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이 방은
짧게 스쳐간 생각이나
텔레비전을 보며 느꼈던 감동이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얻은 깨달음 등...
우리 삶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귀한 것이 분명하나
자칫하다 보면 놓쳐버리기 쉬운 일상의 한 귀퉁이를 잡아두는 메모장입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도 좋고
자기의 기억 창고에 저장을 하기 위한 암호같은 독백도 좋습니다.
그저 메모를 하듯이 편하게 쓰시면 됩니다.
갈수록 시간은 더욱 빨리 달려만 가고
우리 머릿 속 기억 주머니의 끈은 어느새 느슨해져
듣고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을 제대로 간수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떠오른 생각을 어떻게 하면 오래 잡아둘 수 있을까?.
언뜻 스쳐가는 좋은 생각들과
아주 짧은 순간에 얻은 깨달음을 기록할 수 있다면
우리 삶에서 남긴 큰 이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생각,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허망하게 잊혀지지 않도록
문득 떠오르는대로 이 메모장에다
스쳐가는 단상들을 꽉 붙잡아 두시기 바랍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
게시판 관리상 뭐가 좋고 나쁘고는 전혀 없어.
그냥 잘 다듬어진 완성글을 여기에 묻어두기 아깝다는 것이지.
나도 이 방에서 생각의 씨앗을 찾아 글감 삼은 게 많아.
그냥 이 방은 스케치북으로 주 ~~욱 사용하고
그 중에서 내 놓고 싶은 건 건져내서 발표하시라고.
이것도 순전히 내 생각이니 니 맘대로 하셈 ~
- 어머니 ~ 저 이거 지금 먹어도 돼요?
- 물론이지, 너 먹으라고 사다 놓은 건데 뭐. 내가 깎아 줄까?
시도때도 없이 사철 나오는 과일이지만 그래도 제철 참외는 첫물이라 제법 비싸게 주고 샀다.
입덧은 안하지만 그래도 입맛이 변한 며느리가 먹고 싶다고 하길래 큰 맘 먹고...
아삭아삭 참외를 맛있게 먹는 새아기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 너는 참 좋겠다.
시엄마한테 뭐가 먹고 싶다는 말도 할 수 있어서...
나는 새댁 시절에 한번도 시어머니 앞에서 뭐가 먹고 싶다는 말을 해 보지 못했다.
시댁에 가면 나는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늘 겉돌았다.
먹는 것도 시늉만, 자는 것도 시늉만 하며 내 감정도 절대로 표현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자니 시댁에 머무르는 시간 내내 바늘 위에 서 있는 것처럼 편하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적진에 홀로 남겨진 졸병처럼 생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때 나는 왜 그랬을까?
찬정이의 <어무이 독 이야기>를 잘 읽었다.
나는 그 어머니의 독에 대한 마음을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옛날 살림하는 여자들에게 항아리는 지금 우리의 다용도실 가구 같은 것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효소 만드는 후배가 있어서 한 십년 전에 항아리를 구하러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걸 보았다.
지금은 퇴임하신 선생님 집에 허리가 불룩한 큰 항아리가 있어서
그거 쓰지도 않는데 주지요 했더니
눈이 둥그래지면서 그건 안돼 하는 거였다.
뭐든지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분의 반응이 낯설어서
뭐해? 한 구석만 차지하고... 했더니
아냐, 거기에 중요한 거 다 있어 하는 거였다.
우리 시어머니 살림에도 장독간 빈 항아리들이 모두 창고였다.
별 거 별 거 다 들어 있었다.
우리들이 시골 왔다 갈 때 주려고 구메구메 싸 놓으신 것들.
너무나 오래 되어서 비닐조차도 삭아서 구멍이 나 있는 것들.
항아리 속에서 어머니가 말리고 저장해 놓으신 것들이
햇빛이나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구멍을 통해 들락거리는 공기를 통해
어머니 정성과 함께 발효되고 있었던 건 아닌지.....
값으로 매길 수는 없어도, 그 이상의 것.
그 이상의 것, 그것.
우리가 가늠할 수도 없는 그것.
그것이 넓은 항아리 속에서 점잖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아닌지.....
우리 어머니의 물도가지(우리어머니는 그렇게 말합니다)애착은 이해하고도 남지요.
비싸고 좋은 게 아니어도 각별히 지녀 두고 싶은 건 누구나 있잖아요.
우리 엄마가 나 시집올 때 조각보를 모아 만들어 주신 서랍장의 옷 덮게라든지
상보, 수저집은 평생 지녀두려고 합니다. 엄마 솜씨를 다시는 얻어 볼 수 없으니까요.
우리 어머니 살림은 도회지에서 낙향하시면서 한번,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하시면서 또 한번
간추려졌는데도 나이 드시면서 쓸 일이 없어진 것들이 많아요.
저는 며느리라 혹시 오해하시고 서운해 하실까봐 말은 못 하는데 사실은 어머니가 근력이나 정신이 그만하실 때
단촐하게 정리를 하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언제나 하지요.
일본 사람들은 자기의 살림을 누가 간섭하거나 들춰보는 걸 대경질색합니다.
혼자 사는 노인들은 사후(死後)나 시설에 들어가고 난 후 자식들이 구석 구석 들추어내는 것도 싫고,
누군가 치워야 하는 것도 폐를 끼치는 일이라 여겨서 아직 건강한데도 정리를 해서 정말 단촐하게
해놓고 사는 사람들 많아요. 그런 걸 봐서 그런지 우리 어머니도 당신이 찬찬히 정리를 하시면 좋을텐데요.
오늘 밤 자던 잠에 갔으면 좋겠다고 말은 하시면서도 앞으로 한 생전 사실 것 처럼 이불장에 이불도 가득,
옷장엔 안 입는 옷도 가득.
손주들이 연휴맞은 에미랑 즐겁게 지내는 이번 주말은
난 아주 널널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우.
이 방에서 주고받는 이야기속에 끼여들고픈 생각에 들어와
덕분에......... 이곳서도 함께 사시다 가신 시어머니 장독이야기가 하고싶네
그야말로 팔십년이 넘은 장독들
두개는 땅속에 묻어두고 짠지 항아리로
한개는 아직도 장독대에서 메밀푸대(십년도 넘어가도 발아가 된다네요)가 두어자루 담겨있지요.
수없이 끌려다니다 정착한 곳이 이곳인데 우리 나이먹어 아파트라도 건너가면
장독의 운명도 어이될지 모르겄지........걱정도 팔자인 사람 하는 말이라네.
신 동춘 시인의 시 하나 올려봄세.
항아리 속
-신동춘
사기 항아리, 하얀 속살에
자잘한 물살로 부서지는 건
간밤의 갈기갈기 찢겨나간 개꿈 나부랭이
오만 병 흔들어 깨운 설익은 바람소리
그 바람 가신 뒤 항아리 속은
둥글고 오지고, 서늘한 안 구석은
늘 그러하시던 어머니 속
어머니가 두고 가신 항아리 속
은희 언니 !
작년에 언니가 사시는 집이 겨울에 춥다고 아파트로 옮길까 어쩔까 하신다고 봄날에 얘기하신 적이 있지요?
그 글을 보고 언니네 대물림해 온 살림이 꽤 있을텐데 어쩌나 ~. 그런 걱정을 했답니다.
항아리가 그런 마른 것을 보관하는 저장고이기도 했어요.
저희 시이모가 아랫동네에 사시는데 참기름 짰다고 한병 주실 때도 소금독에 묻어놨던 걸 꺼내주셨고,
닭장사 오면 사달라고 부탁해 놓은(방목하는 산란용 닭이 노계가 되면 닭백숙용으로 파는 장사가
가끔씩 아랫동네에 온다고 해서) 닭도 장독대 빈 독속에 있으니 가져 가라고 전화를 하십니다.
하루 죙일 집을 비울 때 아니면 대문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떠돌이 고양이 때문에 밖에다 그냥 놔둘 수
없는 것들의 보관처로는 항아리속이 아주 맞춤입니다.
저도 시장갔다 오며 도토리묵 사서 한 모 덜어드리려다 안 계시면 빈 항아리 속에다 넣어 두고 오고,
잡채해서 드리려고 갔다 안 계시면 그 안에 넣어 두고 나중에 전화하면 되지요.
전엔 김장독으로 쓰고, 장 담고, 멸치젓 내리던 항아리들이었을텐데 지금은 거의가 빈 독입니다.
찬정아~
그러게말야.........겨울만 되면 산이할아버지 협심증에 부정맥에
위협을 느낄정도로 추위에 점점 더 맥을 못추니 걱정이 태산이 되곤해서 그리
생각하게되곤 했어.
거의 둘만 사니 아픈 사람이나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나 걱정이 되고했지
그런데 웃기는것이 봄만 되면 울안의 생명들이 소생하고 온갖 꽃들이 눈을 환하게 해주니
또 생각이 바뀌고.........등짝에 핫팩을 꼭 부쳐야 등이 시립지않다던 것도 깜쪽같이 나아지고
봄날만 같아라 인데...........올 겨울은 더 추울거라는 예보라서 걱정이다.
겨울에 따듯한 나라로 서너달 옮겨가서 살어보나 그러고 있단다.
찬정이는 좋겠다 사는곳이 그래도 따듯한곳이고 집도 새집이고말야
산이 할아버지는 죽더라도 아파트에서 못산다 하는 고집인데...그러나저러나 누가 이집을 맡아 살겠나 싶기도해요.
여튼지간에 아직 겨울이 되려면 몇달 여유가 있으니 그안에 어찌 되겄지 하네.
그러니 장독은 여차 문제지 싶기도 하지뭐야.
옛 물건 작년에도 재활용 26 봉투나 처분했고 앞으로도 또 해야되요.
우리 시엄니 남기고 가신 목화솜 요, 이불은 잘 틀어서 보료요로 만들었고
몇가지 옷중 거의 새옷은 몇벌 내가 챙겨 입기도 하고 그러지..........돌아가시고
시엄니 주무시던 침대에서 며칠 지냈지....돌아가시기전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서
아직도 그 침대를 못버리고 있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처분은 해야 할 것같아............에구....
난.....
엄니 가시곤 엄니 손끝이 닿은것은 다 치웠습니다.
당신 17세 여고시절에 수놓았던 동양자수 액자까지도,
두분사진만은 큰오빠네로 옮기고,
주택사시다가 아파트로 옮기면서 당신 세간 반은 치우고
또 나랑 합치면서 나머지의 반은 치우고 .....
나머지 반을 트럭으로 치울땐 속이 시원했는데
요즘 새록새록 생각나는것이 있습니다.
엄니 소녀시절 수놓았을 동양자수 몇점.
나랑 합칠때 치웠던 독,항아리들.
댓자 소쿠리,채반 등등....
에구 어쩌것어요.
작년에 치울때만 해도 속이 시원했는데
그게 또 그렇지 않더라고요.
어머니 쓰시던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이젠 우리가 쓰던 물건도 슬슬 정리해야 한다구요.
필요없는 것들은 속히 제 임자 찾아 나눠주고
앨범이며 액자며 더 이상 만들이 말고
되도록 살림살이를 단출하게 줄여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니 참...
딴 살 림
건너편 저수지는 늘 만수(滿水)다.
물이 흔한 동네라서 농사에 쓰이기보다는 산불 진화하는 소방 헬기의 소화수로서의 역할이 더 막중하다.
드물게지만 빨간 소방 헬기가 수면 가까이까지 내려와 커다란 물주머니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우기인 요즘은 든 물 만큼 넘쳐 내보내는 수문만이 제 몫의 일을 하고 있다.
저수지 뚝 아래 넓은 들은 주거 제한 구역이다.
건축 허가가 날 리 없으니 논과 밭뿐이고 해를 가릴 큰 나무도 없다.
주말이면 민물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저수지 둘레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지만 평소에는 물새들만이 유유히 논다.
우리는 저녁나절 개를 앞세우고 그 곳으로 산보를 간다.
바람에 찬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지난 초봄.
산보중에 보니 뚝 아래쪽 열 평 남짓한 터에 자갈을 깔아 다지고 있었다.
며칠 후엔 콘테이너 하우스가 하나 놓여졌다.
어느 날 보면 위성안테나가 달려 있고, 또 어느 날 보면 듬직한 야외용 탁자가 놓여져 있다.
빨랫줄을 매어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운동복 바지가 널려 있기도 했다.
차양막을 치는 것도 텃밭을 일구는 것도 혼자 하는 듯 했다.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콘테이너 하우스의 주인이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농기구나 넣어 둘 농막이라 하기에는 살림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부도를 내고 도망을 왔나, 마누라 등쌀에 쫓겨났나, 왜 하필이면 물이 가득 담긴 저수지 뚝 아래에다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자 그는 주변에 배수로를 내고 있었다. 남편이 다가가 '수고하십니다' 인사를 건네니
'안 해보던 일을 하려니 힘이 든다 '하면서도 괭이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남편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남자는 지나가다 말을 붙인 우리에게 거리감을 두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그가 엊그제는 자기도 개를 한 마리 키워야겠다며 먼저 말을 걸어 왔다. 내가 궁금해 한다는 걸 알아 차리기나
한 것처럼 기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는 금융기관에서 근무하다 퇴직을 했다고 한다.
자식들 공부도 다 마쳤고, 퇴직하며 받은 목돈으로 가족 생계 위협을 느낄 형편은 아니라고도 했다.
퇴직하고 집에 들어앉아 있어 보니 마냥 좋고 자유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이웃 부인이 아내에게 마실을 왔다가도 현관에서 소근소근 몇 마디 주고 받고는 가버린다.
그의 아내 역시 집에 있는 남편의 눈치를 보며 운신의 폭을 좁혀가는 것 같았다.
아내는 하루 종일 남편의 먹을 거리를 장만하랴, 집안을 깔끔히 치우랴 종종걸음을 치지만 중년을 넘기는
아내도 남편과 늘 같이 있는 걸 즐거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들어앉은 건 나만이 아니고 본의 아니게 아내까지 들어 앉힌 꼴이 되었다.
시간제 아르바이트라도 나가볼까 생각했지만 그것도 쉬운 노릇은 아니었다.
생각 끝에 내린 묘안이 나만의 아지트를 마련해서 공공연하고 명분있는 딴살림을 차리는 것이었다.
허름한 땅을 사겠다는 데에는 아내도 말리지 않았다.
한 달여 발품을 팔고 다녀 보아도 어지간한 땅은 거의 다 올라 있었다.
텃밭과 과실수 몇 그루 심으려면 삼사백 평은 있어야 했다.
예산에 맞추어 산 땅이 저수지 뚝 아래인 이 곳이었다.
저수지 뚝만 안 무너진다면 건축 허가가 안 난다는 것 쯤은 상관없었다.
부동산소개소에서 그 근처에 뭐가(?) 들어서는데 저수지가 내내 있겠냐고 흘리듯 하던 말에도 솔깃했다
이동식 콘테이너 하우스를 놓고 거처로 삼겠다는 말엔 아내가 펄쩍 뛰었다.
그는 단호히 밀어 붙였다. 매일 하나 둘 살림살이를 장만하거나 옮겨 왔다.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가져오고, 바둑판과 볼만한 책도 실어 오고 냉장고도 들여놨다.
아이 둘을 낳고 내 집을 처음 장만했던 그 때처럼 의욕과 생기가 났다.
처음 와 봤을 때는 심란한 얼굴을 하던 아내가 요즘은 슬그머니 자신의 것까지 챙겨다 놓는다.
스스럼없이 친구들을 불러서 밭일도 시키고 밤낚시를 가기도 한다.
어둘 무렵 퇴근하는 기분으로 집을 향해 가는 날도 있는데 포구에 들러 싱싱한 생선을 사가거나
어설픈 솜씨로 가꾼 푸성귀를 가져가면 아내가 반색을 했다.
앞으로는 자신이 낚은 고기를 맛 뵈겠다는 포부도 펴 보였다.
서너 달 지내보니 비록 얼마간 두려움이 상존하는 뚝방 밑 집이지만 마음은 한결 여유롭고 편하다는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는 부도를 내고 도망 온 사람도 아니고, 가족의 박해를 못 이겨 뛰쳐 나온 백수의 가장도 아니었다.
욕심 안 부리고 자신의 처지에 맞는 생존의 돌파구를 찾아 즐기는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부럽다고 했다.
"그렇게 부러우면 당신도 우리 터 안에 오두막 하나 지어 딴살림을 차리시구랴.
설마 꼭 저수지 뚝 아래여야 하는 건 아니겠죠."
퉁박을 주면서도 나 역시 나만의 오두막 아지트를 갖고 싶다는 욕망이 몽실몽실 피어 오르고 있었다
나두 잘 읽었수.
찬정이네라면 그냥 마당에 하나 지으면 되겠네.
나두 요즘 마당 조금만 있는 집이라면 컨테이너 하우스 작은 거 하나 들여놓고 애들 놀이터로 삼고 싶더라.
친구가 제주도 만평이나 되는 땅에 작은 오래 된 집이 있는데 거기다 천연염색공방을 차린다고 하더니
집은 수리를 했지만 비좁으니까 10평짜리 컨테이너 하우스를 하나 들여 놓았대(난 아직 못봤는데)
칸막아서 방하나 만들고 주방 욕실 만들어서 식사는 거기서 하고 잠은 옛집에 가서 잔다네.
지난 번에 간 방아섬 주인도 그러던데 8평인가 열평인가 까지는 허가가 없어도 지을 수 있다고 그러더라구요.
코스트코에 갔더니 아예 크기대로 창고도 팔던데 창문도 있고 선반도 있고 너무 귀엽더라.
천정아~
나두~ 아주 흥미있게 읽었어.
그 사람 현명하고 배려심도 많은 사람 같다.
배려심~ 고것이 삶의 아주 중요한 덕목이더라.
주의 사람을 힘들게도 하고 행복하게도 하니 말이야.
우리 다 아무도 모르는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은 꿈이 있나봐.
어릴적 왜 책상 밑이나 다락이나 ~ 하다못해 우산을 펴놓고 그 속에서 노는걸 좋아했으니~ ㅎㅎ
명옥이도 잘 지내고 있구나~
5기 방에 너의 댓글이 없어서 허전~ ㅎㅎ~ 어디 갔나 했어.
뒤터에 공간이 많아도 더 이상 뭐 심기 귀찮아서 놔뒀는데 옆짐 아짐이 날 꼬드겨~
서리태를 심으면 ~ 아니 꽂아만 놓으면 여름 내내 콩국도 해먹고 동생들도 나눠주고 할텐데 한봉다리만 사오면 자기가 도와준다고 심으라고~
하도 성화라 사서 하룻밤 불려서 오늘 심기로 했는데 ~ 이게 잘하는 짓인가~
왜냐면 자고 나면 손이 뻑뻑 ~ 삼년이면 좋다고 난리다가도 지쳐서 다들 안한다는 말이 맞는거 같기도 하고~
팔뚝은 점점 굵어지고 얼굴은 기미도 더 끼고 ~ 우째야 쓰까이~
누구의 아지트가 되든 우리 터 안에 작은 별채 하나 지으려고는 하는데
무허가로 살짝 지으려니까 이웃의 눈치를 봐야 해서(이웃에서 민원이 들어가면 원상복구해야 함)
뜸을 들이고 있어요. 가을쯤엔 저질러 볼까 생각중입니다.
개복숭아는 다 따서 처리했어요
거제도는 중고 물품 사고 팔거나, 교환, 공짜 나눔의 네트워크가 있어요.
지난번 묵은 김치도 거기에 올려 두 통을 네 명에게 선심 썼고,
개복숭아도 거기다 올렸더니 벌떼같이 신청을 해서 30KG정도 나눠줬어요.
얼마전 ' 천기누설 ' 이라는 테레비 프로에서 개복숭아 약성에 대해 나왔다데요.
예전엔 산에 야생 복숭아나무가 더러 있었는데 몸에 좋다고 하니 요즘은 그것도 찾아볼 수가 없다나봐요.
내가 '.개복숭아 효소 담그실 분 ' 하고 올렸더니 금방 여덜 명이 신청을 했더라구요.
어차피 신청한 모든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양은 안되고,
보통이라면 앞서 신청을 한 사람부터 주어야 하겠지만 몇 시간 기다렸다가 뒤에 신청한 사람부터
준다고 개별 연락을 했어요.
세상의 하고 많은 일들이 남보다 잽싼 사람의 차지가 되는 게 저는 맘에 안 들거든요.
좀 굼뜨고 쭈빗거리는 사람의 차지도 있어야 되지 싶어서.
내 나무에서 내가 수고해서 거둔 거,
맛 좋은 수밀도도 아닌 개복숭아 가지고 주는 순서 정하는 거쯤이야 내 맘대로 한들 뭐 어떻겠어요.
그래도 일빠에겐 줬습니다.
그런 탓으로 일년 가까이 이 길을 지나 뒷산 산책을 다녔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난 겨울. 숲이 앙상해지자 잡목들 사이에 바윗돌 두 개가 비스듬히 기운채로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 '저게 뭐지?' 뒤엉켜 마구 뻗은 청미래 가시 덩굴을 걷어가며 가까이 가 보았다.
인적 없는 외진 곳도 아니건만 사람이 가까이 다가간 흔적이 없다.
잡목과 가시 덩굴 속 바윗돌은 다름 아닌 ' 佐藤先生之墓' (사토선생지묘) 라고 새겨진 돌비석이었다.
'해방 전 것이겠지?' '모르긴 해도 그럴거야 ' 곱게 다듬지도 못한 납작한 바윗돌에 이름만 새겨져 있을 뿐
생년(生年)도 졸일(卒日)도 없다.
돌보지 않은 비석엔 해묵은 돌이끼가 더께처럼 덮여 있고, 기운 비석 앞에는 상수리 나무가 자라고 있다.
어쩌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역의 산자락 끝에 자취를 남기게 되었을까?
돌비석 세워주며 눈물 훔치던 이승의 인연은 어디 갔을까?
이토록 무심히 내버려 둘거라면 진즉에 고국으로 보내는 편이 낫지않았을까?
조선반도의 남단. 작은 포구 마을에 흘러 들어 온 사토선생을 마음속으로 그려 본다.
그는 자국이 전쟁의 광기(狂氣)로 인간이 피폐해 가는데 염증을 느끼고 자원하여 이 곳에 온 심상소학교 선생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식민통치라는 명목으로 징발, 말살, 유린, 수탈하는 일본의 행태에 혐오를 느낀다.
잘못되어 가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자신의 입장이 늘 괴롭다.
이 나라에 애정이 가고, 자신 스스로 동화되어 가면서도 겉으로 드러내놓고 좋아하지 못하여 외롭다.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마음을 쏟으며 어지러운 세상을 잊을 뿐이다.
낯 모르는 이방인 사토선생은 내 마음에 그렇게 정해졌다. 남 다른 연민을 느낀다.
일본에서 십여 년을 살다가 돌아오며 아이를 그 곳에 두고 왔다.
두고 왔다고 하는 것은 부모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아이는 그 곳에서 제가 선택한 길을 가고 있다.
어릴 적부터 그 나라 교육과 문화를 익히며 자란 아이다.
한국인의 핏줄을 타고 났고, 부모의 슬하에 있던 성장 배경이 한국적일 뿐 그 아이를 움직이는 소프트웨어는
우리네 정서만은 아니다. 우린 그런 아이를 두고 ' 심장은 한국산, 머리는 일본제' 라고 말했다.
아들의 연인은 일본인이다. 지극히 전형적인 일본 아가씨다.
그대로 간다면 우리는 일본 여자를 며느리로 보게 될 것이다.
'선대에 독립 운동을 했고, 민족주의가 강한 집안에서 일녀와의 결혼은 고려해 봐야 하지 않겠냐 '고
친정 오라비가 이야기 끝에 슬쩍 제동을 걸었다. ' 교제를 한다는 것이지 당장 결혼한다는 것은 아니라 ' 고
더 이상 할 말을 막았다.
저변 문화가 다른 사람이 가족이 되어서 부딪혀야 하는 어려움이 많이 있을 것이다.
과거의 뼈 아픈 역사나 국가의 첨예한 문제를 두고 정치가나 일부인사의 이권 발언이 가족간 골을 패이게
하지 않을까 지레 걱정스럽기도 하다.
우리 민족은 당했던 과거가 있어서 ' 일본이 좋다, 일본인이 좋다 ' 말하길 주저주저한다. 하물며 결혼을...
그러나 그런 보편적 눈으로 보는 장애물이 가로 놓여 있어도 둘의 사랑을 뜯어 말릴 의사는 없다.
일본에 살며 영주권을 신청했다.
세밀히 기재해야 하는 신청서 끝부분에는 자신의 의지를 간단히 적는 항목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사회적으로는 자국과 일본의 교류와 소통에 일조할 수 있는 가교(架橋)가
되는데 힘을 보태겠다고 적었다.
그것은 서류상 요식적인 말이 아닌 진실성있는 본마음이었다.
영주권을 내주는데 까다로운 일본이 영주권을 내주었다.
그 후 부모는 돌아오고 아이는 홀로 남았다.
젊은 아이이니 제 갈길을 꿋꿋이 간다고는 하지만 어느 사회나 다수 속에 소수로 살기는 외롭고 힘이 든다.
그것이 교제든 결혼이든 말릴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장성한 자식을 위해, 더구나 객지에 따로 있다면 부모로서 잔손 갈 일은 없다. 마음으로 기도할 밖에.
어미가 객을 위해 베푸는 정성이 있으면 객지에 있는 내 자식도 은인을 만나겠거니 하는 생각을
늘 마음에 두고 산다. 아니다. 그게 어디 내 자식만을 위해서랴.
산책길에 조그만 낫과 젖은 수건을 챙겨 들고 나섰다.
돌비석을 닦는다. 두 나라의 수심 가득한 얼룩을 지운다.
가시 덩굴을 걷어 치우고, 해를 가리는 나뭇가지를 베어냈다.
햇살이 돌비석을 비춘다.
백골이 진토된 사토선생의 외로움이 살짝 걷히는 듯하다
우와, 찬정씨 문지방 넘어갔네요.
돌비석에 비추는 햇살 그 구절로
일본과의 지난한 역사를 어찌해야 할지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찬정씨 의견도 짐작 가고요.
참 조오타 이런 좋은 글 우리 홈피에서 만나니 .....
서두르지 않고 가르치려 않지만 참 따뜻한 부드러움
더 힘이 세지요.
찬정씨 글 잘 읽었어요.
잘 안 보여서 복사해서 워드로 옮겨서 봤다우.ㅜㅜ
다음에 글 쓸 땐 좀 크게 써요.^^;;
그래, 나도 찬정씨 맘 완전 동감이야.
우리 조카도 미국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랐는데 얼굴은 완전 순이야.
부모는 미국인과 결혼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난 절대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
사람이 마음으로 살지 어떻게 몸으로만 산답니까?
부모가 아이를 생각할 때 어디까지 분리해야 할지 정말 어려운 노릇이지만
참으로 현명하게 판단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일본인 이야기.
나도 일본 갔을 때 김옥균 묘비를 돌봐 주는 일본인 모임 이야기를 듣고
참 마음이 뭐랄까 뭉클하달까 복잡하달까 그랬어.
개인사, 사회사....
좋은 글 보며 드는 생각.
찬정씨는 정말 알토란 같은 사람이여.
봄날 게시판지기 춘선 언니
워드에 쓴 걸 옮겼더니 잘 안보이고 행간이 안 맞아서 밑에 다시 올리고
윗 글을 지우려고 하니 삭제가 안 됩니다.
게시판지기인 춘선 언니는 지금 교회에 계실턴디 아이고 ! 이 남사시러븐 노릇을 우야믄 좋을지.
춘선 언니! 집에 오시면 두 개중 윗 글을 후딱 지워주시오이.
지우려고 했는데 그 밑에 댓글로 달린 글이 있어서 못 지운대.
밑의 글을 복사해 두고 먼저 지운 후에 윗글 지우고
그렇게 정리한 후에 복사해 둔 글을 올려 보셈
내 머리로는 이렇게 하는 수 밖에 생각해 내지 못하것네.
참 좋은 글 썼네 동상 ~
화이팅 ~~
예. 그 방법으로 했더니 지워졌습니다.
명제 언니! 힘을 실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리스 여행 잘 다녀 오세요.
옥규 언니! 몽블랑 트레킹 잘 다녀 오셨네요. 사진 잘 봤습니다.
비바람 속 산행, 입은 옷 마저 부실하고 젖었다면 저체온증으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아찔한 일이지요.
고생을 좀 하셨겠지만 두고 두고 울궈먹고 또 울궈먹을 좋은 추억거리를 마련하셔서 든든하시겠습니다.
춘선 언니! 주말 드라마 '꽃들의 전쟁' 을 보세요? 저는 보는데.
실은 볼 때마다 짜증스럽고 스트레스 받는 드라마예요.
요즘은 드라마 만들어 세계 각국에 팔아서 짭짤한 수익을 올린다고 하잖아요.
외화 벌이도 좋지만 이런 찌질이 같은 역사 드라마는제발 팔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극이라는 게 말예요. 실록에 픽션을 붙여 드라마화한다지만 너무 말초적 흥미 위주에 촛점을 맞추네요.
이건 뭐 우리 상식으론 말도 안되게 조선의 왕, 조선의 궁을 완전히 개차반을 만들어 놓으니 참.
그런 드라마를 보는 외국 사람들은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특히 일본에 드라마 수출 많이 하는데
그 따위 드라마 만들어 외국에 파는 건 정말 부끄러워요.
찬정아~
언제나 네 글을 읽으면 그냥 묻어두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 글도 마음을 움직이고 따듯하게 덥혀준다.
일본 사람들 밉다고 흥분할 일만도 아니고 바로 이런 묘비를 닦는 마음들이 결국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 아닐까?
세상을 움직이는건 힘보다는 아름다운 마음일꺼야.
찬정이 화이팅~
난 꽃들의 전쟁 안 본다네.
네 말마따나 너무 찌질해서 짜증나 못 보겠어.
처음 시작할 땐 조금 기대했었지.
그런데 갈수록 스토리가 가관이야.
억지로 눈 부릅뜨고 표독스런 연기를 하는 배유들도 꼴불견이고.
암튼 보면서 열 받기 싫어서 아예 채널을 패스하지 ㅋ
대충 드라마 도입 부분을 보면 그 다음 이야기랑 대사가 줄줄 꿰어지는 건 나이 덕분이겠지?
화림이 언니 ! 고맙습니다.
저는 요즘 꽃씨 받는 일에 아주 열심입니다. 우리집에 핀 꽃 씨도 받고,
우리집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천주교 성지 조성하는 곳이 있어요.
거기 산책 가서도 받고, 남의 마당 기웃거려 이쁜 꽃이 있으면 씨앗 좀 받아도 되냐고 물어 봅니다.
지금 우리집엔 .작년에 일본에서 받아 온 꽃씨(이름은 몰라요)로 심은 게 피어 화사합니다.
일년초이면서도 꽃대가 얼마나 튼실하고 무성하게 피는지 몰라요.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서리 올 때까지 필것 같아요.
꽃씨 많이 받아 놨다가 만나면 드릴께요.
와~~신난다 ~ 약속~
그것도 정성이고 그 마음 넘 고마워.
근데 뭐든 무리하면 안되겠더라.
싹나는거 너무 신기하고 열매맺는거 또 신기하고 좋아서 너무 무리 했나봐.
갑자기 손을 많이 쓰니까 엄지 방아쇠 또 고장나서 요즘 병원에서 체외충격파 치료 받고 있어.
그게 수술 안하고 고치는 치료래.
참~ 쉬운게 없더라.
그래서 우리 동네가 도시계획 들어가서 남주면 골치 아프고 그냥 밭대신 전부 꽃밭을 만들어버릴까?
그런 생각도 했단다.
농작물을 안심으면 잡초 투성이고 ~ 요즘 손아프다고 그냥 놔뒀더니 완전 정글이 됐어.
우찌됬든 꽃씨 ~ 넘 고마워.
우리 동기회 회장님을 이렇게 깊숙하고 은밀한 곳(?)에서 뵙게 되다니.
요로코롬 켜켜히 이야기가 쌓여가는 방이 홈피 안에 있는줄을 모르는 동문님들이 많을거야.
나부터도 늘 보는 게시판만 들여다 보고 후딱 나가니까.
어제는 예정에 없던 거제 일주를했네.
우리집에서 거의 반대편에 있는 도예촌에 도자기 체험을 가는데 갈 때는 오른쪽으로 돌고
올 때는 왼쪽을 돌아 왔더니 일주를 하게 되었단 얘기지. 여유부려서 구경도 해가며.
오다가 해금강에 있는 커피숍에 들렀는데 전망 끝내주더라.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한번 같이 가자.
아이는 열살 되기를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지루했는지 모른다.
열살 먹고 나면 대단한 일이 생길거라고 기대해서 그랬을까?
더디 가는 세월 속에서 빨리 나이 먹기를 갈망하며 빠듯이 자라 사춘기 터널에 들어섰다.
짝사랑, 풋사랑, 이기적인 사랑, 열벙같은 사랑 등을 통해 어른이 되어갔다.
간신히 사춘기를 빠져 나와 어른이 된 아이는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되는 일은 허물을 벗는 일이었다.
단단히 덮인 알곡의 껍데기를 벗기는 것처럼 아프고 힘들었다.
엄마는 여자가 아니야.
엄마는 사람도 아니야.
그냥 엄마야.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일. 산고(産苦.)
허공에다 집 짓고 밑그림 없이 조각품을 만드는 일, 육아.
껍데기만 남을 때까지 제 살을 다 파서 먹이는 거미처럼 되는 일, 교육.
탯줄 가르듯 썩둑 베어내야 둘 다 편한데 그렇게 하지 못해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일, 독립
아이가 낳은 아이가 또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누구의 것인가.
또 아이를 낳은 아이는 아이가 겪은 과정을 그대로 겪어갈게다.
할미가 되는 일도 거저는 아니다.
이제 더 벗을 허물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그 나이가 되어 보고 그 입장이 되어 봐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일이 있다.
상상력을 동원하고 추리력으로 무장해도 도저히 알 수 없는 것.
오직 겪어보고 살아봐야만 알 수 있다.
이래서 세월이 고맙다.
춘선후배,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나도" beaten rice " 가 무언가 궁굼해서
위키 피디아 찾아 보았더니 납작하게 누른 쌀이더군요.
소화가 쉽고 해서 간식으로도 해 먹고 한다고 해요 주로 인도 방글라데시 지역이에서
덕분에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위키 백과사전에서 퍼옴.
어머나, 혜경 선배님 ~
그게 신조어가 아니었네요. ㅋ
혜경 선배님. ~
지난 주말에 교회 영어예배에서 새로 한국에 온 외국인 성도들과 함께
1박 2일로 강원도 인제에 있는 한국 DMZ평화생명동산과
양구에 있는 제 4땅굴, 을지전망대,
그리고 냇강체험마을 등을 다녀왔답니다.
외국인들에게 한국 문화체험도 시켜주면서 지연스레 친해지는 기회를 만든거죠.
냇강 체험마을에서는 여러가지 체험을 할 수 있는데
우리는 떡메로 쳐서 인절미 만들기,
수수부꾸미 만들기,
감자전 부치기,
전통혼례복 입기 등을 했어요.
떡판에다 잘 쪄낸 찰밥을 놓고 힘 좋은 젊은이들이 돌아가며 떡메를 쳤어요.
힘들다고 끙끙거리면서도 하하하 호호호 ~
다 된 떡은 개성대로 잘라 콩고물에 녹두고물에 화장을 시켰고요. ㅋ
그들이 떡을 만드는 사이 저는 몇명의 선발된 인원을 데리고 요리실로 갔어요.
익반죽 해 놓은 수수가루 반죽을 동그랗게 만들어 기름칠 한 후라이 팬에 납작하게 잘 펴고
양면이 다 익도록 두번 뒤집어 준 후에
그 위에다 잘 삶아 간 맞춰 놓은 팥 소를 놓고 반으로 접어서 반달 모양을 만들었죠.
그 사이 떡을 다 만든 일행들이 모두 들어와서 부꾸미 만들기에 합류했고요.
한창 부꾸미를 만들고 있는데 루마니아에서 온 유학생 총각이 제게 이렇게 물었어요.
- 이것도 Beaten rice 에요? (물론 영어 문장으로요 ㅎ)
처음엔 그게 뭔소린지 몰랐어요.
매맞은 밥?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한참 유추한 끝에 말 뜻을 알았어요.
밖에서 인절미 만드는 걸 본 터라 떡을 <매맞은 밥>이라고 표현한거예요. ㅋ
참 기발한 네이밍이죠?
토요일 저녁에 때려서 만든 그 떡 남은 걸 싸가지고 와서 주일 예배 후 교회에서도 나눠 먹었어요.
그 얘길 사람들에게 해줬더니 다들 재미있어 했고요.
그런데 오늘 여기 들어오니 혜경 선배님께서 좋은 자료를 찾아다 놓으셨네요.
저건 아마도 매맞은 쌀이라고 해야겠죠? ㅎㅎ
rice 는 밥도 되고 쌀도 되네요.
암튼...
앞으로는 인절미를 <매맞은 밥>이라고 부를까 봐요. 선배님 ~
하! 그러니까 정답은 "인절미"였군요.
rice 가 쌀도 되고 밥도 되는데
주로 밥일때는 "steamed rice 혹은 fried rice 라고 말 하지요
살다 보면 선물처럼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오래 마음에 품고 바라던 일이 꿈처럼 휘리릭 ~ 이루어지는 순간.
이래서 인생은 참 살아보고 싶은 여정이다.
산다는 것이 마음먹기에 따라 참 다르게 느껴진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 내공이 생겨 단단해지면 살기가 훨씬 수월하다.
세상에 거저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장로부부 신년하례회 가는 길이다.
토요일 저녁, 호텔이 모여 있는 유성 옛길은 늘 차가 밀린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 있는 자동차의 행렬을 비집고 사람들이 걷는다.
호텔 입구 건널목 빨간 신호등 앞에 사람들이 모여 섰다.
겨울답지 않게 푹한 날씨라고 해도 저녁이 되니 제법 바람이 차다.
어깨를 움츠리고 코트깃을 꽁꽁 여미며 파란불을 기다린다.
이윽고 불이 바뀌었다.
횡단보도 위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었다.
서로 마주보고 걸어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려던 사람들이 길 가운데서 멈췄다.
저편에서 폐지를 가득 실은 리어카가 건너오는 바람에 모두들 비켜 섰다.
비쩍 말라서 체구가 더 작아 보이는 노인의 걸음에 리어카가 힘겹게 끌려간다.
노인의 마른입에 거친 숨이 매달려 있다.
참 안되었구나
너무 힘드시겠네.
아주 짧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람들 속에 끼어 바삐 지나갔다.
매우 천천히 끌려가는 리어카여서 섣불리 밀어주겠다고 나서기도 어려웠다.
불이 다시 바뀌었는데도 차들이 움직이지 못한다.
돌아다 보니 횡단보도 한가운데 리어카가 그대로 서 있다.
엉거주춤 서 있는 노인 앞에 코트를 잘 차려 입은 신사가 마주보고 있다.
자기 목에 둘렀던 목도리를 풀어서 노인의 얼굴과 목을 꽁꽁 여며주고 있다.
멀리서 봐도 알아볼 수 있는 명품 머플러가 마치 붕대처럼 칭칭 감겼다.
신사의 공손한 태도와 자연스러운 손길에 진심이 배어있다.
횡단보도에 다시 파란불이 들어오고 리어카 끄는 노인이 저쪽으로 가고 나서야 그 신사가 건너왔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책에서 본 광경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하네.
사람들 대부분 호텔에 가느라 두툼한 코트에다 머플러까지 갖춘 정장차림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못 본 척 그냥 걸음만 재촉했다.
정말 저런 사람도 있구나...
신년회장으로 꾸민 호텔 연회실 앞에서 그 신사를 또 보았다.
알고보니 그 분은 우리와 그리 가깝지는 않지만 잘 알고 지내는 나장로님이셨다.
평소 말이 없고 온화한 성품인 줄은 알았는데 그렇게 하실 줄은 몰랐다.
횡단보도 건너다 말고 자기 목도리를 풀어 어려운 노인에게 정성껏 묶어 주다니...
우리 식구가 그렇게 했다면 나는 복잡한 횡단보도에서 무슨 짓을 한 거냐고 펄쩍 뛰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노인에게 고급 머플러가 가당키나 한 것이냐고 했을 지도 모른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문득, 야고보서에 있는 이 말씀이 떠올랐다.
말씀은 날카로운 검이 되어 내 마음을 쪼개기 시작한다,
배고픈 사람에게 배부르게 하라, 헐벗은 자에게 따뜻하게 하라고 말로만 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 했다.
유독 그 말씀에 공감하여 형광펜으로 표시해 놓고 줄줄 암송했던 나다.
갑자기 등줄기로 더운 기운이 한 줄기 훅 ~지나가며 얼굴이 화끈하다.
나는 아직 멀었다.
.
춘선아~참 아름다운 장면을 목격했구나.
그분이 바로 멋쟁이!!!
나라도 복잡한 횡단보도에서 뭔 짓이래요?하지 않겠니.
" 나는 아직 멀었다 "를 되뇌이는 너의 그맘씨 아름다워라~~~
딱 이맘때다.
한낮엔 제법 봄의 온기가 퍼져도 아침 저녁엔 옷깃을 세워야 하는 계절의 언저리.
올해 스믈여덟 살된 아들아이 출산을 한 달여 앞두고 있는데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기차 소화물로 해산후에 먹을 미역을 보냈으니 영등포역에 가서 찾으라는 것이다.
'엑 ! 나는 기차역이라면 개찰구와 플랫홈밖에 모르는데 '
소화물을 어디가서 어떻게 찾아야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
남편에게 직장 안 가고 소화물 찾아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일뿐더러 그 역시도 소화물을 찾아봤을 리 없다.
어째든 눈이 있고, 입이 있으니 가서 물어 보기로 했다.
부른 배를 안고 물어 물어 찾아간 소화물 보관소에서 내 배 둘레 보다 더 큰 미역부대를 건네 받았다.
부피에 비해 무게는 그다지 무겁지 않아서
버스를 타고 쉬엄쉬엄 집에까지 가지고 왔다.
당시 부산에 사시던 어머니가 친정인 거제도 해녀에게 미리 부탁하셨다고 한다.
' 해산하는 며느리에게 먹일 것이니 좋은 미역을 따서 잘 말려 주구랴. '
산구완을 해주신 친정어머니는 커다란 국 대접으로 그득하게 떠주시면서
' 미역이 얼마나 맛있고 좋은지 몰라. 산모는 미역국만큼 좋은 것이 없다. 잘 먹어라.'
그렇지않아도 끼니마다 먹는 미역국에 물려가는데 앞으로도 줄창 먹으라니 짜증이 더럭 나서
아무리 좋은들 미역은 미역이지, 미역이 산삼이라도 되느냐고 쥐어박는 소리를 했다.
내가 그런 공 모르는 소리를 해도 친정 어머니는 늘 상머리에 앉아 간난쟁이를 안아 어르고 계시다가
남기지 않고 다 먹는 걸 보고나서야 상을 내 가셨다.
류마치스 신경통을 앓아 성치않은 손으로도
산모 미역국은 가위나 칼로 자르지 않는다며 손으로 일일이 뜯어서 바락바락 주물러 빠셨다
삼칠일 내내 정성으로 미역국 끓여 주시던 친정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가셨다.
얼마전 거제도를 여행중이던 선배님이 해산을 앞둔 며느리에게 줄 미역을 사셨다.
요리 조리 살펴 보시더니 제일 좋은 것이냐고 물으셨다.
그리고 길다란 장미역 한장이 접혀서 들어있는 미역 한 봉지를 사셨다.
뒤에서 물끄러미 보고 있던 내가
'우리 어머니는 소화물로 태산같이 보내셨는데 에개 ~ 한 봉지밖에 안 사시네'
양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스믈여덟 해전 우리 어머니가 해금강 해녀에게 미리 부탁해 놓으셨던
미역처럼 맛이 좋기를...
여기는 오늘 아침나절부터 비가 옵니다.
낼 오전까지 올거라네요.
날이 궂으니 밖에 나가기도 뭣해서 오랫만에 여기에 들어와 끄적 끄적 몇 줄 올리고보니
엊그제 어머니상 치루고 시도때도 없이 눈시울 젖을 우리 새내기 봄님
현숙이를 또 울리는게 아닌가 싶네요. 지울까, 으쩌까
삼월초순 나흘간 묵어 갈 손님 네사람이 오기로 해서 집안일이 좀 많습니다.
손님들 이름은 아리가토상, 고자이마스상, 스미마셍상, 모시모시상 입니다. 호호
일본에서 오랫동안 사귄 친구들이라 허물은 없어도
생활 문화가 다르니 신경은 많이 쓰입니다.
지우긴 뭘 지워?
어차피 흘릴 눈물이라면 빨리 빼는 게 낫더라.
속에 고인 물 퍼내듯이 시도때도 없이 장소불문하고 펑펑 쏟아내 버리는 거야.
그러다 보면 슬픔이 스르르 눈처럼 녹아.
마음도 덤덤해지고 ~
암튼... 울고 나면 단단해지는 것이 마음이더라.
아리가토상, 고자이마스상, 스미마셍상, 모시모시상 접대나 잘 하셔.
너무 잘해주려고 기쓰지 말고 쉬엄쉬엄 적당히 ~
오케이?
각시붓꽃
꽃이 피기 전 화살촉 같은 외떡잎 새순만으로는 찾아내기 무리인 줄 알면서도
벌써 일주일째 마른 풀을 헤쳐 가며 찾고 있다.
꽃이 피었더라도 탐스럽거나 눈에 띄게 화려하지 않으니 혹시 못 보고 봄을 넘길까 조바심이 났다.
' 어머나 ! 여기 있네.'
지난 해 봤던대로 양지바른 뫼등걸이(산소 언저리를 이르는경상도 사람들의 사투리)에서 찾았다.
한 송이는 보라색 꽃이 피어 있고, 봉오리 하나가 호젓하게 기다리고 있다.
나는 풀밭에 주저앉아 실눈을 뜨고 두 손으로 꽃을 감싸 쥐었다.
손안에 들어 온 작은 풀꽃 한 송이로 마음속 깊숙이까지 봄 햇살이 퍼졌다.
봉오리는 섬세하고 날렵한 붓끝 같아서 '똑' 꺾어 입술연지를 그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다음날 찾아 오기 위해 언저리를 눈여겨 봐 두는 것도 모자라 나뭇가지를 꽂아 표시해 놓았다.
각시붓꽃에 반한것은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 오던 이 년전 봄이다.
이사 후 아침마다 개를 앞세우고 남편과 뒷산에 올랐다. 우리가 오르는 산길의 양지쪽에는 아랫마을
사람들이 쓴 여러 기의 묘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풀꽃을 그 근처 어딘가에서 처음 보았다. 잡목과 풀이 무성해지기 전이니 이즈음이었다,
인적 드문 무덤가에 핀 기품 있고 단아하면서도 귀여운 매무새의 풀꽃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곳에 가면 각시붓꽃을 찾느라 남의 산소를 타넘어 다니기도 했다.
첫해에는 무슨 꽃인지 이름도 모른채 좋아했고, 그 이듬해에는 사진을 찍어 검색창을 뒤졌다.
그뿐만 아니라 서너 포기를 나뭇가지로 어렵사리 캐다가 뜰 한편에 심었다.
잘 가꾸어 해마다 독차지하고 보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꽃이 지고 그 어여쁜 자태가 사라지자 여느 풀과 구별조차 되지 않았고,
나의 시원찮은 기억력까지 합세하여 각시붓꽃의 흔적은 잡초와 같이 뽑혀 나갔다.
나는 호미 한 자루를 챙겨들고 나섰다
나뭇가지를 꽂아 표시해 놓은 각시붓꽃을 조심스레 캤다.
이번에는 잡초에 묻히지 않도록 자리를 잘 물색해 심었다. 각시붓꽃은 씨가 튀어 번식한다 하니
그 주변은 아예 손을 대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산에 가지 않아도 각시붓꽃의 사랑스런 모습을
보고 즐긴다는(?) 생각에 마음이 흐뭇했다.
나의 성급하고 끝없는 욕심은 이제 막 심은 각시붓꽃이 사방에 종자를 퍼뜨리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미리 약속된 손님이 왔다.
우리 터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아래쪽 땅 주인이다.
이백여 평 되는 논을 수년째 묵히고 있어 우리가 무화과 묘목을 심기 위해 빌리기로 했다.
임대차 계약을 하러 온 것이다. 나는 진즉부터 마음 한구석 걱정하고 있었다.
그가 되지 못한 지주 행세를 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개화기 소설에 나오는 소작인처럼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굽실거려야 하나.
나는 어느새 소작인의 처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젖은 손을 구깃구깃한 앞치마에 닦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앞질러한 걱정은 기우였다.
"임대료는 얼마나 드리면 되겠습니까?"
" 임대료는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묵히는 논 이용해 주는 것만도 고맙죠."
" 그래도 저희가 필요해서 빌리는 것이니 다만 얼마라도 드리겠습니다. "
그는 극구 괞찮다고 했다.
계약서에 찍은 도장의 붉은 인주가 마르기도 전에 일어나려는 지주(?)를
차 한 잔 같이 하자고 붙잡아 앉힌 사람은 소작인(?)인 우리였다.
그는 말과 행동을 지극히 절제하는 사람 같았다.
종교인은 아니지만 이십여 년전부터 명상 수련을 해왔다고 한다.
어린 시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업신여김과 냉대를 받은 경험이 마음 속 응어리로
남아 늘 스스로를 괴롭혔다고 한다.
명상을 하면서 마음을 비위내는 수련으로 지금은 많이 편안해졌지만
아직 한참 더 수련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남 탓 안하고, 남의 것 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사는 것이 그가 가고 싶은 길이라고도 했다.
우리 내외는 어눌한 말투로 쭈뼛거리며 끊어질 듯 이어질 듯하는 그의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이름 날리는 강사의 열강도 아니고 세상사 초월한 듯 격을 두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평범한 생활인 조선소 근로자의 심지 깊고 간결한 사유(思維)가 내 마음을 강하게
흔들어 깨웠다.
공교롭게도 그 날 아침나절 각시붓꽃을 뿌리째 뽑아 오지 않았던가.
산바람 쐬며 곱게 자라다가 봄 햇살에 꽃이 피면 산길 오가는 누구나의 즐거움이 될 것인데
독차지하고자 빼앗아 온 것이다. 더구나 각시붓꽃은 옮겨심기를 싫어한다.
상대가 아무리 미물이지만 배려하지 않았다는 자책도 들었다.
오르내리는 길에 다가가 어여삐 보는 인연으로 만족할 것을 괜한 집착을 가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서 공 들여 키워 보리라.
각시붓꽃의 꽃말은 기별이다. 쓸 데없는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살라는\천명(天命)을
나에게 귀띔해 주고 있다..
?
?????????
찬정씨
실은 어제 아침에 이 글을 읽었어요. 하루 종일 오가며 문득 문득 찬정씨 글을 생각했네요.
제가 이런 말을 할 주변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찬정씨 글에 비해 다소 힘이 들어갔네요.
해서 생각이 참 가지런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작가의 능청스러움이 발현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프로의 힘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핏 읽는 독자들은 그 점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만들고 있어요. 그 점 또한 대단한 필력입니다.
저는 찬정씨와 한방에 뒹굴며 온갖 잡 이야기를 나눈 처지가 아닌 터라,
그대 가슴 우물의 깊이를 전혀 가늠하지는 못합니다.
오로지 간혹 접하는 그대 글에서 조금씩 훔쳐 볼 뿐입니다만, 간절한 호기심은 어쩌질 못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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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찬정씨가 분명 글로 자신의 사유를 퍼트려 우리를 움직이고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 스스로 그 지점에 다달은 듯한 의기양양함을 경험하게 만드는 능력이 그대에게 있다는 걸
의심하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주장하지도 배움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우리를 후벼파고 움직이게 만드는 잘난척 않는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좋은 봄날 되셔요.
대전 모임에 만나면 힘껏 안아보려 했는데....
95세 시모 생신이 있네요.
훗날 만나요.
저는 그냥 댓글에 묻혀 있어도 괜찮지만 게시판 관리상 그것이 좋다고 하시면 그러지요.
이 방이 만들어진지도 제법 되었어요. 그죠?
살면서 스치는 느낌을 제목도 없이 크로키 하듯 쓰는 것도 좋은데
다른 봄님들이 잘 이용하지 않아서 좀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제 글은 정리해서 다른 화일에 옮겨 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