐주지 누가 봐주겠습니까?
근데 그가 걱정스런 얼굴로
이게 옳은 일인가 회의가 생긴다고 말합디다.
에미 애비가 금요일 밤에 왔다가 일요일 오후에 간다고 합니다.
이틀동안은 애기가 방방 뛰고 신나게 놀다가 엄마 아빠가
간다고 현관에 나서면 애기가 우두커니 서서 배웅을 한다네요. 울지도 않고.
근데 차의 꽁무니가 제 눈에서 사라지고 나면
그때부터 애기는 혼자 제 마음을 추스리느라 애를 쓰는 게 보인다네요.
혼자 장난감을 거칠게 다루고, 엄마가 가즈런히 정리 해놓고 간
책을 흐트러 놓고, 제 옷을 다 꺼내어 흔들고.
못 하게 하면 침대에 엎드려 있는다니 그걸 보는 마음은 또 어떻겠습니까?
부모와 분리불안으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중에는 할머니에게 찰싹 달라붙어 세상에 그런 껌딱지가 없다니
일흔을 바라보는 할머니에게도 보통 일은 아니지요.
듣고 있던 한 사람이
옛날식이 좋았다고 한 마디 합니다.
아버지는 나가서 돈 벌고,
어머니는 애기 키우며 살림하던 옛날식.
많든 적든 형제도 있어야 한다.
부모 없는 것만이 결손가정인가, 형제없는 것도 결손이라면 결손이지.
자식에게 뭐 대단한 것 안겨주려고 하지 말고
당연히 줘야 할 것을 빼앗는 부모는 되지마라.
요즘은 딸을 많이 가르쳐 놔서 육아나 살림은 뒷전 ,
나가서 돈 벌고 출세하는데만 눈이 벌겋고,
남자들과 대등해지는 것만을 자아실현이고 삶의 질인 줄 아니
내 자식이고 남의 자식이고 다 걱정이라고 합니다.
외동아이 둔것도 , 며느리가 직장생활 한다고 출산을 미루고 있는 것도
전부 나한테 해당되는 말이었습니다.
그의 얘기가 틀린 말은 아니지요.
하지만 집집마다 형편이라는 것이 있고, 가치관이라는 게 있으니
무엇이 정답이고 어느 길이 바른 길이라고
획일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래저래 밥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모르는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절대로 부모를 완전히 떼어 놓으면 안되는데.....
누구를 위하여 그들은 돈을 버는것인지,
어린것이 얼마나 에미를 그리워 하며 맘으로 삭힐런지 눈에 선하네.
어릴적에 1년이상 부모와 떨어져 지내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다더라.
할머니는 또 얼마나 맘아프고 힘들것이여.ㅉㅉ
할머니네가 그옆으로 가던지
부모네가 할머니네 옆으로 오던지
애를 위해선 그리해야하고
이도저도 안되면 에미가 애를 봐야지.
.
.
.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는것인가???
난 어젯저녁에도 두넘 밥다해먹이고
에미가 와서 데려갔다네.
죽어라하고 봐주는데도
에미소리만 나믄 고지지배가 얼렁 가방 들고 나선다네.
(우리집은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애들한테 에미는 그런 존재인데 그어린것을~!ㅉㅉ
갔다 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부산에 볼 일도 있고, 지난번에 해 가지고 간 호박죽을
어머니가 아주 맛있게 잡수셔서 한번 더 해가지고 겸사해서 갔습니다.
요양병원으로 가신지도 일년 반이 됩니다.
처음에는 떠밀려서 가신 어머니나 떠다 밀은 가족이나 모두 힘들었는데
지금은 어머니가 ' 여기가 내 집이다 ' 하고 계시니 다행으로 여기고 있지요.
사흘돌이로 찾아가던 시누이도 요즘은 뜸한 눈치입니다.
어머니가 계신 병실은 8인실입니다.
치매는 기본으로 다 있고, 식사와 대소변을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중증의 노인환자가 절반 정도 됩니다.
저도 참 고약하지요.
한달만에 가봐서 여덟개 침상의 주인이 바뀌지 않았으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옵니다.
이제 그만 먼 길을 가셔도 될텐데 모진 목숨 놓지 못하고 있는 듯해서요.
그런데 제가 갔던 그날
그 병실 침상 하나에 칸막이 커튼이 쳐졌고 의사와 간호사가 드나듭니다.
임종실이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그냥 그 자리에서 임종을 하나 봅니다.
옆 환자들에게 자극을 줄까봐 그러는지 소란스럽지 않게 조용히.
늙수구레한 두 아들은 장승처럼 서 있고,
헐레벌떡 뛰어 온 딸은 작은 소리로 엄마 엄마 부릅니다.
막내딸이 지금 오고있는 중이라는데 그 어머니는 기다리지 못하고 먼 길을 떠날 모양입니다.
의사가 와서 'ㅇ년 ㅇ월 ㅇ 일ㅇ 시 ㅇ분에 사망하셨습니다.'
귀가 어둡고 정신이 맑지 못한 우리 어머니가 그런 눈치는 밝으셔서?
'초상이 났는가베' 나한테 물으시네요.
내가 나오면서 보니 조금 전에 본 그 가족들이 로비에 모여있습니다.
뭔가 의논을 하는 것 같은데 장례를 의논하는 얼굴이기 보다
야유회나 이삿날을 의논하는 것처럼 들떠 보입니다.
어깨의 짐을 벗은 그이들이 살짝 부러웠다면 다들 저를 욕하시겠지요.
?
나도 그랬어.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더라.
그런 상황이었을 적에...
붙들고 싶은 마음과 보내고픈 마음이 교차되더라.
에효 ~
?찬정이가 본 상주들 표정이 어떤 건지 알겠어요
~~
장례식장 건물을 지나야
어머니 계신 요양원 건물이 나와요
이번 일요일에
어머니 뵈러 가다가
장례식장 건물 밖까지 나와서
문상객을 배웅하는 상주내외로 보이는 사람들 봤는데
찬정이가 본 상주들 표정과 닮은 거 같아요
그래서 남편에게
아주 나이 많으신 분이 돌아가신 거 같다고
얘기했어요~~~
해 방 구
?박 찬 정
왜소한 몸매의 그녀가 우산을 접으며 아파트 현관에 들어선다.
?화장끼 없는 얼굴은 파리해보였다. 허둥지둥 서둘러 나가야 했던 일은 묻지 않아도 뻔하다.
“친정 어머니한테 갔다오나 보네.”
“예. 금방 숨 넘어 갈듯이 빨리 와 보라고 하셔서...”
남매를 다 결혼시켰으니 홀가분하게 자신의 시간을 즐길 나이건만 그녀에게 잠시도 한유한 시간은 없다.
같은 라인에 사는 친구의 권유로 등록한 복지관 취미교실에도 간 날보다 빠진 날이 더 많다.
그녀가 게으르거나 의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그리고 시집간 딸 때문이다.
힘에 부치거나 다른 약속이 있어도 거절하지 못 하고 달려가서 거들어주었던 것이 타성이 되었다.
친가나 시가에 동기간이 없는냐고 물은 적이 있다.
자랄 때는 많은 것 같더니 뿔뿔이 흩어져 살아 지금은 많은 줄도 모르겠다는 게 그녀의 변명같은 대답이다.
그저 만만하고 말 잘 듣는 자식만이 고달플 뿐이다.
시아버지가 몇 해 전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는 혼자 사신다.
지난해부터 치매끼가 있어서 요양보호사가 드나들지만 혼자 계시는 시간에는 가족이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남이든 자식이든 사람을 만나면 없는 일을 꾸며내어 불평하고 이간질하는 것이 그 노인의 치매 증세다.
관심을 끌고 싶고, 외로움의 표현이라고 추측한다.
처음엔 오해하고 가족 간의 싸움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노인의 앞에서만 맞장구를 칠 뿐 곧이듣는 사람은 없다.
요양병원은 한사코 마다하고 시가의 다른 형제들은 남의 일 보 듯 한다.
마음 여린 그녀만이 힘겨운 숙제로 떠안았다.
원래 그녀의 친정은 멀다. 남편의 직장 때문에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객지에서 연년생 아이 둘을 키우며 부업까지 하자니 힘들고 외로웠다.
마침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적적해진 친정어머니를 가까이에 이사하게 한 것이 이십여 년 전 일이다.
노인에게는 그녀 말고도 자식 네 명이 더 있지만
이젠 어느 집이나 잔손 가는 육아시기를 벗어나 노인의 손을 반기는 집이 없다.
더구나 오래도록 따로 살다가 이제 와서 같이 사는 것은 서로가 원치 않았다.
친정어머니는 여러 자식을 두고도 만만한 딸에게만 기대어 산다.
잔병치레가 잦고 식성이 까다로운 노인은 근래 들어 부쩍 투정과 노여움으로 딸의 신역을 들볶았다.
그녀의 딸은 결혼하여 인근 도시에서 산다.
맞벌이 하는 딸은 직장과 육아와 살림 세 가지 짐을 지고 외줄 타기 하듯 아슬아슬하게 산다.
그 세 가지중 하나라도 휘청거리면 그녀가 딸네 지원군으로 간다.
어느 때는 한 달에 서너 번 불려 갈 때도 있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가 그 많은 일을 무리없이 감당하는 줄 알고 있다.
아내가 부재중이면 군말없이 혼자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 아내에게 베푸는 큰 선심이다 .
그녀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그리고 딸을 지탱하게 하는 중심축이다.
그 중심축이 아무도 모르게 기울어져 가고 있다.
한 해 걸러 한 차례씩 받는 건강 검진에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니 정밀검사를 받으라는 통지를 받았다.
아무도 모르게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은 결과 신장암 진단을 받았다.
서둘러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돌아오는데 핸드폰이 든 가방이 부르르 떤다.
화면에 시어머니가 살고 있는 동네 이름이 뜬다.
평소에 저 사람이 내 편인가 남 편인가 할만큼 무심하던 그녀의 남편이 적극적으로 팔을 걷고 나섰다.
그는 우선적으로 아내에게서 두 어머니를 떼어내어 자신의 형제와 처형제들에게 각각 인계(?)했다.
딸에게도 이 기회에 어미가 여차하면 받혀주던 손을 떠나 홀로서기를 하도록 단단히 일러두었다.
수술은 무사히 마쳤지만 고통스런 항암치료로 기진맥진 입,퇴원을 거듭했다.
남편의 간호는 기대이상이었다.
시가와 친가의 형제들이 원하든 원치않든 어머니 봉양에 애를 쓰고 있다는 얘기도 들여왔다.
남편이 아내의 투병을 구실로 철통같이 쳐 놓은 바리케이트 안에서
오로지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 안간 힘을 쓰고 있다.
아무도 그녀를 부려먹을 수 없다.
그녀를 지배하며 부려먹던 세 사람의 절대 권력자들로부터 놓여났다.
비록 암과 싸우느라 얻은 해방이지만 그녀는 이제 자유롭게 자신을 위하여 주어진 시간을 보낸다.
운신의 폭이 병원과 집과 시장 정도에 불과하긴 해도 그녀는 실로 오랫만에 해방구를 만끽하고 있다.?
윗 글은 거제도에 와서 사귄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크게 보태거나 덜어낸 것이 없이 사실 그대로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우리 나이 또래가
의외로 참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진부한 얘기지만 잡아두고픈 단상에 올려놔봅니다.
?찬정아~
진부한 이야기 맞지만 너의 손으로 가면 작품이 되는구나.
그게 여자의 일생인가봐.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에 마지막이라 기억되는 글귀~ 여자의 일생은 그리 행복한것도 그리 불행한것도 아니라는 얘기~
나만해도 아버님 모시고 보내드리고 나니 ~ 그때 친정엄마가 너희 아버님 보내드리면 나랑 살자고 하셔서 말로 인심썼지
그러시라고~걱정 마시라고~
근데 나이가 열댓살은 위이신 아버님보다 우리 친정엄마가 먼저 돌아가시더라고~
우리 엄만 78세에 가시고 아버님은 97세에 가셨으니~
친정에선 큰딸이라 날 많이 의지하셨거든.
아버님 가시고 나니 우리딸네 예은이를 일주일에 두번씩 가서 돌봐줬는데~
이리로 와서는 좀더 멀어졌다는 핑계로 어쩌다 아주 급할때 외에는 안가니 훨 편하더라구~
상황이야 언제나 그렇구 그렇지.
어떻게 마음 먹고 잘 이겨내느냐가 문제지.
어쨋든 너의 친구 그 여인 그동안의 저력으로 암도 잘 이겨냈음 좋겠다.
해방구란 제목도 적절하다.
?찬정 ~
아까 오후에 찬정의 글을 누워서 아이패드로 읽었어.
한국 버젼의 내 얘기 같았어.
물론, 몇가지 다른첨,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말야.
글을 읽고 나서 오후 내내 가슴이 먹먹하데~~
힘들다는 6번의 키모와 4번의 수술의 암치료를 받는 동안
진정한 쉼,
아무도 날 건드리지 못하는 진공관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쉼이 너무 좋아서
암환자의 특권을 누리는 듯 그 기간을 아껴가며 즐겼다면
이해가 가려나 ???
"해방구" 라는 찬정이의 표현이 딱이야 딱 !!!!
미주 인일동문회장을 지낸 11회 김영란 후배를 내가 참 좋아해.
언젠가 그녀를 만났을때 푸념겸, 속풀이겸 신세타령을 하면서
내가 참 치열한 삶을 살았노라고,
어느 소설가나 글 쓰는이 한테 내 이야기 해 주면 글 소재 꽤 나올거라고 했드니
똿 하는 말이
누구나 자신을 소설 속의 비련의 여주인공 인 줄 알고 살지요 ~~
이러쟎어
눈물 질금 거리면서 무드잡고 얘기하다가 내가 얼마나 웃었나 몰라 ㅎㅎㅎ
강약의 차이가 있을 뿐 인생 사는 것 누구에게나 녹녹치 않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영란씨의 그 말이 왜 그리 위로가 되던지....
쓰다 보니 내가 뭘 말하려는 지 방향을 잃었는데
찬정이가 그냥 내 말 뜻 알아주라.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내 속에 있는 생각을 글로 나타낸다는 것이 이리 힘드네 그려.
그 친구분, 힘든 항암치료 잘 견디시면서 치료 끝내고 완치 되시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께.
요 바로 위에 있는 찬정의 글 두어편은 분명히 읽었는데
좀 전에 이 방에 들어 오면서 보니 저 위에 광희의 만화도 있고
좋은 글들이 가득하네
종종 와서 읽어야겠다.
인일 홈페이지 입성하고 지내 온 햇수가 10년은 족히 됬을텐데 왜 이리 모르는 곳이 많은 건지.... ㅉㅉㅉ
신옥이 언니는 '진공관 속' 이라고 하셨고,
저는 '해방구' 라고 했고,
이 글의 주인공은 '무풍지대' 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학교에서 만나는 젊은 여선생들한테 거의 강요하다시피 하는 말이 있어.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나 간에 자기 애들 봐 주는 거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
자기 자식이니까 힘들어도 키운 거라는 것,
그 이상의 일은 인간적으로 너무나 힘에 부친다는 것,
그리고 그분들에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부모님께는 자식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자식 말고도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나 일도 있노라고.
자식 키우느라고 못했을 뿐이라고.
또 만약에 부탁을 하게 되면 정확히 정당한 보수를 드리라는 것,
남한테 부탁하는 것보다 더 드린다고 생각하라는 것,
그리고 마치 용돈 찔러주는 것처럼 애매하게 줘서 수치스럽게 하지 말고
정확한 날짜 확실히 정해서 월급처럼 드리라는 것.
그래도 힘들어하시면 빨리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이지.
어차피 다 모르는 사람들과 사귀면서 살아가는 세상, 자기 아이들이라고 유별날 것도 없다는 것을 아주 강하게 자주 얘기하곤 해.
특히 친정어머니의 도움은 좀 뻔뻔한 느낌이 들 정도로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아.
어머니가 힘들어 병들면 안타까워하면서도 자기 자식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거지.
또 평균 액수를 또는 그 이상 드려야 한다고 말하면
왜요? 하는 눈으로 쳐다 보곤 하지.
아예 돈을 안 드리는 애들도 있더라고.
엄마는 늘 자기를 걱정하기 때문에 드려도 안 받으실 거라면서.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께 맡기면 집안 대소사에 어차피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더 드릴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하더군.
그건 그거고 이 문제는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지.
경우가 다르기는 하지만
여선생들 중에 특별한 이유 없이 싱글로 지내는 이들이 많은데,
대부분 친정 식구들 거두느라고 그런 경우가 많더라고.
특히 중요한 시기에 부모님이 아프시다거나 하면 개인 생활은 끝난 거더라고.
넌 아직 혼자 있으니까 아무래도 괜찮잖아.
이게 소위 가족을 가진 다른 형제들의 이야기지.
그래서 계속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부담을 주면서 자기들은 빠져나가지.
넌 늘 그래 왔으니까 하면서 말야.
복잡한 문제긴 한데 자기 자신의 마음만큼이나 다른 사람의 마음도 중요한 거잖아.
양심의 문제고 말야.
자기가 머슴 살기 싫으면 다른 사람도 머슴 시키면 안 되지.
부부도 마찬가지고.
암튼 난 누군가의 지나친 희생을 요구하는 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해.
그럴 감수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고 말이지.
한쪽의 힘으로만은 어렵고 양쪽이 다 현명하고 정직하게 내 마음과 상대의 마음을
두루 살펴야 한다고 생각해.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야 해방구 운운 하면 되겠냐구!
왜 이렇게 화가 나지?
감사한 마음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화림선배님, 명제 선배님
과분하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잘난 척 ' 저도 늘 하고 싶지요.
앞니곱니 아무리 꼽아봐도 '척' 이나마 할 게 없습니다.
일본에 갔을 때가 삼월이었어요.
그해 사월에 우리아이가 다니는 소학교에서 봄소풍을 갔어요.
학교에서 소풍준비물에는 도시락과 물, 타올 한장, 보자기만한 자리가 전부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는 한국식으로 주전부리거리도 잔뜩 넣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도시락과 물만 먹고 가지고 간것을 그대로 가지고 왔어요.
음료수를 먹는 아이가 없고, 과자를 먹는 아이도 없어서 못 먹었다네요.
아무도 그런걸 싸오지 않았대요,
학교에서는 혹시 준비를 못 해와서 위축되거나, 자랑할 만한 것을 싸가지고 와서 우월감을 가지는 아이가 없도록
일체 가지고 오지 못하게 했던거지요. 일본의 아이들은 벤토와 물만 가지고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글을 쓸 때 그런 생각은 합니다.
쓰는 사람 읽는 사람 모두 위축감이나 우월감은 갖게 하고싶지않다는 생각이요.
화림이 언니 !
전찻간에서 제가 저지른 성추행 사건말씀하시는거지요?
그게 언제적 야긴데 잊어버리시지도 않고.
신입생들이 들으면 뭔 얘긴가 할텐데요. 특히 ㅇ ㅈ ㅎ
궁금해 하실 분들을 위해 끌어오고 싶어도 하두 오래되서 어디 처박혔는지 당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