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이 방은
짧게 스쳐간 생각이나
텔레비전을 보며 느꼈던 감동이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얻은 깨달음 등...
우리 삶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귀한 것이 분명하나
자칫하다 보면 놓쳐버리기 쉬운 일상의 한 귀퉁이를 잡아두는 메모장입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도 좋고
자기의 기억 창고에 저장을 하기 위한 암호같은 독백도 좋습니다.
그저 메모를 하듯이 편하게 쓰시면 됩니다.
갈수록 시간은 더욱 빨리 달려만 가고
우리 머릿 속 기억 주머니의 끈은 어느새 느슨해져
듣고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을 제대로 간수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떠오른 생각을 어떻게 하면 오래 잡아둘 수 있을까?.
언뜻 스쳐가는 좋은 생각들과
아주 짧은 순간에 얻은 깨달음을 기록할 수 있다면
우리 삶에서 남긴 큰 이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생각,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허망하게 잊혀지지 않도록
문득 떠오르는대로 이 메모장에다
스쳐가는 단상들을 꽉 붙잡아 두시기 바랍니다.
** 중년이 되면서 그리워지는 것들 **
색깔 진한 사람 보다는
항상 챙겨주는 은근한 친구의
눈웃음을 더 그리워하며
바보같이 우울할때면
그 친구의 눈웃음이 그리워
전화를 합니다.
눈만 뜨면 만나지 못해도
늘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지
확인하기 좋아하고 ...
늘 사랑한다 좋아한다 말은 못해도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우리는 압니다.
우울한 날은
괜스레 차 한잔 나누고 싶어하며
할 이야기도 별로 없으면서
얼굴이라도 보고싶어 합니다.
말없는 차 한잔에서도
좋아하는건지 사랑하는건지
읽을 수 있고
물어보지 않을 수도 있으며
말할 수도 있고, 감출 수도 있으며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갈 수 있고
아는 척하고 달릴 줄도 압니다.
참을 줄도 알고, 숨길 줄도 알며
모든 것을 알면서 은근히 숨겨줄 줄도 압니다.
중년이 되면
이런 것들을 더 그리워합니다
남편의 블러그에 올라와 있는 걸 어젯밤 남편이 잠든 사이에 몰래 뚱쳐왔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새해에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시기 바랍니다.
찬정아, 잘 지내지?
이제쯤 집에서 망원경으로 별도 보고 있으려나?
요즘 스마트폰으로 별지도 다운받아 가끔 하늘을 올려다 보는데
그 때마다 가끔씩 네 생각이 난다.
참 이름다은 글이다.
그냥 미소짓게 되는...
2011년 마지막 날!
새해엔 하는 일 모두 원하는 데로 이루어지고
가족모두 건강하길 기원한다*^^*
올해는 참......
개인적으로 다사다난한 해 였습니다.
바랐던 손녀가 태어나고,
엄마가 하늘로 가시고....
손녀가 태어나 첨으로 노할머니 뵈러올때
울엄니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아가를 안겨 달라 하셨습니다.
난 못들은척 가만 있었지요.
힘없는 손으로 애를 떨어뜨릴까 걱정되어서...
내가 안으면 명이 길다.
이리내라 ~!
다 스러져 가는 정신으로도 손녀딸이 안고온
증손녀에게 덕담이 해주시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무릎에 안으시곤
미경이딸 이냐~?
부디 명 길어라 ~!
그것이 당신이 자손들과의 최고의 덕담인것입니다.
기미년에 태어나신 울엄니.....
당신발로 걸어다니시던 분이 딱 한달동안 입원하셔서
욕창하나 없이 깨끗하게 가셨습니다.
지리산에서 이몸 도닦다가 병원에서 연락받고
디립다 밟아 내가 도착할때까지 이몸 불효녀 안만드실라고
엄니는 힘든 숨을 쉬고 계셨습니다.
올해가 가기전에,
새해에는 힘들지 말라고,
꽝꽝 춥기전에 떠나신 울엄니,
입관 하기 전에 엄니의 찬얼굴에 뺨을 댔지요.
그얼굴은 참 고왔습니다.
엄마 ~!
천국에 가시거든 아버지 만나셔서 잘지내고 계세요.
애면글면 옆에서 안쓰러이 지켜보던 내딸이
할아버지,할머니가 70세 정도의 연세로 하늘에서
결혼식하는 모습을 꿈에서 보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7년전에 헤어지신 두분이 다시 만나셔서
영생의 복을 누리리라 믿습니다.
난 그소리만 들어도 맘이 편해
또 어디메로 날아갈까 싸이트를 뒤지는 중입니다.
영식님도 아닌
일식씨도 아닌
두식이도 아닌
삼식이 쉐끼도 아닌
간나 쉐끼도 아닌
종간나 쉐끼랑 사는 여편네입니다.
종간나가 오늘 모처럼 삼식이 쉐끼가 되고는
어둠을 가르고 나갔습니다.
낼 오후나 돌아올테니
모처럼 방학을 맞은샘
미처 못 읽었던 글들을 훑느라
눈알이 뻑뻑
어디가서 지고는 못살 울언니들
넘 멋지십니다.
입도 야무지고
손도 야무지고
말도 술술
글도 술술
미친년처럼
혼자서 실실 웃는
내모냥
나도 찬정언니처럼
원초적 단어들을 나열하며
모처럼 자연인의 모습으로
카타르시스를 느껴봅니다.
이 공간에서는 용서될거 같아서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명자씨 참어.
목사님 사모님이 원초적 단어라니 아니될 말 아닌가.
주향씨 명자씨
우리 봄날의 막둥이들이 번개 모임이든 정기 모임이든
꼭 꼭 참석해서 선배님들과 잘 어울리니 참 고마운 일이야.
고상한 말만 하믄 나 안 껴줄까봐....
봄날을 통해
진한 사람 내음을 맡을 수 있음이
참 좋습니다.
사람을 케어하는 직임을 받았으니
사람을 잘 알아야 하고
이렇게 슬적 슬적
들어와 놀다가는 것도
제 소임을 다 하는 것이지요.
설 전에, 살림도 넉넉치 못한 칠순의 시고모님이 인편으로 우족(牛足) 한벌을 보내셨습니다.
지난번 새집 구경을 하고 가신 후 우리 엄니한테 그러시더랍니다.
친정 조카의 집이라도 내자식이 집 지은거맹키로 마음이 든든하고 좋은데
을매나 애들를 썼는지 두내외가 얼굴이 카칠해졌더라고 .
아직은 젊다 할 조카가 늙으신 고모에게 사드려야 마땅한 것을 되레어 받았으니
송구한 마음에 전화로
" 고모님 ! 바쁘단 핑게로 가뵙지도 못 하는데 저렇게 큰 선물을 받아서 어쩌지요? "
" 야 야 ! 그런 소리 말아라. 와 이리 좋겄노. 친정 조카가 지척간에(사실 그다지 가깝지는 않다) 떠억하니 집을 짓고
산다하니 이 고모 맘이 을매나 든든하고 대견스럽고 좋은지 느그들 아나?
갸도 애 많이 썼을끼고 니도 생판 모르는데 와서 남편따라 산다고 욕본다아이가.
원래 여자들은 친정 오래비집 담장 새로 쳤다는 소문만 풍문에 들어도 기분이 으쓱해지는 벱이거든
느그집 밖에 걸어논 화덕 좋더라. 거기다 푹 과서 묵어봐라 기운이 날끼구마.
우야든지 느그가 곁에 있어서 고맙데이. "
먹을것을 받고나서 전화로 인사만 늘어지게 했지 '설 쇠고 가겠습니다' 하고는
아직도 못 가고 있습니다. 이달말일까지 이사나 다 마치고~
???찬정아!!!!
드디어 이사 하는구나.
오랫동안 정성들이고 정성들인 집이라 얼마나 귀하고 튼튼할 지는
안보아도 알겠구나.
그 집에서 오랫동안 건강하고 복많이 받으며 행복을 누리기를 빈다.
특별히 몸조심 하거래이~~~~~~~~~~~~
그리 시간을 두고 야무지게 손을 봤으니 안보이는 곳까지 얼마나 잘 했을까?
어른들은 조카라도 근처에 와 산다는 게 정말 든든하신 모양이더라구.
게다가 우리 찬정이가 얼마나 통크고 야무지냐?
난 올해는 거제도에 갈 일이 여러번 생긴다.
3월 초에는 5기와 함께 가고
3월말이나 4월 초에는 우리 친정 엄마 모시고 하루 가기로 했어.
(모처럼 우리집에 오시겠다고 하셔서)
어른 모시고는 여기저기 다니는 건 무리라서 경치좋은 곳에서 그냥 하루 자고 놀다 오려구.
그 때는 혹시 시간 되면 맞춰보고 얼굴이나 보면 좋겠는데 그것도 그 때 가 봐야 알겠지.
드디어 찬정이가 집을 다 지었구나.
이사한다니 정말로 축하해.
새 집에서는 부디 온 가족 모두 건강하고 화목하며
하고자 하는 모든 일들이 술술 잘 풀려나가기를 기도할게.
찬정아~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학원에서 조금 남은 유자차 마실때 마다 네 생각 한단다.
축하해.
이사할때 너무 무리 하지 말아야해.
쉬며 쉬며 해라.
새집으로 이사와 나흘째되던 날 세상으로 통하는 문명이 개통되었습니다.
kt 에서 서너명이 들이닥치더니 위성 테레비며 전화며 인터넷이 몽조리 한데 엮어 단박에 설치를 하고 가데요.
이삿짐 정리며 해야할 작업이 태배기로 쌓여있어 창너머로 촌동네나 내다보는 고적감을 느낄 새도 없고,
한가로움을 즐길 여가는 더더욱 없다는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원.
이사와서 알게된 놀라운 사실 하나는
우리 연못 (아직 주변 정리가 되지 않아서 물웅뎅이에 불과합니다만)에 매일밤 왜가리며 몇몇 큰 새들이와서
밤을 나고 간다는 사실입니다. 남편이 먼동이 트기전 현관문을 여니 놀래서 큰 날개를 펴며 날아가더라고.
그 다음날은 현관문 안열고 작은창으로 봤더니 댓마리는 되는것 같은데. 하나는 왜가리고 다른건 모르겠구.
지금은 너무 호젓하리만큼 조용한 촌구석인데 그것도 그리 오래갈것 같지 않습니다.
우스운 얘기 하나하자면 제 사주가 주위에 사람이 버글버글한 사주랍니다. 그래서 술장사나 밥장사나 하면
떼부자가 될 사주. 사주쟁이가 영험했던가 우얫던가 이날입때까지 인간밀집지역만 전전하거나
전에 우리가 사는 아파트 바로옆 묘목밭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우리창문을 턱 가로 막질않나~
지난 늦가을 건너편 야산 중턱까지 까뭉개고 집터를 닦더니
얼마있으면 내가 작년에 고사리를 꺾던 동산도 까뭉개져 전원주택이 스믈여섯채나 지어진다네요
내가 그전에 우리 14기방에 두편 ' 꿈 꾸는 귀향(2008.11.9 No.1399) ' , ' 미리 쓰는 村婦日記(2007.1.31 No.1042) ' 쓴 적이 있는데
제가 좀 시간이 나면 귀향인지 귀양이 될지을 다시 한번 써 보겠습니다.
위의 글 찾아 보려니 눈만 아프다는 쪽지가 있어서 페이지를 넣었습니다.
옮겨 놓기에는 너무 장황하게 길고.
*이론과 실제*
2012년 3월 8일 오전 7시
비 온 뒤 끝이라 코로 맡아지는 지리산 공기가 달다.
방문 열리는 소리만 고대하던 진돗개가 꼬리를 살랑이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몸으로 까분다
이틀 전엔 비가 내려서, 어제는 주인이 외부에서 자고 오느라 뛰지 못했던 불만을 어떻게 견뎠었나 싶다.
개가 마시는 물그릇엔 살얼음이 잡혀있다.
봄은 왔다지만 새벽으로는 겨울 언저리임을 실감한다.
귀를 가릴 수 있는 챙모자를 덮어쓰고 손엔 장갑을 끼고
창고에 넣어 둔 자전거를 꺼낸다.
조금 전 까지 길길이 뛰며 말뚝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원을 그리던 진돗개는
어느새 자전거 옆에 얌전히 앉아있다.
자전거 손잡이 축에 묶어 둔 줄과 자기를 얼른 연결시켜달란다.
2년 이상 매일 5Km를 자전거와 함께 뛰다 보니 "앉아!" 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앉아서 대기다.
목걸이의 고리에 자전거 끈을 연결시키자 앞으로 나가며 자전거를 잡아당긴다.
하수관 공사 후에 겨울철이라 미루어둔 세멘포장 공사가 되지 않은 진입로는 울퉁불통 흙길이다.
조금 전에 피우기 시작한 화목보일러 연통에서는 하얀 연기가 뭉클뭉클 솓구치고
때마침 마을회관에서 동네 여기저기에 설치한 스피커를 통해 이장님의 아침방송이 전해진다.
"아!아! 동사무소(마을회관의 방송실을 동사무소라더라)에서 알립니다.
농촌지도자와 둘이서 길가에 모아둔 쓰레기 더미에서 폐비닐과 다른 것들을 분리해서
깨끗히 치워두었으므로 다시는 그곳에 쓰레기를 버리지맙시다.
길가라 보기에도 흉악하니 꼭 지켜주세요.....
농사용 트렉터 관리기구 보조 받으실 분은 내일까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본인부담 50%, 국고보조 50%입니다..."
감기 기운이 아직 남아있는지 가끔 가래 섞인 목소리다.
조금 달리다보면 다랭이 논이 아닌 평지에 조성 된 적지 않은 논 경작지를 지나게된다.
논과 논 사이는 1톤 차가 교행할 수 있는 세멘포장도로가 놓여있기도하다.
이 도로를 이용하여 경운기로 두엄을 나르기도하고, 수확물을 실어 나르기도한다.
날이 풀리며 한겨울을 난 길가의 두엄더미에 새로운 두엄이 쌓이기 시작한다.
그 곁을 지나자 소똥냄새가 설핏 코로 스며든다.
벌레들이 많이 생기면 두엄을 헤치고
벌레를 잡아 먹는 까치떼들을 볼텐데 아직 까치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두엄더미를 두군데 지났고 길 양쪽은 논과 밭만 있는 도로 의 중간 정도 지점쯤 왔다.
시커먼 덩치가 큰 무엇인가가 흘깃보인다.
"엉! 뭐지?" 잠깐 핸드브레이크를 잡으며 속도를 죽였는데
왼쪽 5m 논두렁에 있던 멧돼지와 나의 눈이 딱 마주쳤다.
"헉! 멧돼지! "
갑자기 나타난 물체에 놀랐는지 멧돼지도 놀란 듯 바라 본다.
덩치는 나보다 크다. 도심지에 나타난 멧돼지에 습격당하여 피해를 보았다는 TV 뉴스가 생각나고
무조건 도망가야한다. 절박함만 더해진다.
1~2초 순간에 머리 속에선 얼마 전 보았던 지리산 프랑카드
'즐거운 산행, 야생멧돼지 조심하세요.
야생멧돼지 만날 때 대응요령= 도망가지 말고 가만히 바라보세요'가 떠 오른다.
이론은 이론일 뿐. 갑자기 반대쪽을 향하고 있던 멧돼지 몸이 내쪽으로 돌려고 움찔한다.
자전거 패달에 힘을 가하며 밟아보는데 금방 속도가 나질않는다.
그동안 자전거를 타고 가다 근처에 개나 고양이가 나타나면 그 놈을 쫓느라 질질 끌리면서도
잘 오지 않던 진돗개가 걱정이 되었다. 이 놈이 안 온다고 끌리면...
패달을 아무리 밟아도 자전거가 나가지 않을텐데...걱정은 태산인데...
설상가상 멧돼지가 두두두 소리를 내며 자전거를 쫓아온다.
"아! 이젠 죽었구나. 자전거가 넘어지면? 진돗개가 무식하게 멧돼지 쪽으로 간다며 으르렁거리면?...
멧돼지가 덤비면 팔로 막으라던데?...그나저나 이 놈은 왜 쫓아 오는거야?"
등어리에는 식은 땀이,마음은 안절부절
20여미터 달리며 얼굴을 뒤로 돌리며 보니 여전히 달려오는 멧돼지!
"아! 이젠 정말 죽었구나"
다행이 진돗개도 위기를 느꼈는지 죽을 둥 살둥 달린다. 덕분에 자전거 속도는 더 빨라지고
뒤를 돌아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로지 패달 만 죽어라 밟아댄다.
자전거가 넘어지지도 않았고
100미터쯤 왔을까? 설핏 뒤를 돌아보니 멧돼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몇 백미터를 더 간 후에 자전거를 멈추었고 뒤를 살펴보니
어디에도 멧돼지는 보이지 않는다. 300미터쯤 떨어진 산으로 올라갔나?
저수지를 따라 평소에 가던 길을 갔다가
돌아 올 때는 논 쪽이 아니라 멀리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멧돼지 5m 이내에서 만나 본 사람?
더더구나 멧돼지가 추격해 온 적이 있는 사람?
그 놈이 자전거 타고 있던 나만 보았다면 도망갔을까?
개를 보고 호기심에 달려든건가?
자기가 왔던 길로 가려고 하던 것을 나를 쫓아온다고 착각한건가?
아뭏든 눈 마주치고 곧바로 두두두하며 자전거를 좇아 온 것은 사실이므로...
십년감수!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
노는 것도 힘드는 건지 눈팅만 하고 이제 답을 씁니다.
이론대로 하셨다가 변을 당하실 수도 있었겠네요.
근데 자전거라도 탔으니 망정이지 그냥 뛰는 걸로는 못당하셨을 것 아니에요?
참 위험 천만이셨지만 그걸로 올 해 액땜은 다 하신 셈이니 이제는 좋은 일만 남았습니다.
지리산 김목사님 등줄기에서 식은 땀 좀 흘리셨겠어요.
우리 동네도 멧돼지가 종종 출몰해서 농작물을 망친다는 말은 들었는데 아직 실제로 본 적은 없어서
실제 상황이 되면 얼마나 공포스러울지 모릅니다. 고라니는 몇번 목격했어요.
고것이 생김새는 데려다가 키울까싶게 귀여운데 농사짓는 사람들은 고라니도 그런 웬수가 없다네요.
고라니고 멧돼지고 야생동물 보호 협회에서는 잡아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만 드높인다는데
세상을 향해 인도적인 소리를 하기는 참 쉽지요.
그렇지만 그게 자신이 당한 일이고 더구나 피해를 보는 일이라면
마구 번식을 하여 마릿수를 늘려야 한다고만은 안할테지요.
목사님~죽을둥 살둥 날 살려라 달리셨군요.
참말로 십년감수하셨군요.
등어리에 땀이 을메나 많이 났을꼬!!!
몸살은 안 나셨는가요?
생각만 해도 아찔.
얼마전 누가 이런 글을 읽었다면서 나에게 보내왔습니다.
내가 맨날 일이 많다고 엄청 바쁜 척하니까 조용히 읽어 보며 쉬엄쉬엄 하라고.
그 앤 신실한 카톨릭 신자인줄 아는데 노스님의 설법 같은 이런 글은 어디서 집어왔을고
=== 이 생에 잠시 인연 따라 왔다가 ===
이번 생에 잠시 인연따라 나왔다가
인연이 다 되면 인연따라 갈 뿐이다.
장작 두개를 비벼서
불을 피웠다면 불은 어디에서 왔는가.
장작 속에서 왔는가
아니면 공기중에서 왔는가
그도 아니면 우리의 손에서 나왔는가
아니면 신이 불을 만들어 주었는가
다만 공기와 장작과 우리들의 의지가
인연 화합하여 잠시 불이 만들어졌을뿐이고
장작이 다 타고 나면 사라질 뿐이다.
이것이 우리 몸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생사(生死)이다.
불이 어찌 고정된 실체라 할 수 있겠으며
' 나 ' 라고 내세울 수 있겠는가
다만 공한 인연생 인연멸일 뿐이다.
여기에 내가 어디있고
내 것이 어디 있으며
진실한 것이 어디 있는가
다 공적할 뿐이다.
이 몸 또한 그러하다
인연따라 잠시 왔다가
인연따라 잠시 갈 뿐
' 나 ' 도 없고
' 내 것 ' 도 없다.
그러할진데 어디에 집착하고
무엇을 얻고자하며
어딜 그리 바삐 가고 있는가
갈 길 잠시 멈추고
바라볼 일이다.
찬정아~
좋은 글 아주 잘 읽었다.
나도 천주교 신자지만 가끔 내가 친구의 전도에 의해 신자가 되지 않고 지금 종교를 택하라면 불교를 택할텐데~ 하고 생각한 적이 많아.
천주교에는 없는 전생의 이론도 난 합리적인것 같아.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져서 값아야 하나보다 하면 맘이 많이 가라앉더라고~
돈을 떼인 사람한테도 내가 전생에 빚을 졌나보다 하면 속이 덜 상하고 ㅎㅎ
얼마전 읽은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서 보이는 것들" 이란 책도 비슷한 내용들~
정말 갈 길 멈추고 잠시 바라보면 그때서야 비로서 보이는 것들이 많다.
우리집 진입로에 노란 수선화가 피어서 한참씩 들여다 봅니다.
내가 몇주전 우리집 근처 수선화밭에서 모종으로 팔고 남은 찌시래기를 한바케스 얻어다가
쪼르르 심었더니 벌써 새 땅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
나와 눈맞춤을 하는 인연이 되었어요.
일본가기 전 서울 목동아파트 살때 그러니까 이십년쯤전인가 ~
우리 라인 경비아저씨가 정년퇴직한다고 해서 선물한다고 반상회에서 추렴을 했어요.
한집에 삼천원씩 하면 좋을까 오천원씩하면 좋을까 서로 눈치만 보고있는데
한 아주머니가(연세가 육십대 후반의 대구사람)
" 느그가 좀 덜 쓰고 오천원씩 걷어 조라. 떠나는 사람 섭섭하게 해서 보내면 안된데이.
사람의 인연은 또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만날지 모르는기다. "
굳이 든 돈으로 따지자면 오천원짜리지만 그 말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불교도 잘 모릅니다. 전생의 인연도 글쎄 ~
아뭏든 나는 좋은 인연이든 악연이든 우연이든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막연한 그날 좋은 낯으로 볼 수있기 위해 사람과의 인연을 좋게 정리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지요.
어떨땐 간도 배알도 다 빼놓고.
너무 마음 속 깊이 든 얘기를 했나 ~ ~
어젯밤부터 몰아친 비바람이 내 속을 뒤흔들어서 속엣것이 거죽으로 나왔나봅니다.
맨날 바쁘단 소리를 입에 달고 있는 사람은 사실 외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또 외로운 사람은 알고보면 승질이 드러운 ㄴ 일 경우가 많다고 하고,
그럼 맨날 바쁘다고 설레발을 치는 건 외로움의 호소~ 아니믄 제 못된 승질 ~ 암튼.
우리 동네
토박이들은 바닷가를 끼고 마을 중심에 살고 새집을 지어 이사오는 사람(이 동네 노인들은 이 타지사람들을
뜨네기라고 싸잡아 말함니다)들은 동네에서 좀 떨어진 가장자리나,
산은 등지고 바다가 보이는전망을 보고 터전을 잡지요
바닷가 마을에 오는 도시인은 바다 조망권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토박이네 와 뜨네기들은 서로 앙앙불락하는건 아니지만 서로 잘 어울려 지내지 않아요.
토박이네와 연령의 차이도 있고, 그동안 살아 온 도농(都農)간 정서에도 거리가 있으니
승질이 더럽지 않아도 사람 그리운 이들이 더러 있죠.
남자들은 달라요. 언제부터 꿈 꾸어온 귀촌인지 몰라도 집을 요리조리 손보고 주변 가꾸는 일, 나무심는 일,
채마밭도 신바람나게 가꾸고, 생전 처음 해 보는 일에도 의욕이 넘쳐납니다.
게다가 요트나 윈드서핑, 낚시가 취미인 사람은 살판났어요.
문제는 안주인인 여자.
처음부터 두 양주가 도시를 박차고 짐을 싸 이사오는 사람은 부도나서 도망오는 사람말고는 거의 없답니다.
부인은 애들 교육이네, 손주를 봐줘야 합네, 퇴행성 관절염으로 줄창 병원을 다녀야 한다는둥
갖가지 핑게로 밍기적거리며 도시에 남아있습니다.
남자만 와서 사놓은 터에 콘테이너박스 하나 끌어다가 거처로 마련해 놓고 집 지을 궁리를 하지요.
아내의 잔소리 슬하(?)를 벗어났다 뿐 아주 의지가지 없는 처지가
된 것도 아니면서 자유의 몸 이 된 남자는 한 동안 좋아 죽습니다 .
우선 소일거리로 텃밭을 갈아 수확한 감자야 고추야 깻잎이야 바리바리 도시의 아내에게 나릅니다.
쪼르르 바닷가에 내려가 낚시를 해서 잔챙이 생선일망정 냉동실이 터져나가게 재놓는 홀아비 생활을 한해쯤 하면서
도시에 남은 어부인에게 갈때마다 선전 공세를 한다네요. 육십년대 재일동포 북송선 태우던 때 맹키로.
남편의 선전에 꼴깍 넘어갔든 반신반의하면서든 그 이상한 별거를 끝내고 여자도 촌으로 옵니다.
그때부터 내외간의 하루 해 길이가 같은 집도 있고 다른 집도 있습니다.
아예 따로 살던 때보다 같이 살며 따로 노는 더 이상한 동거가 사람을 외롭게 만듭니다.
촌은 촌 나름대로 재미있는 게 도처에 널려있어 하루해가 짧기만한데두
' 촌사람도 싫고, 땡볕도 싫고, 풀도 싫고, 돌도 싫고, 촌 것들은 다 싫어. 나는야 공주님 '그러면서
도시 생활만 추억하는 그런 사람은 외롭고 우울하고 하루가 지루하게 길기만 합니다.
어제도 우리동네 그런 공주병 아짐 하나를 꼬셔서 서이말 등대까지 갔다왔습니다.
그집 남편이 나에게 자기 부인과도 좀 어울려서 사람도 사귀고 나다니기도 하도록 부탁한 적이 있었지요.
갱년기 우울증인지 자신의 재미를 자신이 찾으면 좋을텐데 남편만 들볶는다나
이 동네 5년차인 그 냥반이 엊그제 이사 온 나한테. 더구나 사교성이 젬병인 나한테 그런 부탁을.
오는 길에 샛길로 들어섰더니 고사리가 얼마나 많은지 둘이서 극성스럽게 한아름씩 꺾어왔어요.
" 그냥 나 처럼 살면 공주님은 영원히 못 되도 외롭지는 않을거예요. 가끔 같이 다닐래요?
할 줄 알든 모르든 그냥 막 옥수수도 심어보고, 강낭콩도 심어보고,
논두렁에 앉아 쑥을 뜯으며 수다도 떨고,
꼭 틀어박혀 산다 생각말고 부산이든 서울이든 가고 싶을 때면 쓩 갔다 오기도 하고 말예요.
그래두 우리가 파라다이스를 꿈 꾸고 북송선을 타 평양에 떨어진건 아니잖우. "
면민 운동회를 동네 한가운데 있는 중학교 마당에서 한단 얘기는 며칠전부터 스피커를 통해 들었지요.
우린 둘이서 데크 공사를 벌려놓기도 했거니와 ' 면에서 지원금 나오겠다, 즈그들 하루 먹고 놀자는거지 뭐.'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지요.
오후 무렵
구미에서 직장다닌다는 만성씨네 둘째 아들이 우사 청소를 하고 가며 우리집에 들러
남편이 일하는 걸 찬찬히 보고 있더니
" 손수 하시는가베요? 꼼꼼시레 이래 허믄 엥간한 업자가 헌 것 보다 훨 좋지요. "
" 운동장에 안 갔소? 예서 낳고 자랐으면 친구들도 많을낀데 와 안 갔소? "
" 예. 친구들이 오라해서 이참저참 내려 왔는데 아버지가 우사 거름 좀 내고
청소하고 가라카니 우얍니꺼.
집에 가서 씻고 친구들과 술이나 한잔하고 올라갈까 허지만 집에 내려가면 어무이 아버지가
바루 쪼가보낼라 할끼라예. "
" 왜요? "
" 동네 친구들 만나 씰데읎는 이바구 듣고 솔깃할까봐 그라지요. "
그의 아버지가 지난 겨울 한날 올라와서 하는 얘기가
' 동네 뉘집 아들도 또 누구도 즈그 부모 농사 짓는 땅 팔아가 사업한다고 하더니 결국 좋은 끝을 못 봤어.
말들은 좀 잘해. 천하에 둘도 없는 효자가 된거 맹키로.
늙은 부모 근력도 없는데 농삿일 그만하라쿠믄서
내외가 뻔질나게 내려와 짓쪼르면 팔아 주삐리는기라..
자식 사업 뒷배 봐준다고 땅 팔아 준 사람 다 실패봤어.
구구루 직장이나 잘 댕김서 제식구 건사하면
부모가 죽을 때 땅문서 쥐고 갈 것두 아니구 다 즈이들 냉겨 줄긴데
젊은 아아들 말만 듣고 휘딱 팔아 깨춤을 추다가는
자슥 망치고 땅 날라가는거 불 보듯 뻔하다아이요.'
" 아부지는 내가 괜히 글마들 만나 술 한잔하며 이말 저말 듣고
바람들까봐 걱정되서 아예 쪼까보내는 겁니다.
우사 청소도 내 오면 시킬라고 아부지가 일부러 안 하고 냄겨둔 것두 다 알지예. "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렸다고 하늘을 못 보는게 아닌 줄
그 아부지도 알고 아들도 알겠지요.
그냥 아버지 뜻에 따르는걸겁니다.
" 작은 언니 ! 바뻐 ? "
동생이 전화를 해서 하루쯤 시간을 낼수 있는가 묻는다.
한가로이 손 놓고 쉴 여가가 없는게 일상이 되어 버렸지만
내면 낼 수 있는게 촌 생활의 시간 아닌가.
동생의 아들이 군 입대로 진해 신병 훈련소에 오는데 즈이 식구 셋은
모두 피치못할 사정으로 진해 훈련소까지는 올 수가 없으니 그래도 가까운 데 사는 내가
배웅해줄 수 있는가 하는 부탁이다.
요즘은 동반 입소(?) 라나 ~ 하는 신풍조로 신병이 가족이나 친구를 훈련소 입소식까지 달고 오는 모양이다.
걔나 나나 진해는 초행길이니 찾기 쉬운 터미날에서 만나서 점심을 먹이고,
해안도로를 따라 진해루앞 훈련소까지 둘이 걸어가는데 이제 곧 신병이 될 아이가 한숨을 푹푹 쉰다.
" 왜 한숨을 쉬니? "
" 그냥 긴장이 되서요. "
" 저기 가는 애들(박박 머리에 종이 쇼핑백 하나 든)모두 오늘부터 너와 똑같은 처지가 되는거야.
힘들고 겁나는 것도 여럿이 같이한다하면 견딜 수 있잖아 "
훈련소 연병장에는
족히 차 두대 분은 될만한 가족으로 에워싸인 빡빡머리도 있고,
단촐하게 부모님의 배웅을 받는 신병도 있다,
어머니는 연신 아들의 깎은 머리며 얼굴을 어루만지고,
의연한 아버지는 무슨말인가 할 때마다 아들의 등을 토닥 토닥 두드린다.
저런 애타는 모정에 비하면 난 한치 건너가 구만리라 했으니
담담하게 들여보내고 쌩하니 돌아서게 될줄 알았는데
조카와 마주서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며 몇번이나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한다.
얼추 시간이 되자 빡빡머리들이 가족을 벗어나 연병장 가운데 출신지별 팻말을 따라 줄을 선다.
나는 조카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린다. ' 몸 건강해라 . '
다른 부모들은 차마 돌아서지지 않는지 뙤약볕 아래 서성이고 있는데
나는 그애가 신병의 무리속으로 뛰어간 후 아무리 찾아 보려고 해도
그 놈이 그놈같고 그놈이 그놈같아 보이자 혼자서 연병장을 나왔다.
이 에미 애비는 뭣이 그렇게 바뻐서 나에게 이런 마음 짜안한 일을 시켰담.
나도 건강한 대한남아 아들을 하나 두었지만 가족 모두 재외국민으로 병역이 서른다섯살까지
연기되어 있으니 사실상 ' 입영 ' 이란 말은 나와 상관없는 얘기라고 여겼었다.
저녁에 동생이 잠이 안올것 같다고 전화가 왔다.
" 걱정마. 나라가 멕여주고 재워주고 입혀까지 주는데 무슨 걱정이냐? "
" 우리가 먹고 입고 자는거만이 걱정은 아니잖아. 군대를 보내 보지않은 에미가 군대를 알어? "
" 그래 ! 훈련소 보내 아직 하룻밤도 안지낸 신병의 에미는 군대를 아슈? "
남편은 두 살 되던 해.
어머니 등에 업혀 고향 거제도를 떠나 부산으로 이사를 왔다.
아버지가 열여덟 나이에 징용가 왜인에게서 눈썰미있게 배운 전기 기술을 밑천으로
미군 부대에 취직된 것이다.
강제 징용으로나마 바깥 세상을 구경하신 아버지가 자식들 촌무지랭이 안 만들려고 하신 결단이었다.
하지만 있는 논밭 놔두고 부모곁을 떠난다는 아들네를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 조부모님의 눈치를 보느라 떠나기 전날에서야
중간치 무쇠솥을 떼어내 국 뜨고 밥 뜰 그릇과 숟가락 몇벌, 간장 종지와 국자와 대조리를 챙겨넣어 이불짐에 엊어
외삼촌이 지게로 뱃머리까지 실어다 줬다고 한다.
물론 거제도가 육지로 통하는 다리 생기기 전 이야기다.
우리 시가는 부산 영도 셋방부터 시작해서 재산을 불리고 식솔을 더 늘여 수십년간 터 잡고 사셨다.
부산에 볼 일을 보러 왔거나 취직을 해서 왔거나 원양어선을 타러 온 사람도, 학교를 다니러 온 아이도, 혼수 장만을 하러 온 사람까지도
다 우리 시가에서 먹고 묵었기 때문에 ‘ 거제 여관 ’ 이란 택호가 붙었다.
올때 간한 생선이나 고구마 한자루라도 들고오면 그만이고 안가져와도 먹이고 재워야 하는게 그 시절 우리 시가의 인정이었다.
노후에 다시 거제도로 돌아와 사시다가 육년전 아버지가 이승의 누추를 벗고 먼 먼 태초의 고향으로 먼저 가셨다.
그 고향에 우리가 돌아왔다.
강산이 다섯 번도 더 바뀌는 세월을 타관으로 돌고 돌다가.
사실, 지금은 조선소가 들어선 옥포에서 태어나 태(胎)를 묻었고 늙으신 일가 친척 몇분이 살아 계신다해서 고향이라 할 뿐이지,
어릴적 같이 자란 동년배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꿈 속에 그리는 고향집 마당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언젠가 여기에 돌아와 자그마한 집을 지어 보리라 꿈 꾸어 왔다.
두 해나 걸린 집 짓기 사투(死鬪)는 거의 끝나 간다.
자잘한 일이 아직 태배기로 남아 있지만 그건 두고 두고 재미삼아 할 일로 남겨두고 있다.
틈틈이 텃밭을 만들어 옥수수며 완두콩, 상추를 심어는 놨는데 고라니가 수시로 야금 야금 뜯어 먹고 가니
쥔네가 먹을 것을 남기기나 할런지 모르겠다.
아직 우리 나이 또래를 일러 노년이라 할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머지않아 닥칠 노년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인 건 확실하다.
사람을은 나름대로 늙어서는 뭣이 우선이고, 무엇이 필요하고,
늙어서는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있어야 한다고도 한다. 나 역시도 수긍한다.
작든 크든 나누며 사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여 나도 따라 해 보고 싶다.
가진 것에 내 노동력을 보태면 나눌 몫이 나오고도 남으리라.
이 나이 먹도록 네 떡 네 먹고, 내 떡 내 먹기로 선을 긋고 산 것이 몸에 밴 탓에
이제와서 후덕한 마음씀씀이가 우러나기 쉽지않겠지만
늘그막엔 나눠가며 살아야겠다는게 앞으로 나의 다짐이고 포부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집의 허우대는 다 만들었으니
나는 이제부터 그 안에 내 여생의 고향을 만들어 나갈 참이다.
그건 난다 긴다 하는 목수를 불러다 시킬 수도 없는 오로지 우리가 살아가며 할 일이다.
지하철 첫차를 타고 사상에 가서 창원까지 7시 45분에는 도착해야한다는 아들 덕에 3시부터 일어나서 설쳤다.
3시30분에 일어나도 넉넉할 것 같은데(보통같으면 4시라도 되는데 우리집식구들은 암튼 서둘르는 걸 싫어한다)
화장실까지 운운하며 엄마는 자라지만 편히 잠이 오냐구요.
암튼 아침밥은 멕였고,
우리나라에서 살면서 어학은 우쨌거나 필수사안이 되어버린지라 누구나 그렇듯
막내도 전역하는 달부터 시작한 영어와 일어!
알다시피 어학이란 게 1,2년 으로 완성되는 게 아닌지라 만29세가 된 지금까지 학원을 다니고있다.
내 딴에는 유학까지는 못해줘도 어학연수정도는 무리해서라도 해주려고 했는데
장남도 막내도 싫댄다.
무작정 가 봐야 얻는 게 별로 없다고.
그냥 자기들이 알아서 한다고!(요 대목에서 많은 이들이 부러워 함.ㅎㅎㅎㅎ)
시험을 위한 공부를 어느정도 하고 점수를 제법 올려놓더니 옮긴 영어학원은 통번역사를 위한 곳이라는데
원장이 통역협회회장이라 수시로 알바이트의뢰가 들어온댄다.
영어는 아직 그 수준이 못되는 모양인데(워낙 날고 기는 전공자들이 많다고) 일어통역의뢰가 온다고.
대부분 두가지를 다 하는 사람이 많지않은 모양이다.
처음에는 그냥 경험삼아 가보더니 지가 서류넣어서 큰 행사에도 일주일씩 서울까지 가고 좀 웃긴다.
내가 부추기는 것도 있다.
서울까지 왔다갔다 하면 경비가 많이 드는데(게다가 서울은 그 전 날 가서 자야하기도 하고)
일단 드는 건 내 몫이고 버는 건 지 몫이다.ㅎㅎㅎ
오늘은 창원의 켄벤션센타에서 열리는 무신 수출 박람횐지?
일어학원은 아이우에오부터 시작해서 아직까지 한 곳에 다니는데 학원의 귀염동이로서는 좀 나이가 많지만
원장님의 자랑꺼리인 모양이다.
(그리 오래 다니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대개 1급자격증 따면 그만둔다)
어느정도 배우면 되겠지 하는 생각은 우리시대의 유산인 듯 하다.
나이키본사에 근무하다 부사장까지 되고 은퇴한 남편 친구는 (물론 미국에 살고)
은퇴하는 날까지 개인 강사를 고용해서 고급영어공부를 했다고한다.
나도 언제나 좋은 선생님께 레슨을 좀 받고 싶다.
지난 번에 미국에서 선배언니가 와서 사진전을 하는데 우리가 오프닝 연주를 해줬는데(친구딸이 바이올린을 하고)
그언니에게 잠시 들어보라고 하고 함께 했는데(원래 피아니스트)
갑자기 뭔가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근데 이게 뭐니뭐니해도 머니가 들어가는 일이라서 다들 못한다.
우리 아들도 막내가 아니었고 우리가 젊은 시절 그리 돈때문에 하고 싶은 걸 못하지않았다면
아마 생각이 좀 달라졌을 지도 모르겠다.
역시 도전이란 게 시간과 돈을 투자안하고는 안되는다는 게 진리다.
나도 가끔씩 나이 서른이 다되도록 학원비에 용돈에 다 주는 게 괜찮은 지
의문이 들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하는데 남편은 알바이트하면서는 공부 못한댄다.
암튼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 이기적이다.
10월 초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막내가 2005년부터 올 해까지 써놓은 글을 모아서
"나의 20대의 습작"이라는 작은 책을 만들었다.
뭐 수백권씩 하는 그런 거 아니고 딱 10권만 만들어서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만 준다고!ㅎㅎㅎㅎ
우선 시험삼아 3권만 만들어서 한권 받았다.
복사해서 제본한 건 아니고 전문업체가 있는데 생각보다 권당 값이 꽤 나간단다.
활자체며 크기며 잘 몰라서 우선은 고것만 했다고 나보고 모니터 하라는데
신랄하게 하면 삐질 것 같고 내 성질에 무조건 좋다고 할 수는 없는데..................................................
지 아빠가 읽으면 나중에 이런저런 옳은 소리해서 기 죽이고 의 상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고 약은 놈이 아예 습작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서문에도 많이 유치하지만 자신의 20대를 돌아보는 추억과 반성의 기회로 만들었다고 썼으니
글에 관해서는 입을 대면 안된단다.ㅎㅎㅎ
찬정이 글에 동조하는 말을 쓰다 보니 신새벽부터 별 소리를 다 한 것 같긴 한데 그냥 놔둘래요.
지난 봄 마당 한켠에 잡초뿌리를 걷어내고 꽃 모판을 만들어 봉숭아 씨 한봉지를 털어 부었는데 딱 다섯 포기 올라왔다
묵은 씨여서일까? 흙이 안 좋아서일까?
여리여리한 봉숭아 모종을 조심해서 옮겨 심었어도 그 중 두포기는 죽이고 말았다.
남은 세 포기. 튼실하게 우뚝 자라지도 못한 꽃대에서 조롱 조롱 앙징맞은 봉숭아 꽃이 피었다.
원래는 봉숭아 꽃잎을 찧어 내 손톱에 꽃물을 들여 볼까 해서 심었는데 나는 애처로운 꽃잎을 차마 따지 못 하여
오랫만에 혼자서라도 봉숭아 꽃물을 들여보려 했던 나의 소박한 이벤트는 접어야 했다.
내 어릴 때 우리 외할머니가 여름밤 한 날을 잡아 우리 조무래기들을 앉혀 놓고 봉숭아 물을 들여 주셨다.
할머니는 그날 어둡기 전 봉숭아 꽃과 잎을 따서 백반을 넣어 찧어 놓고 콩잎에, 비닐 조각에, 무명실을 준비했다가 저녁 먹고 난 우리를
쪼르르 앉혀놓고 꼼꼼이 감아주셨다. 내 남동생도 누나들 따라 끼어 앉았다.
나는 봉숭아 물 들이는 동안 싸매 놓은 손가락이 쓰라리기도 하고 양손가락을 쫙 펼치고 있어야 하는것이 성가셔서 안들이고 싶었다.
그래도 ' 해마다 봉숭아 꽃물을 빨갛게 들이면 나중에 저승길이 밝단다 ' 하시는 할머니의 그 말씀이 어린 소견에 뭔뜻인지 모르지만
거스르면 안되는 의식같아서 해마다 봉숭아 꽃물을 들였다.
그날밤 손가락마다 골무 처럼 끼고 팔을 머리위로 뻗고 곱게 잠들었는데
자면서 무슨 난동을 부렸는지 아침에 일어나 보면 골무가 빠져 달아나 봉숭아 물이 드는둥 마는둥 한 손톱이 꼭 있었다
.
홍포에서 팬션을 운영하는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요즘은 여행을 하면서도 새로운 체험을 즐기려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체험할 꺼리를 계절에 맞춰 마련해 놓으면
아이와 어른들이 좋아한다고 한다.
그 중의 하나가 손톱에 봉숭아 꽃물 들이기다.
손님이 봉숭아 꽃물을 들이고자 하면 주인이 꽃잎을 적당히 따서 준비해 줘야지,
알아서 따라고 하면 꽃만 잔뜩 다 따서 그 다음 사람은 꽃구경도 못 하게 해 놓는다고 한다.
몰라서 그랬다면 그것도 체험이다마는 다음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없는 것 같다고 주인이 속상해 했다 .
풍요로운 세상이라 그런가, 쓰고 남고, 먹고 남는 한이 있더라도 내 몫이 모자라는 건 신경질나서 못 참는 성미가 되어 간다.
정말로 봉숭아 꽃물을 들여 저승길이 밝다면 남의 손톱에 들일 꽃물까지 빼앗아
내 손톱에 덧칠한 사람의 저승길은 얼마나 눈부시게 밝을까
괜히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 푹 푹 찌는 더운날에
울엄니~!
냉정하기가 하늘을 찌르는분이
나 어릴적 늘 봉숭아 물을 들여주셨지.
백반을 넣고 곱게 찧어
오빠 있는 애는 둘째 손가락
안들이는거라고 하시며 나머지 손가락에
빻아진 꽃을 올려놓고 호박잎으로 꽁꽁 싸서
하얀 헝겊 싸매고 실로 꽁꽁 묶어 주셨지....
남자 형제들은 안되다고 하시며 나만 들여 주셨지.
손꾸락,발꾸락....몽땅
어쩌다가 남는것으로 오빠,동생들도 새끼 손꾸락
들였었지.
막내 여동생이 태어나곤 나는 중학생이되어
싫다 했었지.
난 내딸한테 몇번 안들여줬어.
귀찮아서 한 세번 들여줬나?
언젠가 ....
아파트 마당에서 어떤 새댁이 온발바닥에
봉숭아 물을 들여 깜짝 놀랬었는데
무좀있는 사람들은 그곳에 봉숭아 물을 들이면
무좀이 완치 된다더군.
이 푹푹 찌는 나두 괜시리 옛날 생각해봤네.
일명 우렁이손톱이라고 불리는 납작한 손톱이
챙피하기만 했던 소녀는
늘 엄지손을 감추고 다녔기에
붉은물을 들여서 손톱을 노출시키는 것을 꺼려했던 터라
시골에 살았으면서도 몇 번 안 해본듯 합니다.
숙녀가 되어서도
아줌씨가 되어서도
손톱 손질을 하거나 메니큐어를 바르는 일도
내겐 낯선 일이었죠.
우스광스럽게 생긴 내 손톱
지금 들여다보니
귀엽게 생겼네요.
반백을 살아온 인생을 반추하며
이도 지나가고 저도 지나가리라 하며
맘속에 붙잡아 놓았던 것들을 놓아주는
여유가 생긴 것같습니다.
우리 엄니와 작은 시고모를 모시고 창원에서 있은 친지의 결혼식엘 다녀왔다.
큰고모님댁 맏이의 장남 결혼식이니 그 집안의 개혼(開婚)이어서 한여름 무더위에도
하객이 넘쳐났다.
가는 차 안에서 시뉘 올케(어머니와 고모)는 ' 머리가 허연 우리 늙은이들이 안간다고 섭섭해할 사람이야
없지마는 이런 때라도 가야 내 일가 붙이들을 만나볼 수 있으니 염치불구하고 따라 나선다 ' 며 면구스러워하셨다.
신랑의 할머니인 큰고모는 치매로 요앙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다.
아주 심한 정도는 아닌데 자꾸 잊어 버리니 혼자 외출하시는 것도 마음 놓을 수 없고, 음식 태우기도 다반사라고 한다.
제각각 사는 여러 자식들이 불안해서 병원에 모셨다고 들었다.
딸에게 성화를 해서 잔치에 입고갈 한복 한 벌을 집에서 가져다 놓고 기다리신단 얘기를 들었는데
식장에 큰 고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종종 모시고 나와 바람도 쐬여 드리고 식당에도 모시고 가는 정도니까 아주 인사불성 중증은 아닌가본데.
자식이 다섯이나 되는데 어머니 한두시간 꼭 붙들고 있을 사람이 없어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를 못 오게 하냐고
작은 고모가 조카딸을 붙잡고 나무라며 서운해했다.
집안 식구만 모이는 자리도 아니고 양가의 대사라서 신경이 많이 쓰여, 치매노인 어머니는 안 오시면 좋겠다는 게
오빠(혼주)의 뜻이어서 다른 자식들이 어쩔 수가 없었다며 이해해 달란 말로 다독였다.
"그래도 그렇지, 그래도 그렇지 " 자꾸 꾸시렁거리는 작은 고모를 울엄니가 꾹 꾹 찌르며
아뭇소리말고 젊은 애들(혼주)입장을 이해하라고 , 괜히 늙은이들이 토를 달고 나서서 이러니 저러니 하면
아예 오는 거 조차 달가워하지 않을거라고 타일렀다.
나도 좀 섭섭한 생각이 들긴 했다.
결혼식은 양가의 인륜지대사이니 일일이 다 챙기기가 참 어려운 일인줄은 안다 .
또 이제 막 사돈으로 맺은 집안 대소가의 이목이 있어 치매걸린 할머니의 참석이 꺼려지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있다.
단지, 혼주를 빼고도 넷이나 되는 자식들이 어머니를 도맡아 한두시간쯤 곁에서 꼭 지키고 있을 사람이 없다면
자식이 많은들 무슨 소용인가 싶어 마음이 심란했다.
일찌감치 치마 저고리 깔끔하게 입으시고 기다리셨을텐데. 누가 물어라도 보면 " 오늘 우리 큰 손자 장가가는 날 아이가.
둘째가 올낀가, 셋째가 올낀가 곧 데불러 올끼라. 오면 바로 갈라고 채려 입고 기다리는 중이다. " 라는 대답을 수없이 하셨으리라.
치매걸린 어머니는 자식이 기다릴세라 미리 채비하고 있었어도 자식은 그 어머니의 목 빠지는기다림을 들어주지 않았다.
큰 고모는 그날 얼마나 긴 하루를 보내셨을까? 젊었을 적이라면, 남편한테라면 포기도 체념도 빨랐을텐데 자식에게는......
정신이 오락 가락하는 지금 고모님은 진종일 기다리다가
해가 지고 어둑 어둑해서야 잔치에 가려고 차려 입은 치마 저고리의 고름을 풀었을 게다.
어제 아침 개를 데리고 뒷산으로 산보를 갔다 와보니 누가 현관앞에
한됫박쯤 되 보이는 햇밤을 갖다 놨어요.
누가 갖다 놨는지 통 짐작이 되지 않네요.
그래도 짐작이 가는 두 집에 전화를 했더니 그런 일이 없었다 하구.
우째든간에 우리 먹으라고 갖다 놓았겄지 싶어서 송편소 하려고 삶아서 으깨어 놓았습니다.
참 아름다운 동네다.
네가 주위에 그만큼 베풀어서 일꺼야.
송편도 만들고....
사람처럼 산다.
이번 추석엔 딸네 가족과 양평콘도에서
2박3일 지낼꺼야.
집에서 밥 한끼 해주면 되지만
지난번 사돈내외분 모시고 싸이판 다녀온 후
내가 걸렸는지 사위가 엄니 모시고 꼭 2박3일 하자네...
같이 가봐야 식순이 이겠지만
그맘이 갸륵해서 같이 갈라한다.
갸들오면 주려고 준비한 재료들 갖고 가서
먹을것 해주고 난 유명산 등산이나 하고 올란다.
찬정이네가 가까우면 송편좀 얻어먹을텐데.....ㅋ
내가 윗글을 수다방에 올린다는 게 여기다 갖다 붙여 놨으니 할 수없이 여기다 덧붙여서.
누가 갖다 놨는지 모르는 밤 한됫박으로 이런 저런 생각 많이 했어요.
' 먹어도 괜찮을까?' 남편한테 그 소리했다가 ' 사람의 선의를 의심하는 고약한 심사' 라구 퉁박도 맞고.
' 의심이 아니라 조심하는거지. 요새 세상이 하두 요상하니까'
오늘 아침에 밤의 진원지를 찾았어요.
근처 고추밭 주인이 밭에 왔길래 ' 혹시 우리집에 뭐 갖다 놓으셨어요?'
'밤 말입니꺼. 조금밖에 안되지만 한번 삶아 드이소'
먹으라고 갖다 놓은 거 먹으면 되지, 누가 갖다 놓은 게 무슨 대수냐는 듯이.
생색내는 데만 열중하는 사람도 정이 안 가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제 마음같은 줄 아는 사람과
어울려 사는 데도 머리를 잘 굴려야 되는 세상입니다.
곧 신동경 국제 공항에 착륙하겠다는 기내 방송이 있었다.
창밖은 아직 낮은 구름 속이다.
오그려 붙였던 바퀴를 내리는 소리가 내 발 밑에서 들린다.
고도를 점점 낮추어 가더니 덜커덕 드르륵하며 착지(着地).
공기를 가르는 미끈함 보다 땅 위를 구르는 흔들림이 내겐 더 안도감을 준다,
고소 공포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탈 것을 그다지 무서워하지도 않으면서
비행중인 공중에서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그 당연한 '무사 착지' 를
나 혼자 태산 준령이라도 넘어온 것 처럼 안도한다.
쉰다섯해를 살고도 더 살아야 하는 이유는 쌔고 쌨다고
혼자 중얼거린다.
내 자리를 비우자니 할 일이 많다.
전날 해거름녘에 가뭄타는 배추밭에 물도 흠뻑 주고,
잔 돌 주워 내느라 늘 밭고랑가에 나뒹굴던 고무 바케스도 씻어서 들여놨다.
거의 말라가는 곶감는 걷어 갈무리하고,
후라이팬이며 냄비가 포개져 있던 싱크대도 말끔히 정리해서 일인분의 살림살이만 챙겨 놨다.
" 양념은 둘째 서랍에 있구요, 음식 쓰레기는 제깍 제깍 내다 버리세요. "
남편이 귀 담아 듣는 것 같지 않다.
궁하면 통한다 했으니 뒤져 보면 다 알 줄 알면서 하나마나 한 얘기를 또 한다.
" 엉아한테 갔다 올께, 아빠하구 집 잘 보고있어. "
쌈지(개)의 양 볼따구를 감싸쥐고 나의 부재를 설명한다.
사람이 아주 먼 길을 떠날 때도 이렇게 정리하고 당부하고 인사를 챙기고 갈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참 좋겠다.
어질러 놓고 총총히 가는 사람의 마음도 편치는 않을테지.
일본에서 이웃에 살던 일흔 초반의 혼자 사는 할머니를 찾아 갔더니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전에 음식을 종종 나누어 먹고, 손수 만든 선물도 많이 받았다.
이사한 집이 가까우니까 꼭 들르라해서 가지고 간 김도 전해 줄겸 갔다.
작은 맨숀 일층, 그것도 월셋집이라고
죽는 날까지 연금 받아 세 내고 살림 살면 되지, 내집이 무슨 소용이냐고 한다.
앞으로를 생각해 많은 걸 정리하고, 출입하기 좋으라고 1층으로 이사를 했다 하네.
버릴 건 버리고, 자식들에게 나눠 줄 건 주고, 단출하게 주변 정리를 하고 있다는 아직 건강한 할머니.
점점 자신의 정신이나 몸이 나빠지면 나빠졌지, 더 좋아질리 없는데 자신의 힘으로
깔끔히 정리해 놓고 살다가 뒤를 깨끗이 하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좋아하는 김을 선물받았다고 쓰던 봉제 가위 하나와 손수 만든 주머니 두개를 꼭꼭 싸서 준다.
아직 그 나이는 안 되었지만 나도 잘 새겨 두기로 했다.
사람의 앞으로 일을 누가 장담하나.
찬정이가 소리 소문없이 동경으로 날아갔구나.
우리네 어딜 가려면 챙겨야할 것이 넘 많지?
그래서 아예 안 가버릴 때가 한두번이 아니야.
너의 잔정이 눈에 보이네.
김 가져다 독거 노인 챙기는
아들과의 상봉!!!
맛있는 거 많이 해주고 오그래이.
아드님은 잘 계신고?
오랜만의 만남 정말 기뻤겠네.
인간의 세포가 꺾어지기 시작한다는 25세 넘은 아이를 보면서도 어린 시절의 볼따구니며 품에 안기던 몰캉한 어깨며 이런 거 생각하는 거 보면
나도 엔간히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느낌이나 기억은 내 거니 뭐 어쩌랴 싶기도 하공.
남의 모자 만난 것도 남일 같지 않고 기쁘기만 하네.
추수 잘 하쇼~~
광숙 언니, 옥규 언니
갔다 왔어요.
지금은 아들이 혼자 있으니까 부모가 가면 반갑고 좋기만 해도
지 식구가 하나라도 생기면 부모 오는게 좋기만이야 하겠어요?
혼자 있을 때 자주 가서 좀 챙겨주려는 거지요.
저도 친구들 만나 테니스도 치고, 긴자에 나가 눈 호사도 하고, 내 또래 일본 아지메들 만나 웃고 놀고,
그런 날도 있어야 다시 지세포 호젓한 촌살이로 돌아와 즐겁게 살거 아니겠어요.
남들 사는 얘기 들어보면 딱하게 됐구나 싶을 적도 있고, 내가 못나게 사는 건가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남의 집 일이지만 '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 할 때도 있어요.
어젯밤 달이 휘엉청 밝았지요? 그런때 바닷물이 많이 나가서 조개를 캐는 때라고
연락이 왔어요. 오랫만에 나가보려구요.
지난번 바닷가에 가서 핸드폰 망가뜨린 후론 한번도 안갔는데.
아뭏든 오랫만에 조개 많이 캐 오겠습니다 .
또 그런 불상사가 날까봐 전화는 안 가지고 가니 다정하신 봄날님들 전화는 참아 주세요..
일본에 잘 댕겨오시고
지세포 촌부로 돌아와
조개도 많이 캐왔능교?
지는 지난 6월 보내주신
개복숭아와 매실청을
이일 저일 바쁜 통에
엇그제야 걸러서
병에 담아놓으니
얼마나 뿌듯하던지...
핸드폰 없을땐 어찌 살았는지
툭하면 놓고 나가다가
다시 들어와 챙기는 심사라니...
사업을 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수중에 있어야 안정감이 생기니
병이여 큰 병...
그러게 말이야. 핸드폰 그게 참 편하기도 하고 옭가매는 족쇄이기도 하고 그러네.
지하철을 타나, 찻집엘 가나,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도 다 그 손바닥 안에 든 고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지 통 곁을 주지 않아. 그 조그만 모니터안에서 혼자 승부를 겨루고, 희열을 느끼고, 짜증을 부려가며 시간을 죽여.
사전도 필요 없고, 지도도 필요 없고 그러다가 선생님도 필요없어질라. 혼자서 다 해결해.
이렇게 생활 전반을 고것에 의존하고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그 요물단지 속 내용물이 싹 지워져 멍텅구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이. 삼십년전으로 빠꾸했다 생각하고 사람과 소통하면 될텐데 아마 우리가 살아 본 적도 없는
석기시대쯤으로 되돌아 갔다고 착각할 것 같다.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다고 길길이 뛸거야.
근데 우리나라는 지금 카드 빚을 걸머지고 살아도 애나 어른이나 다 스마트폰으로 바꿔 쓰는데 지난번 일본에 갔을 때 유심히 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냥 폰(?)을 쓰더라. 갸들 보다 우리가 더 잘 사나?
그러게요.
난 아직까정 무늬는 스마트폰 비스무리한데
4G는 못되고 3G쯤 되는 일반폰이지라.
핸폰 분실과 세탁기에 돌리는 사건으로
한바탕 난리들 났을때
제가 선배님 말마따나
이세상의 폰 안의 모든 정보가 날라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영화로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말을 했었지요.
지는 졸지에 김장을 두 번 하느라
사흘간 혼줄나게 일했구만유.
팔 다리 허리 어께 머리....
안아픈데가 없네요.
오늘 동치미 절궈놓은 항아리에 물까지 자박하게 부어놨으니
이제 겨울준비 완전 끝났거 같아요.
오랜만에 와서 찬정의 두 이야기를 읽었다.
여전히 잘 생각하고 잘 쓰시고 있구나.
1박2일을 잠깐이라도 같이 있었던 것이
너를 매우 가깝게 느끼게 하는데...나만의 생각인가?ㅎㅎ
동경의 할머니의 소박하고 깔끔한 것들이 나를 부끄럽게 하지만
닮고 배우고 싶다.
이 아침에 찬정의 귀한 글을 읽은 건 나에게 큰 행운이다
좋은 친구 찬정이!!!
또 다른 너의 이야기를 기대해 본다!!!
인희를 여기서 만나네. 양평에서 돌아 오던 날 저녁에 제사 지내야 하는데 짜장면 시켜놓고 지내게
생겼다고 너스레를 떨고 가더니 언제 그렇게 번개같이 여러 요리를 만들었어. 사진으로 봤지. 능력이 한계가 없구먼.
나는 지난 주말 또 서울엘 다녀왔어.
우리 친정 문중 회의에 꼭 참석하라는 통지를 받았거든. 생전 처음이야.
종손인 우리 사촌오라비가 누대에 걸쳐 내려 오는 종산을 마구 팔아 개인 재산화했대. 조금 팔아 가용으로
쓰는 정도는 종손 대접으로 눈 감아 주겠는데 점점 욕심을 부려 조상님들 산소를 다 들어내고 팔려하니 종중에서
제재를 하고 나서게 되었지. 그래서 생전 처음 박문(朴門)의 종원으로 박찬정도 불려 올라 갔다는거 아니냐.
사람의 욕심이란 게 끝이 없더라. 스스로는 제동이 안되나봐.
아뭏든 요즘 세상이 달라져서 '출가외인' 이란 말이 고어사전에서나 나옴직한 말이 되었다.
뭐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그날 오신 분들중에 얼굴 한번 뵌 적 없는 분들도 많지.
우리 재종고모 한 분은 팔십이 넘으셨다는데 아주 단정하고 곱더라구.
회의를 끝내고 오리고기집에서 식사를 했는데 재종고모가 슬그머니 나가시더니 집에서 기다리시는 올케들 몫을
따로 포장 주문해 몇분 안되는 오라버니들 손에 들려 주시더라고.
자상하고 따듯하게 느껴지더라. 나도 늙으면 그만한 돈은 모아놨다가 그럴 때 써야지. 속으로 마음먹었다.
집에 와서 남편에게 그 얘기했다가 인심 쓸 돈 모으기 보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걸 습관화하는게 우선이라나.
훈훈한 마음이 없이는 암만 나이를 먹고 돈이 있어도 남을 위해 쓸 줄 모르는거라구 하네. 그렇긴 그래..
그러나 저러나 내가 봄날에 팔아묵은 내 주변 인물이 수두룩한데 오늘은 우리 친정 종손에 재종고모까지 등장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린 정월 초하루.
단단히 잘 챙겨 입고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러 갔다.
뮤지컬 영화였다.
화음도 좋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 던지는 메시지도 좋았다.
어릴적에 읽고 잊어버렸던 장발장 이야기가 되살아 났고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보였고 깨달아졌다.
신념과 확신을 갖고 일을 한다는 것.
그것이 꼭 옳은 것이거나 선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착각, 위선.
그들도 언제나 입으로는 정의를 위해 싸운다.
사실은 선점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더 움켜쥐고 지키려는 것이면서...
결코 용서라든가 사랑이라든가 희생이 무엇인지 모르는 족속들.
역사가 한없이 구르고 흘렀어도 그들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갖지 못한 자들의 처절한 몸부림과 외침은 끝도 없이 되풀이되지만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 심장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조악한 무기로 무장을 하고 목이 터져라 외치지만
힘 없고 의지가 약한 군중들은 본능적 두려움에 갇혀 제 한 목숨 부지하는 것도 버겁다.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수군거리며 물줄기에 쓸려 내려가는 송사리떼처럼 비굴하다.
아수라장 속에서도 기생충처럼 제몫을 얻고자 혈안이 된 족속들도 낯설지 않다.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고 가장 강인한 생명력으로 버티는 족속들이니까.
어느쪽에나 찰싹 붙어서 살 수 있는 그들은 물질의 노예들이다.
죄는 무엇일까.
정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용서일 수도 있다.
배우들이 부르는 노래의 멜로디와 화음도 좋았지만
가슴에 콕콕 박히는 고백적인 가사가 더 좋았다.
특히 후반부 장발장의 대사는 거의 묵상 끝에 얻은 깨우침이고 기도였다.
번역된 자막보다 영어로 된 대사가 훨씬 좋다.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복합적인 심정으로 영화를 보다가 결국 펑펑 울고 나왔다.
좀 더 생각을 숙성시켜 봐야겠다.
춘선아~
시간을 벼르다가 "레미제라블" 을 봤지.
오래전 "니암 리슨" 인가? 하는 배우가 쟝발쟝 역활을 하는 영화를 봤는데 뮤지컬로 하니 또 다른 감흥이 있네.
마지막 장면에서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배우들이 전부 자기 목소리로 한거라는데 몇몇은 아주 빼어난 성악가더라.
나오는데 아줌마 부대가 웅성거리며 시끌시끌~"에구~ 이나라나 저나라나 먹고 사는게 문제여~"
"누가 아니래~사람 사는건 다 똑같은가벼~"
드디어 나도 오늘 보러 간다우.
하도 영화를 안 봐서 제대로 이해나 하려는지 몰라....................................
"느그 도다리 살끼가? 지난번 물메기 사던 데 알제? 나는 먼저 간다." 달깍
아랫녘이라도 동 틀 무렵의 바닷가 바람은 매섭게 찹니다.
미리 쳐 놓은 그물에 든 고기를 걷으러 어부는 어둠이 벗어지지 않은 바다를 한바퀴 돌고 왔는가 봅니다.
겉 옷도 벗고 고기를 퍼 담는 어부의 등에서 김이 모락모락 납니다.
동네 할매들이 다라이를 들고, 바겟스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모여 들지요.
노인들의 옷은 허술합니다.
"옷 차려 입느라 꿈지럭거리고 늦게 나오면 사고 싶어도 몬 산다 말이다."
다행히 그 날은 어획량이 좋아 모여든 사람들의 다라이에 살 만큼의 고기가 다 담겼습니다.
그렇게 사는 생선은 싸고 싱싱하지요.
오늘 어느 집 빨랫줄엔 건어로 쓸 고기가 널릴테고,
택배 영업소 앞엔 도시로 가는 아이스박스가 쌓일 겁니다.
굵고 살진 것으로만 골라 담은 어머니는 펄떡펄떡 뛰는 이놈들을 들고 내친 걸음에 퍼뜩 갖다 주고싶지만
그건 바램일 뿐, 자식의 집이라도 느닷없이 들이 닥치면 안되는, 그만한 눈치는 다 있습니다.
칠 팔 년전에 돌아가신, 친구의 시아버님 얘기가 생각납니다.
그전에는 추수해서 쌀 보내고 나면 아버지 한번 다녀가시라고 하지요.
아들네로 딸네로 두루두루 돌며 자식들 사는 형편도 보고 손주도 보고,
또 제 형편껏 쌀값겸한 용돈을 주면 고맙고 흐믓해서 왔는데 요즘은 택배로 쌀 보내고 나면 즈들끼리 의논해서
온라인 통장으로 돈 보냈다고 전화 한 통 하고 그만이니 그것도 참 심심한 노릇이라고 하셨다네요.
그래도 불쑥 가기는 마음이 불편하셨던지 전화를 하시더랍니다.
" 얘야 ! 뒷곁 감나무에 감이 많이 열려 익었다."
얼른 그 말씀의 뜻을 알아차린 그 친구가
" 아버님 ! 그 감 많이 따서 가지고 올라 오세요. " 했다네요.
아버지는 그 말을 듣자 마자 바로 장대를 휘둘러 감을 따 들고 올라 오신답니다.
그 감은 한 보름쯤 더 나무에 달려 익혔으면 좋게 푸른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나요.
도다리 사려냐고 전화를 하신 시이모는 우리 동네에 사십니다.
자식들은 모두 성가(成家)해서 객지로 나가 살지요.
이모부도 몇 해전에 돌아가시고
혼자 손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밭을 건사하자니 굽은 허리는 더 굽으셨습니다.
'되서 죽것다(고되서 죽겠다)' 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십니다.
짐짓 어깃장 놓는 소리를 잘 하는 우리 남편이
" 이모 ! 그렇게 힘든데 적당히 하소. 그거 안 한다고 누구 밥 굶는 사람 있소? 갸들도 안 보내 주면 다 사 먹고 잘 사요. "
" 니 말이 맞다. 맞어. 그래두 밭을 우째 놀꾸노(놀리느냐)? 뭐시든 숭구믄 누가 묵어도 묵을낀데.
콩이니 마늘이니 안 사 먹으면 객지에 사는 살림이 훨씬 수월타아이가. 안글나? "
우짜꼬 !! 이 지고지순한 짝사랑. 못 말리는 우리의 엄니들을.
나는 튀기로 태어났다.
지금의 엄니 아부지와 인연을 맺은 것은 생후 두달 무렵이다.
나의 본가는 우리의 끼니를 걱정할 만큼 궁핍하지 않았다. 넉넉한 살림이면서도
네 형제중 하나만 남기고 뿔뿔이 입양 보냈다.
덩치 좋은 형 하나가 돈에 팔려 가는 것을 목전에서 봤지만 나와 내 생모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생모에게서 들은 얘기에 의하면 본가는 버섯 농장을 했다고 한다.
동네에서 뚝 떨어진 산 기슭이어서 산짐승들이 무시로 출몰했다.
멧돼지가 옥수수밭을 망쳐 놓았고, 고라니가 푸성귀를 온전히 놔 두지 않았다.
자연에 의존해서 사니 더불어 살아야한다며 그런 야생의 것들에게 야박하지 않았다.
그런 가풍에 따라 나의 생모 역시 보고도 못 본 척 너그러이 눈 감아 주었다.
그건 너그러운 인자함이기보다 그것들도 자주 만나다 보니 낯을 익혀서 안 짖는 거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렇지만 멧돼지가 고구마 밭을 들쑤셔 놓고 간 날은 ' 너 뭣 하는 놈이냐 ?' 라는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고 한다.
본가에서는 나의 생모가 순해터져서 안되겠다며 비상의 처방을 내렸다.
그 처방은 세퍼트와 진돗개를 교배하여 두 종의 장점을 지닌 품종을 얻자는 것이었다.
세퍼트의 골격좋은 체구와 용감성에다 진돗개의 날쎄고 영리함이 보태지면 명견이 나올거라고 추측했다.
그 산물(産物)로 나를 비롯한 네 형제가 혼혈로 태어났다.
나의 생모는 순종 세퍼트라고 한다.
내가 생후 두달에 헤어진 생모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서구적 마스크에 검고 황갈색의 털 그리고 앉음새에 기품이 있었고.
스피츠나 발발이 처럼 체신머리 없이 짖어대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한 어미 밑에서 한 날 태어났어도 걸치고 나온 옷 때깔이 다르고 타고 난 힘도 달랐다.
어미 젖을 떼자 그 중 제일 튼실한 개 하나만 본가에 남고 뿔뿔이 입양되었다.
나는 덩치도 크지 않았고 말귀를 잘 알아듣는 영리함이 보이지 않았던지
형제들이 하나하나 떠나가는 모습을 쓸쓸히 지켜 봐야 했다.
본가에서 키우기로 발탁된 그 개마저 농장 후문 쪽으로 보내져 나 혼자만이 어미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오붓한 사랑은 그리 오래 가지 못 했다.
가끔 드나들던 파란색 트럭이 오더니 사료 두 포대를 내려 놓았다.
조수석엔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의 생모는 무슨 눈치를 챘는지 내 얼굴을 핥았다.
본가에서는 생모를 집 뒤편으로 데리고 갔다. 마지막으로 새끼가 떠나가는 모습을 안 보이기 위한 배려였다는 걸
그 작은 상자에 앉혀지고 나서야 알았다. 넷중에 제일 찌시레기였던 나는 어미의 배웅도 받지 못 하고 서럽게 본가를 떠나왔다.
나의 몸 값은 겨우 사료 두 포대였다.
세퍼트 어미와 진돗개 애비 사이에서 잡종으로 태어난 것이 내 의지가 아니었던 것 처럼
내가 살아 갈 처지 또한 나의 선택이 아니니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여기가 네가 살 집이고, 이제부터 너를 잘 키워주실 엄니 아부지다. 잘 자라거라." 파란색 트럭은 떠났다.
나는 파고 들 어미 품이 없어 내 몸을 한껏 웅크리고 떨기만 했다.
나의 새 엄니 아부지는 그런대로 인자했다.
이름도 지어졌다. 삼거리에서 태어나 지세포에서 자란다해서 삼지라고 지었는데
센 발음을 잘 하는 엄니는 쌈지라고 부른다. 삼지라고 하든 쌈지라고 하던 나는 다 알아듣는다.
여태까지 보신탕을 먹어 본 적도 없다니 나를 복날 개장수에게 넘길 리 없고 끓여 먹을 리는 더욱 없다.
바쁜 중에도 나를 데리고 아침에는 뒷산을 오르고, 저녁에는 마을 한 바퀴 산보를 한다.
심심할 틈을 주지 않고 말을 가르치고 훈련을 시킨다.
내 야생적 본능이 있기 때문에 사람과 같이 살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길을 잘 들여야 한다고
둘이서 말씀하시는 걸 들었다.
개를 개처럼 살도록 하는 게 아니고 사람답게 살길 바라는 게 아닌가. 의구심도 들었다.
아부지가 나의 먹거리에 신경을 많이 쓰니 식복도 그만하면 있는 편이다.
우리 집에 오는 사람은 모두 나를 좋아한다. 드나드는 사람중에 내가 경계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간혹 산책 길에 만나는 이들 중에는 나를 겁내고 피해 가는 사람도 있다.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을 내가 괜히 해코지할 리가 없는데 사람들은 왜 과잉 방어를 하는 걸까?
아마도 개 중에는 생각 없이 짖어대고 무는 몰지각한 것들이 있어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로 각인 되었는가 보다.
옆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겁을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리 엄니와 아부지는 나를 끌어 안고, 코를 부비고
볼따귀를 잡아 당기기도 한다. 심지어 내 입에 손을 집어 넣기도 한다.
나를 무척 신뢰한다는 표시라서 나도 그 기분을 맞추어 살짝 물었다 놓는다.
말이 없어도 통하는 깊은 믿음이다. 말로는 신뢰감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척 하면서도
막상 제 실속을 챙길 때는 슬쩍 모른 체도 하고 물어뜯기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개만도 못 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집을 지키고 있으니 마음 든든하다고 한다.
같이 산에 가면 큰 의지가 된다고도 한다.
나를 기르는 정성이 인간을 키우는 정성 못지 않다는 걸 안다.
낳은 정이 천륜이라면 우리 엄니 아부지와의 만남은 세상이 맺어준 인연이다.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믿음직하게 곁을 지켜 인연에 보답하리라 마음먹는다..
내가 비록 개일지라도.
어머니의 물독
어머니댁에 배가 불룩하고 아구리가 큰 항아리가 하나 있다. 예전에 쓰던 물독이라고 한다.
그 전부터 뒷베란다 한 귀퉁이에 있는 걸 보긴 했지만 탐을 낼 만한 물건은 아닌지라 안팍을 요리조리 살펴 본 적은 없다.
내 살림엔 용도가 없고, 자리만 차지할뿐이지 장식품으로 놓아 둘 만큼 눈에 차지도 않았다.
그랬던 어머니의 물독을 눈 여겨 보게 된 데에는 친구의 부추김이 있었다.
지난해에 우리집에 왔던 친구가 뒷산과 집 주변을 둘러 보더니 산야초 효소를 만들어 보라고 권했다.
커다란 항아리를 서늘하고 안전한 곳에 놔두고 산이나 들에 나는 가지가지 약성있는 식물을 채취해서
설탕에 버무려 발효를 시키라고 가르쳐 주었다.
식구들 먹을 양 만큼 만들어 두었다가 물에 타 마시거나 요리에 이용하면 웬만한 보약보다 낫다며 효소 예찬을 했다.
나는 식물에 문외한이다. 약성에 대한 상식은 고사하고 약초와 독초를 구별하지 못한다.
공연히 큰일을 저지르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되었지만 시험삼아 만들어 보고 싶었다.
항아리라면 어머니 댁 베란다에 있는 것이 딱 맞춤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에 ' 네 살림에 소용되는 거 있거든 가져 가라' 하셨지만 달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 당신이 직접 말씀 드려봐. 안 쓰시거든 누굴 주든지 버리시라고 내가 전에 말했더니 들은 체도 안으시던데"
남편은 오히려 내게 미루었다.
" 어머니 저 항아리 제가 가져 갈까요?"
말 꺼내기가 어렵지 선뜻 내주실 거라고 생각했다. 의외로 어머니는 그 항아리 안에 뭐가 잔뜩 들어 있다며
그냥 놔두라고 하셨다. 안 쓰는 빈 독인 줄로만 알았는데 뭐가 잔뜩 들어 있다니 궁금해졌다.
몰래 열어 봤다. 항아리 속은 깊고 넓었다.
언제 쓰시고 넣어 둔 것인지 모르는 시루밑이며 체와 어레미, 내 얼굴을 다 가리고도 남을만큼 커다란 나무 주걱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올해 여든다섯 살, 조석이나 간신히 끓여 잡수시는 어머니 살림에는 가당치 않은 묵은 살림살이다.
모질게 말하면 꺼내 볼 것도 없이 항아리째 내다 버려도 사시는데 아쉬울 게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있던 그대로 다시 넣어두고 나무 쪽을 잇대어 만든 항아리 뚜껑을 조심스레 닫아 놓았다.
그리고 열어 본 체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가 독 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은 내가 방금 들춰 본 것이 아닌 다른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어머니의 살림은 컸다. 도회지에서 내 식구 건사하기에도 빠듯한 월급쟁이 살림이었지만
늘 군식구가 끊이지 않았다.
객지에 나와 있는 조카 하나 둘을 붙박이로 데리고 있는 것은 기본이었고, 군대에서 휴가 나온 군인도 하룻밤 묵고
다음날 거제 가는 첫 배를 탔다. 먼 바다에 어선을 타고 나갔다 돌아온 고향 사람도 거제도가는 배편이 없으면 찾아 들었다. 불시에 찾아 든 식객이더라도 수저 한 벌 더 놓아 먹이고 재웠다.
모든 게 넉넉치 못하던 시절, 그들을 거두는 노고가 만만하지 않았으련만 어머니는 투덜대거나 공치사하는 일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수도 사정이 좋지 않던 예전에는 시간제 급수를 많이 했다.
급수 시간이 정해져 있다고 모두 그 시간에 물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압이 약한 곳에서는 한밤중이나 되어야 물을 받아 하루 종일 썼다.
그나마 그건 내 집에 수도 꼭지가 있는 집 이야기다.
공동수도에서 물을 받아다 쓰는 집도 많았는데 허드렛물이야 밖에 놓아두더라도 식수는 물독에 담고 뚜껑을 덮어 잘 간수했다. 어머니의 물독도 그때 쓰던 것이다.
첫 배를 타러 떠나고, 직장를 가고, 학교를 보내기 위해 어머니는 새벽에 일어나 그 독의 물을 떠서 많은 식구의 밥을 짓고 상을 차리셨다. 어머니의 하루 일과는 물독을 열어 물을 뜨는 일로 출발했다.
물독은 기본 살림살이였고,물은 꺼뜨려서는 안되는 불씨 처럼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밑살림임에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 물독이 이젠 원래의 쓰임새를 잃고 물이 마른지 오래되었어도 어머니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살림살이이고 어머니의 전성시대를 함께한 동무다.
너 나 없이 어렵던 시절이라 깍뜻한 대접이야 못 했어도 고향 떠나 온 이들에게 스스럼없는 쉴 곳이 되어 주던 그 때를 어머니는 생애 가장 좋았던 시절로 꼽고 계신다.
어머니는 지금 아파트에 외롭게 사신다.
어머니에게 찾아와 재워 달라거나 한 끼니를 해결하려는 사람은 이제 없다.
남의 집에 가는 일에 염치를 차리는 세태가 되었고 경제적 사정도 나아졌다. 어머니 역시 그걸 모르실 리 없다.
그럼에도 염치 차릴 여유 조차 없던 그 시절이 그립고 그런 고향 손님을 기다리시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 추억 속 물독에는 아직도 물이 찰랑찰랑 담겨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물독이 내 차지가 되기는 요원해 보이지만 서운한 마음은 없다.
거제도도 목하 찬정이의 점령하에 들어갔구먼!
옥규의 어제밤 포도주마신 곳 사정이 궁금해서 전화하니 안받네.
목하 대청소에 열중하신 모양일세요